• 2015-09-02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추사(秋史)가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읽다가 글 속 언저리를 한참 서성였다. "산촌의 비가 아침에 개었으니 북악산 자락에는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겠구나. 예전 비에 옷 젖던 일도 생각나고 해묵은 이끼에 신발 자국이 찍히던 것도 기억나는군.(邨雨朝晴, 想北崦百花盡放. 攬舊雨之沾裳, 記古 之留屐.)" 사각사각 봄비에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 몽환적 풍경을 연출한다. 나막신을 신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물기를 머금은 스펀지 같은 이끼 위에 발자국이 또렷이 찍히더니 물이 고인다. 애틋하다. 예전 김일로 시인의 시집 '송산하' 중 "산기슭 물굽이 도는 나그네.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란 구절 앞에서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던 기억과 겹쳐졌다.때마침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고재식 선생이다. "추사가 치원에게 준 글입니다. 일본에 있는 걸 벗이 아침에 보내줘 가을 문턱 안부로 삼습니다." 함께 전송돼 온 사진을 열자 일본인의 서재에 높이 걸린 추사의 친필이 황금빛 비단 안에 찬연하다. 다산의 제자 치원 황상에게 추사가 써준 시다. 추사를 읽는데 추사가 왔다. 추사의 영혼과 한순간 절묘한 계합(契合)이 이뤄진 듯해서 한동안 마음이 황홀했다.액자 속 여러 구절 중 한 대목은 이랬다. "매번 방초 볼 때마다 명마를 생각하고, 어쩌다 운산(雲山) 들면 기이한 글 떠올리네.(每因芳艸思名馬, 偶到雲山想異書.)" 과천에 올라왔다가 멀리 강진으로 돌아가는 황상을 전송하며 이렇게 써준 것이다. 방초를 봐도 구름 산에 들어도 이제부턴 네 생각만 날 거라는 뜻이다.이덕무가 조카 이광석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밤 삼경에 서상(西庠)에서 오는데 두 사람의 발자국이 봄 이끼 위에 찍혀 있더군. 희미한 달빛이 이를 비추는 바람에 완연히 그대가 떠올랐소." 이광석이 벗과 함께 이덕무의 퇴근을 기다리다 길이 어긋났던 모양이다. 이덕무는 희미한 달빛 아래서 이끼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고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했었노라고 했다. 이끼 위 발자국을 따라 오가던 그 마음들이 오늘 문득 그립다.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1/2015090104237.html​ 
  • 2015-08-26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의 '휴양수창대판관(睢陽酬暢大判官)'은 이렇다. "오랑캐는 본래부터 끝이 없으니, 회유함이 하루아침 일이 아닐세. 주려 착 붙을 때는 쓸 만하다가, 배부르면 떠나가니 어이 붙들까.(戎敵本無厭,羈縻非一朝. 飢附誠足用,飽飛安可招.)"서융(西戎)은 초원에 야영하며 사는 족속으로 사납고 거칠어 좀체 신하로 복속되는 법이 없다. 곡식이 늘 부족해 먹을 것이 없으면 중원에 붙어 순종하지만 일단 배가 부르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통제를 벗어날 뿐 아니라 중원에 큰 위협을 가하곤 했다. 시 속의 기부포비(飢附飽飛)는 배고프면 붙고 배부르면 날아간다는 의미다. 형세가 여의치 않으면 숙이고 들어와 혜택을 구걸하고, 만만하다 싶으면 어느새 등을 돌려 해코지를 한다.두보(杜甫)는 '경급(警急)'에서 위 구절을 받아 변방에서 패전한 고적을 풍자했다. "화친함이 못난 계획인 줄 알지만, 공주께서 돌아올 곳이 없다네. 지금은 청해를 누가 얻었나. 서융은 배부르면 달아나는 걸.(和親知拙計, 公主漫無歸. 靑海今誰得,西戎實飽飛.)" 금성공주(金城公主)를 토번(吐蕃)에 시집보내면서까지 화친을 꾀했지만 결국은 토번이 청해(靑海) 땅을 침략해 차지해버린 옛일을 지적해 말했다.다음은 조선 중기 장유(張維)가 나응서(羅應瑞)의 '견분(遣憤)'시를 차운한 3수 중 첫 수다. "듣자니 서융이 또 포비를 하였다니, 조정 정책 모두가 올바르지 않아설세. 저 못난 벼슬아치 종내 무슨 보탬 되리. 강호의 포의(布衣) 보기 부끄럽기 짝이 없네.(聞說西戎更飽飛, 漢庭籌策總成非. 迂疎肉食終何補, 愧殺江湖一布衣.)"나응서가 시국을 보고 분을 못 참아 쓴 시에 동감한 내용이다. 후금이 다시 준동해 국경을 위협한다는 소식에 조정의 무능력한 대응을 질타했다. 포비는 일종의 '먹튀'다. 배고프다며 협박할 때마다 달래서 먹을 걸 내주니, 덕화에 감화되기는커녕 아쉬우면 회유되는 척 잇속을 챙긴 후 뒤돌아서 다시 능멸한다. 문제는 해결되는 법 없이 반복되어 쌓인다. 공주를 내 줘도 안 되고 식량으로 달래도 소용없다. 고분고분해졌나 싶어 손을 내밀면 어느새 칼을 휘두르며 찌르자고 달려든다.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25/2015082503909.html​   ​
  • 2015-08-19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다산은 강진 동문 밖 주막집 뒷방에 서당을 차려 생도를 받아 가르치면서 아동 교육에 대한 글을 여럿 남겼다. 문집에 실린 것 외에 '교치설(敎穉說)' 같은 친필이 전한다. 최근 강진 양광식 선생이 펴낸 '귤동은 다산 은인'이란 책자에서 또 '격몽정지(擊蒙正旨)'란 다산의 새로운 글 한 편을 보았다. 말 그대로 어린이의 몽매함을 일깨우는 바른 지침이다. 글 가운데 독서일월(讀書日月), 즉 독서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인생에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해야 5년에 그친다. 11세 이전에는 아직 멋모르고, 17세 이후로는 음양과 즐기고 좋아하는 물건 등 여러 가지 기호와 욕망이 생겨나서 책을 읽어도 그다지 깊은 유익함이 없다. 그 중간의 5년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기간이다. 하지만 한여름은 책 읽기가 마땅치 않고 봄가을은 좋은 날이 많아서 즐기고 노는 것을 온전히 금하기 어렵다. 하물며 병으로 아프거나 초상이라도 나서 방문해야 할 일이라도 생기면 다 합쳐 봤자 1년에 100일 정도 읽는 것도 다행일 것이다. 이 500일이 사람에게는 지극히 보배로운 시기다. 이 500일의 시간을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사람이 12세가 되면 총명과 지혜가 마구 솟아나 마치 여린 죽순이 새로 돋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16세까지 간다."인지 발달 과정에서 12세에서 16세까지 5년 동안 얼마나 순도 높게 독서하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된다고 말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이다. 이때 익힌 공부 습관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특별히 공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아이 때는 말할 것 없고, 이성(異性)에 눈을 뜨고 저만의 취향과 고집이 생겨나는 사춘기로 접어들면 공부에 전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중간의 5년간은 총두(聰竇), 즉 슬기 구멍이 뻥 뚫려 있어 지혜가 우후죽순처럼 쑥쑥 자라는 가장 보배로운 시간이다. 이때를 허투루 보내면 몇 배 노력으로도 회복하기 어렵다. 공부에도 때가 있고 독서에도 때가 있다. 보석 같은 시간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18/2015081804020.html​   ​
  • 2015-08-12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책 여러 권을 동시다발로 보았다. 빡빡한 일정 속에 다양한 독서를 배치해 조금씩 야금야금 읽었다. 아침에 머리 빗을 때 읽는 책과 안채 자리 곁에 두는 책이 달랐다.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에 읽을 책은 또 달랐다. 진도는 더뎠지만 잊어버리고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게 되곤 했다.이런 독서 습관은 공직에 나가 정신없이 바쁠 때도 한결같았다. 그때는 주로 '한서(漢書)'를 읽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기록이어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공무에 지쳐 귀가해도 반드시 몇 줄이라도 읽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너무 피곤하면 눈을 감고 전에 읽은 글을 암송했다. 외우다 잠이 들곤 했는데 입은 그대로 글을 외우고 있었고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또 날마다 일과를 정해 읽었다. 그가 말했다. "일과는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사정이 있다고 거르면 일이 없을 때도 게을러진다." 또 말했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아우 홍길주(洪吉周)가 쓴 '수여연필(睡餘演筆)'에 나온다.이삼환(李森煥·1729~1814)이 종조부인 성호 이익(李瀷) 선생을 찾아뵙자 선생이 물었다. "무슨 책을 읽느냐?" "'상서(尙書)'를 읽는데 개인적으로 번다한 일에 휘둘려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말했다. "몸이 한가해서 일이 없을 때를 기다려 독서한다면 죽을 때까지 독서할 여가는 없다.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지만(生事事生), 일을 줄이면 일이 주는 법(省事事省)이다. 유념하도록 해라." 이삼환이 정리한 '성호선생언행록'에 보인다.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 것처럼 슬픈 말이 없다. 마음이 일을 만든다. 쓸데없는 일은 끊임없이 궁리해내면서 나를 반듯하게 세워 줄 책은 멀리하니 마음 밭이 날로 황폐해진다. 오가는 지하철에서만 책을 읽어도 삶이 문득 바뀐다. 휴대폰을 잠깐 내려놓아도 낙오하지 않는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11/2015081104099.html​​
  • 2015-08-10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손변(孫抃)이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 일이다. 동생이 누나를 소송했다. 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에게 검은 옷과 검은 갓,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권만 주고 나머지는 다 자신에게 물려주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남긴 문건까지 보여주었다.둘을 불러 사정을 들어보니 당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고, 누이는 시집을 갔고 아들은 고작 7세였다. 손변이 말했다. "부모 마음이 똑같다. 시집간 딸에게만 후하고 어미 없는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박하게 했겠느냐? 아들이 누이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재물을 나눠주면 동생을 잘 돌보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들이 자라면 이 종이로 소장을 써서 검은 관에 검은 옷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 관에 소송하면 바로잡아 줄 것을 알고 이 네 가지 물건을 남겨주었구나." 남매가 듣고 마주 보며 울었다. 유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역옹패설'에 나온다.선산부사 송기충(宋期忠)이 3형제의 송사를 처리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막내아들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고 첫째와 둘째에게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사가 일부러 죽은 아비의 처사를 나무라며 풀로 인형을 만들어 묶었다. 인형을 형제의 아버지라 하고 끈에 매어 잡아끌게 했다. 첫째와 둘째는 주저하지 않고 인형을 땅에다 끌었다. 막내아들에게 끌게 하자 그가 말했다. "풀로 만든 인형이라도 아버지라 이름 붙이니 어찌 잡아끕니까?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송기충이 말했다. "아비만큼 자식을 아는 이가 없다더니 막내에게 유독 후하게 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고는 두 아들을 내쫓아 버렸다. '효빈잡기'에 보인다.산 아버지의 뜻을 놓고 형제간 다툼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시경' '규변(支頁弁)'에 "술은 맛나고 안주는 푸짐하다. 어찌 다른 사람이리, 형제이지 남 아닐세. 눈이 내릴라치면 싸락눈이 먼저 오네. 죽을 날 모르거니 몇 번이나 서로 볼까. 오늘 저녁 술 즐기며 군자가 잔치하네(爾注旣旨, 爾殽旣阜. 豈伊異人, 兄弟匪他. 如彼雨雪, 先集維霰. 死喪無日, 無幾相見. 樂酒今夕, 君子維宴)"라 했다. 이겨도 지는 싸움이다. 큰눈이 오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옳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04/2015080403865.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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