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01-21
    ​- 책에서 영화가 된 작품 8편작품상 부문서 5편이 원작 있어소설·전기·경제서 등 다양… 영화에 못담긴 배경·디테일 풍성할리우드의 화려함이 월가에 빚지고 있다면, 내실을 책임지는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은 책이다.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도 마찬가지. 최고 영예인 작품상 후보 8편 중 절반 넘는 5편이 소설과 논픽션에 기대고 있다. 다른 부문까지 합치면 원작 있는 작품은 9편으로 늘어난다. 외국어영화상 부문의 콜롬비아 영화 '뱀의 포옹(Embrace of The Serpent)'을 제외하면 벌써 8권의 책이 국내에 출간됐거나 곧 번역될 예정. 이 책들의 어떤 매력이 수백, 수천억원을 들여 스크린에 옮길 생각을 하게 했을까./자료:해당 출판사·ebookfriendly.com​▲레버넌트(Revenant: 죽음에서 돌아온 자): 마이클 푼케·오픈하우스 2016년刊·소설지난 주말 국내 박스오피스의 압도적 승자는 아카데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른 '레버넌트'였다. 죽은 말의 내장을 꺼낸 뒤 그 안에 기어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회색곰과의 사투를 벌이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에 압도되면서도, 이 처절한 분투의 배경을 궁금해하는 관객이 많았다. 해답이 원작에 있다. 1823년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모피 교역 이권을 둘러싼 사내들의 무모함과 복수. 오바마 정부의 WTO 미국대사였던 마이클 푼케의 2002년작 역사 소설이다.▲빅 숏(Big Short): 마이클 루이스·비지니스맵 2010년刊·경제경영'티핑 포인트'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지난 20년간 최고의 경제서 중 하나"로 격찬한 작품. 글래드웰은 이 책의 작가 마이클 루이스를 '진정한 천재'로 꼽았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재앙 속에서 천문학적 돈을 벌어들인 월가 영웅 혹은 악당의 이야기다. 영화가 인물 중심이라면, 책은 미국 경제가 어떻게 낭떠러지로 질주했는지에 대한 시스템의 문제점 역시 빼놓지 않는다. 작품상, 감독상 등 5개 부문 후보다.▲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민음사 2011년刊·전기주지하다시피 5년 전 화제의 베스트셀러. 최근 IT 영웅 협업사(史)인 '이노베이터'로 다시 화제를 모으는 전 타임지(誌) 편집장 월터 아이작슨이 썼다. 선악 이분법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을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전기의 매력이 있다. 각본은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론 소킨. 작품상, 남우 주연상(마이크 파스밴더) 후보 등에 올랐다.▲마션(Martian): 앤디 위어·RHK 2015년刊·소설지난해 조선일보 올해의 책으로도 꼽힌 과학 소설(SF). 작품도 흥미진진하지만, 출판 과정도 흥미진진했다. 컴퓨터 프래그래머 출신인 위어가 처음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별 욕심 없이 연재했고, 네티즌의 폭발적 지지가 이어졌으며, 메이저 출판사를 통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역시 국내에서만 500만 관객을 모았다.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 후보.▲브루클린(Brooklyn): 콜럼 토빈·열린책들 2011년刊·소설원작 작가와 각색한 시나리오 작가 모두 매력적이다. 부커상 후보에 연속 올랐던 아일랜드 작가 콜럼 토빈이 원작,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 소설가였던 영국의 인기 작가 닉 혼비가 각색했다. 1950년대 초반, 아일랜드 소도시 출신의 젊은 여성 아일리시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이야기. 세심하고 따뜻하다는 평이다. 작품상, 여우주연상(시얼샤 로난), 각색상 후보.▲룸(Room): 엠마 도노휴·아르테 2010년刊·소설친아버지의 아이를 낳아야 했던 딸의 비극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그런데 작가는 최악의 비극 속에서 피어난 단 하나의 아름다움과 희망에 주목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3.5m의 작은 밀실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그 방을 떠나지 못한 아이.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커먼웰스상을 받은 소설이다.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브리 라슨) 등 4개 부문 후보.▲대니쉬걸(Danish Girl): 데이비드 에버쇼프·현대문화센터 2011년刊·소설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를 그린 작품. 성적 방황, 작가적 열망, 서로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분열하는 부부의 이야기가 1920년대 코펜하겐과 파리를 무대로 펼쳐진다. 남우주연상(에디 레드메인) 등 4개 부문 후보.캐롤(The Price of Salt, or Carol):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그책 2016년刊·소설서스펜스의 장인으로 불리는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예외적 로맨스 소설(1952). 백화점 인형 판매사원으로 일하는 테레즈가 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온 캐롤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하이스미스는 '리플리'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 여우주연상(케이트 블랑쳇) 등 6개 부문 후보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1/2016012100074.html​ 
  • 2016-01-19
    ​▲ ’심장의 뛴다는 말’의 저자 정의석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기자님, 제 친구 좀 도와주세요. 말기 암으로 치료받고 있는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서울대병원에 격리됐습니다. 며칠 전 병원에서 보호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답니다. 일단 격리가 해제돼야 보호자가 환자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지난해 11월 메르스 사태가 정리될 무렵, 마음 아픈 제보를 받았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메르스 때문에 가족들과 이별의 준비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지인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격리가 해제되길 원한다고 알렸다. 격리 때문에 제대로 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제보자는 환자의 가족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제 친구에겐 4살 된 아들이 하나 있어요. 이 아이를 두고 어떻게 쉽게 세상을 떠납니까? 아들하고 인사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나는 어떻게든 환자를 돕고 싶었다. 서울대병원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은 섣불리 격리 해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른 환자들에게 메르스 감염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메르스 환자의 격리 해제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숨졌다. 제보자는 “그 때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라며 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환자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날 밤 한 숨도 못 잤다.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서울대병원의 한 교수는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있다”라며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지만, 이미 암세포가 온 몸으로 전이된 상태였다”라고 말했다.의사들은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를 진료하려면 15분동안 방역복을 입고 격리실에 들어가서 치료하고, 다시 15분간 방역복을 벗는 작업을 거쳤다고 했다. 다른 환자들이 몇시간씩 대기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은 급해도 방역복 탈의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했다. 감염 위험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메르스 환자 때문에 진료가 늦어졌다고 이야기하면 환자들이 더 불안해해서 사정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라며 “방역복을 입고 벗는 과정에서 의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심장이 뛴다는 말’은 지난해 메르스 취재 현장에서 느꼈던 의사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정의석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생의 끝자락에 놓인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감정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했다.대한민국 국민 5000만명은 아플 때마다 병원을 이용한다. 반면 의사는 전 국민의 0.2%인 10만명에 불과하다. 병원을 이용하면서 의사에게 느낀 서운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환자는 많다. 하지만 의사를 가족이나 친구로 두지 않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별로 없다. 게다가 의사들은 환자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진료실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가급적 말을 아낀다.▲ 정의석 지음|스윙밴드|263쪽|1만3000원의사도 환자와 똑같은 ‘사람’이다. 의사들도 힘든 환자를 진료할 때마다 마음 아파하고 어려운 환자를 치료하면 힘들어한다. 죽어가는 환자가 앞에 있는데 먼저 치료해달라고 우기는 감기 환자를 보면 화가 솟구치기도 한다. 다만 그들은 환자를 위해 묵묵히 견디고, 최선의 치료를 위해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임계점을 넘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과 다르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더 냉정해야 했을까? 한 번도 자신의 아이를 안아보지 못한 채 쓰러진 젊은 아내와 사흘 된 아이를 보고 누가,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을까?”(66쪽)“어제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환자가 밤새 잘 이겨내더니 갑자기 1분에 60번 숨을 쉬며 힘들어했다. 환자의 기도에 가는 관을 연결하고 인공호흡기에 연결했다. 나도 1분간 60번 숨을 쉬어봤다. 많이 힘들었다. 힘들어서 자꾸 부끄러웠다.”(110쪽) 임솔 기자 sol@chosunbiz.com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6/2016011601430.html  
  • 2016-01-18
    ​▲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책은 빈 새둥지와 같다. /사진 출처 pexels​지난해 ‘생각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며 실망한 기억이 있다. 마이크임팩트라는 단체가 주최한 명사 강연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박웅현, 진중권, 장하성, 데니스홍, 조한혜정 등 한국 사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그런데도 ‘생각 수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강연으로 사유의 장을 연다는 발상이 얼마나 허무한가’였다.장강명의 ‘댓글부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책 읽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는군요. 강연 문화는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때 흥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미국처럼 강연회가 많아질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 한두시간짜리 강연에서 무언가를 배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강연자가 쓴 책이나 강연 주제를 다룬 책을 읽는 것이 배움에는 더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 수업’을 덮고, 조한혜정 교수의 ‘경계에서 말한다’를 다시 꺼내들었다. 조한혜정 교수가 말하는 친밀성이 거래되는 사회나, 압축된 근대화의 개념은 강연보다 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장샤오헝이 쓴 ‘철학 읽는 밤’은 중국판 ‘생각 수업’이다. 북경대 유명 학자와 교수들의 인생철학 강의들을 모아 장샤오헝이 읽기 좋게 편집한 책이다. 동양철학의 중심지인 중국에서마저 강연회나 강연모음집이 자리 잡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그럼에도 ‘철학 읽는 밤’은 ‘생각 수업’과 달리 끝까지 읽었다. 우선은 영리한 편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활자가 크고 이야기 호흡이 짧다. 지루할 틈이 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워낙 술술 읽히다보니 별 생각 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100쪽은 읽었다. 유명 학자의 명언을 앞에 소개하고 중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중국 고전 속 일화를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장샤오헝이 짧게 해설하는 방식도 효과적이었다. 삼국지의 제갈량, 홍루몽의 조설근,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등 누구나 알 만한 사람이 등장하는 일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그리고 루쉰이 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루쉰의 목소리였다. ‘아Q정전’과 ‘광인일기’의 바로 그 루쉰이다. 루쉰은 북경대에서 한동안 강사로 활동했는데, 장샤오헝은 북경대 학자들에 루쉰까지 포함하는 재주를 보여준다.본질이 형식을 압도한다. 강연모음집이라는 비루한 형식도 루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보여주는 명료함을 가리지 못한다. 루쉰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장샤오헝 지음|이성희 옮김|리오북스|382쪽|1만5000원"아무리 위대한 천재일지라도 이 땅에 탄생하는 첫 울음소리마저 아름다운 시일 수는 없다."(56p) "희망이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아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 진다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셈이다."(166p)비단 루쉰뿐 아니라 장샤오헝이 인용하는 중국 대가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곱씹어볼만 하다. 중국 국학의 대가인 지셴린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들여왔다는 리다자오 같은 이들도 루쉰 못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가르침의 깊이가 얇지 않다. 이들의 목소리를 접할 기회가 적은 한국이기에 이런 책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럼에도 강연모음집은 나쁘게 말하면 겉핥기, 좋게 말해도 첫걸음에 불과하다. ‘철학 읽는 밤’을 통해 루쉰이나 지셴린에 흥미를 느꼈다면, 다음 단계는 그들의 책을 직접 읽는 것이다. 루쉰을 알려면 ‘아Q정전’은 읽어야 하고, 지셴린이 쓴 인생에 대한 에세이도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철학 읽는 밤’을 읽은 독자들이 이 책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만 읽고 중국 철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자신한다면, 또는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다면, 장강명의 ‘댓글부대’처럼 누군가가 뒤에서 우리를 비웃게 될 것이다.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5/2016011501332.html​
  • 2016-01-18
    ​열한 번째 시집 펴낸 김광규4년간 쓴 시, 한 권으로 엮어김광규(75·사진) 시인이 열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 지성사)을 냈다. 지난 4년 동안 쓴 시를 한자리에 모았다. 1975년 등단한 시인은 새해 새 시집을 내며 "지난 40년간 시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마음과는 달리 노쇠한 기운을 감출 수 없다"며 "흰 눈에 뒤덮인 노년의 일상을 이렇게 천연색으로 드러내다니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밝혔다.김광규는 쉬운 언어로 평범한 일상에서 심오한 삶의 의미를 건져낸 시인으로 꼽혀왔다. 지금껏 그의 시는 소시민의 단조로운 일상을 구술하듯 묘사하며, 인생에 대한 짧은 우화를 제시하거나 해학이 담긴 풍속화를 보여주거나 시대의 불의를 에둘러 풍자하곤 했다. 새 시집에서도 그는 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겪은 사소한 일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내놓은 '실버 문학'의 특징은 육체의 나이에 흔들리지 않는 시인의 자의식을 유지하면서 소박한 유머와 절제된 슬픔으로 노년의 나날을 그려낸다는 것이다.그는 시 '쓰지 못한 유서'를 통해 시인은 유서를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큰 수술을 받기 전에 유서를 쓰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찢기를 거듭해 유서를 탈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집마당에 날아든 새가 빵 부스러기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관찰하더니 '주위를 살피는 시간은 꽤 길고/ 먹이를 삼키는 순간은 아주 짧다'라고 썼다. 그러곤 '시 쓰기와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해학적 시론(詩論)을 설파하기도 했다.시인은 친구들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슬픔 앞에서도 감정을 절제했다. 시인의 부끄러움도 속속들이 알던 친구가 세상을 뜨자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몫까지/ 나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내 몫의 부끄러움만 오히려 그만큼 늘어난 셈'이라며 '부끄러움이 속으로 쌓여/ 나이테를 늘리며'라고 고개를 숙였다.김광규 시인은 시 '녹색 두리기둥'에서 버려진 전신주를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을 보며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담쟁이덩굴이 전신주 꼭대기에서 더 이상 하늘로 오르지 못하자 '되돌아 내려오네'라고 했다. 회색 시멘트 전신주가 지금껏 주로 도시에서 산 시인의 일상이라면, 그 위를 타고 오른 녹색의 담쟁이덩굴은 시인의 이상(理想)이라고 볼 수 있다. 회색과 녹색의 대비로 전신주와 담쟁이덩굴은 문명과 자연, 죽음과 삶의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하지만 시인은 현실에 주저앉아 절망과 회한에 빠지진 않았다. 오히려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을 만들어놓았네'라고 노래했다. 시인이 척박한 현실을 견디며 시작(詩作) 40년간 간직해온 꿈의 생명력을 예찬한 셈이다.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8/2016011800060.html​
  • 2016-01-18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정민 지음|휴머니스트|272쪽|1만5000원'소인인소(笑人人笑)'"내가 남을 비웃으면, 남이 나를 비웃는다." 대구와 대조가 한 문장에서 절묘하다. '옛글의 통역자' 한양대 정민 교수가 명나라 이장과 등이 엮은 '광인품(廣仁品)'에서 뽑아낸 네 글자다. 사자성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사자(四字)는 아니다. 문장 능하고 효성 지극하던 이웅(李熊)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질투하던 그의 동서가 허튼소리를 했고, 이듬해 그 동서가 죽자 주변의 비웃음이 집중됐다는 이야기. 지금 봐도 새롭고, 불투명한 미래를 밝힐 깨달음이 있다.'정민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조선일보에 7년째 연재 중인 정 교수가 자신의 칼럼 중 100개를 골랐다. 차고술금(借古述今)이라 했다. 단순히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자는 것이다. 찔러도 바늘 들어갈 자리 잘 안 보이는 것으로 이름난 그의 문체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를 대학원생 정민은 이렇게 옮겼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지도교수는 "사내 녀석이 웬 말이 그렇게 많으냐"며 그의 글을 집어던졌고, 불호령을 받은 청년은 압축과 생략을 거듭했다. '텅 빈'에서 '텅'을 떠나보냈고, '나뭇잎'은 '잎'만 남겼으며, 필요 없는 조사와 이별했다. 결국 그 문장에서 남은 건 '빈 산 잎지고 비는 부슬부슬'. 22자가 11자가 됐다.이 책에는 이런 꼭지도 있다. '생사사생, 생사사생(生事事生 省事事省).'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줄이면 일이 주는 법. 성호 이익(1681~1763)이 독서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한 말이다. 번다한 일에 휘둘려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하자, "몸이 한가해서 일이 없을 때를 기다려 독서한다면 죽을 때까지 독서할 여가는 없다"며 덧붙인 말이다.정 교수는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 것처럼 슬픈 말이 없다"면서 "쓸데없는 일은 끊임없이 궁리해내면서 나를 반듯하게 세워줄 책은 멀리하니 마음 밭이 날로 황폐해진다"고 설명한다.정초에 읽으면서 스스로를 되새기면 좋을 100꼭지의 네 글자다. 그래 봤자 옛 고사성어 아니냐고?정 교수는 "후진 것은 옛날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게다가 야비해져서 품격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서 "옛글에 무선 랜은 없었지만 생각의 힘은 광속으로 펄펄 날았다. 인터넷이 아니래도 통찰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했다.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5/2016011503581.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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