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05-13
     김홍신은 충남 공주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악적인 청년 장총찬은 돈도 연줄도 없었던 젊은 김홍신의 분신이다. “왜 소설가가 되었나” 물으니 그는 “허영기 때문이다. 국어책에 등장하는 소설가들처럼 유명한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이태경 기자 소설가 김홍신(69)은 36세 때 한국 최초 밀리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대표작 '인간시장'은 첫 권 출간 2년 만인 1983년 100만부 넘게 팔렸다. 1989년 2부 20권으로 완간돼 현재까지 560만부가량 판매됐다. 소설의 인기는 김홍신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그는 1996년 통합민주당 비례대표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00년엔 제16대 비례대표(한나라당)로 재선(再選) 의원이 됐다. 정계 은퇴 후 2009년과 2012년 낸 수필집 '인생사용설명서' 1, 2권도 25만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올해로 등단 40주년. 대하역사소설 '대발해'(2007), 최근 출간한 수필집 '인생견문록' 등 지금까지 낸 책이 모두 134권이다. 이쯤 되면 부러움을 살 법한 삶. 정작 김홍신은 고개를 내저었다."사람들은 나더러 돈, 명예, 권력을 다 가져봤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 괴롭고 불안정하다."봄비치곤 꽤 험한 비바람이 불던 3일, 서울 서초동 자택 2층 서재에 앉은 김홍신은 "인생이란 게 힘들다"는 말부터 했다. 강풍에 창 밖 나뭇가지가 휘어졌다."모든 걸 다 가진 삶은 없다"―밀리언셀러 작가에 국회의원까지 지냈는데 힘든 인생이라니.‘인간시장’을 집필하며 최고 인기를 누리던 1980년대 중반의 김홍신./김홍신 제공"위로 올라가 보기 전에는 올라가는 것만 좋다. 돈도 없을 때는 있어야만 좋다.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다 가져보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불안해진다. 안 가졌으면 몰라도 갖고 있는 걸 놓치면 상실감이 엄청나다. 그러니 안 떨어지려고 매달리는데 인생이 어디 그런가.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법은 없다. 소위 '다 가졌다'는 유명인이 자살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회 고위층 인사나 재벌가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비슷한 얘길 한다.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건 내 성공한 면만 봐서 그렇다. 내가 실패한 부분은 창피해서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기도 했고."―크게 실패한 적 없는 인생 아닌가."남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대학만 해도 전기·후기 합쳐 네 번 떨어졌다. 건국대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합격자 발표 때는 내 이름이 없었다. 한참 후에 누가 등록금을 안 내서 추가합격했다. 대학 때부터 등단하려고 계속 신춘문예, 문예지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낙방의 연속이었다.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을 때 29세였다. 당시로 치면 늦은 나이다. 내가 졸업한 대학이 문학 분야에서 약해서 그런지 등단했는데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거나 중용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이라는 것이 엄청났다. 그러다가 '인간시장'이 터지니 학벌, 집안, 고향 같은 걸 아무도 안 따지더라."김홍신이 1981년 '주간한국'에 연재를 시작한 '인간시장'은 '장총찬'이라는 청년이 재계, 법조계, 종교계 등의 비리를 파헤치며 정의를 구현하는 이야기다. 소설이 장안의 화제가 되자 전국 곳곳에 장총찬 행세를 하는 한량들이 등장해 순진한 여자들을 울렸다. 가짜 김홍신에게 돈을 뜯겼다는 여자가 얼굴을 확인하겠다며 집으로 찾아온 일도 있었다. 인간시장 표지를 덧씌운 음란 서적이 리어카에 실려 버젓이 팔리기도 했다. 김홍신은 "책이 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돼 10만부를 돌파했다. 출판사에서 최신형 포니 승용차를 사 주더라. 2년 후 100만부를 돌파하자 자동차를 바꿔줬다"고 했다.―인간시장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시대가 엄혹했으니까. 군부독재에 노동자들이 노사분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사람들의 울분을 대신 해소해 줄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게 장총찬이었다. 원래는 '권총을 찬다'는 의미에서 '권총찬'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검열에 걸려 '장총찬'으로 바꿨다. 인간시장 같은 소설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진심으로 이런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30대 중반에 갑자기 유명해진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처음엔 황홀하다. 방송 출연까지 하다 보니 세상이 전부 다 나를 알아본다. 그런데 그 황홀경이 행복과 직결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이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간시장이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렸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협박을 해 오기 시작했다. 전화도 오고 편지도 왔다. 불붙은 장작 끝에 협박 쪽지를 매달아 집 마당으로 던진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을 유괴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가뜩이나 몸 약한 아이 엄마의 심장병이 도졌다. 낮엔 황홀하다가도 밤이 오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언제 저들이 날 죽일까' '언제 날 납치할까' 하는 생각에 유서를 써놓기도 했다."―심리적인 압박이 심했겠다."그렇다. 게다가 인기나 명예가 계속 상승하는 건 아니지 않나. 꺾였다 올라갔다 하는데 꺾일 때 못 견디게 된다. 그걸 이겨내려고 면벽 수행도 하고 명상하러도 다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당신 부러울 게 어딨어, 이만하면 됐지' 하는데 나는 요즘도 밤마다 참회 기도하고 108배 한다."김홍신은 책상 위 종이를 끌어당기더니 만년필로 '懺悔'라고 적어 보였다. "'참(懺)'이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지은 잘못을 뉘우치는 거고, '회(悔)'란 지금부터 미래에 이르도록 지을 허물을 뉘우치는 거다. 남을 질투한 것도 허물이고 남이 나를 질투하게 한 것도 허물이다. 부모님께 효도 덜한 것도 잘못이고 부모님 속 아프게 한 것도 잘못이다. 그런 걸 전부 참회하면 맑아지고 편해진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신부(神父)가 되고 싶었으나 어머니 반대로 뜻을 꺾었다고 한다.―인간시장은 통속소설이다. 무협소설 같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에 대한 열등감은 없나.“있었다. 내 다른 작품들도 이 작품 때문에 평가절하될 것 아닌가. 처음엔 섭섭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아, 하늘은 공평하구나’ 깨닫게 되더라. 이만큼 줬는데 다른 것까지 포개서 주는 건 인생이 아니다. 준 것만큼 빼앗고, 빼앗은 것만큼 주는 게 인생이다. 게다가 인간시장은 큰 걸 줬다.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라는 역사에 남을 이름을 줬다. 돈도 줬다. 명예도 줬다. 그 바람에 국회의원도 거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다른 것까지 준다는 건 공평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절망감, 아쉬움 같은 게 있었다. 기도만으로는 그걸 이겨내기 힘들길래 선(禪) 공부를 했다.”튀는 국회의원 김홍신김홍신은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으로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던 1995년 개혁신당 창당에 참여해 홍보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개혁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비례대표 4번을 받았다. 그렇게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인간시장 덕에 그전에도 종종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YS, DJ, JP로부터 다 콜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1980년대 초 MBC 라디오 심야 방송 ‘0시의 플랫폼’을 진행하는 김홍신(왼쪽). 오른쪽은 국회의원 때인 1997년 국정감사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연금 축소 지급 사실을 추궁하는 모습이다./김홍신 제공·조선일보 DB―소설가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갈등은 없었나.“왜 없었겠나. 애 엄마도 반대했고 주변에서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실 글 쓰는 데 지쳐서 방황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다른 국회의원과 다르게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가장 공정하고 바르게, 법안도 근사하게 해보자 했다.”―초심(初心)대로 바르게 했다고 생각하나.“헌정 사상 최초로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을 했다. 8년간 추석 때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 본 적이 없다. 국정감사 준비했다. 추석 때 여의도에 여는 식당이 없어 집에서 밥을 싸 가서 보좌관들과 일했다. 지금도 내가 있었던 의원회관 302호는 ‘보좌관 사관학교’ 이야기를 듣는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으로 일하던 1999년 전국 장애인시설의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실태를 폭로한 것은 김홍신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이 만들어진다. 김홍신의 당적도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한나라당 의원 시절 김홍신의 별명은 ‘상습적 당론 거부자’였다. 그는 ‘튀는 국회의원’이었다. 15대 국회 개원 때는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30일부터 일을 시작하는 5월은 이틀만 근무하는데 한 달치 세비를 받는 건 국민 혈세를 남용하는 것”이라며 세비 거부 운동을 벌였다. 국회 출입 때 의원 전용 출입구 대신 일반인 출입구를 사용하기도 했다.그는 2003년 12월 10일 정기국회 폐회식 때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나의 기준이 당론과 마찰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한나라당 이름으로 총선에 나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1998년 5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 대해 “사람들을 너무 많이 속여서 염라대왕에게 끌려가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더럭더럭 박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 ‘막말 파문’이 일었다.“정략적으로 이용당했다. 부부가 동시에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아내를 먼저 심판했더니 나쁜 짓 세 번 했길래 입을 세 바늘 뜨고, 다음에 남편을 심판했는데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았다는 시중의 농담을 하면서 ‘거짓말 많이 하면 그렇게 된다. 대통령이라도 정치할 때 거짓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걸 상대편이 하나로 묶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결국 모욕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반성은 안 했나.“반성했다. 내가 아무리 공정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가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부터는 말에 신경 쓰게 됐다.”―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했다.“당연한 일이다. 나는 새누리당 참패를 예상했다. 대통령이 레임덕 막겠다고 자기편 사람들을 당선시키려고 그렇게 작전을 썼던 것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적 식견, 사회를 보는 시각, 멀리 내다보는 감수성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정치권이 너무 모르는 거다. 대구에서 김부겸, 호남에서 이정현, 부산에서 김영춘이 당선된 사례들을 보면서 국민이 얼마나 현명한가를 알아야 한다.”―참패 요인은 뭐라고 보나.“대통령의 소통 부재다. 정상적인 국가의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들을 3년 만에 만난다는 게 말이 되나? 대통령이 정신 차려야 한다. 야당에 참패당했으면 이튿날 바로 대국민선언 해야 한다. ‘국민에게 심려 끼쳐 죄송하다’로 시작해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오직 국민 위해 경제정책, 청년실업, 육아, 통일문제에 남은 임기 동안 온몸 다 바치겠다’ 같은 뭐가 나와야 하지 않나.”아내, 내 영혼에 스민 사람2004년은 김홍신에게 상실의 해였다. 의원직뿐 아니라 아내도 잃었다. 천식과 심장병을 앓던 아내는 그해 3월 20일 결국 세상을 떴다.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은 선거가 코앞이었다. 결국 그는 500여표 차로 낙선했다.1998년 아내 이화영씨와 함께./김홍신 제공―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같은 하숙집에 있었다. 내가 대학생, 애 엄마가 고등학생 때였다. 나는 집이 논산이고 애 엄마는 화성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시화전 같은 걸 하면 가끔 놀러왔었다. 일곱 살이나 아래라 연애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그냥 ‘하숙집 오빠’였다. 군대 가면서 연락이 끊겼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1978년 결혼했다.”―언제부터 앓기 시작한 건가.“결혼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천식으로 시작해서 기관지 확장, 심장, 면역구조 이상으로 점점 나빠졌다. 심각하게 앓은 건 5년 정도였다. 여자는 자기가 아프면 절대 사진을 안 찍는다. 애 엄마 사진이라는 게 내 후원회 때 와서 멀리 앉아 있는 걸 누가 찍어준 것밖에 없다. 그걸 내가 아는 사진작가에게 맡겨서 영정 사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볼까봐 몇 년간 옷장 뒤에 숨겨 놓았다. 아내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산소발생기를 집에 갖다놓고 호스를 코에 끼워 숨을 쉬었다.”―가족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겠다.“결국 내게 공황장애가 왔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으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그러니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애 엄마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직막 말을 딸 아이가 했다. 볼에 뽀뽀하면서 ‘엄마, 이 다음에는 아프지 마…’.”김홍신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두 손을 눈두덩으로 가져가더니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김홍신이 지난해 발표한 연애소설 ‘단 한 번의 사랑’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영혼에는 그 사람이 습기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1984년 인간시장 인세로 지은 집에서 김홍신은 딸(33)과 둘이 산다. 근처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가 식사며 집안일을 돌봐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 네 개를 꼼꼼히 읽고 오후부터 글쓰기에 전념한다. 밤 11시 전에 집필을 마치고 기도와 108배로 하루를 마무리해 새벽 1시 반쯤 잠든다. 사회 고발 소설로 인기를 얻었지만 요즘 출간하는 수필집의 주제는 ‘마음 다스리기’다. ‘인생사용설명서’에서는 90년대 초 아버지를 치어 죽인 음주운전자를 용서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사고 소식을 듣고 갈 때는 울분에 차 있었다. 가해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새벽이 되어 가해자를 만나게 됐다. 나와 마주친 순간 부들부들 떨더라. 그 얼굴을 보니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게 생겼더라.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고 ‘떨지 말아요. 내가 복이 없어서 아버지를 잃은 거예요. 당신은 살아야 하잖아. 내가 용서할게’라고 했다. 아버지 빈소에 오신 어르신 한 분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물으시더라. 1초도 안 돼 내가 답했다. ‘용서하라고 할 것 같다’고. ‘그럼 자네가 잘한 거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엉켰던 내 마음이 풀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내 옹졸한 가슴을 키워주려고 그 순간 그를 끌어안게 한 것 같다.”―참회 기도 외에 또 어떤 기도를 하나.“신문에서 누군가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사를 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나를 위한 기도를 하면 거만해진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면 편안해진다. 예전에 수재의연금 봉투를 내고 방송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더니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웃돕기를 했으면 그만이지 왜 잘난 척을 했느냐 그거다. 그 뒤부터 애들 이름으로 몰래 하니 편안하더라.”―자신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하나.“나를 위한 건 이런 거다. 오늘 살아있게 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살겠습니다. 오늘 웃고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잘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베풀며 살겠습니다.”―도인(道人)처럼 보인다.“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고 싶으니까. 이 모든 것이 잘 죽기 위해서다.” 일흔을 앞둔 풍운아 장총찬이 희뿌옇게 웃어 보였다.
  • 2016-05-03
     역사소설 '금강' 낸 김홍정 작가, 기묘사화서 임진왜란까지 다뤄"갓개포는 지금 사라졌지만 옛날 금강(錦江)에선 상업이 활발했던 3대 포구(浦口)에 들어갔지유. 금강 주변의 특산물인 염색 옷감과 젓갈, 소곡주(小麯酒) 등이 갓개포를 통해 한양까지 유통됐던 조선시대의 역사를 제가 소설에서 살을 붙여 되살렸지유."충남 공주의 토박이 작가 김홍정(58)씨가 대하 역사소설 '금강'(전 3권·솔출판사)을 최근 완간했다. 현재 공주여고 국어 교사인 김씨가 10년 취재하고 2년 집필 끝에 금강을 중심으로 16세기 조선시대의 격변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士林) 세력의 핵심이 훈구(勳舊) 세력에 밀려 처형된 기묘사화(1519년)에서 시작해 임진왜란 중 충청도에서 이몽학의 난(1596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다뤘다.역사소설 ‘금강’의 작가 김홍정씨가 금강을 굽어보는 공주산성을 찾았다. /신현종 기자소설은 '병신년(1596년) 유월 그믐. 강물이 불었다'고 시작한다. 이어서 '촛대봉과 무성산(茂盛山), 정지봉(艇止峰) 봉우리만 남기고 강줄기를 따라 펑퍼짐한 들판은 모두 물에 잠겼다. 이는 공산성(公山城)만의 일이 아니었다…'며 간결한 문체로 유장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작가 김씨는 "홍산농업고교에 근무할 때 그 동네 노인들로부터 이몽학의 난에 얽힌 설화를 들은 뒤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지유"라며 "백성들이 아무리 무지렁이기로서니 전란 중에 난을 일으키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지유"라고 밝혔다. 왕실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집안에서 천대받아 지방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 중 홍산(지금의 부여군) 무량사(無量寺)를 중심으로 동갑회(同甲會)란 비밀 결사를 조직해 반란을 꾸몄다. 왕실의 권위가 크게 떨어진 가운데 수탈당하고 굶주린 농민이 대거 반란에 참여해 충청도 일부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몽학이 내부 배신자의 손에 참수돼 반란은 한 달 만에 진압됐다.소설 '금강'엔 이몽학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몽학을 암시하는 청년이 등장할 뿐이다. 작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16세기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해 임진왜란을 초래하고 민중 봉기까지 일어난 까닭을 오늘의 관점에서 풀이하려고 했다. 임금과 대신(大臣)에서 소리꾼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그는 실록에 기초한 정쟁(政爭) 재현 못지않게 민중 생활사의 묘사에도 주력했다. 궁중 소설과 민중 소설의 결합이다. 기묘사화·을사사화·기축옥사로 이어진 권력 투쟁의 참극이 민생 파탄과 임진왜란의 뿌리로 그려진다. 동시에 연산군 폐위 이후 등극한 중종 시대부터 상업이 발달한 사실을 반영해 대규모 상단(商團)들의 투자와 경영도 세밀하게 묘사된다. 여기에 농민과 승려, 천민 집단이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역사에 참여한다. 더 나아가서 작가는 소리꾼 출신의 여성이 전주(錢主)가 돼 금강 지역의 상업을 이끌고 개혁파를 지원한다는 문학적 상상력까지 발휘했다.작가는 이 소설에서 민중 못지않게 개혁파 지식인의 역할을 중시했다. 사림의 개혁 의지를 대표한 실존 인물 김정(金淨)이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실제와 똑같이 사사(賜死)되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정신적 스승으로 거론된다. 심지어 작가는 김정이 사농공상(士農工商) 차별이 없고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꿈꾸며 비밀 결사 '동계(同契)'를 만들었다는 허구를 제시한 것. 작가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선비들은 초기 사림 세력"이라며 "원래 사림은 유학(儒學)에 의한 민본주의를 추구하면서 향약(鄕約)을 대안으로 제시했잖여"라고 말했다.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02/2016050200267.html 
  • 2016-03-23
    20대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공천 칼바람'에 여야 모두 시끄럽다. 중진 의원 다수가 탈락했고,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일간지 1면엔 온통 공천 얘기다. 그만큼 총선 열기가 뜨겁다는 방증이다. 선거 분위기가 고조된 곳은 정계 만이 아니다. 새 학기를 맞은 전국 초·중·고교에서는 학생회장 선거가 한창이다. 등굣길, 선거 운동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점심시간 음악방송을 하겠다" "교내 무료 와이파이를 설치하겠다" 후보마다 공약 팻말을 들고 외친다. 요즘 교내 선거는 총선·대선 열기에 버금간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커졌지만, 미흡한 점은 여전히 많다. 학교별 선거 제도에 차이가 있고, 매뉴얼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공약이 아닌 개인 친분을 이유로 표를 던진다. 일부 학교에서는 상대 후보 비방, 사전 선거운동 등 혼탁 과열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내 선거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될 책이 나왔다. 공직·일반선거 전략을 컨설팅하는 한국선거연구소에서 3년치 자료를 엮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 연구소장인 저자는 학교 선거도 공약 작성부터 운동원 모집, 러닝메이트 물색, 투표인단 파악, 불법선거 감시까지 공직선거에 준하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본문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선거 운동 사례를 소개한다. 페이스북 '좋아요' 수와 트위터 팔로워가 각각 100만개와 400만명에 달하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의 활동과 지난 1월 대만 총통 선거에서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 주 홍보 수단으로 쓰인 것에 비견된다. 교내 선거에서도 소셜미디어는 빼놓을 수 없는 선거 운동 수단이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유튜브, 블로그를 후보 특성과 콘셉트에 맞게 활용할 것을 권한다. 스피치 능력도 중요하다. 저자는 논리적인 발표 방식인 '트리플 스피치'를 권한다. 주제 발표, 화제 전개, 촌평 및 주제 반복의 세 단계로 구성된다. 듣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실제 사례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한때 말더듬 증세를 겪은 그리스 최고 웅변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입 안에 자갈을 넣고 발음 연습을 했다는 일화를 읽을 때면, 같은 증상을 극복한 영국 왕 조지 6세의 실화를 그린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학생회장 선거엔 왜 출마해야 하는 거야? 저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미국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의 사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1954년 사생아로 태어난 윈프리는 성장 과정, 마약에 빠지는 등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미국 남부 테네시주 한 고교 회장에 당선되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됐고 방송인으로서의 꿈을 갖게 됐다는 것. 학생회장을 수행하면서, 혹은 준비하면서 언변술, 설득력, 친화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궁극적으론 학생들의 선거 참여를 늘릴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말은 선거 참여의 이유를 되새기게 한다. '정치 참여 거부에 대한 징벌 중 하나는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표지와 본문의 일러스트를 보고 학생용 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선거구 제도, 선거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인 독자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오는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선 더욱 그렇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18/2016031800497.html 
  • 2016-03-20
    게리 쿠퍼여 안녕 로맹 가리 지음|김병욱 옮김 마음산책 | 320쪽|1만3000원프랑스 외교관을 지내고 공쿠르상을 두 차례 받은 작가 로맹 가리의 장편소설이다. 그가 1964년 미국에서 먼저 발표한 뒤 1969년 개작해 프랑스에서 낸 작품으로, 당시 청년층을 열광시켰다. 1963~68년 스위스 알프스에서 고도 2500m쯤 되는 외딴곳으로 숨은 청년들이 냉소와 독설의 향연을 펼친다. 주인공 레니는 베트남전 징용을 피해 도망친 미국 청년이다. 그는 알프스에서 제각각의 이유로 현실을 등진 여러 친구를 사귀게 된다. 레니는 188㎝의 건장한 청년이다. 영화 배우 게리 쿠퍼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 소설에서 게리 쿠퍼는 '언제나 대의를 위해 악당에게 맞서는, 정의를 세우고 마지막에 늘 승리하는 미국인'의 상징이다. 그러나 레니는 미국이 게리 쿠퍼처럼 영웅이었던 시대는 끝났다고 외친다. 레니와 친구들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거부한 채 냉소주의를 신봉한다. '인구 폭발로 개인이 사라지고, 숫자로 취급되는 것을 냉소하며 소외를 택한다'는 것이다.소설은 청년들이 내뱉는 독설의 연속이다. '어떤 세대든 길 잃었다고 느끼지 않는 세대는 똥 덩어리와 같아. 이봐, 우린 완전히 길을 잃었어.' '파시스트적 낭만주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같아.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한 현상이지.' '이제 완전한 개자식의 자아 외에 허용되는 다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가? 허용된 유일한 '나'는 공중변소 같은, 공적 유용성이 있는 자아뿐이었다.'그러나 그 청년들의 이상향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재즈 연주자의 트럼펫 소리 속에 있다. 문제는 인간이 트럼펫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19/2016031900041.html 
  • 2016-01-22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美대법관 더글라스 평전 출간미 사상 최장수 대법관 재직… 6·25 전쟁 중 訪韓하기도"신생국 대한민국의 출발은 나쁘지 않다. 국회도 활기가 넘치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끄는 법원은 희망의 불씨를 품고 있다. 권력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한국은 어디서든 강한 생존 본능을 느낄 수 있는 나라다."6·25전쟁 당시인 1952년 9월 윌리엄 더글라스(1898~1980·작은 사진) 대법관이 한국을 방문한 뒤 이렇게 기록했다. 아시아 6개국 순방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미 대법관 중에서는 첫 방한(訪韓)이었다. 더글라스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도 3시간 동안 만났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그(이 전 대통령)는 늙었다. 행정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며 비판적 평가를 내렸다. 반면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었다. 최전방을 시찰한 뒤 "예외 없이 사기가 높았다. 특히 여러 나라 군대로 조직된 유엔군의 협조는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적었다.안경환(68)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라이프맵)을 펴냈다. 인권 변호사 조영래(1947~1990) 평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5·16을 함께 '모의'했던 황용주(1918~2001) 전 문화방송 사장 전기에 이어 그가 쓴 세 번째 인물 평전이다. 더글라스는 1939~1975년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법관을 지냈다. 환경문제와 사생활 등에 대해 개혁적인 판결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개인의 사생활과 언론·표현의 자유, 평등권과 환경 문제에 대한 윌리엄 더글라스의 개혁적인 사상은 20세기 법 이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한국 법학자가 미국의 대법관에 대해 전기를 쓴 이유가 궁금해 21일 서울 방배동 안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그는 "어느 사회든지 '90%의 법률가는 상위 10%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구조'라고 비판받지만, 나머지 10%의 법률가만이라도 90%의 지친 국민들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낼 때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 소수의 법률가에게 '표본'이 되는 인물이 더글라스라는 얘기다.더글라스가 예일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인 1934년, 미국 증권거래위(SEC)의 위촉으로 착수한 '기업의 파산과 갱생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에서는 변호사들이 담합해서 보수를 나눠 갖거나, 피의자가 법정 소환에 불응하기 위해 심리 치료사를 자문위원으로 고용하는 등 불법행위가 만연했다. 더글라스가 20만 건의 사례를 담은 연구 보고서 8권을 의회에 제출한 뒤, 1938년 미국에서는 투자기관의 책무를 강조하는 신탁책임법이 제정됐다.더글라스는 안 교수가 법학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動力)'이기도 했다. 안 교수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80년 선경(현재 SK) 기획조정실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주제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더글라스 판사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안 교수는 유학 후 1986년 더글라스의 법 사상을 분석한 논문집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을 첫 책으로 펴냈다.더글라스는 대법관 재직 당시 3차례 이혼했고, 비영리재단과의 유착 의혹 등으로 4차례 탄핵당하는 등 논란도 적지 않았다. 안 교수는 "더글라스는 흠투성이 인간에 가까웠지만, 법률가는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2/2016012200161.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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