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07-11
    ▲ 오영식 토탈임팩트 대표 디자이너가 포즈를 취했다. / 이태경 기자​ 현대카드는 그 자체로 강력한 브랜드다. 그것도 이미지는 금융상품이 아니라 문화상품에 가깝다. 어느 순간 카드업계에 새 바람을 몰고온 혁신의 동력은 디자인이었다.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용카드는 골드, 실버 컬러 일색이었다. 현대카드 이후 카드는 색채의 해방을 경험했다. 형형색색의 상품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카드 옆면에도 색이 들어갔다. 이제 회원 등급은 레드, 퍼플, 블랙 같은 색깔로 구분한다.그뿐 아니다. 현대카드의 디자인 철학은 또 다른 파격의 프로젝트들을 줄줄이 불러냈다. 도서관 디자인 라이브러리, 트래블 라이브러리, 뮤직 라이브러리 등등 화제의 연속이었다. ▲ 현대카드의 ‘컬러 카드’ 시리즈/ 세미콜론 제공현대카드가 처음부터 이렇게 디자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회사는 아니었다. 그 뒤에는 지난 10여년 동안 남다른 마케팅과 브랜딩 전략이 있었다. 그 주역이 디자인 회사 ‘토탈임팩트(total impact)’다.오영식 디자이너가 이끄는 토탈임팩트는 현대카드의 M 시리즈 등 다양한 카드 디자인, 전용 서체 개발 등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는 “토탈임팩트와 오영식 디자이너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대카드 디자인의 모든 사상적 체계와 근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성공담이 책으로 나왔다. 오영식 대표를 비롯해 차재국, 신문용 등 세 주역이 쓴 ‘토탈임팩트의 현대카드 디자인 이야기’(세미콜론). 지금은 현대카드 디자인에서 손을 뗀 시점에서 책을 낸 이유와 성과, 내력을 오 대표로부터 직접 들어봤다.지난 8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서울숲 전경이 환히 보이는 토탈임팩트 사무실에서였다. 오 대표는 51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 보였다. 곱슬머리에 동그란 눈이 호기심 가득찬 소년 같았다. 흰 셔츠에 독특한 질감의 빨간색 넥타이, 분홍색 바지까지 한눈에도 디자이너다움이 느껴졌다.-지금은 현대카드 일을 그만두셨지요? 지금 책을 내신 이유가 뭔가요?사실 저는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조용히 지내다보니, 저희가 했던 일을 자기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현대카드 같은 경우는 10년 넘게 진행했던 프로젝트라 거쳐간 사람이 많다 보니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우리가 홍보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이다 보니, 이런 오류를 바로잡을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서, 지금은 현대카드 디자인을 맡고 있지 않아서 조심스러웠지만 정태영 부회장과 상의를 해서 동의를 받아 책을 내게 됐습니다. 쓰는 작업은 2년 전쯤 시작했습니다. 그런 진상을 알리려는 것이 첫 번째 취지였습니다.두 번째는 디자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그저 환상적이라거나 감각적이라는 식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보다 훨씬 더 논리가 필요하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현대카드 프로젝트를 통해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토탈임팩트는 어떤 회사인가요?규모 면에서는 작은 회사입니다. 처음에는 스튜디오 개념으로 6명 정도만 일하려고 했는데, 일을 하다보니 사람이 필요해져서 늘어났어요. 지금 열다섯 명인데, 그 이상으로는 늘리지 않으려고 해요. 신입사원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구요. 다만 ‘열정 페이’ 같은 청년 취업난도 있고 해서, 재능 있는 친구들은 일을 시켜서 키워보자는 취지로 올해 네 명의 신입을 뽑았어요. ▲ 오영식 토탈임팩트 대표 디자이너/이태경 기자저희 회사는 모든 프로젝트를 맨위 사장부터 말단까지 온 식구(그는 직원을 ‘식구’라고 부른다)가 함께 맡아서 해요. 일이 많으면 서로 나눠서 하는 거죠. 경험이 많은 사람은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고, 신입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소화하기도 어려우니까. 일에 철저하게 집중된 회사입니다. 회식도 잘 안해요. 그 시간에 차라리 집에 가서 쉬라고 합니다. 불필요한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구요, 일만 잘 하면 됩니다. 다만 이런 일은 있어요. 아까 말했던 신입 친구들이 좀 게을러진 느낌이 들어, 한 2주 전에 불러서 이야기를 좀 했어요. “우리 회사가 별로 바쁘지는 않다. 너희가 꼭 필요해서 뽑은 게 아니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젊은 사람들을 키워보자는 취지로 뽑은 거다. 그런데 너희가 열심히 안 할 거면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줘라.” 그랬더니 그 다음부턴 좀 열심히 하더라구요.(웃음)스타일로 보자면, 유럽 디자인에 가까워요. 우리가 창업하던 2003년만 해도 지금보다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어요. 그리드(grid, 일정한 간격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안내선), 서체(font)에 대해서도 무지했지요. 그런데 유럽 디자인은 그리드, 로직(logic)에 대한 생각이 강해요. 나라마다 특성도 다르고요. 특별히 글씨 서체나 그리드에 강한 나라가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등인데 우리 회사의 디자인 스타일은 그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 디자인은 미국과는 어떻게 다른가요?미국 디자인은 좀 더 상업적이고 마케팅 중심입니다. 그리드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는 편이구요. 그에 반해 유럽 디자인은 좀 더 장인 정신(craftmanship)과 명작(masterpiece)을 강조합니다. 손으로 직접 하는 걸 중시하고요. 토털임팩트의 정신도 장인 정신을 추구합니다.-현대카드와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됐지요?2003년 당시 현대카드는 정태영 사장이 처음 부임해서 자신들만의 기업아이덴티티(CI)를 만들려고 했어요. 하지만 현대카드는 현대자동차의 계열사잖아요. 현대자동차가 이미 심볼을 갖고 있어서 현대카드만 새 심볼을 사용하긴 어렵고, 그래도 현대카드만의 그 무엇은 필요하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때 정 사장과 인연이 있던 이남식 현 계원예대 총장이 저한테 그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그래서 정 사장과 인터뷰를 하고 일하게 됐어요. 사실 제가 현대카드 프로젝트에 투입되기 전 9년 동안 직장이 아홉 군데였을 정도로 이직을 많이 했어요. 정 사장이 저를 채용하면서도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이직을 많이 하느냐”고 할 정도였죠.(웃음) 저도 “그 문제로 고민 많이 했는데, 하다보니 그리 됐고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 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제가 정 사장과는 거의 10년 동안 일을 함께 했잖아요? 그래서 그만둘 때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제가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모시는 분은 아마 정 사장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구요.(웃음)-현대카드가 토탈임팩트의 대표작인 셈인가요?대표작은 많아요. SK텔레콤의 ‘생각대로 T’, 방송사 jtbc, 하이트 진로 등 다양하죠. 하지만 같이 일한 기간으로 보면 현대카드가 가장 길어요. 보통 우리는 프로젝트별로 일하기 때문에 한 고객과 길게 일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그런데 10년을 함께 했으니까요. SK텔레콤과는 4년, 하이트 진로와는 5년 정도 일했습니다.▲ 오영식 토탈임팩트 대표 디자이너(사진 왼쪽)와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세미콜론 제공-현대카드와 작업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어떤 건가요?역시 정 사장의 존재입니다. 지금까지 현대카드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인지가 좋은 건 최고경영자(CEO)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고, 그 결과 질이 좋아진 덕분입니다. 정책적으로도 유리한 면이 있지요. 다른 곳은 CEO가 2년이면 바뀌는데, 이곳은 10년 넘게 한 분이 쭉 끌고 가니까요. 문화적으로도 풍성해졌고.저는 그런 분을 만난 게 참 운이 좋았던 거죠. 지금은 정 사장이 전문가가 다 됐지만, 13년 전에는 지금만큼은 잘 몰랐어요. 한 13년 정도 공부하다시피 하니까, 이젠 웬만한 미술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잘 알고 트렌드도 빠삭하게 꿰고 있지요. -현대카드는 서체 디자인이 유명한데요.오해가 좀 있어요. 사람들이 서체 이야길 많이 하는데요, 이건 서체 만들기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기업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싶긴 한데, 같은 심볼을 써야 하는 그룹사에 속한 계열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방법으로 제안한 게 서체였어요.지금이야 온 기업이 전용서체 만들기에 나섰지만 당시엔 국내 기업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처음 정 사장께 설명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듯했지만 “괜찮다, 해 보자”고 해서 시작했던 거예요. ▲ 현대카드의 서체/ 세미콜론 제공현대카드 서체는 디스플레이용 서체(제목, 광고글 등에 이용하는 장식용 서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 기업이 요즘 현대카드처럼 특징적인 서체를 만들려고 하는데, 기업의 개성을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심볼이나 그림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현대카드는 ‘어쩔 수 없이’ 글씨로 CI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마치 그림같은 글씨, 가독성은 떨어지는 서체가 나온 거지요. 출발점이 달랐다는 얘깁니다. ▲ 푸투라 글씨체를 사용한 루이비통(사진 왼쪽)과 폴크스바겐/ 세미콜론 제공요즘 기업들이 국문 서체를 통일해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정말로 좋은 서체, 그러니까 가독성도 좋으면서 완성도도 높은 서체를 만들어야지요. 애플처럼요. 그런데 애플 서체란 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끊임없이 기존에 있던 ‘프루티거(Frutiger)’ 서체를 발전시킨 결과물이거든요.억지스럽게 ‘전용서체’ 개발에만 힘 쓸 필요 없고, 기업 이미지에 맞는 서체를 잘 선택해서 지정해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루이비통이나 폴크스바겐만 해도 완전히 다른 기업인데 둘 다 ‘푸투라'라는 서체를 쓰잖아요. 두 회사가 헷갈리나요? 그렇지 않거든요.▲ ’컬러카드’로 카드업계에 새 바람을 몰고온 현대 M카드 시리즈/ 세미콜론 제공-서체 개발 이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디자인은?아무래도 컬러 카드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지요. 현대카드 ‘M 시리즈'에서 시작됐는데요, 색색의 신용카드 이미지가 컬러 차트처럼 보이는 카드였죠. 당시 실버 카드니 골드 카드 이야기만 할 때였는데, 컬러만으로 카드업계의 전체 소통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객의 생활 방식을 관찰해서 이야기를 담고 색깔로 단장한 거죠. 고객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경영 철학이 있고, 그 위에 컬러라는 디자인이 더해져서 공전의 히트가 됐어요.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컬러코어 카드죠. 옆면까지 색을 입힌 카드인데, 현대카드 디자인의 백미로 꼽고 싶은 카드이기도 해요. 현대카드의 모든 디자인 원칙은 ‘지갑에 꽂혔을 때 제일 먼저 인식되는 카드'라는 건데, 이 원칙에 제일 잘 맞는 카드 타입이죠. 이 카드야말로 컬러 카드의 완성본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컬러 카드라는 게 탄생한 계기도 재미있어요. 어느 날 정 사장이 전화를 걸어서 “오 팀장, 잠깐 올라와 봐" 하셔서 사장실로 달려갔죠. 그 당시만 해도 굉장히 격의없이 형님처럼 대할 때였어요. 정 사장이 “팬톤 칩(Pantone Chip, 미국의 색채연구소 팬톤의 색상 체계를 구현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작은 표지)같은 느낌이 날 수 있을까?” 하시는 거예요. 아 그러면 컬러로 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해서 탄생했어요. 카드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그전에 준비했던 광고도 죄다 바꿨죠. -의사결정이 굉장히 빨랐던가 봅니다.그 당시엔 정말 빨랐어요. 잘난 척이 아니고, 제가 한 마디 하면 사장님이 곧바로 반영해주시곤 했거든요. ‘궁합(chemistry)'이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웃음) 회사 의사결정 과정 자체가 무거워지기 전이라서 빨랐죠. 사실 이런 디자인을 제안은 많이 해요. 문제는 실제로 받아들이고 쓰는 고객이 드문 거죠. 그래서 제가 디자인의 완성은 고객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현대카드 작업에서 아쉬웠던 부분이 있나요?서체요. 지금 서체는 디스플레이서체거든요. 가독성도 있는 서체를 제대로 완성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후임으로 온 사람이 프로젝트를 다 갖고 가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글씨가 나왔고, 결국 완성을 못했어요. 애플처럼 정말 가독성도 좋고 완성도도 높은 서체를 만들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금융회사 디자인이라서 어려웠던 면은 없었나요?접근법은 다 똑같아요. 처음 현대카드에 가서 디자인할 때 친구들이 이야기한 게 카드 디자인이 너무 어렵다고들 하더라구요. 조그마한 판에 숫자 들어가고 비자 마크가 들어가고 나니 할 게 없다구요. 그런데 어차피 상황은 제한이 다 있는 건데,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죠. 컨설팅 하는 친구가 그래요. 대안이 없는 의견은 그냥 불평 불만에 그친다는 거죠. 방법이 있는지 생각하고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서 제시해야 하는 거지요.▲ 미국 색채연구소 팬톤의 색상 체계를 구현한 팬톤 칩./ 세미콜론 제공-원래 색상에 관심이 많았나요?원래 디자인에서 컬러란 게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디자인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는 비례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서 나와요. 이건 절대음감처럼 타고 나는 자질인데 계속 디테일을 보는 훈련을 하면 계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컬러 감각은 훈련으로 기르기가 어려워요. 어릴 때 자란 환경에 따라 색 감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도시에서 다양하고 세련된 색을 어릴 때부터 접한 아이들이 더 세련된 색감을 갖는 것 같아요. 유럽에 가보면 이탈리아 친구들이 정말 기가 막힌 색 감각을 보여줍니다. -어릴 때 색 감각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셨나요?환경이 좋다기보다, 어머니가 눈썰미가 좋으셨죠. 어머니가 귀엽고 이런 걸 좋아하시다보니 컬러풀한 옷도 많이 사주셨고. 저도 옷 고르거나 사는 걸 좋아했고. 그렇게 자라면서 나만의 취향, 옷 감각, 색 감각이 발전해온 것 같아요. -원래 전공은 디자인이 아니었지요?미술은 고등학교 2학년때 시작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금속공예를 전공했어요. 거기에서 강조하는 건 장인 정신이죠. 디테일을 얼마나 볼줄 아느냐, 다듬을 줄 아느냐의 차이인 거죠. 디자인은 일하면서 배우는 거구요.그런데 대학원에서 미국 워크숍을 잠깐 갔는데 회의감이 일더라구요. 함께 하는 친구들과 말도 잘 안 통하는 느낌이 들었고, 기왕이면 제가 투입하는 시간에 비해 좀 더 효율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것, 좀 더 실생활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걸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로 고민을 시작했죠. 원래는 영화감독도 꿈꿨는데, 촬영장에 한 번 가보고 꿈을 접었어요. 체력적으로 도저히 안 될 것 같더라구요.(웃음) 우연히 기회가 닿아 디자인을 하는 선배와 함께 일을 시작했죠. 1993년 매일유업 패키지를 만드는 일로 시작했는데 성향에도 맞고 해서 쭉 하게 됐지요.-좋은 디자이너의 자질은 뭔가요?뭘 하든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게 정답인 것 같아요. 디자인을 잘 하든 말든. 디자인이라는 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problem solving activity)이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해요. 책도 많이 읽고. 지식이 있어야 디자인할 때 필요한 개념(concept)을 뽑아내고 거기에 맞는 논리를 세울 수 있지요.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디자인은 장식미술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좋아하는 말이 실천적 이상주의자가 되라는 거예요. 머리는 하늘에 있더라도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거죠. -현대카드 이외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좋았던 프로젝트들은 함께 일했던 담당 임원들이 좋았던 일들이에요. SK텔레콤, 하이트 진로, jtbc 등이 다 그랬죠. 좋은 마케팅 전문가가 있고 제대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습니다. -굳이 하나를 꼽으면?아무래도 SKT가 로고 작업이 인상적이었어요. 회사와의 관계도 좋았고, 전국 매장이 이 로고로 다 바뀌었으니까요. -요즘은 ‘디자인 경영’이라는 말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디자인으로 무슨 경영을 하나요?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경영이 중요하고 제품이 중요하지요. 본질, 사업의 본질을 잘 잡아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맥주 겉포장을 아무리 예쁘게 하면 뭘 하나요? 맛이 없으면 아무도 안 마시죠. 사업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토탈임팩트가 디자인한 진로 하이트의 맥주 패키지. 오 대표는 “외국인 친구들이 ‘유럽식 패키지 디자인이 한국에서도 정말 먹히느냐’고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오영식 스타일’의 디자인이란 어떤 거라고 할 수 있나요?뭐 따로 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우리 회사 팀이 함께 해온 거니까요. 그냥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면 그 콘셉트에 딱 어울리는 걸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옷으로 예를 들면 어떤 옷이 잘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지 아는 거구요.저는 평일에도 캐주얼 하나를 입더라도 그냥 평범한 티셔츠만 입고 하지를 않아요. 이렇게 뭔가 깃이 달린 게 어울리구요. 슬리퍼 신는 것도 굉장히 싫어해요. 그게 어떤 종류든 꼭 어울리고 맞는 걸 잘 해놓아야 맘이 편해요. 일하는 환경도, 사무실 분위기도 거기에 맞게 어느 정도 돼 있어야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강요는 안해요. 나는 원래 남한테 간섭하는 것도 싫고 간섭받기도 싫거든요.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 일도 너네가 알아서 잘 하고. 서로 힘들지 않게 하자, 그런 식이에요.▲ 오 대표 디자이너의 개인 사무공간. 가구는 직원들이 쓰는 것과 똑같다. /이태경 기자그런 면에서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질문이 디자인 트렌드를 묻는 건데요, 그런 것 없어요. 우리가 해온 일은 예전부터 있어온 일이고 계속 해나갈 일이죠. 중요한 건 얼마나 깊게 들어가서 디테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느냐는 거지, 트렌드는 없어요. 누가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각자 잘 하자. 그런 생각이라 별로 관심도 없어요. 나한테 맡겨진 일과 상황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혹시 ‘클래시 오브 클랜’이란 게임 아세요? 시작부터 전 세계 사람과 같이 하는 게임이거든요. 다른 나라 애들과 팀 짜서 치고박고 게임하는 시대인데요, 시차라는 게 의미가 없고 정보도 자기가 원하면 다 찾을 수 있어요. 본인 하기에 달린 거죠.-최근 눈여겨본 다른 디자인이 있나요?얼마 전에 수많은 히트곡을 낸 유명 대중음악가가 그런 이야길 했다고 하더라구요. 이제 악보 보는 것도 힘들다고. 하도 많이 봐서. 내 심정이 좀 그래요. 이제 디자인 자체에 대해서만 바라본다거나 하는 게 굉장히 피곤해요. -요즘 디자인 추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요즘 추세 중에 제가 좀 우습게 보는 게 UX, UI 디자인으로 몰려가는 추세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 몰려가는데, 2000년대 초반에도 웹디자인 붐이 인 적이 있어요. 이게 사실 같은 이야기거든요. UX, UI나 웹디자인이 다 사람들이 쉽게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치 새로운 것처럼들 여기죠.내가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워낙 시대가 바뀌고 다루는 미디어도 바뀌니까, 우리도 어느 분야까지 뻗어나갈지 고민을 많이 해봤어요. 그런데 결론은 이거예요. 본질에 충실하자. 다들 새로운 걸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디자인 수는 줄어들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덴티티든, 앱이든, 서비스나 회사의 브랜드가 첫눈에 인식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이건 변하지 않는 본질이거든요. -그밖에 어떤 생각들을 많이 하세요?고민이 많아요. 디자인 업의 충실성으로는 잘 팔리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내가 원래 그렇게 상업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우리 회사는 그런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겠지만, 나는 이제 50대에 접어들었으니 나라는 사람이 고민할 것은 뭔가, 그걸 생각하고 있어요. 토탈임팩트 사장, CEO로서가 아니라 이 일을 오래한 사람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고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 말이죠. 어떻게 하면 내가 어린 친구들한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영향을 주고 싶지도 않아요. 나처럼 사는 사람도 있구나, 그런 정도면 충분하다고 할까요?내가 옷 사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오랜 세월 옷에 관심을 두고 살다보니 큰 돈 들이지 않아도 나한테 꼭 맞는 옷을 잘 골라요. 사람들이 나한테 그렇게들 물어봐요. 좋은 패션의 완성은 뭐냐고. 그러면 예전엔 양말, 속옷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하지만 요즘은 ‘지혜'라고 말해요. 지식인치고 멋부리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 멋있거든요. 뭘 걸쳐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제대로 된 생각이 있어서 멋있는 거예요. 내 삶 자체가,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보이면 좋겠어요. 아 저 사람, 이런 면은 좋으니까 본받아야겠다 하는 게 있고. 아 그런데 이런 건 별로네? 이런 건 본받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 -디자이너로서 도전하고 싶은 꿈이 남아 있다면요?또 다른 정 사장 같은 분을 만나서 한 3, 4년 정도 일하는 거랄까요? 메가스터디라는 인터넷 강의 사이트를 창립한 손주은씨가 “몰두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촌철살인이라고 생각해요. 행복이란, 굉장히 모호한 이야기거든요. 늘 행복하지 않아요. 순간이 행복한 거지요. 그런데 내가 행복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몰두할 때거든요. 어떤 게 됐든, 정 사장이나 김신배 SKT 사장처럼 내가 몰두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지요.-앞으로 계획은?책을 아주 많이 읽는 편은 아닌데, 요즘은 동양고전만 눈에 들어오고 이해가 되는 정도구요. 요즘 페이스북을 어쩔 수 없이 하다보니 보는데, 젊은 친구들이 디자인에 대해 논하고 누가 잘하고 아니고 이야기들을 해요. 그런데 그게 사실 나로선 다 지난 시기거든요. 그 친구들과 동일선상에서 그걸 논쟁할 그런 위치도 아니구요. 사실 이제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중에 혼자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뭘까 생각해봤어요. 음악을 워낙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음악 콜렉션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는 쪽 방향을 최근에 잡았어요. 예를 들면 지금 시간이 나면 해야겠다고 목표로 잡은 게 월화수목금토일 오전 오후대 별로 그때 들으면 좋은 음악을 선곡한 앨범 만들기. 월요일 오전에 들으면 좋은 음악, 이런 컴필레이션 음반이랄까요.◆오영식 토탈임팩트 대표 디자이너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실생활과 연관된 직업에 관심을 갖고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기업 아이덴티티(CI) 디자인과 브랜딩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토탈임팩트 대표 디자이너이자 비주얼 브랜딩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책 속 구절들▲ 토탈임팩트 본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깔끔하게 진열된 다양한 디자인 서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태경 기자“디자인은 경영을 위한 수단일 뿐, 디자인 자체가 브랜드나 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즈니스를 잘하는 회사, 질 좋은 제품을 끊임없이 연구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려는 회사, 안목 있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갖춘 회사에 안목 있는 디자인이 수반되었을 때 전략적 무기로서 디자인 파워가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단순히 디자인 경영이라는 어휘적 무기를 앞세워 기업이나 제품, 브랜드의 본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디자인은 어차피 한계를 갖고 시작하는 것이다. 장점은 단점이고 단점은 장점이라고 늘 생각한다. 그 어려운 문제에 대한 출발점을 부인한다면 모든 디자인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현대카드는 자신들을 단순한 카드회사나 금융회사로 규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고객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기업으로 규정하고 ‘고객 라이프 스타일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현대카드 고객에게 새로운 몰입과 영감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2013년 문을 연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시작으로 2014년 트래블 라이브러리와 2015년 뮤직 라이브러리까지 확장됐다.”▲ 서울 가회동에 있는 현대카드의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전통적인 맥락에 현대적인 건축 양식을 과감하게 배치시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전면에서 다룬다. /세미콜론 제공▲ 서울 청담동의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세미콜론 제공“현대카드 라이브러리와 팩토리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문화적인 공간이다. ‘문화적인 공간’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매년 많은 공간이 생겨나지만 공간의 의미를 건축주와 건축가가 공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 공간을 만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드나들고 사용하는 사람까지 생각하는 현대카드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서울 한남동에 최근 문을 연 헌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는 공연장과 합주실, 카페와 라이브러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세미콜론 제공“사실 단순하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단순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디테일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테일에 파고드는 것을 말한다. 만들고 디자인하려는 제품과 제조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진정한 단순함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들을 제거하는 것이 단순하게 만드는 길인데 그러려면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탈임팩트 임직원은 사원부터 대표까지 똑같은 가구를 쓴다. 오 대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대표보다는 하루 열 시간씩 앉아 일하는 직원들의 의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일하는 환경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우리 회사 컴퓨터는 2년마다 절반이 교체된다. 새 컴퓨터는 직급에 상관없이 손이 제일 빠른 디자이너가 가장 좋은 사양의 컴퓨터를 쓴다. 그리고 회사 임원진들은 직원들이 쓰던 노트북을 물려받아 쓴다. 이제는 임원진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스킬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우리 사무실의 모든 책상은 비트라(Vitra) 제품이고 의자는 허먼 밀러(Herman Miller) 제품이다.”▲ 토탈임팩트 사무실에 놓인 다양한 잡지들. /이태경 기자“디자이너는 이상을 꿈꾸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실천적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창조의 작업이다. 디자이너라면 ‘실천적 이상주의자’로서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의미 있는 디자인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0/2015071003403.html​ 
  • 2015-07-07
    2015-07-07 전병근 조선비즈 기자​ 온라인 디지털 시대. 그물망처럼 뻗친 소셜미디어를 타고 정보와 뉴스는 빛의 속도로 생겨나고 퍼져간다. 그 속에는 진실과 거짓, 사실과 추측이 혼재한다. 미담도 추문도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스캔들일수록 더 빠르고 파상적이다.얼마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 그랬고, 최근 유명 소설가의 표절 파문이 그랬다. 둘 다 사건 하나로 당사자들은 단번에 치명상을 입었다. 사태가 개인 수준에서 자신이 속한 혹은 관련된 기업으로 번져간 것도 닮았다. 두 경우는 모두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고, 본인도 ‘사과’했다. 하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브랜드 시대, 평판 관리는 누구에게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개인, 기업, 기관 어느 하나 그 걱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번역돼 나온 ‘유리턱(Glass Jaw)’은 그 점에서 시의성이 있다.저자 에릭 데젠홀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백악관 공보실을 시작으로, 위기관리 전문회사를 창업해 숱한 기업 및 기관에 자문을 맡아온 전문가다.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답으로 보내온 조언들이 마키아벨리를 방불케 한다. 그만큼 냉정하다. -제목을 ‘유리턱(glass jaw)’이라고 붙였다. 무슨 뜻인가?일반적으로 어떤 유형의 권투 선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강해 보이지만, 의외로 ‘한 방’에 그냥 쓰러뜨리기 쉬운 선수를 말한다. 제목으로 쓴 이유는 현대 사회의 아주 강력한 사람이나 기관, 조직이 지금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는 오히려 특별히 취약해진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이런 책을 쓰게 된 이유는?위기 관리 업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기업이나 저명 인사, 기관들이 아직 세상을 1980년대처럼 오판하고 있다. 과거에 써먹었던 위기 관리의 노하우가 아직도 통할 수 있을 거라는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어떤 변화를 말하나?세 가지 주요 요인이 미디어 환경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첫째, 정보가 전파되는 속도다. 둘째, 정보의 양이다. 특히 부정적인 정보는 엄청나게 요란하게 퍼져나가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만다.셋째, 독성이다. 인터넷 공간은 부정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취약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공격 목표물이 된 상대는 반격해 싸울 시간이나 여지조차 없게 만든다.-그 배경으로 ‘마이크로 유명세 사회(micro-celebrity society)’를 꼽았다. 무슨 말인가?오늘날 모두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름의 ‘작은 유명인사’가 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청중(audience)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개인이나 기업, 기관의 평판 관리 측면에서는 문제를 야기한다.왜냐하면 사람들이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종종 유명 인사나 기관, 기업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들을 내놓기 때문이다. 전파하는 사람들도 주목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있다.-뉴스와 정보 확산에 관한 한 전통적인 ‘게이트 키퍼들’이 급속도로 힘을 잃으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옛날에는 어떤 의심스런 주장을 무마하려고 하면 기자나 정치인, 법원을 상대로 설득하거나 설명하면 됐다. 터무니없거나 부당한 주장은 전파되기도 전에 검증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말을 전파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갖게 됐다.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진위가 의심스럽거나 정당하지 않은 주장도 마음껏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됐음을 뜻하기도 한다. -구식 거대 세력(골리앗)과 게릴라 세력(다윗) 간의 힘이 역전되면서 지금은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했는데?인터넷은 힘 있는 소수로부터 약한 다수로 힘의 이전을 가져왔다. 이제는 겉보기에 힘이 없는 사람이나 집단이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을 상대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미디어라는 중간 매개가 일종의 심판이나 중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없다. 직접적으로 격돌하고, 이 경우 순간 결집한 익명의 다수가 유리하다.-종래의 위기 관리 방안이 소용 없어졌다는 얘긴가?그보다는 위기 관리의 옛날식 철학이 쓸모없어졌다고 하는 게 나은 표현이다. 나는 요즘도 어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즉각 대응이 중요하다’는 말 같은 상투어를 듣는다. 하지만 때로는 무작정 즉각 대응했다가 부정적인 반응을 더 촉발하거나 자극하기도 한다.무조건 사과하는 게 좋다는 상투적인 지침도 마찬가지다. 공개 사과의 경우 대부분 서툴게 진행되거나 오히려 사태를 망쳐놓는 경우가 많다. 섣부른 사과들은 종종 나중에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인정될 수도 있다.사건 결과에 따라 잃을 게 많은 고객을 변호하는 사람이라면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해 상투적인 조언을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될 수 있다. 옛날식 대처 요령이 언제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기 관리의 실무 교본이나 수칙 같은 것이 이제는 통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얘기하고 싶다.-상투적인 옛날식 위기 관리 방식으로는 어떤 게 있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흔히 평판에 대한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기사보다 앞서가라(get ahead of the story)’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한번 공격의 목표물이 되면 결코 쏟아져 내려오는 기사들을 앞설 수가 없다. 언제나 뒤를 좇아가게 돼있다.더욱이 뉴스에 앞서서 선제적으로 대응한답시고 취하는 행동과 조치들이 시장이나 대중 사이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다 보면 위기 관리는 난장판이 된다. 사안에 따라 다른 전술로 접근해야 한다.‘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는 말도 그런 상투적인 대응책 중 하나다. 이것은 어느 정도 조건이 충족됐을 때만 쓸 수 있는 마지막 해결책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작정 ‘죄’를 자백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소셜미디어가 가장 큰 화근이라고 했다.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위기 관리는 부정적인 사안이나 사태를 ‘봉쇄(contain)’하고 나쁜 뉴스가 사라지게 하는 일인 반면, 소셜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분산시키는(dispersive) 기술이다. 본질적으로 상충한다. 다만, 소셜미디어는 상황에 유리한 특정 정보를 공유하는 데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또한 상품 리콜 같은 것과 관련한 중요 정보를 전파할 때 활용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사태가 전개되는 것을 모니터링하는 데도 유용하다. 또 저명 인사가 당신을 변호하는 의견을 내놓는 경우처럼 유리한 콘텐츠를 공유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하지만 소셜미디어는 주주들과 소통하려고 할 때는 유용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통제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진정보다는 불길을 키우기 십상이다. 소셜미디어는 아주 선동적인 매개물이다.-루머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봤는데?모든 미디어가 똑같지는 않다. 한 곳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그러지는 않는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부당한 공격에 처했을 경우에는 한 다른 매체로 하여금 공방을 벌이게 하면 도움이 된다. 어느 한 매체가 무시하고 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정보가 있으면 다른 매체가 거기에 관심 가질 가능성이 높다.문제는 대부분의 미디어가 단일한 공격 전선으로 뭉쳐져 있을 경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매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교적 덜 알려진 신생 매체들을 통해 기존 유력 매체들에 대한 감시견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당신은 스캔들에 대한 수습책으로 무조건적인 사과가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사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기독교적인 사과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죄와 용서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종류의 사과다. 여기서는 당사자의 진정한 회개가 목적이고 고통은 거기에 따르는 필연적인 대가다. 사과의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둘째, 업무적인 사과다. 가시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목적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진심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대중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의 사과다.문제는 위기에 빠진 대부분의 개인과 기관은 자신의 사과가 이런 전략적 차원의 것이면서도 기독교적인 사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복귀’라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 기독교식 선의를 최대한 보여주려 한다.셋째, 결혼생활식 사과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과해야 될 때가 있다. 자신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질 때조차 상황 호전을 위해 하는 사과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했다고 믿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는 경우다. 이 경우 잘 진행되면 처벌과 논란의 강도는 약해지고, 다시 평판을 쌓아갈 수도 있다. 사과에서 가장 큰 변수는 당신이 혐의를 받은 행동을 실제로 했는지 여부다. 두 번째 변수는 어떤 유형의 사과를 할 것인가이다.과거 GM이 시동 스위치 결함으로 인한 대규모 리콜 사태에 직면했을 때 메리 바라 GM CEO가 의회에 불려나간 적이 있다. 사상자를 발생시킨 제품을 생산한 데 대한 사과를 요구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핵심적인 사과는 피해갔다.그 이유 중 일부는 그런 사과를 했을 경우 미국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과한 것은 ‘소비자를 실망시킨 데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상자를 낳은 제품 제조에 대한’ 사과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결국에는 단기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어떤 말보다는 추후에 회사가 제품 개선을 위해 취한 조치들(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도요타도 리콜 위기 후에 판매가 70% 상승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요타는 사후에 충성스런 자사 고객에 초점을 맞췄고 핵심 고객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취한 행동들이 효과를 봤던 것이다.-‘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인가?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맞는 말이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이 법이나 다른 의제들과 서로 관련이 될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많은 위기 상황에서는 진실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실제로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시인부터 하는 것은 어리석다.자칫하면 위기 상황을 거치면서 어떤 당사자는 정보를 감추거나 속이는 방식으로 살아남게 되는 추한 현실만 남을 수 있다. 가령 애플 같은 회사들이 비밀주의로 악명높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그들은 그런 불투명성으로 인한 보상을 받아왔다. 그 배경에는 사람들이 애플 제품을 좋아하고, 이런 경우에는 그들에게 다른 룰이 적용되기 때문이다.빌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도 거짓말로 결국에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런 거짓말이 비도덕적인 것인가? 그렇다. 효과적이었나? 불행히도 때로는 그렇다.-빌 클린턴을 위기 관리의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나?핵심을 보자. 미국에서도 흔히 그가 사과를 했고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말이다. 모니카 르윈스키에 관한 추문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맨처음 그는 거짓말을 했다.(성관계를 부인했다)두번째, 그는 묵묵부답했다. 이때 그는 다른 전략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셋째, 그는 ‘인신 파괴의 정치(the politics of personal destruction)’는 끝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휘하의 아주 공격적인 보좌관들을 불러 의회 내 적들(클린턴에게 공격적인 의원들)을 맡으라고 지시했다.넷째, 그 적들은 조사를 받았고, 그들 역시 성적인 위선자들임(성적 추문에 연루됐거나 혐의가 있음)이 판명됐다. 이런 사실이 노출되면서 그의 적들이 제거됐을 때 클린턴은 사과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일처리였다. 하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한국에서도 크고 작은 스캔들이 일어난다. 얼마 전 재벌 총수 딸의 땅콩 회항 사건이 있었고, 최근에는 유명 소설가의 표절 사건이 있었다. 둘 다 외신에도 보도됐다. 두 경우 다 당사자가 사과했지만 너무 늦었고 미온적이어서 더 화를 키웠다고들 한다. 어떻게 했어야 할까?진짜 위기와 위기 관리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진짜 잘못된 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위기 관리만 잘하면 당사자는 화를 면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위기에서 사과나 위기 관리는 ‘너무나 기대에 모자라고 너무나 뒤늦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상황 수습이나 사태 진정에 대한 조급증이 있다.사과로 위기가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위기 관리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 요금에 불과하다. 대중은 당사자가 적절히 처벌받기 전까지는 복귀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땅콩 분노’ 사건에 연루된 여성은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고, 작가는 아마 글쓰기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땅콩 분노’ 여성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보다 작가가 글쓰기 본업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위기 관리에 있어서 예술, 문학, 역사에서 배울 게 많다고 했는데.논란이나 스캔들 대처에 대해서도 경영학 수업보다 문학, 예술, 역사에서 배울 게 더 많다. 스캔들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요소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위대한 위기 관리의 고전이라고 곧잘 추천한다.이 책에서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후에 상어와 만난다. 그는 자신이 잡은 대형 청새치를 싣고 아바나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결국에는 다 잃고 혼자서 돌아가게 된다.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그게 바로 위기 관리에서 배울 수 있는 위대한 교훈이다. 평판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생존을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위기 관리를 위한 실무적인 조언을 한다면?몇 가지 유념할 원칙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주의와 피해망상을 혼동하지 말라. 피해망상은 비합리적인 걱정이고 주의는 당신의 약점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다.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취약하다. 혼자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절대 과민반응하지 마라. 이메일을 써놓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번 더 확인하라. 오늘날 대부분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 특히 이메일의 ‘전체 회신’ 기능을 신중히 사용하라.자기 자랑이나 과시가 남들에게는 어떻게 인식될지 신중히 생각해 보라.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실행 가능한 일에 집중하라. 그럴 때는 우군의 지원을 받아라. 당신에게 적대적인 편을 설득하는 데 매달리는 것은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이다.물리치거나 반격보다는 인내에 집중하라. 비판자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단기적으로 보면 스캔들을 잘 헤쳐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극복해내는 사람이 많다. 생존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섣부른 희망보다는 인내하는 데 집중한다. 종결에 집착하지 마라. 만족할 만큼 완전 종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의 본연에 충실하라. 비난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강점에 집중해서 인정 받도록 하라.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정해진 ‘각본(playbook)’ 같은 것은 없다는 거다. 보편적인 룰이 있다고 믿지 마라.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간이다. 즉석에서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기대하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치거나 실망하게 된다.◆ 에릭 데젠홀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뉴스 미디어와 정치학을 전공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백악관 공보실에서 일했다. 1987년 위기관리 회사 데젠홀 리소스를 창업해 CEO로 일했다. GE, 엑슨, 엔론, 프록터앤갬블 등 대기업과 기관 들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해오면서 유력지에 관련 글을 기고해왔다. 데젠홀 리소스는 현재 워싱턴DC, 새크라멘토, 로스앤젤레스, 런던, 브뤼셀 등지에 지부를 두고 있다.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07/2015070702068.html​ 
  • 2015-07-04
    기원전후 400-500년 사이, 동서양이 교차했던 인도 북부 간다라.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날 다채로운 불교 미술의 원류로 꼽히는 그곳 미술은 어떤 과정에서 생겨났고 어떻게 전파됐을까. 간다라 불상이 멀리 한반도 통일신라 석굴암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통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간다라 미술의 권위자인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 교수가 이런 크고 작은 물음에 대한 답을 들고 대중 앞에 섰다. 조선비즈 북클럽과 위비클럽이 매달 기획하는 지식콘서트가 그의 저서 ‘간다라 미술’(사계절) 개정판 출간을 맞아 연사로 초청한 자리였다.이 교수는 이날 책 내용을 반복하기보다 ‘후일담’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강연은 ‘후일담’ 수준을 훌쩍 넘어 간다라 미술의 전후좌우를 망라하다시피했다. 불교 미술은 물론 동서 문화의 교류 혹은 침투, 그리고 우리 근대기의 미적 인식과 지식의 형성 과정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진 이야기는 마치 별 권의 인문서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질의응답과 함께 1시간반 가까이 진행된 강연 내용을 중계한다. 당일 녹취한 것을 정리하고, 이 교수가 약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강연>이번에 나온 책은 12년 만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그 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표현을 바꾸고 새로운 걸 더 집어넣고 여러 작업을 좀 했습니다. 기존의 틀이 있다 보니 많이 고치기는 어렵더군요.이 책을 처음 쓰게 된 것은 1999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간다라 미술이라는 전시회가 계기였습니다. 그때 제가 도록(圖錄)을 썼는데 소개 글을 원고지로 250매를 썼습니다. 사진으로 실린 작품 해설도 쓰고요. 그냥 두기 아까워 거기에 살을 좀 더 붙여 책으로 내게 됐습니다.원래 도록에 썼던 것이어서, 말하자면 서양의 미술과 동양 종교의 만남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낭만적으로 썼던 것 같아요. 2003년에 나온 책 체제도 그렇게 됐구요. 그 뒤에 책을 다시 쓴다면 다르게 쓸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아주 학술적인 저술은 아니고, 대중적인 것에 학술적인 살을 붙였다고 하겠습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지역 탈레반의 포격으로 폭파된 바미얀 서대불(왼쪽)과 동대불 /사계절 제공1년 뒤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을 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사회평론)이라는 제목인데요, 전작 ‘간다라 미술’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점이 있었고, 또 그때부터 3년쯤 전에 바미안 불상이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일이 있었죠. 그 불상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책을 쓸 생각을 했습니다.이 책은 좀 더 일반 독자를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어느 출판사 사장님이 우리나라에서 잘 팔릴 책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우리 독자들은 알고 있는 무언가와 연결이 된 책이라야 읽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었어요. 아주 먼 곳의 생소한 것들은 바로 소개하기가 참 어렵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오늘 주제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책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 뒤 추가된 사실이나 또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왜 우리는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첫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는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입니다. 이 물음은 제 책 마지막에 간단히 다룬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간다라 미술에 대해 적정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두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간다라에 대한 심취가 대단합니다.이 문제는 우선, 서양인들이 역사를 보는 낭만적인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책도 그런 시각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 부분 서양인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은연중에 서양인들을 보면서 닮으려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책을 다시 쓴다면 아마 다르게 시작할 것 같습니다.이게 간다라 불상입니다. 간다라는 서력 기원전후부터 4-5세기 동안 파키스탄 북쪽에서 유행한 미술입니다. 이 사진은 기원후 200년쯤에 만들어진 불상 머리, 불두(佛頭)입니다.서양 사람들이 왜 여기에 매료됐느냐. 서양의 근대 이후, 19-20세기에 걸쳐 특히 19세기에 서양 사람이 동방에 관심을 두는 데에는 알렉산더가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란이나 인도 같은 동방에 관심을 두게 됐을 때 흔히 알렉산더를 통해 이쪽으로 접근했다는 말입니다.특히 역사학자 중에 오렐 스타인(1862~1943, 탐험가) 같은 사람이 그랬어요. 많은 사람이 스타인처럼 어릴 때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으면서 동쪽 세계, 인도를 꿈꾸고 이 지역에 대한 탐험이랄지 연구랄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리석 두상 /사계절 제공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334~326년경에 있었죠. 유라시아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건 확실히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본 역사 속에서 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알렉산더 때만 해도 세계에 대한 지식이 크게 부족해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만 알았는데 인도마저 아주 조그맣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쪽 중국은 전혀 몰랐고요. 중국을 알고 교류하게 된 것은 기원전후나 되어서였습니다.그런 세계에서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발길을 좇아 근대 역사학자들도 탐험하게 됐죠. 간다라 미술도 그런 맥락에서 조명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알렉산더의 원정을 통해 그리스인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럽에선 변방인 마케도니아인들이 아시아 서반부 곳곳에 정착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쪽과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의 박트리아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헬레니즘이 뿌리내렸던 거지요.  ▲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도 /사계절 제공박트리아에는 그리스인들 도시도 남아 있는데, 지중해 세계의 도시처럼 체육관도 있고 큰 반원형 극장도 있고, 궁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철학책의 단편도 출토됐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그보다 조금 남쪽에 있는 간다라라는 지역에서 불교 미술이 나오게 됩니다.알렉산더가 세운 것은 결국 제국인데요, 자기가 사는 곳 이외 다른 지역에 관심을 두는 것은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대기에 제국이 아니었던 나라 중에는 그렇게 자기 문화 이외 다른 여러 곳의 문화를 연구하는 전통이나 관습이 있는 곳이 별로 없어요.영국, 프랑스가 바로 그런 제국이었고요, 일본은 한때 제국이 되려 했고, 미국은 제국이지요. 그렇게 보면 한국은 굉장히 특이한 것 같아요. 이탈리아는 오늘날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상당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워낙 학문 전통의 뿌리가 있어서 그게 남아 있는 거지요.서양 사람들이 서양 역사의 일부라는 면에서 간다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데,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그토록 매료된 데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지요. 그중에는 이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불교 미술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아요. 우리는 그런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우리의 美的 인식과 지식의 형성 과정다음으로, 제가 관심 있는 것이 뭐냐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나 불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지식이 근대기에 어떻게 형성됐느냐는 거예요.▲ 아프가니스탄 핫다의 불두 /사계절 제공여러분이 서양 영화를 볼 때는 서양 사람 얼굴에 대해 거부감을 거의 느끼지 않죠? 하지만 바로 옆에 서양 사람을 두고 얼굴을 보면 어쩜 저렇게 코가 큰가 싶기도 하고 이상해 보이는 면이 많아요. 요즘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사람 얼굴을 볼 때 모든 디테일을 골고루 종합해서 보는 게 아니라 몇 군데만 중점적으로 보는 것을 반영한 겁니다.언젠가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데 눈이 찢어지고 인상이 별로 안 좋은 사람이 등장해요. 틀림없이 악당이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니엘 헤니였어요.(웃음) 동양인들 틈에 있을 땐 미남인데, 서양 인들 틈에 있으니 달라 보이는 겁니다.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다라 미술에 경도되는 것은 서양 고전주의에 익숙한 우리의 심미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상적 형상의 사실적 조형을 목표로 삼았던 서양 고전주의의 심미적 이상이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하고 깊이 내면화돼 있다는 거지요.동서양의 인간 조형을 비교해 보면, 형상의 입체성이나 그것의 재현 기술과 관행에서 서양 고전주의가 우월하고 더 인간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고, 서양인의 형상이나 조형은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를 제일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이 석굴암 불상이 간다라 영향을 받았느냐는 겁니다. 교과서에 그렇게 많이 쓰여있죠. 하지만 거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 얼굴이니까 비슷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비교해 보면 거리가 있습니다.그런데도 간다라 미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심리 이면에는 우리가 간다라 미술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정서가 심리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석굴암 불상의 높은 가치를 적절히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원류가 간다라에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모든 불상의 뿌리가 간다라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양식으로 말하자면 석굴암 불상은 오히려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살지고 푸짐한 게 복스럽고 원만한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우리는 동과 서를 이야기할 때 융합, 교류를 말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미화하거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당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심미적인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서양인의 시선에서 시작된 불교 미술간다라에 흔히 매료되는 세 번째 배경은 연구 전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불교 미술에서 간다라의 불상이 가장 조각답고 미술의 범주에 넣기에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여겼진 거지요. 그런 점에서 간다라는 서양 고전 미술의 가장 동쪽 끝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학술적 의미의 근대적 불교 미술이란 것도 서양 사람들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서양인들이 처음 간다라 미술을 알게 된 것은 1840~1850년인데, 두 명의 학자가 굉장히 중요한 책을 썼어요.한 사람은 독일의 알버트 그륀베델(Albert Grünwedel, 1856-1935)인데, 중국 서쪽 신강성의 쿠차 지역 석굴 조사를 많이 했어요. 그는 1893년 ‘인도의 불교 미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이 간다라 미술이었습니다.불교에 미술(Kunst)란 말을 붙여 쓴 게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서양인들은 간다라에서 나온 불상은 그냥 ‘우상(idol)’이라 부르고 미술이 아닌 민속학 유물 범주에 넣었어요.이런 상황에서 최초로 불교 미술이라 불린 범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간다라 미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미술 연구의 시작이 바로 간다라 불상에 있었고, 그것만이 미술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출발할 때부터 있었던 겁니다.다른 한 사람은 알프레드 푸쉐(Alfred Foucher, 1865-1952)라는 사람입니다. 푸셰는 1900년 ‘인도의 불교 도상 연구’라는 책을 냈고, 1905-1922년에 걸쳐 ‘간다라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이라는 대작을 냈습니다. 그의 연구가 간다라 미술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고, 후대 불교 미술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또 에른스트 페놀로자(Ernest Fenollosa, 1853-1908)라는 미국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1878년에 일본에 와서 제국미술학교에서 처음으로 미술사를 가르쳤어요.1912년에 ‘Epochs of Chinese and Japanese Art(중국과 일본 미술의 시대)’라는 책이 그의 유작으로 나왔는데, 이 책에 ‘중국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 당 초기(Greco-Buddhist Art in China: Early Tang)’와 ‘일본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 나라 시대(Greco-Buddhist Art in Japan: Nara Period)’라는 제목의 장(章)이 실려 있습니다.동아시아 불교 미술에서도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표현하게 된 시대를 일컬어 동아시아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 생각이 뿌리내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겁니다. 석굴암에 대한 인식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따라서 저는 동과 서의 만남으로서 간다라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서양 고전 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오히려 거칠고 퇴화한 지방 미술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그 나름의 독특한 맛이 있긴 하지만, 특별히 인도라거나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만들어진 불상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너무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런 눈으로 봐서 그렇지,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왼쪽은 3-4세기 간다라 지역의 불입상. 오른쪽은 기원전 340년경 로마시대 소포클레스 대리석상 /사계절 제공또 다른 인도 문화의 중심, 간다라다음으로, 간다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인데요. 요컨대 이곳은 또 하나의 인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다라 미술의 기원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과 그 뒤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인, 헬레니즘 문화에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실제 간다라 불상을 만든 주체는 대부분 인도인이었습니다.지도를 보시면 간다라는 파키스탄 북쪽에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 페샤와르라는 곳이 있고 그 주위에 분지가 있어요. 아래로 인더스 강이 흘러가고 있고요. 이 페샤와르 분지가 좁은 의미의 간다라입니다.역사적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까지 포함해 부른 적도 있지만, 대체로 페샤와르 분지를 간다라로 불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간다라 불교와 불교 미술이 퍼져 있던 곳을 넓은 의미의 간다라라는 뜻의 ‘Greater Gandar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간다라의 주민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간다라는 간다리라는 사람이 살던 땅이라는 뜻이에요. 인도-유럽어족의 유목민이 남진해 기원전 1500년쯤 인도에 정착하는데, 그 한 갈래가 간다리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경로(실선은 육로, 점선은 해로)와 주요 전투지사실 동서의 만남은 알렉산더 이전에도 있었어요. 이란과의 만남인데, 알렉산더가 오기 전에 이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서반부가 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지요.기원전 6세기-4세기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할 때 간다라도 속주의 하나였어요. 페르시아 제국 수도 페르세폴리스에는 20여 개 지역에서 조공하러 온 사절들을 묘사한 부조가 있는데, 여기에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새겨져 있습니다.그 뒤에 알렉산더가 온 겁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동쪽 끝까지 온 거죠. 알렉산더 뒤에는 아시아의 제국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의 제국이 됐고요.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인 왕국이 독립해 남으로 뻗어 나갔습니다.여기 기원후 1, 2세기에 새겨진 간다라의 부조에 그리스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요. 우리가 종족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언어이고 미술에선 복장인데, 이건 확실히 그리스인 복장이죠. 바쿠스나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주신제를 하는 장면입니다.이 지역 서쪽에는 알렉산더 후예들이 있었고, 남쪽 인도 본토에서는 기원전 4세기 말 큰 제국이 일어납니다. 바로 마우리아 제국입니다. 이 제국이 커지면서 서쪽의 알렉산더 후예들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아쇼카왕 때 제작된 주두(기둥머리)와 오늘날 인도 국장마우리야 제국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가 유명한 아쇼카왕이죠. 그가 불교로 귀의해 후원자가 된 후 불교가 이 지역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붓다가 처음 설법했던 불교 유적에 남긴 커다란 기둥이 있는데, 그 주두(柱頭, 기둥머리)가 현대 인도의 국장(國章, emblem)이 됐죠.독자적인 문자와 말을 썼던 간다라아쇼카는 다르마, 즉 정법에 의한 삶을 강조하는 칙령을 제국 곳곳에 새겼는데, 명문을 보면 위쪽은 그리스 문자, 그리스어로 썼고, 아래쪽은 아람 문자, 아람어로 썼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아시아 서반부에서는 오늘날 영어와 같은 보편어였습니다. 이걸 보면 이 지역에서 그리스계와 이란계 사람들이 살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이런 문자와 언어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죠.페샤와르 분지에 새긴 칙령을 보면, 인도어를 쓰고 있어요. 인도어 중에서도 이 지역의 특별한 방언이 있어요. 간다리라고 부르는데요. 그것을 이 지역에서만 특별히 쓴 문자, 카로슈티라는 것으로 썼습니다.이 시기는 인도 역사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인도인들이 비로소 문자를 쓰게 됩니다. 인도에는 오랜 종교 문학 전통이 있는데, 그럼에도 인도인 문자를 쓰게 된 것은 인더스 문명기를 제외하면 기원전 3세기 아쇼카가 돌에 새기게 한 것이 가장 오랜 유물입니다.이때 두 가지 문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인도 본토에서 쓰던 브라흐미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간다라에서 쓰던 카로슈티 문자입니다. 인도 전역에서 브라흐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간다라만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어요. 카로슈티 문자는 아마 페르시아 제국에서 쓰던 아람 문자를 기원전 4세기쯤 변형해서 만든 것 같아요.브라흐미 문자의 기원은 좀 모호한데, 간다라의 카로슈티 문자 창안에서 자극받아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인도 지적 문화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간다라 지역이 인도 본토와 달리 독자적인 문자를 썼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어로도 그렇고 문자로도 그렇고 인도 본토와 구별되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다라의 불상도 만든 겁니다.그러니까 이 지역은 인도 변방이 아니고, 인도 아리안이 정착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구사하고 있었어요. 인도 본토에서 문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3, 4세기였지만, 이곳에서는 세계 언어학사에서 가장 정교한 문법책을 처음 쓴 빠니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미 상당한 지적 전통이 있던 곳이란 거죠. 변방이 아니라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경쟁하던 유력 지역 단위가 있었던 곳입니다.쿠샨 왕조 사람이 불상 만들기 시작간다라 미술이 본격적으로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후쯤인데, 여기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쿠샨 왕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어요. 중국 역사책에 돈황 부근에 살던 월지라는 종족이 나옵니다. 한나라 변방의 유목민들이죠. 이들은 인접한 또 다른 유목민인 흉노와 갈등하다가 패해 월지 왕의 두개골이 흉노 왕의 술잔이 되는 수모를 당합니다.그 뒤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손이라는 유목민에게 패해,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과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박트리아에 자리잡았습니다. 그 바람에 박트리아에 정착했던 그리스계인들이 패해 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지요.그런데 한나라 무제가 북쪽 흉노족을 치려는 과정에서 서쪽의 월지랑 협공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자원해서 서쪽으로 간 사람이 장건입니다.하지만 장건은 월지를 찾아가는 길에 흉노족한테 붙들려 거기서 결혼까지 하고 10년쯤 살았어요. 그러다가 도망쳐서 결국 박트리아의 월지에게 갔는데, 그 곳 사람들은 옛 원한은 다 잊고 흉노의 협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그 덕에 중국과 서쪽 간 교역과 교류의 길이 트였습니다. 또 덕분에 우리로서는 쿠샨이나 월지에 대해 쓸 만한 역사 기록을 갖게 됐지요.쿠샨은 아프간 북쪽 그리스계 사람들을 쳐부수고 한때 넓은 제국을 이뤘습니다.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유역 중부, 이란 동부, 중국 신강성 남쪽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신강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인도어로 쓴 목판들이 니야라는 곳에서 다수 발견됐어요.이 쿠샨 시대에 불교 미술이 흥했습니다. 또 이때 비로소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쿠샨 제국 화폐에는 부처라는 이름을 그리스 문자로 새긴 상이 보입니다. 불상을 만들 때 간혹 누가 이러이러한 상을 바친다고 명문을 새기기도 했어요.제 책에는 별로 담지 못했는데, 간다라 미술과 관련해 지난 20년 동안 불교학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 있습니다. 간다라에서 나온 나무껍질 경전들입니다. 2000년 전쯤 필사된 불교 경전들인데, 그것이 다 이 지역 인도말로 돼 있습니다. 인도 본토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말이지요.오늘날 우리는 인도 하면 하나의 인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만 해도 하나의 한국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터 ‘하나의 한국’이라는 생각이 등장했느냐는 것은 따져볼 문제 아닙니까?마찬가지로 과거 인도에도 몇 군데 중심지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후 400~500년쯤 되면 인도 본토의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완전히 인도 문명의 주류가 됩니다. 부처가 활동한 곳, 아쇼카의 마우리야 제국이 흥기한 곳, 고전 문화를 완성한 굽타 왕조가 번성한 곳도 이쪽입니다.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쪽 인도와 함께 또 하나의 인도로서 인도 문명의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했던 곳이 간다라라고 하겠습니다. 여기는 나름대로 다른 문자와 언어의 정체성이 있었고, 이들은 밖에서 들어온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죠. 헬레니즘 문화유산이 있었기 때문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게 간다라 불상이라는 서양 고전 양식을 가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기원후 400~500년경이 되면 이 지역의 간다리라는 말, 카로슈티라는 문자, 서양 고전 미술 양식이 다 자취를 감춥니다. 대신 인도 본토에서 흥기한 고전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미 문자, 인도 특유의 미술 양식이 이 지역으로 올라옵니다. 헤게모니 경쟁에서 서북쪽의 인도가 패하고, 드디어 갠지스 강 중류의 인도가 승리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 문명을 형성하게 된 거죠.불교 미술의 기원, 간다라간다라 미술은 조형적으로 아주 다양합니다. 불상도 아주 다양한 얼굴이 있습니다. 한 가지 주류로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여러 요소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헬레니즘 양식과 아주 흡사한 것도 있고, 로마와 연관된 것도 있고, 이란계도 있고, 북쪽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그 결과 간다라에서 불교 미술의 여러 유형이 창안된 거지요. 그런 점에서는 불교 미술의 원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후대 인도 본토의 불교 미술과 동아시아의 불교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불상이 만들어진 건 사람들이 부처를 인간 모습으로 보려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다라에서 나온 불상들을 보면, 서양 미술처럼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정형이 없었어요. 특정 형상의 얼굴이 아니라 몇 가지 유형(type)을 전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후대 인도에, 또 동아시아 중국으로 전해졌지요.기원후 7세기쯤 인도의 불교도들에게 제일 유명하던 곳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불상이 가장 유명했어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데, 그때 불상이 유명해서 이곳에 참배했던 당나라 사람들이 그 불상을 그림으로 모사해서 가져갔다고 해요. 그런 것이 우리나라까지 전해져서 석굴암 불상 같은 것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교류저는 원래 19세기 후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때가 근대적 지식이 형성되는 시기인데, 이때 불교 미술에 관한 지식도 간다라의 불교 미술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이게 제 책 표지에 쓴 사진인데 한 사원에서 아주 많은 불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유적에 관해 알려진 것은 이런 사진 몇 장뿐이에요.▲ 1896년 로리얀 탕가이에서 발굴된 다양한 불상들 /사계절 제공사실 인도에서 동서 교류는 간다라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해로를 통해서도 상당한 교류가 있었어요. 남인도의 안드라 지역에도 상당한 규모로 교류가 있었습니다. 인도 동남부에서도 많은 로마 화폐들이 발견된 적이 있고요. 이쪽 조각에도 서방이 영향을 줬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쓰던 항아리 모양도 갖고 온 게 보입니다.우리는 동서 교류를 이야기할 때 흔히 서에서 동으로의 영향을 주로 언급합니다. 간다라 미술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에서 서로 간 영향은 매우 단편적인 사례들만이 알려졌습니다. 그게 간다라뿐만 아니라 중국 장안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제가 한번은 장안에 관해 강의하면서, 당나라 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어떤 분이 “왜 동서 교류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것만 이야기하느냐”고 하시더군요. 정확히 핵심을 찌른 질문이었어요.이런 편향은 대체로 그동안 연구가 서에서 동으로 가는 것에 집중돼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근대기 이후 문명 교류에 대한 연구가 주로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이뤄진 데서 기인한 거지요. 그만큼 동에서 서로 바라보는 연구는 미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유럽 형성기의 아시아 영향이 새 연구 과제그런 점에서 최근 서양 고전철학의 피로니즘(Pyrrhonism)에 대한 연구가 관심을 끕니다. 피로니즘이란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피론이라는 철학자를 상징적으로 내세우면서 지중해 세계에 등장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올해 ‘Greek Buddha(그리스의 부처)’라는 책도 출간됐는데, 피로니즘이 분명히 인도 불교도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을 거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쪽에 대해 비로소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쪽의 연구가 더 많이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앞으로 21세기는 아시아 시대가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속에서 이런 동과 서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또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과제일 것 같습니다.지금까지는 주로 서양 문명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면서 아시아의 특수성을 설명하려 하고, ‘아시아의 형성에서 서양(Europe in the making of Asia)’이라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둬 왔습니다.하지만 이제는 서양 문명의 형성에서 아시아의 역할, 또 아시아의 시각에서 서양 문명을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럽 형성 과정에서 아시아의 역할(Asia in the making of Europe)’입니다. 이제는 우리 눈으로 서양의 것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고 우리가 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작업이 21세기의 중요한 작업이 될 거라고 봅니다.제가 이제까지 공부하고 학생들 가르치면서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비단 간다라미술뿐만 아니라 미술사학, 또는 인문학 연구에서 어떻게 서양인들과 서양어의 헤게모니를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지난 20~30년간 제 가장 큰 주제였음을 몇 년 전부터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방향에서 어떤 식으로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가, 제게 남은 시간 동안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이걸로 마칩니다.<질의 응답>-간다라 미술에 사람들이 왜 매료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교수님은 왜 간다라 미술을 연구하게 됐지요?저는 간다라 미술에 매료된 건 아니구요, (웃음) 원래 저는 불교미술에서 인도와 중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쓰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어려운 문제죠. 인도와 동아시아 관계에서 불교의 인식과 번역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미술의 문제와 어떻게 상응하는 변화를 보일까 그런 걸 쓰고 싶었어요. 박사 학위 논문은 들어가서 나오기 쉬운 걸 써야 하는데, 자칫 진짜로 거기 들어갔으면 못 나올 뻔했죠. (웃음)제가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세미나에서 불상의 기원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인도의 민족주의적 학자인 쿠마라스와미라는 사람의 글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일종의 맞수로 생각했던 푸셰의 글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해 글을 쓰게 됐는데, 제 지도 교수가 그걸 보더니 제게 간다라 미술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그게 발단이었어요. 거창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제 지도교수는 인도미술 전문가였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을 함께 공부한다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했고, 인도만 하되 간다라가 좋지 않겠느냐고 권한 거죠. 저는 간다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주로 간다라에 대해 글을 써 왔습니다만, 간다라 전문가라기보다는 기원전후부터 300~400년의 인도 불교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제가 주로 하는 건 인도와 지중해 세계나 서양과의 외부 관계가 아니고, 영어로 말하자면 ‘internal operation’, 내부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연구합니다. 그걸 불교사와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이 제가 주로 쓰는 글의 주제입니다. 그 밖에 간다라 미술의 시각적 특징이라든가, 그 연장으로 감식에 대한 문제 같은 것도 다루고 있습니다.간다라 불상 연구에서 큰 문제 중 하나는 가짜가 엄청나게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써보려는 글이 요즘 국제 경매에 나오는 가짜들에 관한 거예요. 소장자나 미술상들 생각하면 좀 위험하긴 하지만, 동료가 한번 써보라고 해서 말이지요. 더 큰 문제는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 새로운 위조를 시도하면서 그 작품이 연구자의 논문에까지 소개되는 경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문제는 써야겠다 싶은 거지요.-간다라 미술이 우리나라 불상에는 별 영향을 안 줬다고 말씀하셨는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다 영향을 줬다고 나옵니다. 제가 역사 교사인데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요?모든 말이 그렇듯이 간다라라는 말이나 어휘에 우리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지요. 마치 간다라에 뭔가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해요. 그러면 불교 미술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같고.(웃음)불상을 처음 만든 곳은 간다라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거기에서 여러 유형이 창안됐어요. 손을 뺨에 대는 반가사유상이라든가. 그 점에서는 간다라가 불교 미술의 원류라고 할 수 있고, 모든 불상이 간다라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어요.하지만 ‘영향’이라고 할 때는 어느 정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분명하게 있을 때 그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연관성이라고 한다면 간다라보다는 직접적으로 당나라 불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불상은 간다라가 아닌 갠지스 중류의 불교 미술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불상이 간다라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헬레니즘,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이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영웅을 형상화한 것이 영향을 줘서 처음으로 불교에서 불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인가요?아쇼카의 전설적인 전기가 있어요. 거기에 우파굽타라는 승려가 나옵니다. 부처가 죽은 뒤에 법을 전한 사람인데, 어느 날 설법을 하는데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이 있어요. 마왕이 변한 거였어요. 마왕이 자꾸 방해하니까 우파굽타가 시체 셋을 갖다 붙여요. 뱀과 개, 사람. 마왕은 그것이 안 떨어지니까 여러 신한테 사정을 하다가 결국 우파굽타한테 갑니다.우파굽타가 이런 이야길 합니다. 나는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싶은데 본 적이 없다. 너는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부처님 형상으로 한 번만 바꿔 나타나 봐라. 그러면 시체를 떼줄 거라고 했어요. 그러자 마왕이 "내가 변하더라도 절대 나한테 절을 하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해요.하지만 우파굽타가 그 변한 모습을 보고선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고 말아요. 마왕이 이래서 되겠느냐 하니까, 우파굽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 너한테 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한테 절한 거다. 사람들이 흙이나 금속이나 나무로 불상을 만들지만, 사실은 거기에 절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한테 절하는 것"이라고 해요.그 이야기가 왜 거기에 나오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건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그 형상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게 될 만한 힘을 갖게 된다는 거죠.그런 열망이 있음에도, 여러 불교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합니다. 형상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해요. 후대 불교에서 많이 읽은 금강경에서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가 석가모니 부처는 신체적인 특징으로서, 즉 가시적인 몸으로서 볼 수 없다는 거예요.이걸 다 극복하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거지요. 부처를 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간다라 쪽은 그걸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리스 사람들이 들어와서 신전도 만들고 화폐에 조각도 하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불상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그에 비해 인도 본토에서 간다라와 비슷한 시기에 처음 불상을 만든 마투라에서는 부처상을 만들면서도 ‘부처’가 아닌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절에 가는 여성을 보살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이라고 불렸어요. 그러다가 마투라에서도 간다라식 불상을 도입하면서 그때부터 비로소 부처라고 불렀어요.간다라 사람들은 불상 제작을 더 편하고(casual)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불상을 보는 태도 역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간다라 불상은 우리처럼 불당에 모셔서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덕, 복을 얻기 위해 만든 거였어요. 절하기 위해 한 곳에 모셔둔 것이 아니라, 봉헌된 많은 불상을 쇼윈도 같은 감들에 넣어 줄지어 세웠다는 말이지요.불상으로 부처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사람들이 해결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불상 안에 사리, 부처의 유골을 넣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부처를 특별하게 만들고, 그저 돌덩이가 아닌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로 만드는 거지요.-요즘 인문학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이 높은데요. 혼자 외롭게 공부를 하시면서 일반인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거라는 신념이나 믿음 같은 게 있나요? 인문학을 하려는 일반인에게 어떤 도움의 말씀을 해줄 수 있으신지요?글쎄요, 요즘은 인문학이 힐링을 해주고 위로를 해준다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일반 대중에게 교양을 높여 주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는 인문학도 있겠지요. 제가 하는 인문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학자 중에는 500명이 읽을 책을 쓰는 사람도 있고, 5만명이 읽을 책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은 500명이 읽을 좋은 책이 많이 있어야, 그런 책을 토대로 해서 5만명이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쓰는 일도 가능하겠지요.저는 우리 인문학에 좀 부족한 것이 세계적으로 지식 창출의 최전선에 서서 500명이 읽을 책을 쓴다는 각오로 치열하게 연구하는 전문가적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되기보다 우선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저는 500명이 읽을 좋은 책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런 종류의 인문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정교한 의자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장인의 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의자를 아주 정확히 만들기 위해서 애쓰지요.인문학에도 흥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요. 외롭지 않으냐고 하셨는데, 저는 제가 쓰는 글들을 통해 세계의 불교학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제가 다루는 시대는 불교사적으로 매우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변화가 많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많은 문제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습니다.그런데 뭐랄까, 인문학의 결론은 고정된 게 아니거든요. 인문학자들의 글은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해석이 결코 고정된 것이 될 수가 없어요. 결론을 이 지점에서 내릴 수 있고 저 지점에서 내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것이 유동적입니다.저 자신도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시시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보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죠. 이번에 제가 쓴 논문 하나는 한 10년쯤 전에 쓴 걸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전과는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고는 독자들에게 어느 쪽이 맞을지 판단해 보라고 썼어요.국제 학계의 동료는 제가 오래전에 쓴 어떤 글에 대해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어떤 문제를 보고 답하는 데는 여러 지점이 있는데, 나는 내가 가진 지점이 유용할 것 같아서 그 지점을 계속 추구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구도 게임과 같은 면이 있지요.제 결론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념을 지니기보다, 세계를 보는 우리 시각과 생각의 유동성을 염두에 두다 보니 저의 학문적 세계는 흥미롭지만 단단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랄까요. 아무래도 불변의 신념에 차서 회의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어떤 것을 계속 끌고 가는 원동력에서 어려운 점은 있겠지요. 이상입니다. 긴 이야기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주형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2년부터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간다라 미술 전문가다. 버클리대 누마타 불교학 초빙교수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한국어 저서로 ‘간다라 미술’(2003년 초판, 2015년 개정판),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2004), ‘인도의 불교 미술’(2006) 등이 있다. 영문 저서도 다수 있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03/2015070303415.html​
  • 2015-06-27
    ▲'부자 언니' 유수진은 “남의 말을 잘 듣는 성향을 타고난 여성이 남성보다 돈 모으기 쉽다”고 말한다. /유수진 제공“남자들은 차근차근 재테크해서 언제 부자 되느냐는 식이에요. 주식 한 방, 큰 사업 하나로 금방 대박 날 테니까, 찌질하게 한 달에 얼마씩 아껴 모으고 이런 것 하지 마, 하는 식이죠. 반면에 여성들은 남의 말을 잘 들어요. 본인 생각에 확신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꼭 물어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지구력이 있어요. 매일매일, 한 달이면 한 달. 열심히 전략을 세워서 ‘찌질하게’ 해 나가는 걸 힘들어하지 않아요. 그런 특성이 지금의 경제 상황에는 더 잘 들어맞는 재테크 전략이란 얘기지요.대한민국에선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로만 부자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어요. ‘인생 한 방’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일 때 가능하던 얘기지요. 두자릿수 성장률을 올리고, 누구나 열심히 살면 한 방 노릴 수 있던 그때.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주변에 자산관리사는 많은데 다들 부자만 만나려고 하더군요. 부자가 돼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자산관리사인데, 왜 부자들만 쫓아다니지? 그래서 결심했죠. 제가 앞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을 만나서 부자 되는 법을 알려주는 자산관리사가 되기로.”단정하게 드라이한 까만 머리에 딱 부러지는 말투,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첫인상은 매섭기까지 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업계에서는 ‘부자 언니’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유수진(40) 루비스톤 대표. 고객의 90% 이상이 20, 30대 미혼 여성이다.일찍이 생명보험사에 입사해 30대에 이미 ‘6억 연봉’을 받는 스타 자산관리사로 이름을 날렸다. 2013년엔 직접 ‘루비스톤’이라는 자산관리전문 회사까지 차렸다.이번엔 11년 동안 쌓아온 자산관리 노하우를 담은 책을 냈다. ‘부자언니 부자특강’.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지난 8일 낮 서울 강남구 역삼동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어떻게 해서 자산관리사가 됐나요?원래 전공은 환경학이었어요.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 환경이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갑자기 제가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어요. 우선 식약청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월 80만원을 받았어요. 그걸로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어요. 취미로 하던 살사댄스 강사도 했고, 영어 문제를 내는 아르바이트도 했어요.‘쓰리 잡’을 뛰는데도 답이 안 나오더군요. 그래서 외국 식품업체로 이직해 식품을 한국으로 통관하는 업무와 마케팅 업무를 함께 맡아 1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가 2005년 삼성생명에서 자산관리사 제안을 해와 이직하게 됐어요. -그 전에 금융권 경험은 없었는데 어떻게 그런 제안이 들어왔지요?식약청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제가 종신보험을 찾아 가입했어요. 월급이 80만원 나오는데 매달 8만원씩 보험금을 냈지요. 제가 우리 집 가장인데, 혹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까 싶어서 가입한 거였어요. 담당 설계사가 그걸 기특하게 봤다고 하시더군요.그러다 삼성생명이 서울에서 여성 전문 자산관리 조직을 만들고 일할 사람을 찾던 중에, 제 담당 설계사가 “내 고객 중에 이런 사람 있는데 야무지고 똑똑하니 좋을 것 같다”면서 추천한 거지요.-전혀 몰랐던 분야인데 어떻게 일할 생각을 했나요?사실 처음 제안 받았을 때 기분이 좋았다곤 할 수 없어요. 물론 돈을 제대로 벌려면 금융권에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보험 설계사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스카웃하러 오신 담당자가 거의 6개월을 설득하는 거예요. 그냥 보험 설계사가 아니라, 삼성생명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자산관리’ 조직이란 점을 강조했어요.결정적인 것은 결국 ‘돈을 벌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식품업계가 다른 업계에 비해 급여가 짠 편이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이직에 대한 고민도 많았어요. 내 수입을 단번에 늘리지 않으면 인생의 판을 바꾸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그러던 중에 저를 설득하러 오신 분이 제게 자기 월급 통장을 보여줬어요. 한 달에 1000만원 넘게 들어온 급여 내역이 찍혀 있더군요. 아, 그 정도 벌면 내 상황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때 이직을 결심했지요. 세상에 어차피 평생 가는 일이란 게 없지만 자산관리사란 직업은 평생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처음부터 젊은 미혼여성을 타깃으로 잡았나요?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저에 대한 분석을 먼저 했어요. 짧지만 마케팅을 했던 사람이니까, ‘나’란 상품이 이 시장에서 어떻게 해야 잘 팔릴지 먼저 분석했어요. 제 외모가 어때요? 그렇게 감성적으로 보이진 않죠? (웃음) 말투도 딱딱 떨어져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편이지요. 그 다음, 내적인 나만의 장점은 뭔지 따져봤어요. 생각해 보니 20, 30대 미혼 여성과 가장 말이 잘 통하겠다 싶더군요. 비슷한 세대니까.그 중에서도 미혼을 겨냥한 것은 제가 기혼이 아니다 보니, 기혼 여성과는 공감대를 이루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2030 미혼 여성 시장이란 답이 나오더군요. 더구나 남성은 말도 잘 안 통할 뿐더러 남 얘기도 잘 안 들어요.(웃음) 저도 남성 고객을 만나는 봤어요. 대부분 저를 우습게 보더군요. 젊은 여자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뭐라고 하나 보자는 식이었어요. “너보다는 내가 잘 안다”는 투였어요. 관심이 있어서 분명히 계약이 성사될 단계까지 갔는데도 굳이 “나중에 다시 봅시다” 라고 한다거나.그런 남성 고객들을 보고 나니 결심이 확고하게 서더군요. 아, 남성은 만나지 말아야겠다. 물론 제 선입견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자산관리사로 택하고 말고 할 권리가 있듯이, 자산관리사인 저도 ‘고객을 고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2030 직장인 미혼 여성은 객관적으로 자산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제가 그랬으니까요. 그렇게 목표 시장을 정했고, 다음으로는 어떤 상품을 팔지를 분석했어요.저는 보험설계사보다는 자산관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자산을 아무리 잘 관리해둬도 아프거나 사고가 나면 자산을 팔아서 병원비로 써요.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분들 자산이 꾸준히 수익을 내면서도 위험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는 순서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병원비를 내고도 일정 수준의 자산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니까.그렇게 0순위를 위험 관리(리스크 매니지먼트)로 잡고, 그 위에다 자산 설계를 올리자는 생각을 하고, 제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공부를 하고 또 했어요. 그 뒤로 고객을 만나기 시작했지요. 고객과 전화할 때부터 직접 만나 상담할 때까지 제 이야기가 하나로 일관되게 이어지도록 했어요. 그게 설득력을 발휘했어요.-입사해서 그렇게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보통 입사하면 한 달 정도 신입사원 교육을 시켜요. 그 때 공부하고 고민해서 결정한 일들이에요. -짧은 기간에 많은 고민과 결심을 했군요.저는 물러설 곳이 없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 일에서 성공 못하면 가족 생계가 위험했어요. 어떻게든 잘해야만 했어요. 또 원래 보험회사의 교육 시스템이 그런 게 있어요. 입사 직후 한 달 동안 신입 교육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이런 걸 요구해요. “네 일에 대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답을 찾아오라.”이 일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이어 나가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썼지요. 매일 아침 7시 출근, 오후 11시 퇴근을 반복했어요. 한 달을 전쟁처럼 지낸 뒤 얻어낸 답이었어요. 다행히 제대로 기초를 잡아주신 지점장님을 만나서 차별화된, 소위 ‘빡센’ 교육을 받았지요. 그 덕분에 독특한 정체성을 잡고 잘 해나갈 수 있었어요. -여성이 남성보다 돈 모으기 쉽다고 했던데, 왜 그런가요?제가 미혼 남성이나 고객의 남편들을 만나본 바로는 그래요. 별로 돈 모으는 데에 관심이 없어요. 차근차근 재테크해서 언제 부자 되느냐는 식이에요. 주식 한 방, 큰 사업 하나로 금방 대박 날테니까, 찌질하게 한 달에 얼마씩 아껴 모으고 이런 것 하지마, 하는 식이죠. 남성들은 길 찾을 때도 직접 지도 들고, 혼자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나요? 다른 사람 이야기 듣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있어요. 이렇게 남의 말 안 듣고, 다른 사람이 주는 정보에 닫힌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되겠나 싶었어요.대한민국에선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로 부자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어요. ‘인생 한 방’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일 때 가능하던 얘기지요. 두 자릿수 성장률을 올리고, 누구나 열심히 살면 한 방 노릴 수 있던 그 때.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반면에 여성들은 남의 말을 잘 들어요. 본인 생각에 확신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꼭 물어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지구력이 있어요. 매일매일, 한 달이면 한 달. 열심히 전략을 세워서 ‘찌질하게’ 해 나가는 걸 힘들어하지 않아요. 그런 특성이 지금의 경제 상황에는 더 잘 들어맞는 재테크 전략이란 얘기지요.그러니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굳이 없는 시간과 에너지를 쓰느니, 차라리 그들과 결혼할 여자들을 잘 가르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어차피 여자들이 돈 관리하고, 아이 낳아 기르면 아이들에게도 경제 관념을 길러줄 것 아니예요? 그러면 그 효과는 결국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2030 미혼여성이야말로 가장 핵심에 있는 집단이라 생각한 거지요. (웃음)-다들 종잣돈이라면 1억원을 이야기하더군요. 왜 그렇지요?예전에 말한 1억원과 제가 말한 1억원의 의미는 조금 달라요. 예전에 말하던 1억원은 ‘집 살 수 있는 돈’이라는 의미였어요. 주식을 한다면, 삼성전자 주식처럼 블루칩을 살 수 있는 돈이라는 뜻이고. 제가 말하는 1억원의 의미는 돈이 돈을 벌어오는 최소 단위라는 뜻이에요.예를 들어 1억원을 종잣돈으로 해서 20% 정도의 수익을 낸다고 쳐요. 20%는 주식이나 펀드로 충분히 낼 수 있는 수익이거든요. 1500만~2000만원 정도 수익이 나와요. 웬만한 신입사원 연봉이죠. 놀아도 돈을 버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죠. 만약 제가 미혼이라면 맞벌이 효과가 나는 거고, 맞벌이 부부라면 세 사람이 버는 셈이죠.그러다가 부인이 아이 낳고 휴직을 하면? 무급휴가를 받더라도 둘이 버는 셈이구요. 이런 식으로, 1억원 이상 종잣돈을 갖고 있다면 인생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때에도 선택의 폭이 넓어져요. 그래서 저는 최소 1억원을 모으라고 하는 거지요. -이야기가 아주 체계적입니다. 그런 건 어떻게 깨달았죠?저는 금융은 글로 배우면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금융계에 수많은 자격증이 있고 학자도 수없이 많아요. 하지만 그분들이 실제 자산을 불려주나요? 실전과 이론은 달라요. 연애도 마찬가지잖아요? 글로는 배울 수가 없고,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있지요. 직접 부딪치고 경험해서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해요.저는 다행히도 실용 지식을 먼저 공부했어요. 금융이나 경제 관련 전공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자산관리사가 되려고 결심한 직후 “내가 고객일 때 어떤 게 제일 궁금했지?” 하는 점부터 공부했어요. 청약이란 게 뭔지,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떤 절차로 진행해야 하는지. 아파트 분양 절차는 어떻고 재개발은 어떻게 되는지, 부동산에선 어떤 업무를 보는지, 은행에선 어떤 상담을 받고 증권회사에선 뭘 상담 받는지. 이런 걸 직접 하나하나 다 다니면서 배웠어요. 거기에 이론 지식을 함께 쌓았지요. 그렇게 해서 고객이 볼 땐, 자신들이 궁금했던 부분을 묻지 않아도 가르쳐주는, 그런 자산관리사가 된 거죠. 그것도 굉장히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비전공자인 제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이해하다 보니, 다른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게 된 거지요. 그러자 고객들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개를 많이 해줬어요. 금융 비전공자였던 게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된 셈이죠.▲ 2030여성에게 ‘부자되는 방법’ 알려주는 ‘부자언니’로 불리는 유수진 루비스톤 대표 / 주완중 기자-그래도 금융 공부에 도움 준 선생님은 없었나요?운 좋게 만난 자산가 멘토(mentor)가 있어요.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던 2008년에 만났어요. 이 분을 만난 뒤 실제 부자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사고로 자산을 굴리는지, 금융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자산을 관리하는지 실제로 보게 됐어요. 지금까지도 늘 연락하며 지내요. 이번에도 메르스 문제가 터졌잖아요? 그럴 땐 바로 연락이 와요.“사스(SARS)에 대해 얼마나 공부했니? 홍콩에서 당시 사스가 몇 개월이나 지속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주식시장은 어떻게 움직였고 외국계 자금의 흐름은 어떻게 됐는지 공부해서 와. 나랑 토론해 보자.” 이런 식으로.제가 그동안 본 부자들은 각자 필살기가 있어요. 부동산, 해외 채권, 주식, 어떤 분은 아예 사업만 해요. 그 중에서 이 분은 아예 자기 노하우를 이론으로 정형화한 분이에요. 제가 그 이론을 익히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설명해 주셨어요. 그 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역사와 심리와 철학을 모두 공부해야만 세상을 읽을 수가 있다. 역사는 사람의 심리고, 사람의 심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하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거다.”그 어른 뵙고서 이론도 업그레이드가 됐는데, 실제로 부자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도 봤어요. 이 부자들은 신년회나 송년회 때 꼭 한 번씩 모여요. 그 때 이야기 나누는 걸 들어보면, 제 또래 2030 여자들 과는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요. 아, 이게 부자와 일반인의 생각 차이구나 싶지요. 생각이 차이가 나니까, 부(富)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다, 부의 DNA 자체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걸 중간에서 전달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먼저 이 분들의 패턴과 노하우를 나름대로 검증해요. 그리고 2030 여자들이 해볼 수 있는, 적용 가능한 방법으로 걸러서 전달하는 거지요. 이런 구조를 갖추게 된 게 2008~2009년이었어요. 그런 뒤로 ‘부자되는 방법’이랄까, 그런 걸 관통하는 원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부자 멘토를 만난 게 발전의 계기가 된 거지요. -부자와 일반 월급쟁이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다른가요? 너무너무 달라요. 월급쟁이처럼 아껴쓰고 적금 넣고 예금해서는 부자가 못 돼요. 그나마 아껴쓰는 분은 습관이 좋은 분에 속해요. 하지만 이분들은 정보가 없어요. 나름 재테크에 관심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이것저것 인터넷으로 찾고 공부했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습득한 지식을 갖고 고집을 피워요. 하지만 그건 절대 정답이 아니거든요.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뒤진 정보예요. 진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지식인’ 같은 곳에 댓글을 못 달아요. 최근에 저도 잡지에 칼럼을 썼지만, 밤잠 줄여가며 어렵게 한 번 겨우 쓴 거라서 이제는 그만두기로 했어요. 전문가들은 그렇게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 카페에 실시간 댓글을 달아줄 수가 없어요.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보고서는 공부를 했다고 믿으면, 결국 수업료를 물 수밖에 없어요. 아껴쓰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라면,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하고서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된다 안된다는 걸 구분할 수 있는 기초 경제지식은 있는 상태에서 정보를 찾았으면 좋겠어요.안 그러면 ‘2015년 주목할 만한 금융 상품’ 같은 곳에 혹해서 물리게 되지요. 스스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금융상품을 권할 때 "그래, 이건 나한테 필요하다" 혹은 "필요 없어"를 구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상품을 선택하란 얘기예요. 아예 아껴 쓰는 습관도 없는 분은 더 문제지요. 인생 뭐 있나, 어차피 부자 안 될 건데 하는 이런 분들. 마음 속으로는 나도 부자 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어요. 그래서 로또도 한 번 사 보지요. 수중에 돈 생기면 복권 사서 긁어요. 이런 분들은 이미 머릿속에 이런 사고가 있어요. “나는 돈 모아봤자 부자 안 된다” 하는 거.재테크를 하긴 하는데, 그냥 ‘지금보단 낫겠지’란 생각으로 해요. 또 이런 생각도 해요. “내가 아무리 지금 아끼고 재테크 해봤자 별 소용 없다. 차라리 지금 젊고 예쁠 때 날 위해서 투자하고 내가 행복한 데 쓰자.” 사람들이 저성장 때문에 희망을 버렸어요. 중산층이면 평생 중산층, 서민층이면 서민층, 선을 긋고 계실 거예요. “내가 왜 나이들어 잘 살기 위해, 오늘 먹고 싶은 아메리카노를 지금 참아야 하죠”라는 가수의 말이 왜 그리 인기였을까?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테니 오늘의 나에 집중하고 내가 행복한 것에 집중하자는 것 아니겠어요?하지만 그렇게 쓸 수 있을 때 쓰자 하면서도, 맘 한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은 있어요. 이렇게 써도 될까. 그러면 이렇게 결심해요. "그래, 올해까지만 쓰고 내년부터 돈 모으자!" 이런 분들은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먼저 품어야 지출을 줄이고 아끼는 습관을 만들 수 있어요. -부자가 되는 원리라는 건 뭔가요?이미 우리가 다 아는 거예요. 아끼고 모으고 종잣돈 만들어서 금융 공부해서 제대로 투자해야 부자가 될 수 있지요. 세부 전략은 또 각각 세워야 해요. 무엇보다 종잣돈 1억원을 만들어야 해요. 어떻게 만들까? 먼저 내가 왜 아껴야 하는지 이유를 찾고, 단계별로 종잣돈을 모아야 해요. 1억원을 만들고 나면 금융 공부는 어떻게 할까. 자본주의를 공부하고, 돈의 역사를 공부하고, 은행 시스템을 알고, 경기변동 사이클은 왜 존재하는지 공부해요. 왜 10년에 한 번 위기가 찾아오는지 알고, 그 때마다 내 돈은 어느 위치에 가 있어야 하는지 파악하는 거지요. 그리고 맞는 위치에 돈을 갖다 놔야만 평균 수익률이 15% 정도는 나올 수 있어요. 그 뒤엔 ‘로드맵’을 한 번 그려보는 거예요. 내가 매년 15% 수익률로 가면 내 인생의 로드맵에서 언제 얼마 정도의 수익을 달성하는지 계산할 수 있어요. 그렇게 그려보고 나면 안 믿기던 것도 희망을 품게 돼요. 이렇게 하면 내 나이 50살 되기 전에 건물을 살 수 있겠네? 그럼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이죠.-부자가 되는 희망을 먼저 가지라고 했습니다. 왜 부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세요?자본주의에선 부자가 안 되면 돈 때문에 힘이 듭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요. “저는 큰 욕심 없구요, 그냥 집 한 채, 차 한 대. 사람들한테 빚 없이 아이 교육 시키면 좋겠고 노후 풍족하게 보내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는 게 부자예요. 그런 생활을 평범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된 생각이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평범하다'고 하는 사람의 시나리오를 볼까요? 대학은 대출을 받아 다니고 졸업합니다. 졸업생 10명 중 4명이 취업하는데 그것도 비정규직이예요. 결혼할 때까지 겨우 학자금 대출을 갚아요. 그러고 나면 돈이 없어요. 결혼하고 싶은데 남자친구가 돈이 없고 남자친구 아빠도 돈이 없다? 그러면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시작해요. 그걸 겨우 갚고 나면 아이가 태어나요. 아이가 더 크기 전에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해요. 주택담보대출로. 그러면 둘째가 태어나요. 그러면 직장생활 병행이 어려워서 남편이 외벌이가 돼요.남편이 250만원씩 벌어오는데 주택담보대출 1억5000만원 받았으니 원리금 상환하는 3년차부터 매달 120만원씩 들어가요. 나머지 130만원으로 식구 4명이 어떻게 살지요? 이 때부터 계속 마이너스 인생이예요. 아이들 컸을 때 또 빚내서 학교 가야 하고, 아이들 결혼한다고 하면 그나마 그 빚더미 속에서 집 한 채 있는 걸 반으로 쪼개서 집 해주고. 노후는 어쩌나? 이게 평범한 사람들 인생이지요. 아까 말한 건 평범한 게 아니라 부자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묻지요. 뭐, 꼭 돈돈 하면서 살아야 하나요.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대로 살고 싶으면 돈돈 하면서 살아야 해요. 돈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지 돈 자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생활을 영위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돈 하면서 사는 게 싫다면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이런 ‘부자 컨설팅’을 하면 젊은 사람이 그렇게 돈을 밝히느냐는 식의 반응은 없던가요?그런 시선이 있었어요. 그냥 무시했어요. 이 일은 신념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제 동기는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주변 자산관리사들 보니까 다들 부자만 만나려고 하더군요. 부자가 되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자산관리사인데 왜들 부자들만 쫓아다니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역할을 맡기로 한 거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부자 되는 법을 알려주는 자산관리사로 살면 정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나더러 이 일을 하라고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살도록 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자산관리사라는 직업이 기본적으로 돈이 있는 사람 더 벌게 해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요. 우리 사회의 자산관리사에 대한 정의부터 새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방송에 나가고 이런저런 활동을 벌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예요. 부자보다, 빚이 있는 사람이 자산관리사를 더 만나야 해요. 대출 상환 계획부터 만들어야 하니까요.부자들은 자산관리사가 옆에서 해줄 게 별로 없어요. 비위나 맞춰드리는 거죠. 부자들은 이미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정해져 있어요. "보험 상품 중에 확정금리 제일 높은 것 목록으로 뽑아와" 하면 저희가 그거 뽑아서 들고 오는 식이예요.이런 분들 절세 플랜이라도 짜 드리면 “그래, 너 참 열심히 산다. 내가 너 뭐 도와주면 되겠니?” 하세요. 보람이 안 느껴져요. 과연 내 존재가 이 사람에게 도움을 준 걸까. 이 사람은 내가 자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자가 돼야 할 사람 옆에서 일을 해보니, 옆에서 부자가 되는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보게 됐어요. 이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자산을 불려가는 과정들. 그렇게 하면서 굉장히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게 돼요.이런 고객은 생활에 조그마한 변화라도 있으면 바로 연락을 줘요. 모든 게 다 돈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의 인생을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 이야기로 이 사람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걸 보니까, 그것만큼 보람찬 일이 없는 거죠.-좋은 부자는 어떤 걸까요?우리가 부자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리면 좋겠어요. 그동안 생각해 온 부자는 나쁜 방법으로 돈 번 부자들이예요. 정치권에 뒷돈을 대 주고 정보를 빨리 얻어서 벼락부자가 됐다거나, 기업인으로 살면서 정치권에서 밀어준 정경유착 부자라거나.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말 멋진 부자도 많아요. 이런 분은 부자가 된 뒤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쭉 해요. 이런 멋진 부자는 내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부자가 돼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요.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예요. 그래서 부자가 된 뒤에도 꾸준히 하는 일이 있고 목표가 있는 거죠.얼마 전 방송에 나온 이야기인데, 방송인 송해 선생님이 엄청난 현금 부자라고 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차 한 대 안 사고, 검소한 서민 아파트에 사시는 걸로 유명해요. 그래서 여쭤봤대요.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돈 쟁여 두시냐고. 그랬더니 “내가 죽은 뒤에 문화 예술인을 위한 회관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대요.우리가 부자를 목표로 하되, 그 후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이유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돈 많은 사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부자. 그렇게 되면 부자에 대한 거부감도 줄지 않을까요?-재테크는 기술이 아닌 습관이라고 썼더군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일상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면, 아무리 수익을 내도 수중의 돈을 다 털어서 쓰게 돼 있어요. 그래서 재테크란 일상이며 습관이란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거죠. 그래서 마음 다스리는 게 중요해요. 저는 상담을 하다가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상담을 더 진행하지 않아요. 본인의 심리 상태를 먼저 점검하고 오시라고 권해 드리죠.-젊은 여성에게 쓸데없이 ‘힐링’하며 돈 쓰지 말라고 쓰셨던데요.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방법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전에 춤을 췄고 지금은 수행을 해요. 수행을 하게 된 이유는 직접적으로 마음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예요. 저 자신이 힘들단 생각도 참 많이 했어요. 제가 보니까, 2030 여성 10명 가운데 3명은 스스로 마음 조절을 못해요. 오전엔 맑았다가 오후엔 흐렸다가. 별 말 안했는데도 울기도 해요. 본인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문제를 스스로 알고는 있어요. 이곳에 와서 이야기하다가 직면하게 되고, 그걸 보면 답답하니까 또 우는 거죠. 이런 건 대단히 큰 문제다 싶었죠. 그래서 심리학 공부를 할까, 철학 공부를 할까 하다가 만난 게 불교식 사띠(Sati, 念) 수행이었어요. 2010년부터 공부했죠.-카페 회원이나 고객에게 감사일지 쓰기, ‘to do list’ 같은 생활 지침도 주더군요.상담을 하면서 느꼈어요. 고객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게 먼저라는 것. 처음 고객을 만나거나. 제 카페 가입 회원을 보면 정말 평범한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선글라스는 어떤 브랜드인지, 진주 귀걸이는 어디 제품인지.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저도 예전엔 그런 것에 다 관심 가져봤는데, 그런 게 인생을 멋있게 만들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까요. 그래서 누구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이 회사를 2013년에 열었는데, 고객 대상 인문학 강좌부터 시작했어요. -왜 인문학 강좌였죠?제 멘토들 중에 프랑스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외국어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지낸 분이 있어요. 이 분께 2006년부터 그림 배우고 인문학 강의를 들었어요. 그러면서 느낀 게, 금융이란 게 그냥 돈이 아니라 인생이고, 결국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걸 느끼고 나니까, 금융과 재테크, 인문학을 어떻게 하면 결합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걸 회원이나 고객들한테 직접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백날 말로 해봤자 잔소리밖에 안 되니까, 저의 멘토를 직접 만나도록 해줬어요.강의 효과가 바로 나타나진 않았어요. 그런데 2~3일 지나고 나니 후기가 올라오더군요. 뭔가가 머리에 들어온다고. 생각해보면 이런 말이었구나,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말들을 했어요. 자기들끼리 미술관도 갔다 오고. 하지만 점점 서로 일정이 어긋나고 하면서 수강 인원이 줄었어요. 그래서 강의보다 뭔가 근본적으로 해볼만한 방법이 없을까 찾게 됐죠. 어느 날 팔과 다리 없이 세계를 누비는 희망전도사로 유명한 닉 부이치치가 나온 TV 프로그램을 보게 됐어요. 그의 말을 듣다가, 감사 일지 쓰기를 떠올렸어요. 함께 하는 ‘to do list’는 원래 제가 해오던 스케줄 관리 방법이었어요. 해야 할 것들을 버릇처럼 써두고, 작은 목표를 조금씩 달성하는 게 습관으로 배어 있었어요. 작은 성공들이 습관이 된 거지요. 그러고 나니 어떤 일에 도전해도 별로 겁이 안 나요. 감사일지를 쓰면 내가 가진 장점을 스스로 찾고, 깨닫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죠. ‘to do list’를 통해서는 성취감을 맛봐요. 두 가지를 하면서 자존감을 키우는 거지요. -실제로 효과가 있던가요?언니, 선글라스 어떤 브랜드 쓰나요, 이런 질문 하던 회원들이 이제는 남자친구 사귀고, 공연 보러 다녀요. 자기들끼리 모여 공부하고 다큐멘터리 봐요. 유니클로 후리스를 사서 입어요. 싸서 입는 게 아니예요. 유니클로에 원단을 납품하는 일신방직 주주니까 입는 거죠. 그 정도로 야무진 친구들로 변했어요. 그런 걸 볼 때마다 뿌듯해요. 이렇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을 지금껏 아무도 안 돌봤구나 싶지요.-자산관리사라기보다 동생들 키우는 것 같군요.맞아요. 요즘은 저도 모르던 중고책 파는 법 같은 정보까지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짠순이 정보’에 올리고 있어요. (웃음) 요즘은 회원들한테 “이제 너네 하산해도 되겠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직 멀었다”고 징징대요. (웃음)-부자가 된 뒤에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제가 상담한 ‘우리 애들’이 각자 꿈을 이룬 뒤에 함께 쉴 수 있는 쉼터를 짓는 게 꿈이에요. 아까 말한, 제가 수행하는 곳은 ‘수행처’를 운영해요. 3000만원만 내면, 평생 지낼 수 있는 곳이죠. 저도 그런 곳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이끈 사람들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죠. 물질적인 편안함이 아닌,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부자 언니’ 유수진 2005년 삼성생명 전략채널본부 VIP 자산관리조직 Wealth Life Tech에 입사해 자산관리사로 근무. ‘부자가 되는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라이프 컨설팅'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 현재 자산관리 전문회사 ‘루비스톤’ 대표이면서 회원 900여명의 자산을 관리. 2030 여성만 가입할 수 있는 재테크 전문 네이버 카페 ‘부자언니 유수진의 부자 재테크’ 운영자이기도 하다. 현재 이 카페 회원 수는 1만5000여명에 이른다. ◆유수진씨가 추천하는 ‘금융 문맹 탈출’ 단계별 교재들1단계: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돈의 역사, 금융 시스템 발전 계기, 자본주의의 이면을 공부한다. 진실을 알아야 더 이상 속지 않을 수 있다.”2단계: 경기변동“주식이건 채권이건 부동산이건 기타 등등이건, 투자를 하려면 무조건 경기변동 사이클상 지금이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3단계: 금융 지식“기본적인 금융 상식과 경제 용어들을 배운다. 방대한 양이니 경제 신문을 읽으면서, 책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해가며 공부해라.”4단계: 투자하는 방법“실전 투자를 위해 공부한다. 경제의 흐름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가치 있는 기업을 고르고 장기 투자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방법 등 투자 전반을 아우르는 책이어야 한다.”5단계: 글로벌 투자“경제권이 통합된 시대에 글로벌 투자는 필수다. 세계로 눈을 돌려라. 외국인 자금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세계 부자들의 돈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투자 여행도 추천한다. 투자 여행을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쓰고 바르는지, 현지 상황은 어떤지를 보고 오라. 그 나라에서 어떤 기업이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처럼 될 회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길 것이다.”“이렇게 공부한다고 경제 신문 읽는 것을 스킵하면 안 된다. 가장 신속하게 이슈와 트렌드를 볼 수 있는 것은 뉴스나 신문 기사니까.”  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5/2015062502573.html​
  • 2015-06-20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복될 수가 없어요. 반복된다면 예측이 가능할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 못 하는 거지요. 다만 지난 역사 경험을 들여다보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고 사회는 대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남들보다 감을 더 잘 잡든지 혹은 약간 실수를 덜 하는 정도는 될 것입니다.그러니까 역사가는 예측이 아니라 해석을 할 뿐입니다. 그런 경험이 다른 전문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역사가의 영역이고... 지정학적 향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제 역사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활동적 지식인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가끔은 피끓는 애국열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사실 저도 우국충정 그득한 애국자이거든요.”“아무도 모르겠지만 피에르 쟈냉(Pierre Jeannin)이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유럽 거의 모든 언어로 원사료를 꼼꼼하게 읽고 바위처럼 단단한 논문들을 쓰기로 (학술지 편집자들 사이에) 유명했습니다. 그 분이 제 지도교수였습니다. 어찌나 엄한지 지금도 일 잘 안 풀리면 그 분이 꿈에 나와 뭐라고 야단치시는데 이런 악몽을 꾸고 나면 깰 때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저보고 그런 식으로 살라고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또 오실까 두렵군요. 워낙 세상에 좋은 역사가들이 많아 이런 분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눈에 안 띄더라도 탁월한 성과들을 누적해 가는 역사가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처음 인터뷰를 청했을 때 그는 “말보다 글로 하자”고 했다. 역사학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평생 사료를 찾아 읽고 해석하고 기록을 남기는 데 단련된 사람 아닌가. 주경철(55)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얘기다. 어느 곳에선가 그는 역사, 역사학, 역사가를 두고 “인간의 내밀한 심층에 대해 살펴보고 사회에 대해 해석해 주는 우리 정신의 무당 같은 존재”(‘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서문)라고 한 적이 있다. 지난달 출간된 그의 신간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산처럼)를 보고, 이 타고난 무당의 내밀한 심층은 어떤 것인지 헤엄쳐 들어가보기로 했다.그가 바란 대로 이메일로 문답을 먼저 주고받은 후, 만나서 사진도 찍고 대화로 보완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니까 아래 인터뷰는 서면으로 오간 내용과 직접 만나 대화한 것을 합치고 다듬은 것이다. 낮춤말로 오간 이메일의 답변은 무척이나 경쾌했는데, 경어체로 바꿔놓고 보니 그때의 글맛(북유럽 소설가를 연상시키는 유머가 섞인 말투가 주는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그 점은 아쉽다. 그만큼 그는 진지하면서도 대중적인 이야기 방식에도 능하고 근접해 있는 학자군에 속한다.-철든 후의 지적(知的) 여정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학부는 경제학과였는데 서양사로 옮기셨지요?입학할 때 경제학을 전공한 것은 별다른 고민 없이 한 일입니다. 성적을 맞춰 간 결과이고 부모님 바라시는 데에 따른 측면이 다분합니다. 그런데 학과 공부를 막상 시작해 보니 제가 이 쪽에는 큰 소질이 없고 흥미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수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 하지도 못 하고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과목을 듣다가 역사학이 제게는 훨씬 구미가 당긴다고 느꼈습니다. 역시나 나는 말로 풀고 글로 쓰는 게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거 참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맞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하는 게 최선입니다.-대학 때 데모하다가 잡혀서 징계도 당했습니다. 그때는 어떤 생각에서였나요? 지금은 이른바 보수 신문에 칼럼도 씁니다. 그 사이 생각에 변화가 있나요?1970-80년대에 극단적인 생각을 안 해본 대학생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신 정부와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이런 정권에 항의하는 것은 따로 증명이 필요없는 공리에 속하는 일이지요. 다만 데모를 하다가 잡히고 학교에서 ‘짤리는’ 정도까지 나가느냐 하는 것은 좀 별개인데, 평소 너무나도 조용했던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달려 나갔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입니다.지금은 소위 보수 신문에도 쓰고, 소위 진보 신문에도 씁니다. 저는 사실 보수 진보 운운하는 그런 식의 구분을 소름 돋게 싫어하고, 그런 천박한 기준으로 사람 판단하는 걸 혐오합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양쪽 모두에 글을 쓰는 게 나의 드넓은 기상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후배들이 저를 보수에 편드는 인간으로 치고 아주 안타깝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곰곰 생각해 보니 제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달리 실제의 나는 요즘 ‘정치적’ 기준에서 보수에 가까운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니 진보니 가르는 기준이 19세기적이고 올드(old)한 것이라서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저는 전혀 별개의 기준에서 아주아주 진보적이고자 합니다.-선생님이 생각하는 별개의 기준이란 어떤 것입니까?그것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 꿈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진보 인사들의 꿈(혹은 전망)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너무 희미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저 역시 명료하고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계획 같은 것은 없습니다.다만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승리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는 식의 투박한 스토리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행복함을 느끼고,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을 갖추고, 정서적으로 충일한 느낌을 갖도록 사는 사회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삶을 예술처럼 사는 곳이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학생들에게 ‘최초의 기억’이 뭔지 묻는다고 하더군요.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말이지요. 선생님 자신은 어떤 기억이 떠오르나요?정처 없이 걸어가는 것! 근데 그건 실제 있었던 일입니이다. 어릴 적 저를 돈암동에서 잃어버렸는데 광교에서 발견되어 미아보호소에서 낮잠을 자다가 찾아왔다고 합니다.-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지금 바라던 곳에 와있다고 생각하십니까?정확히 잘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었던 것은 교수나 교사였으니까요.-번역을 포함해 저술량이 상당합니다. 그 동안 몇 권이나 내셨지요?따로 세어보지 않았는데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보니 스무 권이 넘는 것 같군요. 대중용 풀어쓰기 책과 전문 서적이 반반 정도 되는 듯합니다.-일과 중 상당 부분이 읽기와 쓰기일 것 같습니다. 일과 수칙이 있나요?‘Eile mit Weile(여유를 가지고 서둘러라)’라는 우아한 수칙이 있었는데, 요즘 주변에서 하도 여러 종류의 잡다한 일들을 시켜서, 말하자면 ‘투구 밸런스’가 깨져 슬럼프에 빠진 상태입니다. 최근에 여유를 가지고 게으르게 살아갔는데, 방학 때 다시 원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학술서 외에도 대중적인 글도 많이 쓰시고 책으로도 묶어 냈습니다. 반면에 교수들 중에는 연구나 학술서에만 매진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글쓰기와 저술에 관한 나름의 원칙이나 철학이 있나요?원칙과 철학을 따지기 전에 숙제가 너무 많아서 그거 처리 처분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번역도 부탁받고, 여러 사람 함께 하자고 하면 쫄랑 좇아가고, 토막 글 쓴 거 모아보자고 하면 그렇게 하고, 도대체 내 생각대로 할 여지가 없었어요.그런 가운데 일부 책들, 예컨대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특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같은 책들은 내가 쓰고 싶어서 기획했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칙이나 철학이라기보다 ‘요령’만 있는 셈인데, 그건 대학원에서 교육하고, 그 내용이 소화되면 학부 교양 과목에서 교육하고, 거기에서 또 소화되면 글로 쓰기, 이런 식입니다.-올 상반기 인문학 책이 소설보다 더 많이 팔렸습니다. 요즘 인문학 열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사이비가 너무 판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인문학자들은 동냥하고 다니고 있고, 사회는 인문학자들을 악용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제가 정년 퇴임할 즈음 인문학이 완전 결딴나는 꼴을 보고 은퇴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도 듭니다. 남이 도와주는 ‘열기’에 기대기 전에 인문학이 스스로 갱신해서 사회에 신선한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고고한 척하면서 어느 한 옛날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든지, 진보적인 척하면서 허황한 이데올로기의 ‘슈퍼 전파자’가 되고 있다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도 눈을 떠서 그런 내용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과거 역사는 주로 학교 수업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았습니다. 이제는 TV 퓨전사극, 영화,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접합니다. 지식인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보십니까?요즘만 그런 게 아니라 여태 계속 그래왔습니다. 리처드 3세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은 셰익스피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은 톨스토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대중들의 역사 ‘인식’은 넓은 의미의 문학에 의해 지배됩니다. 요즘은 그게 사극과 영화로 더 확산되었습니다.그런데 그것이 때로 너무 왜곡되고 정치적 영향 하에 들어가고 흔히는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전문 역사가들의 ‘연구’가 그런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전문 연구자들의 노력과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 양자가 다 튼튼하고 동시에 서로 교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양자가 다 부실하고 양자간 관계도 미약해 보입니다.-서양사학자이면서 대중 교양 역사서도 많이 써오셨습니다. 그런 중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일본의 역사 교양서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를 강하게 비판하신 적이 있지요? (주 교수는 신입생들이 감명깊게 읽은 역사서로 ‘로마인 이야기’를 손꼽은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어떤 책인지 꼼꼼히 리뷰한 적이 있다.)역사서의 경우 저자가 전문 역사학자인 것과 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해주는 경우, 이 두 가지로 크게 나뉩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경우 후자의 영역이 크게 발달해 있는데, 시오노 나나미도 그 분야 저자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람도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습니다. 박사 학위가 있고, 거기서 출발해 글을 잘 쓰든지 해서 독자를 확보하는 식으로 갑니다.하지만 우리 경우에는 전문 영역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중 역사서 작가 영역이 부재하다시피했어요. 그 틈새를 시오노 나나미가 때맞춰 들어와서 아주 매력적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거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로서는 비판적 안목이 미처 갖춰지기 전에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돌풍을 일으키고 사람들이 빠져들어 굉장히 좋게 받아들여졌는데, 전문 역사가 입장에서 보자면 헛점도 많습니다.그분이 글을 유려하고 재미있게 쓰는데 그 재미있는 부분들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해석하기 어렵거나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때는 짐짓 격언조로 ‘남자는 이런 법이다’ ‘지배자는 이런 법’이라는 식으로 풀어 넘깁니다.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런 부분이 대개는 증거 부족인 경우입니다. 증거가 부족할 때 오히려 화려한 언사를 통해 비약을 해버리곤 하지요.전문 연구자들이 그렇게 멋있게 못 쓰는 것은 필력 탓도 없지 않겠지만, 실제로는 사실 관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증거가 없는데 단정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반면 시오노 나나미 같은 저자는 그런 꼼꼼함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지식을 보기 좋게 이야기로 엮는 과정에서 도약해서 상상도 해보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하니 멋있어 보일 수밖에요.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부실한 측면들이 있습니다.나아가 더 큰 문제는 그 부실함을 문학적 표현으로 이야기를 만드는데 그게 결코 중립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일본 극우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거기서 사관의 문제가 제기되는 거지요. 제가 볼 때는 일본 여류 작가가 필생의 업적으로 로마를 연구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자기 생각에 로마를 일본의 근원으로서 찾고 있는 거지요.과도한 일반화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에는 자신들이 또다른 유럽이라는 기묘한 사상 같은 게 있습니다. 원류로서 유럽사가 있고 원류의 원류로서 로마제국이 있는데 그 로마가 붕괴된 후 되살리려 했던 게 르네상스이고, 그걸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것이 대영제국, 그 영향을 받은 게 일본이라는 생각이지요. 그런 것이 시오노 나나미에게 영향을 준 계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가 로마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 강력한 지배 체제에 의한 식민지적인 제국 지배를 굉장히 미화합니다.-대동아공영권의 논리가 떠오르는군요.그것과 일대일 대응하는 것은 위험할지 모르겠지만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실제로 시오노 나나미는 일제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는 글을 써서 구설에 올랐지요.그런 게 로마를 이야기할 때는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시사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곧바로 드러나지요. 사람들이 그의 위안부 발언 나왔을 때 “실망했다” “그럴 줄 몰랐다”고들 했는데 “그럴 줄 몰랐다”는 게 잘못이지요. 극우의 논리로 로마제국을 보고 비교했는데.-선생님의 주저는 여전히 ‘대항해 시대’로 봐야 하나요? 그 뒤에 다른 책들도 나왔습니다만.지금까지는 ‘대항해 시대’가 주저입니다. 빨리 다음 책을 써서 주저를 다른 것으로 대고 싶군요.-또 다른 역저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있습니다. 한 인물을 집중 조명한 책으로는 유일한데요 어떻게 쓰시게 되셨죠?‘대항해 시대’를 낼 때 연구를 하면서 여러 영역을 다뤘어요. 각각의 영역이 독자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는 점에도 주목했지요. 군사 문제가 화폐와 연결되고 화폐는 또 다른 문제와 연결되는 식으로. 그 중 하나 빠진 게 바로 심성이었습니다.물질 측면만이 아니라, 도대체 당시 유럽인이 밖으로 팽창해 나갈 때 그 밑에 깔린 심성은 뭘까 궁금했지요. 그것에 대해서도 약간의 연구를 진행하다가 별개의 장(章)으로 하기엔 모자라서 남겨뒀는데, 보충 작업으로 유럽 팽창의 심성 이걸로 출발했다가 콜럼버스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발견한 겁니다.알고 보면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굉장히 종교적인 인물라는 거예요. 당시 유럽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그토록 공격적이었던가 하는 심성에 대한 해명과도 맥이 닿는 것 같았어요. 이것만 별개로 좀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었던 거지요.-상업적인 동기에서 출항한 세속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뜻인가요?그게 미묘해요. 세속적인 것과 거의 수도사적 신비주의 요소가 함께 있어요.-흔히 근대 유럽의 팽창을 설명할 때 종교적 이유도 같이 이야기하지 않나요. 군인과 상인과 선교사가 함께 들어갔다고 말이지요.그 이전에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집단적인 의식 혹은 무의식 차원의 공격적 심성의 흐름 속에 콜럼버스가 있었다는 것이 저의 초점입니다. 당시에도 어느 문명이나 밖으로 나갈 개연성은 다 있었는데 왜 하필 유럽에서 돌파가 이뤄졌나. 왜 죽음을 무릅쓰고까지 밖으로 나가려 했던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어요. 돈을 벌려고 나갔다? 그런 필요성은 어디나 다 있었어요.그보다 더 강렬한 어떤 무엇이 있었고, 그것이 종교사적 의미에서 해석 가능하다는 거지요. 콜럼버스의 견지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로 반드시 가야 하는, 인류 구원 차원의 아시아 여행이었지요. 이런 게 중세말 근대초 유럽 문명의 역동적인 심성이었다는 겁니다.-박사 학위 논문부터가 서유럽과 동유럽의 무역이었지요. 지금도 문명 교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계기나 이유가 있습니까?무역과 교류가 제가 생각하는 큰 틀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전쟁 아니면 전도 아니면 교역이다. 막연하지만 문화와 경제 사이의 관계의 역사를 살펴보고 싶습니다.-역사학 개론 같은 것을 보면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앞세운 쪽과 ‘해석된 역사(사관)’를 강조하는 쪽이 대립해온 것 같습니다.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실증주의 대 해석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어느 입장에 가까운 편인가요? 요즘 학계의 견해를 소개해 주셔도 좋습니다.사학 개론에서 말하는 게 정말 맞다는 것을 박사 논문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최대한 많은 자료를 구해 그 토대 위에서 쓰려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 줄거리를 만들려고 하다 보면 의외로 문학적 측면이 강합니다. ‘history’ 가 곧 ‘story’입니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라는 건 세상에 없다, 해석된 역사라는 게 진리입니다.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두고 양자가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오류가 시작됩니다. 최대한 많은 사실을 확보해야 상상이 가능한 겁니다. 제 책 중 가장 잘 지은 제목이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인데, 역사는 상상된 기억이고 기억이란 과거에 대한 매우 꼼꼼한 상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한국 근현대사를 두고 학자들 간에도 좌우 대립이 심합니다. 학교 교육에까지 갈등이 번지곤 합니다. 역사는 현재 권력의 투쟁사라는 말도 합니다만, 외국 학계도 그런가요? 서양사학자로서 한국 근현대사 논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당연히 외국에서도 역사 해석을 두고 심하게 다툽니다. 다만 다투는 양상이 진지하고도 의연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다투는 양상은 수준이 낮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문제인데, 그건 공부해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먼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 후 그것을 학문적으로 포장하려는 경향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최근 학계나 출판계를 보면, 서양의 우위는 우연적이거나 한시적인 것이었고 이제 동양 혹은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그런 견해에 동의합니다. 초장기의 역사에서 보면 서구의 지배적 지위는 ‘고작’ 300년 남짓입니다. 그 전에는 중국이 세계 문명의 탑(top)이었던 때가 있고, 아랍 문명이 최고의 학문 수준을 자랑하던 때가 있고, 몽골이 최대의 파워를 가진 때가 있었습니다. 잭 구디(Jack Goody)의 ‘유라시아의 기적(Eurasian Miracle)’에서는 이렇게 큰 범위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류해온 게 인류 역사라고 봅니다. ‘유럽의 기적’은 그 중 가장 최근 것입니다.그런데 유럽의 성취를 ‘우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에 조심해야 합니다. 영어로 ‘accidental하다’(아무 원인 없이 일어난 일로서 일종의 로또 당첨이라고 보는 것. 이런 건 학문적 주장도 아니다)는 게 아니라, ‘contingent하다’(초역사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고 그 시대의 인과관계의 연쇄로 인해 일어났다는 주장)는 겁니다. 21세기가 중국의 패권 시대로 가는지를 역사학자한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주소를 잘못 알고 있는 분들입니다.-하지만 국가나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세계 패권의 향배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역사가의 역할이나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역사가의 답은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한 차원 뒤로 물러선 답을 제공할 뿐이지요.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복될 수가 없어요. 반복된다면 예측이 가능할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 못 하는 거지요.다만 지난 역사 경험을 들여다보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고 사회는 대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남들보다 감을 더 잘 잡든지 혹은 약간 실수를 덜 하는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가는 예측이 아니라 해석을 할 뿐입니다. 그런 경험이 다른 전문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역사가의 영역이고..지정학적 향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제 역사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활동적 지식인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가끔은 피끓는 애국열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사실 저도 우국충정 그득한 애국자이거든요!-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일종의 빅데이터를 활용한 경제사를 다뤘지요. 그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이 일상의 관심사와 멀어졌다, 18세기 문학이 중요하게 다룬 절박한 현실(불평등)을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선생님도 문학이나 영화 같은 것들을 수업이나 저술에 많이 끌어안는 편인데요. 피케티의 책이나 그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피케티의 책은 사기만 하고 안 읽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묻지 않는 게 신사들 간 에티켓입니다! 그런데 설명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숫자와 문학이 만날 때 제일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문학적 진실에서 출발하여 과연 그게 맞는지 한번 세어보고 그 결과를 다시 문학적 진실로 만들어가는 게 아름다운 학문이라고 봅니다.-최근 빅데이터 열풍이 학계로도 향하는 것 같습니다. ‘빅데이터 인문학’이란 책도 나왔지요. 디지털 혁명이 역사학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심대한 영향을 줄 겁니다. 빅데이터의 분석이 지금껏 우리가 파악하지 못 하는 정보를 주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빅데이터 분석이 기존 역사학의 분석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긴밀한 도움을 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정보는 잔뜩 발굴해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될 터인데, 그게 바로 역사학이 해 오던 일입니다.-외신을 보면 빅데이터 인문학의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소개되기도 합니다. 국내는 어떤 시도나 움직임들이 있는지요?역사학자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물리학자의 시범을 본 일이 있을 뿐입니다. 가령, 지난 과거의 책 혹은 신문 자료들이 다 모아진다면, 어느 시대에 어떤 문제들이 가장 중요했고,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지적-정서적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동시에 사람들의 심성까지 아주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인류 역사를 빅히스토리로 접근한 ‘사피엔스(Sapiens)라는 신간이 최근 여러 나라에서 화제입니다.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히브루대 교수는 역사의 유용성이 ‘과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얼마나 우연적인 결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역사학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앞에서 인류사는 ‘contingent하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맥락과 통한다고 봅니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유발 하라리가 먼저 한 겁니다.) 현재 결과가 우연적이라는 것은 지난 과거에서 지금과는 다른 방향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거지요. 당면했을 때에는 우연이지만 지나고 보니 필연인 겁니다.이걸 거꾸로 풀면 필연인 듯 보이는 게 사실은 우연의 연쇄라는 말도 됩니다. 이런 분석과 종합을 하다 보면 인간은 그만큼 더 지혜롭게 됩니다. 내가 얻은 작은 지혜들을 함께 나누는 게 역사(학)입니다. 우리의 사고 폭을 넓히고 당장의 기근에 매달려 몸부림치지 않을 수 있게 해 줍니다.-역사학을 가르치면서 무엇을 가장 강조하십니까? 요즘 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뛰어난 점과 아쉬운 점이라면?우리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틀을 크게 갖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학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도와줍니다. 가능하다면, 하고 싶은 것 맘껏 누리며 살아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원전 3000년 파피루스에도 “요즘 애들은 부모와 선생에게 대든다. 말세인가 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도 헛말입니다. 요즘 학생들 보면 아무도 대들지 않아요. 아마 그러면 교수가 학점을 안 줄까 봐 그러는 것 같아요. 모두 겁먹고 초라하게 사는 것 같아요. (진짜 그런지는 저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군요) 공부는 우리가 학생일 때보다 잘하는 것 같은데, 더 나은 인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예를 들면, 영어 강독 때 학생들 보면 원어민 발음으로 굴려서 읽은 다음에는 해석을 못 합니다. 저는 콩글리시 발음이었지만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을 영어로 읽었습니다. 단, 분노의 포도는 진짜 재밌게 읽었는데, 에덴의 동쪽은 너무 길고 폼만 잡는 것 같아서 그 시간에 다른 거나 읽었을 걸 그랬지요.-밖에서 인문학 열기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대학내 인문학과 사정은 좋지 않지요? ‘인구론(인문계 졸업생 90%가 논다)’ 이야기도 합니다만, 학문을 이어가려는 제자는 있습니까?그래도 끊기지 않을 정도는 있습니다. 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양사 공부라는 게 역사 연구가 기본으로 갖춰야 할 게 많은 데다, 외국사이다 보니 외국어로 된 사료를 봐야 하고 외국의 기본 연구를 많이 봐야 하니까 공부 압력이 큽니다. 선생들이 볼 때는 어학이 떨어진다든지 하면 성에 안 차는 거죠. 석사를 4, 5년씩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렇게 힘들게 공부해도 교수 자리가 적다 보니, 공부 마치고 나서도 어떤 때는 갈 곳이 아예 한 곳도 없기도 합니다. 그러니 공부를 계속하라는 권유를 차마 대놓고는 못합니다. 정말 탐나는 학생이 있으면 쓱 돌려서 “소질 있어 보인다”고 하는 정도지요.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셨는데, 국내에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이 드물지는 않지요?제가 갈 무렵엔 그쪽으로 많이들 갔습니다. -요즘 우리 학계에서 ‘미국 유학파 헤게모니’ 논란이 새롭게 제기됐는데요, 어떤가요?저희 학과의 경우 여태까지 미국 의존도가 낮았는데 요즘에는 거꾸로 그렇게 돼가는 것 같아요. 프랑스사를 공부하러 미국에 가는 경우도 있고. 미국 학계의 지배력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도 프랑스에서 학위를 했지만, 미국에 1년 연구하러 나가 보니까 그런 게 보이더군요. 유럽에서 뭔가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있으면 미국의 좋은 대학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불러들입니다.그렇게 1년이나 몇 달 단기 코스로라도 데려와서는 그 사람 연구한 것을 강도 높게 짜내서는 흡수하고 흡수하고 합니다. 유럽 학자들도 이미 주류는 미국 쪽에 가 있다고 보니까 자기가 어느 단계에 올라섰다 싶으면 미국 학계나 출판계에서 한번 인정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그런 식으로 미국의 영향력은 최근 들어 더 커지는 것 같아요.-미국의 소프트파워는 최소한 건재하다고 볼 수 있다는 말씀 같군요?네. 유럽 쪽이 많이 쇠퇴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나마 많이 버텼던 쪽이 인문학, 문사철(文史哲) 정도인데 그마저 조금씩 상실해가는 느낌이 듭니다.-미국의 지식 헤게모니는 영어의 패권과도 관계 있지 않나 싶습니다.니얼 퍼거슨(하버드대 역사학 교수)이 그런 얘길 하잖아요. 미국의 최대 수출품이 영어라고. 맞는 말 같아요. 모든 사람이 영어라고 하는 그 세계로 들어가야 뭔가 글로벌하게 인정받고 한다는 건 굉장한 거지요.-서울대에서 자유전공학부제 실험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고, 지금까지 자평한다면 어땠습니까? 계획은?대학에 입학한 다음에는 스스로 공부해 보고 자신의 자질과 성향을 파악한 다음 전공을 선택할 자유/특권이 있습니다. 심지어 전공을 만들어 볼 수도 있습니다.(학생설계전공 – 자신이 교내의 과목들을 골라서 커리큘럼 짜고 지도교수 정하고 논문 쓰면 된다) 매우 이상적입니다.그런 정도라면 서울대 역사상 최고의 성공이라고 판단합니다.(투입 대 성과 비율로 볼 때; 천 명의 학생을 7명의 교수가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은 기적에 가깝지요) 그런 성과를 계속 키우는 게 좋을지, 통폐합하고 딴 것 또 시작할지는 제 소관이 아니라 학교 본부 소관입니다. 저는 초창기 멤버로 봉사했고 지금은 떠났습니다.-최근 실험 학교인 건명원에도 참여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것 같나요?아직 판단하기에 이른 감이 있습니다. 이건 최소한 첫 회 나오고, 그들이 어떤 인재로 사회에 봉사할지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역사학자로서 좋아하는 역사가가 있나요?아무도 모르겠지만 피에르 쟈냉(Pierre Jeannin)이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유럽 거의 모든 언어로 원사료를 꼼꼼하게 읽고 바위처럼 단단한 논문들을 쓰기로 (학술지 편집자들 사이에) 유명했습니다. 그 분이 제 지도교수였습니다. 어찌나 엄한지 지금도 일 잘 안 풀리면 그 분이 꿈에 나와서 뭐라고 야단치시는데 이런 악몽을 꾸고 나면 깰 때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저보고 그런 식으로 살라고 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또 오실까 두렵군요. 워낙 세상에 좋은 역사가들이 많아 이런 분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눈에 안 띄더라도 탁월한 성과들을 누적해 가는 역사가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아날학파(1929년 프랑스에서 창간된 ‘경제사회사연보’에서 시작된 역사학파)의 대가인 페르낭 브로델의 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번역에 많은 힘을 쏟아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그 책은 대학원 때 원서로 처음 읽었어요. 그때가 우리나라에서 소위 아날학파에 대한 인기가 제일 높았던 때라 그걸 읽어야 된다고 믿었지요. 학위 마치고 오니 그걸 번역하자고 해서 두말 않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낸 큰 책입니다. 자잘한 책을 읽는 재미도 있겠지만, 이런 큰 저서를 한번 완주해 보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역사학자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아무래도 자기가 본 것들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인데, 저는 브로델식의 자본주의 설명에 대해 전적인 동의는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역사의 한 단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16,17,18세기에 점차 형성되어서 20, 21세기까지 강화된 어떤 체제이지요. 이 역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멸할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갈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근대에 와서는 가장 큰 의미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체제이기도 하고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못 되고 상층부라는 겁니다. 그 밑에 인간의 일상생활이 있고, 그 위에는 시장경제가 있고, 그 위를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거든요.그 상위 체제가 서구처럼 자본주의일수도 있고 반대로 중국 같은 황제 체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중국의 경우 시장경제까지는 유럽과 같지만 자본주의로는 못 나가고 정치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체제로 갔다는 이야긴데 이런 식의 통찰이 재미있습니다.-앞서 국내 좌우 대립 문제도 언급하셨습니다만, 국내에서 자본주의는 80년대 이래 정의나 인간성에 반하는 사회 질서의 대명사로 인식되곤 합니다.저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의 원흉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얽매는 그 모든 것의 종합으로서 자본주의라는 것을 상정해 놓고 거기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이고 쉬운 해결책 같아요. 그게 그렇게 간단한 실체가 아닌데.그렇다고 해서 어느 분의 말씀처럼 그게 오히려 정의라는 것도 이상한 논리이고, 그렇다고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것의 원흉으로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로델이 얘기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형성된 것이고,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최상위 체제이고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피케티만 해도 ‘21세기 자본’ 서문에서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신은 공산권 붕괴 이후 성년이 된 세대로서 “반(反)자본주의의 의례적인 하지만 게의른 수사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만큼의 예방접종은 받았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썼더군요. 오히려 지금 이 체제가 이대로 지속가능한지를 묻는다는 거지요. 그가 보기엔 지금의 불평등 심화는 자본주의를 위협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의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국내의 경우엔 종종 정권 비판이 체제 비판과 뒤섞이는 경향이 있습니다.사실 자본주의 이야기가 나오면 언어를 더듬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경우 문제 설정 자체가 자본주의가 선하냐 아니냐로 치닫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자본주의는 악하고, 악한 것은 자본주의’ 식으로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자면야 저도 당연히 반대지요.이 체제가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그것이 심해지는 것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거야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요.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선한 사회인가의 문제는 갈래가 다른 문제입니다. 자칫 이야기를 하면 오해를 살까봐 답 자체를 꺼리게 됩니다.-같은 기업인을 자본가(capitalist)로 보느냐 사업가(entrepreneur)로 보느냐의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가들을 보면, 돈벌이보다 사명(mission)을 앞세웁니다. 세상을 바꾸거나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창업에 나섰고 그것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겠다는 거지요.콜럼버스 책을 쓸 때 그 얘길 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세속주의와 함께 가요. 지극한 종교심, 그러니까 세계의 지금 단계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요소와 굉장히 세속적인 요소, 즉 그 하나님의 사업을 스페인이 해야 하고 그걸 내게 줬고 따라서 나는 계급적으로도 상승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병존합니다. 수도사이면서 기업가인 거지요. 지금 보면 굉장히 이상한데 그게 중세말 근대초 유럽인의 특징적인 심성이라는 거지요. 아까 말한 기업가 정신도 돈 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를 위해 사업을 벌이는데 그걸 위해서 자본을 끌어오고 수익을 남기는 식으로 두 요소가 같이 가고 뒤섞여 있지요. -아까 콜럼버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 심성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잡스만 해도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에 보면, 인류 전체의 진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아주 영적(spiritual)이지요. 그 정신이 세속의 결정체인 애플 상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묘합니다.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콜럼버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묘사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남다른 점은 집요함입니다. 뭔가 하나를 잡게 되면 쉽게 바꾸는 게 아니라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거지요. 제가 콜롬버스를 이야기하면서 스티브 잡스 같은 데가 있다고도 해요. 자신이 어떤 영감을 받았으며 굉장히 소중한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걸 끈질기게 밀어붙이지요.-잡스 이후 주목받는 혁신 기업가인 일론 머스크(테슬라, 솔라시티, 스페이스엑스 창업자이자 CEO)도 그런 점에서 유사합니다. 그는 민간 우주항공사업을 벌인 이유가 인류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화성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일견 돈키호테 같은데 생각과 의지가 워낙 확고한 데다, 기술적으로 하나둘 실현해가고 있습니다.자본주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면, 자본주의가 그런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 다음에 논의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피드백되는 체제라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여기에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습니다.제가 자본주의를 무작정 옹호한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게 자칫 악덕 기업주나 이런 것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선하든 악하든 그런 걸 다 포함하는 문명 전체의 역사 발전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라는 거지요.-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있습니까?저는 역사 책 추천 같은 건 안 합니다. 편견을 키워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책가게에 직접 가서 두어 시간 투자하면 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토요일 오후는 그런 데 가서 시간 보내는 게 최고지요. 학생들에게 방학 동안 멋진 소설책들 시집들 읽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곁에 두고 되풀이해서 읽는 책이 있나요?-최근 국내에서 눈여겨 보는 학자 국내외 한 분씩(복수라도 좋습니다) 소개해 주시겠습니까?이 두 질문에 뭐라도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없다는 게 새삼 스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정말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군요.-역사학자가 아니었으면 무엇을 했을 것 같으신가요? 학자나 교수라는 직업이 한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어떤가요?회사원이 되어 무역업을 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출장 중에 비행기에서 역사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교수는 천하의 ‘만고땡’인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제가 주 6시간 수업을 한다고 하면, 그 다음에 월급 얼마 받느냐고 묻습니다. 월급 액수를 6으로 나눌 태세입니다. 사실 ‘만고땡’인 건 맞지만, 저 하기 달렸습니다. 저는 머리는 나쁜데 부지런한 편이라 월급 만큼은 할 일 한다고 생각합니다.중요한 건 내가 내 삶을 디자인하며 살아갈 여지가 주어진다는 것, 이건 정말로 흔치 않은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교수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교수로서 뭘 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제 주변의 교수분들 다 나름대로 의미있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남들이 알면 의외라고 생각할 만한 취미나 특기가 있나요?의외로 서예를 했습니다. 그런데 글씨는 하나도 안 늘었습니다. 의외로 술도 잘 마십니다. 이건 취미나 특기는 아니지만....-필생의 사소한 소망과 큰 꿈이 있다면?사소한 소망은 좋은 여행 많이 하는 겁니다. 빈에 가서 멋진 그림도 봤고 코르시카 섬도 가 보았고 프로방스 산골도 돌아다녀 봤습니다. 제 인생에 이런 호사를 누리리라고는 꿈도 못꾸었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어요. 가면 되는 거였습니다.큰 꿈은 이제 없습니다. 중간 정도 꿈이 있다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대로 좋은 책 한두 권 더 쓰는 것입니다.-지금 준비하고 계신 책이 있습니까?여름 장학 동안 두 권 쓰려는 게 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에 관한 것하고 서양 근대사 해설서입니다. 마녀사냥 연구는 어디에 끌려 들어가서 하게 됐는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작업 중입니다.좀 더 큰 주제로는 서양 근대사에 관한 책입니다. 기존 역사들은 학술적이어서 일반인은 읽기가 너무 딱딱한 감이 있습니다. 해설을 해주되 너무 옛날 얘기 말고 최신 연구 성과도 넣어서 써보려고 합니다.-요즘 (학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가장 궁금한 게 뭔가요?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더 미스테리하고 남한 사회가 북한 사회보다 더 미스테리합니다. 그 둘이 어떻게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는지도 미스테리고요. 수십 년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며 결국 진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평생 전쟁을 결국 경험하지 않고 생을 마칠 수도 있는데, 이런 인간은 인류 역사상 아주 드문 행운아들입니다. 수십 년 내에 한반도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주경철 교수1960년 서울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했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빙 연구원으로 있었다. 현재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은 책으로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문화로 읽는 세계사’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대항해시대’ ‘문명과 바다’ ‘문학으로 역사 읽기’ ‘문학 읽기’ ‘히스토리아’ ‘히스토리아 노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있다. 역서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역사와 영화’ ‘유럽의 음식문화’ ‘제국의 몰락’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유토피아’ ‘가차없는 자본주의’ ‘물의 세계사’ 등이 있다.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19/2015061903418.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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