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08-08
    ​​▲ 유품정리사 김새별 바이오해저드 대표/장련성 객원기자“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다. ‘너 때문에, 너 키우느라, 너를 위해서.’ 그럴 바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욕 먹더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낫다. 내가 잘 살아야 남도 도울 수 있으니까.”“유품을 정리할 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내가 없으면 결국 버려져야 할 물건들이다. 지금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건강한 몸으로 살아있을 때 아끼지 말고 충분히 사용하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를 위해 가진 것들을 너무 아끼지 말라.”“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내가 죽은 뒤 세상 한구석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당신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을 상상할 때 무엇이 가장 아쉽고 기억에 남을지 생각해 본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유품정리사. 아직 우리에겐 생소한 직업이다. 세상을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물건, 그 자리를 정리해 주는 직업이다. 가엾을 슬픔의 현장을 생업으로 마주하기란 지난한 일일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이 고독사, 자살, 범죄 사고사와 같은 비운의 현장임에랴. 그런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 김새별(40) 바이오해저드 대표다. 20대 초반 장례지도사로 나선 걸음이 12년 후 유품정리 사업으로 이어졌다. 2007년 창업 후 1000건 이상의 유품 정리와 현장 정리 일을 해 왔다. 9년째다. 그 모질고도 각별한 경험과 거기서 나온 단상을 지난달 책으로 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청림출판)'.자신이 목격한 가슴 아픈 현장, 먹먹했던 사연들을 조심조심 정리했다. 책에다 그가 본 삶과 죽음을 이렇게 적었다.“꽃은 꽃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그저 존재한다. 장미가 아름답고 송충이가 징그러운 것은 우리가 선입견을 갖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 무엇도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지난달 28일 오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갓 제대라도 한 듯 짧은 머리를 한 그는 얼마간 지친 듯했다. 1년 중 가장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는 여름이다. 인터뷰 중에도 전화벨이 수시로 울렸다. 이 순간에도 삶과 죽음은 쉴새없이 교차하고 있다는 신호음 같았다.-유품 정리라는 직업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어떤 일인가요?고인이 살던 공간에 남은 유품을 정리하고, 특수 청소를 하는 일입니다. 고인이 살다 간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이삿짐센터에서 뒷정리를 하는 것 같은 역할입니다.-그런 일을 하는 전문업체가 많나요?2007년 창업할 때에는 우리 회사뿐이었어요. 지금은 부업으로 하는 업체도 여럿 생겨났습니다. 저희는 이제 특수청소 분야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다 보니 아파트에서 골치를 앓는 비둘기 퇴치와 배설물, 세균 청소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주로 맡게 되는 것은 고독사 현장입니다. 현장 정리를 다 하려면 4~5시간은 기본으로 소요되는 힘든 일입니다. 집이 크거나 청소를 완벽하게 하다보면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지요.-책까지 내게 된 이유는 뭐지요?이런 일을 하는 내내 우리 일이 워낙 어두운 일이어서 묻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운 현장에도 여러가지 사연들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 것들이 다같이 묻히고 무시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죽음이란 게 사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접하는 현장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가 ‘무관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죽음을 그저 불쾌하게만 여기고 피하려 드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상황에 대해 한 번쯤은 같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언젠가는 고독한 죽음에 얽힌 따뜻한 사연, 추억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쪽 일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생겼어요. 유품정리사를 소재로 한 영화도 제작됐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내자는 제안도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작년부터 준비해 이번에 책까지 내게 됐습니다. -현장에서 보는 유품들은 어떤 게 있나요?연령 별로 유품 종류가 달라요. 보통 고독사 현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건 라면 봉지와 술병이에요. 그만큼 혼자 보낸 시간, 외로움의 시간이 길었다는 뜻이지요. 또 젊은 사람들 고독사 현장에서는 혼자 끄적였던 일기, 취업 서적이 많이 나옵니다.취업난이나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 흔적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것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는지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 곁에서 이 사람에게 힘이 되어줬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요.-가장 흔한 유품들은 어떤 건가요?액자가 많아요. 고인의 삶이 어땠는지, 가족 관계는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유품이지요. 보통 혼자 사는 분 집에 가면 액자에는 그리움의 대상, 자신이 마음으로 의지하고 싶었던 대상을 담아 놓는 경우가 많아요.어떤 남성의 고독사 현장 정리를 하러 갔더니, 액자에 학사모 쓴 아이들의 대학 졸업사진이 하나씩 담겨 있더군요. 아들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미혼이었고, 조카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았던 거였어요. 어떤 액자에는 고인의 메시지가 들어있기도 하고, 장례비용과 집 문서를 곱게 넣어둔 경우도 있어요. 자식들은 그것도 모른 채 액자에서 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쓰레기로 생각하고 버릴 뻔했지요.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유가족에게 고독사는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쉬쉬하려는 분이 많아요. 고인의 유품 정리와 현장 청소를 ‘처리’ 개념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도 문의 전화를 받으면 “현장에 직접 안 오셔도 저희가 깨끗하게 정리하고, 귀중품은 사진으로 찍어 보여드리고, 소독해서 택배로 따로 보내드립니다”고 하는 게 의례적인 말이 됐어요. 한번은 이런 사례도 있었어요. 고독사한 분이 어느 집에 세 들어 살던 분이었습니다. 그 집주인이 유가족에게 “이분이 집세를 너무 안 주셔서 보증금은 이미 다 까먹었고, 더 받아야 할 월세가 100만원 있다”고 하자, 정말 그 돈만 딱 내고 가버린 거예요. 장례도 치르지 않고 유가족이 사라진 겁니다.물론 그 사람의 사정이 어땠는지는 우린 모르지요. 아마 집 보증금이라도 있으면 장례를 치러주려고 했다가 형편이 안됐거나 했던 모양이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자주 마주하다 보니 그런 현실이 슬픈 거예요. 요즘은 사체 포기 각서를 쓰면 나라에서 장례도 치러주니까, 그런 걸 선택하는 분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연 50~60건은 되는 걸로 압니다. 저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사람들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건을 겪다 보니 이제는 그런 모습들도 담담해졌어요. 그냥, 세상살이가 너무 각박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지요.-기구한 사연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험한 현장들이지만 거기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마저 속사정은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함부로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진작부터 술이나 마시고 소리나 지르더니 저렇게 갈 줄 알았다”는 식입니다.하지만 사실 고인의 사연이 얼마나 깊고 슬픈건지 아무도 몰라요.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술을 마시고, 혼자 방에서 노래를 부른 건지 모르는 거지요.언젠가 고등학생 아들이 엄마를 죽인, 이른바 존속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뉴스에선 아들이 파렴치한 살인범이라고 나왔어요. 하지만 사연이 참 기가 막혀요. 아들이 일등을 못 하면 골프채를 휘두르던 엄마인데, 그날도 한참을 때리고선 “내일 다시 보자”고 한 거예요.아들은 이미 고등학생이었요. 그전까지 힘으로 엄마를 제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계속 맞고 지내다가 폭발한 거지요.어떤 분은 꿈을 향해 나아가다가 돌연사하기도 해요. 그래도 젊은 나이에 돌연사하면 주변 사람들은 막연하게 ‘자살이겠거니’ 하며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곤 합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요?어떤 분은 참 곱게 홀로 가신 여자 분인데, 자신이 미리 장만해 놓은 수의 버선 속에 수표 2500만원을 남겨두고 갔어요. 장례비용으로 남겨 놓은 것 같았어요. 수의는 보통 꽁꽁 싸매져 있는데, 차곡차곡 펼치다 보면 속에 넣어둔 것이 보이게 돼있거든요.가족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 거지요. 정작 가족들은 어머니가 미리 수의를 준비해둔 줄 모르고 새로 사서 시신을 염했어요. 나중에야 그 수의와 안에 든 수표를 발견하고 어머니의 배려에 더 슬퍼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보람을 느낄 때도 있나요?이런 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딸이 현장에 왔는데 너무 참혹해서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아파트 세 동을 소독하라는 요구부터 받았다고 해요. 해충청소업체에 전화해서 소독을 하고, 다른 청소업체를 불러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장을 정리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현장이 너무 끔찍하다며 다 도망갔다는 겁니다.딸이 그렇게 상처 받고서 우리 업체에 연락해왔어요.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 지금 꼭 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시간에 가서 현장을 정리해 드렸어요. 그 분이 펑펑 울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는데, 그때 저도 뭉클하더군요.-좋지 않은 장면들도 적잖을 것 같은데요.어떤 경우엔 가족을 잃은 슬픔에 힘들어하기보다, 저희한테 현장 청소를 맡긴 후에 귀중품이 사라질까 못 미더워하는 분도 굉장히 많아요. 챙길 것을 챙기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슬픔의 감정은 조금도 없이 돈만 밝히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지요.한번은 전기장판 위에서 돌아가신 분이 있었어요. 장판이 마치 불나기 직전처럼 뜨겁더군요. 황급히 전기장판을 걷어냈는데, 그 바닥에 오만원짜리 지폐들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어요. 그때 곁에서 정리 현장을 지켜보던 고인의 아들이 황급히 방을 나가더니 대야를 들고 뛰어 들어왔어요. 허겁지겁 돈을 쓸어 담고는 인사 한 마디 없이 홀연히 사라지더군요. 어떤 자녀는 부모님의 사진이 담긴 액자 속에 있던 돈과 집 문서만 챙기고, 그 사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버리기도 했어요. 그런 분을 워낙 많이 만나다 보니,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대단한 효자 효녀로 보일 지경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가족의 고독사에 대해 위로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나요?그래도 우리에게 도와 달라고 청하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초기만 해도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도 몇 없었고, 계속 도와줘야 할 분들이 보이니까요.-그동안 숱한 비운의 현장을 봐오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말년의 외로움이란 결국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에게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서로에게 더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더 많이 보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사실 우리도 언제 죽을지,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잖아요. 내 말년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자꾸 하게 되지요.사람들은 우리더러 “그런 현장에서 일하면 무섭지 않으냐”고 자주 물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현장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현장이 만들어지는 과정,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이란 게 더 무서워요. 고독사하는 환경을 만든 게 결국 살아있는 사람이니까요.◆김새별 대표가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1.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정리를 습관화하라.처음부터 쓰레기가 쌓이도록 내버려둔 경우는 없다. 세상에 상처받고, 사람에 실망하고, 먹고사는 일에 치여 삶의 의지를 놓을 때 게으름도 함께 찾아온다.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먼지 앉은 가구를 닦고, 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된다. 내가 떠나고 난 자리가 아름다울수록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은 덜어진다.2. 직접 하기 힘든 말은 글로 적어보라.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고민이나 아픔이 있다면, 노트를 마련해 일기처럼 조금씩 적어보는 건 어떨까? 남겨진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보관해 두라. 당신이 떠나고 난 뒤 상실의 고통에 빠져 힘들어할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될 것이다. 3. 중요한 물건은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라.유품 정리를 하다 보면 종종 장롱 아래, 베개 속, 액자 뒷면 등에서 귀중품이나 현금을 발견하곤 한다. 눈에 띄는 곳에 두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 싶어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두는 거다. 그러나 이런 유품은 ‘아차’ 하는 사이 버려질 수 있다. 4. 가족들에게 병을 숨기지 말라.가족들에게 병을 숨기는 일은 짐 대신 죄책감을 얹어주는 일이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잠깐의 짐이 되지만, 병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면 자식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안길 수 있다. 자신의 짐을 다른 가족과 나눠 질 줄 아는 현명함도 필요하다. 5. 가진 것들은 충분히 사용하라. 유품을 정리할 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내가 없으면 결국 버려져야 할 물건들이다. 지금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건강한 몸으로 살아있을 때 아끼지 말고 충분히 사용하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를 위해 가진 것들을 너무 아끼지 말라.6.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다. ‘너 때문에, 너 키우느라, 너를 위해서.’ 그럴 바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욕 먹더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낫다. 내가 잘 살아야 남도 도울 수 있다.7.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라.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내가 죽은 뒤 세상 한구석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나?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을 상상할 때 무엇이 가장 아쉽고 기억에 남을지 생각해 본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07/2015080702843.html​ 
  • 2015-08-04
    2015-08-04 윤예나 조선비즈 기자 “우리의 가장 큰 모토는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에요. 지식을 얻는 게 목적이라면 구글로 검색하면 웬만한 건 다 나와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죠. 배운 걸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내 행복에는 어떻게 적용하고, 세상의 빛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인생 학교입니다.”이렇게 말하는 사람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에 여행 작가, 허핑턴포스트 편집인. 지금은 또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까지 경영한다. 여행을 중심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코칭 회사 손미나앤컴퍼니의 손미나(42) 대표다.그런 그가 올 가을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인생 학교(The School of Life)’와 손잡고 오는 10월 서울에 분교를 열기로 했다.<관련 기사 : 조선비즈 2015. 7.22 알랭 드 보통의 '인생 학교' 10월 이태원에서 개교>‘인생 학교’는 알랭 드 보통이 2008년부터 인문학과 실생활의 접목을 목표로 시작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런던에서 시작해 지금은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호주 멜버른, 브라질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터키 이스탄불,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벨기에 앤트워프 등 8개 도시에 분교를 두고 있다. 서울은 아홉 번째 분교다. <관련 기사 : 조선비즈 2015.6.05 "알랭 드 보통의 '인생 학교'는 이런 곳">지난달 29일 오후, 인생 학교 교실이 될 서울 이태원 손미나앤컴퍼니 본사 1층 카페를 찾았다. 용산구청 뒤 작은 골목에 숨듯 자리 잡은 곳이다.▲ 인생학교 서울의 수업 공간이 될 손미나앤컴퍼니 1층 카페 SSAC 내부 모습. 파란색 벽면과 곳곳에 배치된 노란색 의자, 파라솔이 눈에 띈다./손미나앤컴퍼니 제공개교 두 달여를 앞뒀지만 이미 카페 공간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손 대표로부터 그 동안의 과정과 앞으로 구상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까지.-인생 학교는 어떻게 유치하게 됐나?알랭 드 보통과 인연이 깊다. 그가 2008년 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해 2월에 그와 만났다. 국내 잡지사에서 기획한 사업에 참여하면서 인터뷰를 하게 됐다. 처음 만나서부터 이야기가 너무나 잘 통했다. 내가 그를 인터뷰하러 갔는데, 반대로 내게 질문을 너무 많이 던져서 “아니, 인터뷰는 내가 하러 온 건데 왜 당신이 날 인터뷰 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당시 내가 아나운서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아나운서는 왜 그만뒀느냐” “작가로 전업하니 행복한가” “세계를 돌아다니는 건 어떤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는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서로 삶에 관한 의문에 대해 질문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예정했던 인터뷰 시간을 세 배나 초과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가 이런 이야길 했다.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고, 도서관 하나를 통째로 읽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독서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보니 인생이 더 어렵고, 돈이나 일이나, 여러가지로 세상을 살면서 벌어지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 물어볼 곳도, 물어볼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그런데 인생은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런 걸 가르쳐주는 곳을 만들고 싶다.” 그가 당시 ‘학교’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도 보통과는 계속해서 인연이 닿았다. 서너번 정도 직접 만났고, 트위터, 이메일로 연락을 종종 주고받았다. 그 때마다 서로 넌지시 “인생학교가 한국에도 생기면 참 좋을텐데” 하는 식의 이야기는 나눴다. 한국의 산업화가 워낙 빨리 이뤄지고 급하게 살아가다 보니, 교육부터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질문은 전혀 던지지 못한 채 이 이뤄진다는 데에 공감한 거다. 보통 역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작가여서 관심이 더 많았다. 결국 이 일을 내가 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 손미나앤컴퍼니 1층의 카페 SSAC 외관 전경. 이곳을 리모델링해 인생학교 강의실로 쓸 예정이다./손미나앤컴퍼니 제공-그때부터 먼저 제안을 받은 게 아닌가?그냥 친구한테 하는 말처럼 “너도 한국에 하나 만들어” 하는 식으로 권유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난 내가 작가로 살아갈 거라고 여겼다. 직접 운영하는 데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누군가가 하면 참 좋겠네’ 하는 생각만 했다. 알랭 드 보통이란 사람이 참 독특하다. 철학자이지만, 책장 속의 철학을 전부 삶으로 끌어온다. 서양 철학자인데 우리 마음을 꿰뚫는 이야기를 하고, 남자인데 여자 마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쓴다. 그가 하는 인생 학교가 파리, 암스테르담, 리우데자네이루, 멜버른 등으로 우후죽순 뻗어가는 걸 보면서 ‘그의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내 생각이 바뀐 건 2012년쯤이다. 4~5년에 걸친 유럽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나운서로 10년, 해외에서 4~5년 해서 15년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온 경험을 우리 사회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걸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고 싶었다.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든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일은 없다. 작가가 글을 쓰든, 아나운서가 방송을 하든, 기자가 취재를 하든, 사회에도 헌신하지만 그 일을 통해 자신도 성장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경험을 통해 성장했고, 요리사로 치면 정말 다양하고 독특한 재료를 모아 한국으로 돌아온 거다. 이 재료를 갖고 어떻게 맛있고 재미있는 밥상을 차려서 우리 사회와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걸 고민하면서 만든 게 손미나앤컴퍼니였다. 여행을 통해 인생에 대해 탐구하고 삶에 대한 질문을 나누는 라이프코칭을 하는 회사다.이 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새 소식을 듣게 됐다. 알랭 드 보통의 인생 학교가 그전까진 알음알음으로 분교를 열다가, 그 때부터 공식 공고를 내고 분교 협력사를 모집한다는 얘기였다. 런던에 다른 일로 취재갔던 기자 친구가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면서 “네가 내 친구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네가 하면 참 좋겠던데 지원 안 했어?”하고 물어봤다. 알아보니 다행히 접수 기간이 남았길래, 2013년 10월에 공식 제안서를 만들어서 접수했다. 그 뒤로 몇 번의 과정을 거쳐서 직접 보통과 만나기도 하고 서면으로 우리 철학과 비전을 이야기했고 구체적인 사업 구상도 함께 했다. 결국 보통으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런던까지 찾아와서 나를 만나고 가긴 했는데 너와 함께 하는 게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게 언제쯤인가?작년 여름쯤이다. 다만 세세한 계약 조건을 맞추거나 언제 어떻게 문을 열지, 내 개인 일정과는 어떤 식으로 맞출 수 있을지 논의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좋을지도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영국이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일 처리가 굉장히 느린 편이다. 이메일 몇 개 주고받는 데도 중간에 휴가 떠났다고 해서 답장을 몇 달 걸려 받기도 했다.(웃음) 결국 계약은 올해 초에 맺었다. -국내에도 이런저런 인문학 강좌가 꽤 많다. 인생 학교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기본적으로 강연 수요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유사 인생 학교’도 많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기획하는 인생 학교와 비슷한 건 없더라. 인생 학교는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 가장 큰 모토다. 우리는 학교에서 마치 가분수처럼 지식만 키워서 머리만 자라는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이 시대에 지식은 웬만하면 구글 검색으로 다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배운 걸 어떻게 삶에 적용하고, 내 행복에는 어떻게 적용하며, 그 배움을 통해 어떻게 내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다.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기 위한 것이 바로 감성지능이다.철학자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 너무 더우니까, 시원하게 마실 게 필요해서 아이스 커피를 마신다. 혹은 글을 써야 하는데 글 쓸 종이를 받칠 도구가 필요해서 책상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은 필요에 따라서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태어난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의 결과물이다. 바로 실존이 본질에 앞서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태어난 걸까? 내 본질은 무엇일까? 그 고민을 해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 사회에서 하는 교육을 보면, 그리고 대부분의 인문학 강좌를 보면 더 많은 지식을 어떻게 머리에 넣을 것인지로 되돌아가더라. 인생 학교의 수업은 다르다. 단순히 인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 작품 속에서 이런 주제가 나오고, 셰익스피어 연극은 이런 사상을 다뤘다고 배운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런 주제와 사상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을 때 우리를 어떻게 치유해줄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수업이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거나 답을 해주지 않는다.보통 살면서 우린 이런 질문을 할 기회가 없다. 질문을 함께 고민해주는 대신 “시간 없으니까 성공하려면, 제대로 살려면 이걸 배워” 하는 식으로 가르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 명문대생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나. 자신에 대한 세상의 기대를 떨쳐내지 못해 자살한다고. 우리가 ‘끝’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들 참 똑똑하고 소중한 사람들인데, 우린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지 질문해야 한다. 자동차 좋은 거 사기 위해서?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살기 위해서? 그런 목표는 있는데, 그럼 과연 그 목표가 나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주는가, 그걸 물어볼 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나? 그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인생 학교의 모토는 ‘일상을 위한 좋은 생각들(Good ideas for everday life)’이다. 창의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창의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게 쉽나? 어제까지 창의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살았는데 오늘부터 창의적으로 살자, 이렇게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나도 그랬다. 어릴 때 미국에서 1년 정도 학교 다닐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곳 아이들보다 훨씬 수학도 잘하고 지식도 많고 똑똑했다. 친구들이 나더러 천재라고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질문이 바뀌면 대답을 못했다. 가령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대해서? 나는 그거 다 읽고 공부 다 했기 때문에 사지선다형 문제를 주면 다 풀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작품이 내 삶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거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자친구랑 싸웠는데, 그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방법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결국 대형 서점에 찾아가서 책 찾아봤다. 할 줄 아는 게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웃음) 나부터 이런 삶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나도 런던 인생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고, 그 수업을 들으며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란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등수도 없고, 정해진 규범도 없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회나 국가, 문화라는 틀에 따라 남들이 내게 편협하게 요구하는 기준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내게 제시하는 “성공이나 행복은 이런 거야”라는 편협한 기준을 벗어나서, 나 자신이 삶에 대해 질문하며 돌아보는 그런 장을 제공하고 싶었다. -얼마나 올 걸로 기대하나?구체적으로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말한 취지의 그런 수업을 절실하게 원하는 그룹에게 먼저 소비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더 발휘돼 오랫동안 ‘이런 건 누구한테 묻지?’라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답을 찾으러 오는 그런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개교 소식이 나간 후 반응은 정말 엄청났다. 내가 일하는 허핑턴포스트에서는 기사 조회 수를 알 수 있는데, 이 기사를 하루 만에 50만명이 봤다. 엄청난 관심이다. 뉴스레터 신청자도 하루 만에 3000~4000명이 등록했다. 그만큼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고 있다. -직접 들어 본 인생 학교 강의는 어떤 과목이었나?출장 간 김에 들은 거라 듣고 싶은 걸 골라듣진 못했다. 그래도 런던에서는 ‘파트너를 고르는 현명한 방법’ 강의와 일에 관련된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창의성과 관련된 수업, 관계 맺기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도 수업을 들었는데 내가 네덜란드어를 모르니까 참관 수업 정도였다.(웃음) 분위기가 어떤지 보고, 그쪽 사람들과 이 사업이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보면서 느낀 건, 전 세계적으로 참 잔잔하면서도 강력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인생학교/손미나앤컴퍼니 제공-글로벌 분교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콘텐츠를 공유하기 때문에 분명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나라마다 특성에 맞게 변형돼 있다. 프랑스는 원래 역사적으로 철학을 중시해온 나라이고 남의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영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네덜란드 역시 굉장히 ‘쿨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대학 진학률이 15%밖에 안 될 정도로 자기 주관이 강하다. 그래서 사실 유능한 강사가 온다고 해도 잘 안 먹히고 콧방귀를 뀐다고 하더라.(웃음) 오히려 강사도 평범한 사람이 많고 내용만 군더더기 없이 전달하는 편이었다. 그런 차이들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공통된 추세는 보고 왔다. 파리든 암스테르담이든 런던이든 어디든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철학에 대한 붐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피곤한 거다. 물질주의, 패스트 라이프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사유와 질문에 목말라 있다. 철학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다. 글로벌 분교 사람들과 이메일로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실제로 만나서도 대화했는데, ‘철학’ 단어만 들어가면 전 세계에서 난리가 난다는 말도 하더라.-수강 대상은?아마 강의마다 다르긴 할 거다. 누구나 함께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을 수 있고, 특정 연령대나 상황을 공유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도 있을 수 있다. 젊은 여성의 수요가 가장 많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여성 위주로만 가면 아저씨들이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웃음)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사람들, 커리어 끊긴 주부, 스펙 쌓기만 강요받는 청소년, 대학생까지 다양하게 받을 거다. 공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와도 좋고 30대 직장인, 아이 엄마, 나이와 학력과 모든 걸 다 떠나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장을 열고 싶다. 질문할 용기만 낼 수 있다면 누구든 올 수 있게 문을 열어두겠다. 특히 돈 없고 취직 준비로 힘들어하는 대학생들은 어떻게든 펀딩을 받거나 해서 참여 기회를 열어줄 방법을 찾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대학생에게 힘을 주고 싶다. 그런 식으로 수강 대상을 차츰차츰 넓혀나갈 계획이다. 직장에 묶여서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찾아가는 강의도 생각하고 있다. 아직 온라인 강의를 열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지 않았고, 이야기만 하는 상태다. 정규 수업은 지금 인터뷰하는 이 자리에서 할 거다. 좁아 보일 수 있지만 파리보다는 훨씬 큰 거다. 그리고 특강은 여러 곳에서 할 예정이다. 예술 강의는 미술관, 사진작가 스튜디오에서 하는 식이다. 장소를 제공할 테니 함께 하자고 제안하시는 분이 굉장히 많다. -수강료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나?확정된 게 아니라 구체적인 금액을 밝히긴 어렵다. 대강 이야기 하자면 ‘엄청나게 싸네’ 하는 수준은 아니다. 영국은 유명 강사의 경우 수강료가 100파운드(약 18만원)를 넘기도 하고, 20~60파운드(약 3만~11만원) 사이였다. 그리고 프랑스나 암스테르담도 그보다 약간 낮았다. 아주 싼 가격은 아니다. 그렇지만 강의를 듣고 나면 “아 이 정도 값은 지불할 만하네”하는 정도라고들 한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정도로 책정될 것으로 본다.-정규 강의 정원은?특강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하겠지만, 정규 강의는 25명 이상은 안 받을 생각이다. 그 대신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로 열 번짜리 강의 쿠폰을 발행한다거나, 멤버십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1년짜리 멤버십을 운영한다거나 해서 회원에게 더 많은 특혜를 주는 식이 될 것이다. -인생 학교 학생이 어떤 걸 얻어가길 바라나?강의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아, 정말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한 것처럼 직장 때려치우고 해외로 나가서 몇 년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나. 현실이 가로막으니까. 그래서 그 역할을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1년, 2년짜리 해외 연수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내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질문하고, 그런 걸 공유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정말 좋은 철학과 학문들을 배운 뒤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이 지식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 나갈지 알게 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까지 죽을 것 같았는데 여기 오니까 살 것 같다는 식으로 되진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뭔가 질문을 던지면 문제를 맞닥뜨릴 때 그걸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거다.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차피 인생은 문제로 가득하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은 몇 가지 없다. 인생 학교는 문제가 생길 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장소다. 생각 근육을 훈련시키고 감성지능을 기르는 곳이다. 극단적 예를 들면 초등학생이 친구 죽이고도 죄책감을 못 느꼈다는 뉴스도 있지 않나? 그 아이가 악마, 괴물로 태어난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 아이에게 감성적인 지식을 전혀 일깨워주지 못하고 키워주지 못한 게 문제인 거다. 지식만 싹 틔우게 물 준 셈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못한 거다.우리가 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감성지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위기를 맞은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우리에게 맞도록 잘 만들어서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해 나가느냐, 그게 우리 몫이다.-서울에서만 할 건가?지방으로도 갈 거다. 지금은 서울에서 시작하지만 앞으로도 확장해 나갈 생각이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여행을 통한 라이프코칭과 인생 학교가 비슷한 건 아닌가?이 회사를 세우면서 집중한 건 여행을 매개로 한 청소년 대상의 라이프스타일 코칭이었다. 큰 줄기로 보면 우연하게도 인생 학교와 같은 방향을 본 거다. 그 때 인생 학교 협력사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제대로 회사를 차린 시점과 인생 학교 협력사에 원서를 낸 시점이 거의 같다. 사실 회사 일을 하면서도, 늘 내가 중점적으로 해 나갈 일이 인생 학교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확정된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나도 갑갑했다.(웃음) 인생 학교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업 모델만 가져와서 되는 게 아니고, 어떤 수업이 정말 필요한지, 우리 사회에 어떤 수요가 있는지,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통한 라이프코칭도 하고, 미디어에서는 팟캐스트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면서 공감하는 작업을 했고, 작가라는 이름으로 내 여행이야기를 풀고 독자와 소통하고 사유했다. 우리 사회에 어떤 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는 작업이었고, 인생 학교를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손미나앤컴퍼니를 세운 목적 중 하나가 인생 학교였던 셈이네?그렇다. 작년에 회사가 이 자리에 이사온 것 역시 인생 학교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이사한 거다. 이미 알랭 드 보통과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카페의 인테리어도 런던 인생 학교와 비슷하게 노란색과 파란색을 테마로 했다. 이 공간이 우리 수업 공간이다.-과목은 확정된 건가?어느 정도 큰 그림은 나왔다. 처음부터 영국처럼 30여 개의 수업을 다 할 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걸 중심으로 하게 될 것이다. 가장 큰 비중을 둘 수업은 ‘일과 생활의 밸런스 찾기’ ‘어떻게 하면 일터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일을 찾는가’, 그리고 관계 맺기에 관한 수업들이다. 열 다섯 과목이 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많아도 스무 개 정도 될 거다. -수강신청, 모집요강 같은 상세 계획은 언제 나오나?9월에 나올 예정이다. 이제 한 달 밖에 안 남았다. 세부 내용은 영국에서 올 트레이닝 팀과 함께 의논한 뒤 결정한다. 영국에서 실제 강의하는 강사들과 트레이닝 담당자들이 일주일 일정으로 우리 학교를 찾아와서 운영 관련 내용을 알려줄 예정이다. 그때 여러 가지 시험 작업도 해보고 대화도 해보고 하면서 구체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사실 여러 사람들이 이 일에 참여하고 싶다면서 연락을 많이 해왔다. 콘텐츠 갖고 계신 분이나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는 분도 있고 해서. 함께 할 방향을 더 의논해보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교실로 쓸 공간에 그림을 그려주셔도 좋다.영국 인생 학교 역시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 공감해서 그냥 돕겠다고 함께 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교실 그림도 어떤 아티스트가 와서 “그려 드리겠다”고 하면서 그렸다고 하고. 개인 포트폴리오에도 도움이 되는 일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재능기부 해주실 분이 있다면 대환영이다. 뜻 있는 분들의 참여가 많았으면 좋겠다. -인생 학교가 문을 열면 직함이 하나 더 생길텐데, 어떻게 불리는 게 가장 좋은가?이제 작가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한 시점인데 회사를 세우는 바람에 ‘대표님’이라고들 부른다. 허핑턴포스트 편집인을 맡으면서 편집인이라고들 부르기도 하고. 인생 학교는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교장’ 하면 너무 할아버지 느낌이 나지 않나. (웃음) 알랭 드 보통의 직함은 체어맨(chairman)인데, 나는 뭐라고 할지 아직 고민 중이다. -인생 궤적이 다채롭다. 그런 과감한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들이 있나?대학 전공으로 스페인어를 선택한 것도, 첫 직업으로 아나운서를 택한 것도 독특하긴 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인 게 뭐가 유행이고 뭐가 더 전망이 좋다는 이야길 듣고 지원하고 선택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굉장히 독특한 교육 철학을 가진 분들이셨다. 그래서 다른 건 전혀 중요한 게 없으니 네가 하면서 무조건 정말 즐거운 게 무엇인가, 그것만 생각하라고 그렇게 강조하셨다. 그래서 스페인어 학과에 내가 갈 당시엔 사람들이 “거길 왜 가?” 하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당시 내 선택이 20~30년 뒤를 내다본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게 없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유학하면서 나 자신을 가만히 관찰해봤다. 가만 보니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현장에 가서 뭘 보고 전하고 하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아, 그러면 내가 아나운서를 해야겠네? 하고 결론 내린 거였다. 당시 휴학도 과감하게 했다. 한국에서 지금은 안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학생이 휴학을 한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던 시대였다. 여학생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졸업해서 빨리 취직하고 빨리 시집 가야지, 하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한 번 1년씩, 적당한 시기에 쉼표를 찍는 게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했고, 남들이 그냥 사회적 분위기에 우르르 휩쓸려서 방황하면서 “정말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과연 맞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살 때, 다행히 나는 나를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게 굉장히 감사했다. 그런 경험이 아나운서 일을 하다가 휴직을 하고, 사표를 쓰고 할 때에도 도움이 됐다. 내 인생에서 쉼표를 찍는 시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물 반컵을 놓고, ‘반이나 남았네’ ‘반밖에 안 남았네’ 하는 관점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나? 서른이라는 나이가 그렇다. 내가 휴직할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사람들이 서른이나 돼서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무슨 도전이냐고들 했다. 그러나 난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앞뒤가 안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나이 아닌가. 이제 걷기 시작하는 애한테 왜 자꾸 “너 넘어질 수 있으니까 더 이상 걷지 말라”고 하는 걸까. 그럼 난 영영 뛰는 법을 못 배울 텐데, 용기를 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 손미나의 저서들. 여행 서적으로 시작해 장편소설까지 냈다.그 다음으로 내 경험에서 스스로 배운 게 지금을 보지 말고 20, 30년 뒤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2007년 방송을 그만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태껏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그 당시가 서른 다섯이었다. 그런데 내가 짧게 살아서 예순 다섯, 일흔 다섯까지 산다고 가정을 해봤다. 인생이 30년, 40년이 더 남았다. 그런데 그 전까지의 내 삶은 뭔가? 대학 가고 직업 찾느라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진정한 내 삶이란 건 10년 밖에 안 됐던 거다. ‘앞으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시간의 몇 배를 더 살아갈 텐데 그 안에서 과연 내가 이 직장에 끝까지 사는 게 과연 맞나?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눈을 떠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라. 방송도 TV 수상기로만 보는 사람이 굉장히 적어졌다. 이제 모바일로 모든 걸 다하는데 이게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문이든, 뉴스든 원하는 때에 한 번에 몰아볼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그 회사에 과연 남아서 일하는 게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을 계속 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는 게 아주 어렵진 않았다.-그래도 적성에 맞는 걸 찾으면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 않나?예전과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여러 우물을 파도 되고, 또 파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마리 토끼도 못 잡는다고들 걱정하시는데, 그게 아니라 늘 새로운 기회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면서 두 마리 토끼, 여러 마리 토끼 다 잡으면 된다. 그 당시에 했던 생각은 그런 거다. 인간은 하나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하나의 씨앗으로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물과 빛을 잘 받아서 더 빨리 싹이 트고 더 큰 줄기로 자라나기도 한다. 설사 좋은 토양과 물이 없는 곳에 떨어져도 누구나 꽃을 품고 있다. 중요한 건, 식물의 씨앗은 꽃이 한 종류만 피어나지만, 인간이란 씨앗은 그 안에 어떤 꽃이 얼마나 들어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아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이야기를 했다. 실존이 있는데 내 본질이 튤립인지 장미인지, 혹은 동백과 튤립과 장미를 한꺼번에 틔울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 피운 꽃이 수선화였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 “넌 그럼 앞으로 평생 수선화 한 송이만 피워”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했던 일을 버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그랬다. 싫어했던 일이라면 모를까, 좋아서 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인정도 받았다. 그래서 그 일을 발판 삼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나온 거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게 아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아예 버리지 말라고. 현재의 모습을 발판 삼아서 앞으로 점프하라고. 아나운서를 그만둘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직장 그만두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을 너무 못해서 쫓겨나는 것, 둘째는 일은 잘하는데 적성에 너무 안 맞아서 행복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 마지막은 일도 잘하고 적성에도 맞는데 더 나은 것을 위해 잠시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네가 세 번째 경우로 만들면 된다”고 하셨다. 다만 나한테 특이한 점이라면, 늘 확신하고 있던 하나가 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 정말 ‘열심히’ 할 거란 사실이다. KBS라는 울타리, 아나운서라는 훌륭한 옷이 있을 때에만 내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늘 알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 있든 내가 열심히 살 거란 걸 믿었다. 그래서 확신을 갖고 가고 싶은 길을 갔다.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은 같은 직장에 다녀도 허수아비처럼 그냥 월급 받고 다니는 거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 그때만큼 열심히 살면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는 확신이 있었다.-여러 일을 거쳐왔는데 어떤 모습이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나?참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사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그 일이 그 일이기도 하다. 이름이 다를 뿐이다. 허핑턴포스트에서 하는 일도 저널리즘이라는 일을 계속 이어서 하는 것이다. 그 일과 작가 역시 같은 일 같다. 세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며 글 쓰는 것이고, 변화를 주기 위해 글을 내보내는 것이다. 인생 학교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세상을 공부하고, 그걸 나누는 거다. 세상을 관찰하며 공부해 나가는 동시에 이걸 나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누고, 그것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 그런데 그 수단이라는 게 하나는 미디어고, 하나는 교육이라는 정도가 다른 거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 허핑턴포스트도 글로벌 미디어로 세상과 소통하는 다리이고, 인생 학교 역시 현대인이 가지는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는 다리다. 내가 할 역할도 그 ‘다리’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사회가 다양하지 않고 내가 여기에서 태어나면 그 동네에서 대강 결혼하고 아버지 직업 물려받고 그렇게 살았다. 그것도 물론 훌륭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하루 만에 비행기 타고 파리에 날아가서 저녁을 먹고,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시대다. 여기에서 과연 우리가 한 직장, 한 곳에 머물러서 평생 갈 수 있을까. 그러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게 굉장히 두렵고도 중요한 문제인 거다.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남녀 관계도 그렇지만 이렇게 변화가 많은 시대에 직장 내에서 사람과의 관계 맺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거고 모든 두려움과 문제의 근원은 같다. 나부터 이런 것들을 기회만 된다면 배우고 싶었던 건데,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인생 학교를 여는 거다. ▲ 사진 왼쪽부터 알랭 드 보통, 손미나 대표, 다니엘 튜더/손미나앤컴퍼니 제공-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게 또 있나?지금까진 커리어 차원에서 워낙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으니까,(웃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잘 해서 인생 학교 잘 키워나가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어를 더 많이 알고 싶다. 지금 할 줄 아는 게 영어, 스페인어, 불어를 할 수 있는데 이태리어와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다. 외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싶다. 중국어도 배워야 하나 고민 중이다.외국어를 배우는 게 너무나 재미있다. 언어를 알면 그 나라와 문화와 역사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다 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는 건 새로운 우주를 하나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 욕심이 난다. 다행히 남보다 조금 빨리 배우는 편이라서 더 많이 배우고 싶다. 그리고 더 나이들기 전에 악기 하나 익숙하게 해 놓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개인적인 소망은 있다. 또 다른 건 가방 하나 둘러메고 세계일주 한번 해보는 정도? 여행은 많이 했지만 그런 자유로운 세계일주는 아니었으니까. 그 외에 일로는 지금 상태를 잘 키워나가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다. 열정을 갖고 있는 여러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서 더 많은 생각을 나누고 싶다.-시간 관리는 어떻게 하나?정말 허투루 쓰는 시간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보통 여섯시 일곱시쯤 일어나서 운동하고서 일과를 시작한다. 요즘은 페루 여행기를 쓰고 있다. 9월말 출간 목표로 작업 중이다. 보통은 오전엔 운동한 뒤 출근해서, 낮에 일하고 저녁 6시쯤부터 글을 쓴다. 글 쓰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편이다. 원래는 아침에 글을 썼는데 새벽에 나와서 글 쓰려니 직원들 출근하는 것도 신경쓰이고 해서, 차라리 저녁 시간을 택해서 글을 쓰고 있다.◆ 손미나고려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KBS 아나운서로 '도전 골든벨' '가족 오락관' 등을 진행했다. 2004년 휴직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언론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 경험담을 써낸 첫 책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통해 여행 작가로 데뷔했다. 2007년 사표를 내고 여행 작가로 살며 일본 탐험기 '태양의 여행자' 아르헨티나 탐험기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프랑스 거주기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를 썼다. 2011년엔 첫 장편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지금은 페루 여행기를 집필 중. 2013년 11월 여행을 통한 라이프스타일 코칭 회사 '손미나앤컴퍼니'를 설립해 대표로 일하고 있으며, 2014년 2월부터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인도 맡고 있다. 팟캐스트 '싹수다방'의 진행자이기도 하다.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04/2015080400756.html?main_hot1​​​    
  • 2015-08-01
    ​▲ 신생 격월간 문예서평 잡지 Axt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한 소설가 천명관 /촬영 백다흠, 은행나무 제공“한국문학은 대체로 자의식 과잉이다. 90년대 이후 줄곧 그래왔던 것 같다. 작가 자신의 내면적 자아가 투영되고 스토리 대신 작가의 직접적인 생각이 아포리즘으로 포장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그것은 뭔가 특별한 예술가적 자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초라하고 누추하니까. 작가들은 언제나 그런 초월에의 욕구가 있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흥미를 잃는다.작가의 내면적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 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에겐 그것이 여전히 불편하고 촌스럽게 느껴진다. 에세이나 칼럼을 안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필자의 생각과 의견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니까. 그래서인지 소위, 본격문학이라는 걸 하는 데 점점 더 회의를 느낀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결국 나의 소설은 장르로 가지 않을까 싶다.”새로 나온 잡지에 실린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작가 천명관. 책 표지에 담배를 꼬나문 채 ‘뭘 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의 흑백 사진이 시선을 잡는다. 인터뷰는 꽤 길다. 대화를 이끌며 물음을 던진 이는 이 잡지 편집위원 3인 중 한 명인 후배 소설가 정용준. 그는 천 작가를 불러낸 경위를 문답 중에다 이렇게 방백 투로 써놨다.“순수냐 참여냐. 순문학이냐 장르문학이냐. 이제는 그런 식의 구분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 선은 기이하고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이상하고 불분명한 기준이지만 실제로 굉장히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문학의 수준과 깊이와 재미와 의미의 차이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 평가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좋은 소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 나름의 단순하고 확고한 입장이 있다. 좋은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인(재미있는) 소설이다. 이런 문제를 비판적 시각에서 공론화시켜볼 때 가장 뜨겁게 오르내릴 수 있는 작가는 천명관일 것이다. 그는 ‘그 기준’을 놓고 볼 때 분명 경계에 서 있는 작가다.”그 다음 단락부터 이 ‘경계에 선’ 작가의 생각이 활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Axt 인터뷰 기사에 함께 실린 천명관 사진 /백다흠“문단의 작가들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시선이냐 하면 바로 선생님들의 시선이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는 동안 선생님들의 엄한 눈이 등 뒤에서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거다. 출발부터 그렇다. 대학을 다니며 교수들의 지도 편달과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등단을 할 때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심사, 청탁을 받을 때도 편집위원 선생님들의 평가, 문학상 후보에 오를 때 또 심사위원의 평가, 하다못해 문예창작과 곤련한 지원금을 받을 때도 누군가의 심사를 받는다. 그러니까 문단생활을 한다는 건 내내 선생님들의 평가와 심사를 받는다는 의미이다.”“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이런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학상 제도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대부분 단편에 주는 상인데 상은 여러 개이지만 문학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획일화되어 있다. 심사위원이 모두 같은 선생님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 헨리 문학상만 있고 브람 스토커 문학상은 없는 셈이다. 매 시즌 문학상을 놓고 겨루는 이 리그에선 장편보단 단편이, 스토리보단 문장이, 서사보단 묘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중의 취향과는 괴리가 있다.”“한국사회가 대체로 그런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문단조차 그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을 해보니 문단엔 절대 무너지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문단마피아라고 부른다. 출판사와 언론사, 그리고 대학이 카르텔을 형성해 시스템을 만들고 작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작가는 더 이상 문단의 주인이 아니다. 선생님들이 주인이다. 이런 의견에 대해 다들 펄쩍 뛰며 노발대발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심사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의 명단을 확인할 때마다 그 실체를 경험한다.”▲ 소설가 정용준과 천명관 /백다흠“우선 작가들이 먹고살 수 있는 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선생님들이 먼저 숟가락을 거둬가야 한다. 편집위원이니 심사위원이니 하며 문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 끼어 권력을 누리던 중세의 성직자들과 같은 것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왜 선생님들의 지도편달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필요하다면 유능하고 영민한 편집자가 필요할 뿐이다.거슬러 올라가 선생님들이 문단을 점령한 것은 콤플렉스 때문이다. 역사가 일천하다 보니 뭔가 권위가 필요했고 그것을 대학에서 빌려왔는데 결과적으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지식인에 의해 예술이 점령당한 꼴이다. 다른 예술 분야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문학은 문학주의의 성채에 가둘 수 없는 역동성이 있다. 지금도 독자들은 재밌는 작품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보라, 영화판은 대학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잘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문단도 당연히 작가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등단제도니 청탁제도니 문학상이니 다 때려치우고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대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평가는 당연히 독자의 몫이어야 한다.”용의주도하게 문답을 끌고 가던 정용준도 이즈음에선 짐짓 불안한 듯 다짐을 받아 둔다. “오늘 이야기한 것 다 써도 되나?”역시나, 상대는 논스톱이다. “물론이다. 쓰라고 한 얘기이니까. 하지만 이런 소리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결국 아무것도 안 바뀔 테고 선생님들은 만수무강하실 테고, 나는 기껏해야 또 적이나 잔뜩 만들었겠지. 쩝.”이 화끈한 인터뷰 하나만으로도 이 신생 잡지는 창간호부터 장안의 화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름은 Axt(악스트). 책 제호 바로 밑에 ‘Art & Text’라고 해놓은 것을 보면 ‘예술과 텍스트’를 조합한 단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독일어로는 Axt가 한 단어다. ‘도끼’라는 뜻. 잡지 뒷표지에 보란 듯, 출처를 선언문처럼 박아놨다.“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독일어 원문과 함께.천재작가 카프카가 21세이던 해 1904년 1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예술사가였던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글에 등장해 이제는 나름 유명해진 구절이다.여러 면에서 실험적인 이 잡지는 첫 호 발간 1주 만에 1쇄 5000부가 매진된 데 이어, 2주 만에 1만부를 향해 질주 중이다. 중견 출판사인 은행나무가 수익과 무관하게 한번 내보기로 했다는 소설 서평 전문 잡지다. 그런 것 치고는 주목할 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여기에는 물론 흡인력 강한 작가의 색깔 있는 인터뷰를 앞세운 단단한 콘텐츠와 더불어, 2800원이라는 파격의 가격이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형식과 내용의 문학 잡지의 홀연한 등장에 무언의 지지를 보낸 이도 적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잡지 창간을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관심을 갖고 일찌감치 제작진과 인터뷰를 했다. 출간 전에 편집장인 백다흠씨를 만나 준비 과정을 들었고, 책이 나온 직후에는 편집위원 3명(백다흠의 친형이자 소설가인 백가흠, 같은 소설가인 배수아, 정용준)과도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으며, 끝으로 이메일로 추가 답변을 들었다. 차례로 소개한다.색다른 문예 잡지가 탄생하기까지 도모한 사람들의 생각과 염려와 기대를 읽을 수 있다. 굳이 주목하는 것은, 이 시대 소설은 물론 문학, 좀 더 확대하자면 지식 콘텐츠 생산자들이 지금 어떤 고민을 하는지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먼저 백다흠 편집장과의 인터뷰. 창간호 출간 전에 이뤄졌다.>그는 대학 학부 때는 소설을, 대학원에서는 사진을 공부했다. 작가들 인물 사진을 잘 찍는 걸로 정평이 나있다. 이번 Axt 창간호의 사진 작업도 도맡았다. 편집자 경력은 10년쯤 된다. 이전 직장인 문학동네에 있으면서 계간지 편집장도 1년 반 했다. 은행나무로 온 지는 1년 반이 넘었다고 한다.▲ Axt 편집장 백다흠. 사진도 맡았다.-이런 잡지를 내게 된 경위랄까 배경을 듣고 싶다.1년도 더 전에 사장님(주은선 은행나무 대표)이 일본에서 가져온 거라며 잡지를 보여줬다. 겐토샤(幻冬舍)에서 내는 ‘Pontoon’이라는 아주 얇은 무가지인데 거기에 장편소설만 연재하고 있었다. 원고 매수도 편당 30-40매 정도에 모두 11편을 실었다. 처음엔 신기했다.일본 출판 시스템은 우리와 달라서 소설가들 작품도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잡지도 문학적 이슈나 문단의 필요에 의해 나오는 게 아니라 출판사가 원고를 수급하고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방편으로 활용한다.처음엔 사장님도 이런 걸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는 별 승산이 없다고 봤다. 오히려 외부에서 말만 많아질 것 같았다.-말이 많아진다니?너무 출판사의 상술이 보이는 기획 같았다. 장편 열 몇 편만 연재하는 잡지를 내는 것 자체가 그런 이미지를 줄 것 같아 싫었다. 하지만 백가흠(친형)씨와 이런저런 이야기하던 중에, 소설가들이 편집위원이 되어서 소설에 관련된 잡지를 한번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설 작품이 실리거나 소설에 관련된 글이나 그 무엇이 실리는 잡다한 잡지를 구상했다. 그걸 세분화시켜 단순히 두세 개 코드로 기획을 해보자고 해서, 사장님께 의견을 냈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일본의 그 무가지는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발행하고 있는 건가?출판사 입장에서는 장편 원고를 수급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연재 지면을 주는 셈이다. 지금 국내 문학 계간지들도 연재 란이 있지 않나. 이게 출판사에 원고를 쓰게 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일본 폰툰은 그걸 극대화한 셈이다. 판형도 작고, 인쇄비만 들어가니까 비용도 높지 않고 몇 천 부만 찍어서 뿌리는 모양이었다.아무튼 우리 출판 현실과는 안 맞을 것 같았다. 문인들한테도 슬쩍 떠보니 대부분 반응이 안 좋았다. 왜냐하면 국내 소설가들은 문단이 갖고 있는 어떤 헤게모니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안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그런 상황에서 일본식 소설 무가지는 굉장히 이질적인 변종이기 때문에 작가들이 선뜻 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안전한 창비나 문학과지성이나 민음사 같은 곳에서 만든 안전한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연재하기를 바라지, 그렇게 새롭게 출현하는 헤게모니의 변종에 쉽게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봤다.-출판사의 영향력도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긴가?그런 것도 섞여 있다. 내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은행나무 나름의 좋은 이점도 있다. 변종을 시도해 볼 수 있고 새로운 것을 해볼 위치에 있다. 역설적으로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어떤 언론에서 우리보고 ‘문학 출판사의 후발주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썩 맞는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기획 의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악스트를 이렇게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계에서도 그동안 조금은 다른 어젠더를 품거나 바라온 사람이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존 문학 계간지들. 왼쪽부터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자음과 모음, 세계의 문학-잡지의 성격이나 방향은 어떻게 결정이 됐나?과정이 쉽지 않았다. 사장님은 발행인으로서, 편집위원들은 위원들대로 각각의 생각이 있었다. 사장님의 조건은 기존 문학잡지가 가진 무거움을 많이 덜어낼 것, 감각적으로 가벼워지든지 문학성에서 아주 날렵해지든지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편집위원들은 아카데믹한 국문학의 이슈를 뺀 순수 소설 관련 콘텐츠만으로 된 잡지를 원했다. 나는 텍스트가 전부가 아닌, 약간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도 들어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것들로 소설을 리뷰하는 방법이 있었다.사실 국내에는 리뷰 잡지가 활성화 돼 있지 않다. 미국이나 일본, 독일에서는 서평 잡지가 활발한데. 거기도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우리는 어차피 소설가들로 꾸려졌고 소설을 말하려고 만드는 잡지이기 때문에 결국엔 소설 리뷰에 조금 비중을 두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카데믹한 국문학적인 이슈는 기존의 문예지들이 너무나 잘 구현해 내고 활발히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가자는 쪽으로 윤곽이 잡혔다. 그러고 준비를 한 게 1년 반쯤 된다. 그동안 여러 기획안이 일어났다가 엎어지곤 했다.-지금 와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이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닌데, 우리 잡지에 새로 실을 소설을 청탁할 때는 다른 문예지에서 나오는 것과 달랐으면 했는데 받고 보니 비슷했다. 결국 작가들은 원고 청탁을 받으면 실리는 잡지에 맞춰 작품을 구상한다기보다는 그냥 시기적으로 맞으니까 여기 주고 저기 주고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개성을 부여해주기를 바랐는데 거기에 맞게 작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게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 같다.-잡지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고 청탁을 했길래?사실 그게 말하기도 참 애매하다. 그냥 우리는 신생 잡지라는 점을 이야기한 건데.-실험적인 것을 요구했나?아니다. 실험적이란 말을 쓰면 안된다. 그럴 경우엔 모든 작품이 다 실험적인 것만 나올 수 있으니까. 그냥 좀 더 재미있게, 그 전에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봐도 좋습니다, 이런 정도였다. 알아서 생각해주기를 바랐는데 결과적으로 큰 변별 같은 게 안 보인다. 이건 앞으로 편집위원들과 이야기하면서 작가군을 적절히 안배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의식했든 아니든, 기존 문예지들이 다루지 못했던 틈새를 겨냥한 것 같다. 기존의 창비나 문학동네 것은 어떻다고 보나?기존 문학 계간지들은 어떤 규정된 틀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문학적인 이슈들이나 화제, 국문학적인 시각과 문학 비평의 관점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화제를 만들어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창비가 60년대부터 문학잡지를 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문학 계간지의 기본 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뒤이어 문학과지성사가 70년대 중반부터 나왔고, 그다음 문학과 사회가 약간 바꿔서 나왔다. 그리고 문학동네가 약간 후발주자로 들어와 있고. 자음과 모음도 들어와 있다.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본 구성도, 담론을 생산하는 것도 비슷하다.우리도 사실은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평론가들은 많다.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해서 문학 공부를 오래 해온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중에서 서로 맞는 사람 몇 명이 모여 약간의 공통 화제를 만들고 하면 계간지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하지만 그런 방식은 이미 너무나도 잘해오신 분들이 있다. 우리는 조금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그냥 소설가들이 모여서 우리가 재미있게 마음대로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해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작가 세 명이 모인 것이다.-첫 호는 어떻게 짜였나?신작 소설을 장편과 단편 각 3편씩 실었다. 그리고 소설 서평이 국내외 합쳐서 16편이다. 서평 필자들로는 소설가와 시인, 번역가들이 참여했다. 외국 소설 서평의 경우 번역자에게 맡겼다. 또 화가가 소설 작품을 그림으로 평하는 그림 리뷰 코너도. 젊은 소설가들의 일기, 패션에디터이자 시인인 이우성의 ‘세상의 모든 리뷰’도 색다른 시도다.-해외 서평을 번역자에게 맡긴 이유는? 역자 후기 같을 수도 있을 텐데.독자에게 자신이 옮긴 책을 소개도 할 겸 맡겨봤다. 글 나온 걸 보면 역자 후기와는 다르다. 각각 스타일도 다르다.-평론가는 다 배제됐네? 원칙인가?꼭 그런 건 아니다. 다음호 원고로는 한두 명 청탁해 뒀다. 이번호에는 한 명이다.-가격을 2900원으로 매긴 이유는?유통과 관련된 건데, 서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격을 매겨야 했다. 무가지는 서점에 못 들어가니까.-하필 왜 2900원인가?그 문제는 내 소관이 아니어서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2900원이나 3900이나 4900이나 차이가 뭔지 궁금했다. 아마 사장님은 3000원이 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난 무가지로 가고 싶었다.장편 소설을 열두 편만 연재하는 것에는 반대지만 지금 형태로 가는 잡지라면 무가지에도 찬성이었다. 콘텐츠가 살아있으니까. 동시대적이고 읽을거리가 있고 많은 소설가들을 불러내고 있으니까 피드백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궁극적으로 은행나무 출판사 브랜드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글쎄.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게 주된 고려 사항은 아니다.-무가지일 경우에는, 요즘 콘텐츠 무료화나 저가 공세가 초래하는 폐단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을 텐데.사실 작가들은 웬만한 소설가들 빼고는 대부분 무명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그런 사정에서 조금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들을 좀 널리 퍼뜨려주고 싶은 거다. 독자들이 책을 보는 데에 있어서 가격이 걸림돌이 된다면 이 걸림돌을 없애면 좋지 않을까 하는 거다. 심심할 때마다 그냥 보고 버려도 좋다. 그런 식으로라도 접점과 반경을 늘리는 거다.-콘텐츠 생산자에게도 보수를 줘야 하지 않나? 출판사는 그 비용을 마련해야 할 텐데. 자선 사업도 아닌 다음에야.거기에 모이는 원고를 가지고 단행본으로 내는 방법도 있고. 그런 문제는 사장님 복안이 있겠지.(웃음) 광고를 넣어도 되지 않을까 싶고. (악스트 창간호는 광고를 하나도 싣지 않았다. 심지어 출판사나 책 광고도.) 나는 원론적으로 답할 뿐이다. 소설이 많이 안 읽히는 상황에서, 소설가들이 모여 좀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거다. -소설 독자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라면 이해가 간다. 소설이 많이 안 읽히는 상황에서 잠재 독자층을 발굴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을 들일 만하니까.그렇다. 우선은 소설을 읽는 독자를 유지하고 키우는 게 문학 출판계의 관건이 아닌가 싶다.-우려되는 점은 콘텐츠 제작자는 심화학습으로 가기를 바라는데, 대중은 공짜나 싼값으로 편하게 맛보기 단계에만 머물러버리는 것이다.물론 이 잡지를 봤다고 해서 소설 독자로 많이 건너 가지는 않을 거다. 잡지가 성공하면 좋겠지. 하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이것대로 정당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본다. 나는 다른 계간지 제작에도 관여했었는데 볼 때마다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책의 물성이나 시각적 비주얼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기존의 것들은 너무 무겁고 글이 많다는 생각이다. 그 글들이 다들 쓸데없지도 않다. 굉장히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려있는 거다. 그걸 읽으면 문학적인 접점의 날을 성숙시켜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잡지가 좀더 대중친화적이었으면 했다. 어떤 저항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사실 나는 악스트의 독자가 거기에 실린 작품 다 안 봐도 좋다는 생각이다. 몇 개만 소화하고 쉽게 버려졌으면 좋겠다. 물론 서가에도 꽂히면 바랄 게 없겠지만. 평소 문학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보다가 좀더 정보를 얻고, ‘어라 이런 사람도 있네’ 하는 정도만 돼도 내가 지향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아닌가 싶다.-요즘 전반적으로 책 소비가 줄고 있다고 한다. 소설은 어느 정도인가?더 많이 안 좋다. 국내 소설에 대해서는 이상한 선입견이 퍼져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국내 한 신문에서 편집장들 상대로 설문조사한 게 있었다. 거기에 “왜 해외 소설은 팔리는데 국내 소설은 안 필린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이 있었다.답은 쉽게 나온다. 해외 소설이 재미있으니까. 왜냐? 요소들이 이질적이고, 흔히 상상하지 못했던 서사를 많이 시도하고, 낯선 것이 주는 약간의 아우라도 있으니까. 그 반대로 생각하면 국내 문학이 안 팔리는 데 대한 답이 나온다.하지만 나는 국내 문학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데 접할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문학이라고 하면 어떤 저항감이 있다. 그 저항감이란 게 약간 아카데믹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문학하는 사람들은 그 아카데믹한 느낌이야말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다. 그걸 깨고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도외시하고, 그런 이상한 헤게모니 같은 게 있다.-독서 시장과는 별개로 작동하는?그걸 혼자서 깰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조금 진입 장벽을 낮추고 조금 더 감각적으로 예리하고, 무겁지 않은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물론 콘텐츠는 어려울 수도 있다. 쉽고 재미있게 써달라고는 얘기하지만, 필자들이 글을 쉽게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격월이면 다음호도 이미 기획 단계이겠네?그렇다. 다 청탁했다. 일단 5호까지 기획은 어느 정도 마쳤다. 단편과 장편도 1년치가 준비돼 있다. 서평은 신작이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서평용 책 선정은 기준이 있나?특별한 제한은 없다. 이번 창간호에도 1970년대 작품인 박상륭의 ‘잡설품’ 리뷰가 포함됐다. 자유롭다. 책을 낸 출판사도 상관하지 않는다.<다음은 편집위원들과의 방담. 창간호가 나온 직후 편집 회의를 한다기에 찾아가서 잠시 이야기를 들었다. 백다흠 편집장과 편집위원인 백가흠, 배수아, 정용준.>-세 사람이 다 소설가라고는 하지만 잡지에 대한 생각이나 기대는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백다흠: 사실 우리들이 다같이 잡지 발간 취지에 대해 합의를 먼저 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아마 세 사람 다 잡지나 문학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 창간호에 세 사람의 개성이 다 드러난 것도 아니다.배수아: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일이 커진 것 같다.(웃음)▲ 소설가 백가흠백가흠: 잡지가 나오고 난 뒤에 일어난 오해랄까, 바로잡고 싶은 게 있다. 우리는 기존 문학에 대한 저항이라든가 그전에 있던 문학잡지에 대한 경쟁 차원에서 이걸 낸 게 아니다. 이전 문예잡지들은 그것대로 효용성이 있다.우리는 좀 더 친숙하고 쉽고, 좀 더 확대하면 좀더 즐길 수 있는 걸 해보자는 취지로 모인 것이다. 편집위원에 비평가가 없는 것도 우리가 비평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기왕에 비평하는 잡지들은 많이 있고, 우리는 지향하는 초점이 그것과 다르다 보니 작가 셋이 모인 거다.좋은 소설이라는 책을 대중에게 보다 쉽고 재밌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걸 1년 내면 120권 정도, 2년 하면 240권에 대한 리뷰가 쌓인다. 이런 양서들이 사람들에게 잘 읽히고 팔렸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크다. 그렇다고 소설 리뷰만 실을 수는 없으니까 소설 신작도 좀 넣고, 볼거리도 좀 있었으면 하는 아이디어를 모은 정도다.정용준: 다른 분들과 비슷한 생각인데, 뭔가 사전에 합의를 해서 합류한 거라기보다 먼저 제안이 들어왔고, 내 경우에는 잡지에 대한 기대감이랄까 사적인 마음이 든 것은 제목이 정해진 후부터였다.배수아 선배가 ‘악스트’라고 정하면서 그때부터 그것에 대한 정서적 합의 때문에 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다른 선배들이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정확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서로서로 기대가 없었다기보다는 애매했기 때문에. 분명히 각자 생각은 있었을 텐데.내가 기대했던 것은 문예지가 아니라 잡지라는 점이다. 카페 같은 곳에 예쁘게 비치돼 있어서, 누가 나한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런 데 글도 싣고 여기에 내 글이 있다는 걸 바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잡지를 상상했다.▲ 소설가 정용준그렇다고 해서 너무 가볍거나 잡스러운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적으로 다룰 수 있는 풍성한 내용의, 예쁘고 우아한 잡지를 꿈꿨다. 비평 담론에 대한 반발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소설가들이기 때문에 비평언어와는 또 다른 좋은 언어들로 소설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 점에서는 우리 잡지가 많이 근접했다고 생각한다.다만 악스트가 출간되고 난 뒤 갑자기 사람들이 여기에 대한 기대를 펼치고 나서 다소 혼란스러운 것은 있다.-시기적으로 묘하게,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천명관 작가의 인터뷰 발언(맨 앞에 인용된 천 작가의 인터뷰 속 말들)이 부각되면서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악스트’의 성격이 규정된 감이 있다.백가흠: 우리 잡지에는 비평이나 시론 같은 것도 없다. 그나마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작가 인터뷰 커버스토리와 맨뒤에 아주 짧게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후기가 전부다. 우리가 어떤 입장이나 담론을 표방하지는 않기로 했지만 작가의 인터뷰 속 말로 문학이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작가의 말이 비평이나 시론을 대신할 수는 있다고 본다. 천 작가는 평소 생각을 이야기한 거다. 시기가 미묘하게 겹쳤을 뿐이다.-천명관 작가를 창간호 커버에 올린 것은 대중에게 가까이 가려는 의도와 맞는 것 같다. 어떤 생각에서였나?정용준: 인터뷰에도 실었는데, 나는 그가 경계에 서있는 작가라고 썼다. 경계라는 것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경계라는 게 있지 않나. 아카데믹과 그렇지 아닌 것 사이, 혹은 순수와 장르 문학의 사이.하지만 독자들은 그냥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나. 결국 그것을 허물거나 그것의 무의미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천 작가는 구분을 넘어서는 것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문학에서도 충분히 주목하고 있으니까.-문답 내용이 공교롭게도 마치 지금 표절 파문이나 문단 권력 논란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적중했고 구체적이었다. 그만큼 문단에서는 누적돼온 문제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백가흠: 그래서 굉장히 부담스럽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런 논의도 필요하다고 해서 한 건데, 본의 아니게 그런 사건들이 터지고 창간호의 천 작가 발언 내용이 겹치니까. 마치 우리(잡지)가 앞으로 무슨 큰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됐다.정용준: 마치 이때다 하고 발표한 것처럼 돼버렸다.▲ 소설가 배수아배수아: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시류에 편승한 것 같은 모양이 돼버린 듯한 인상을 주니까. 본인(천명관)한테 미안하기도 하고.-너무 지나친 자의식 아닌가?배수아: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면, 우리가 마치 천 작가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어서 그런 이야기를 끌어낸 것 같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백가흠: 이번에 천 작가를 인터뷰에 올린 것도 그 자체가 ‘비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새로운 권력을 탐내는 권력자라는 얘기다.(웃음)-막상 창간호가 발행돼 나온 후의 소감은?정용준: 내 욕심은 대중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무작정 그쪽으로 다가간다기보다 좀더 독서를 많이 하는 다른 독서가의 독법을 대중이 체험함으로써 독서의 폭이 넓어졌으면 한다.백가흠: 소설보다는 리뷰에 더 방점이 있다. 사실 국내에 변변한 서평지가 없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 선택 폭도 줄어들었다. 그걸 넓혀보려는 것이다. 이 잡지가 좋아지려면 리뷰가 가진 힘을 믿어야 하고 비중을 더 늘렸으면 한다.배수아: 감각적인 것과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콸러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가져가야 한다.<이메일 문답: 방담 때만 해도 편집위원들은 ‘문단 권력’ 논란의 여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말을 아꼈다. 결국 이메일로 보충 의견을 듣기로 하고 헤어진 후 나중에 이메일 질문을 보냈다. 아래와 같이 편집위원 공동 명의의 답을 보내왔다.>-잡지의 정체성은 정리가 됐나?소설가들을 위한, 소설 독자를 위한, 소설을 위한 잡지.-앞으로 방향은?기본 문예지와 차별을 내세운 만큼 감각 있고 균형 잡힌 문학잡지를 지향한다. 나아가 독자와 소설가들을 잇는 가교 역할도 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을 느낀다.-구체적으로 염두에 둔 독자는?기존 문학 독자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대중 독자.-창간호에 대한 자평은?약 70% 정도는 의도했던 대로 모양을 갖춰 나왔다고 생각한다. 관건은 나머지 30%인데, 앞으로 나올 호에서 최대한 보완해갈 생각이다.-어떤 부분을 보완할 생각인가?악스트는 완료형이 아닌 현재수정진행형이다. 앞으로 좀더 감각 있는 시각적인 오브제를 확보하고, 악스트에서만 읽을 수 있는 차별화된 텍스트, 친대중적인 기획, 새로운 소설가의 작품과 서평을 통한 묻힌 소설의 재발견 등이 우리가 할 일이 될 것이다.-현재 판매 현황은?1쇄 5천부가 1주일 만에 다 나갔다. 현재 2쇄 5000부를 찍고 1만부를 향해 가고 있다. 정기구독자도 500명 정도 된다. 창간 이벤트로 나간 물량을 감안하더라도 기대 이상의 성적이다. 원래 수익을 목적으로 찍은 것은 아니지만 반응이 생각보다 좋다.-예상 밖의 좋은 성적은 어떻게 해석하나?창간 전부터 기존 문예지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기대 섞인 입소문이 났고, 잡지가 나온 후에 받아본 독자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된 것이 다시 입소문을 탄 것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다. 디자인이나 구성이 이전 문예지들과는 달랐던 점이 수용된 것 같다.-2호 준비는?창간호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들으려고 했고, 많이 취합했다. 당장에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히 반영해 수정해 나가려고 한다. 좀더 쉬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편집도 좀더 신경쓰려고 한다.악스트 창간호의 마지막 페이지 편집자 후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우리는 우리이기 위해 도끼를 들었습니다. 조금 덜 지루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책 읽는 것 좋아하고 글 쓰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의 놀이터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은 책의 운명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도끼가 가장 먼저 쪼갤 것은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입니다. ‘Axt’는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우리는 매혹당하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나눌 수 있는 쾌락을 나누고 싶습니다.(중략)이제 도끼를 들고 춤을 추어도 좋겠습니다.생각을 깨는 도끼,얼어붙은 감정의 바다를 깨는 도끼,‘Axt’를 들고 말입니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31/2015073103250.html​  
  • 2015-07-25
     “예술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주제라는 점에서 일종의 게임과도 같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도 기본적인 규칙과 규정을 알고 나면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다.”(윌 곰퍼츠)사방이 먹자판 같다. 두 명 이상 모이면 주된 화제가 맛집 이야기고, TV에서도 ‘먹방(먹는 것 방송)’에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일색이다.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예술 문화에 대한 취향도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미술에 대한 관심이다. 전시회가 다양해지고 많아진 데다 찾는 사람도 갈수록 늘고 있다. 이제 주말이면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듯 시내 미술관을 찾곤 한다.다만 여기에 걸림돌이 하나 있다. 미술 작품 감상은 맛집 탐방이나 먹방 시청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 특히 현대 미술로 올수록 그렇다. 보기만 해도 얼추 이해가 되는 이전의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을 왜 저렇게 했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모르고 보자니 답답하고 아는 체하는 것도 고역이다.이런 부담을 얼마간 덜어줄 만한 책이 국내에 번역돼 나와 있다.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알에이치코리아). 원 제목은 ‘What Are You Looking At?’이다. 책 첫 장을 펼치면 지하철 노선도 같은 게 나온다. 모던아트의 계보를 다윈의 진화 계통수처럼 그려 놓은 지도다. 1870년대 인상주의부터 시작해서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팝아트, 개념주의, 행위예술, 미니멀리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거쳐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복잡다단한 지형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런던 교통청 허가를 받고 시내 지하철 노선도를 참조해서 그렸다고 써놨다.저자는 책을 쓴 취지를 앞에다 뚜렷이 밝혔다. “150년에 걸친 현대 미술의 역사 속에, 기본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모든 것을 담았다... 이 책을 읽고 현대미술관에 가게 된다면, 전보다 덜 겁먹고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저자의 이력을 보면 빈말 같지가 않다. 현대 미술 작품 전시로 유명한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디렉터를 거쳐 현재 BBC 아트 에디터로 있는 영국인이다. BBC 본관 사무실로 찾아가 현대 미술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현대 미술사를 포괄한 책인데 내용이 알차면서도 재미있더군요.되도록이면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쓰려고 애썼습니다. 예술사에 관한 학술서들은 이미 좋은 게 많이 나와있습니다. 곰브리치가 쓴 고전 ‘서양미술사’ 같은 책이 대표적이지요.저는 그런 정통 학술서들과는 달리 제가 예술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얻은 지식을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책들도 참고를 했고, 어떤 대목은 제 상상을 더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했습니다. 현대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나면 대단히 멋집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현대미술관에 가게 됐을 때는, 전보다는 겁을 덜 먹고 흥미를 더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복잡한 미술 사조와 예술가들의 개인사들을 뜨개질하듯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주가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첫 책이라구요.책을 쓴 것은 처음입니다. 벌써 20개국어로 번역됐다는 게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첫 출간은 2013년 9월이었다.) 각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책마다 제목도 표지도 달라지고 하는 게 제 눈에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저도 그 나라의 문화에 참여해서 일부가 되는 셈이니까요. 생각만 해도 아주 신나는 일입니다.책은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어요. 제 생각이나 주관적인 의견보다는 예술계의 여러가지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고 독자들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원래 미술을 전공했나요? (빙그레 웃으며) 아니요. 저는 열여섯 살 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그 뒤로 정규 교육 과정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문제아(naughty)’였지요.(웃음) 학교는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너무너무 재미없었어요. 저랑 안 맞았어요. 그래서 일찍 학교를 떠난 거지요.그 후에는 자잘한 문화 예술 관련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직접 회사를 차렸어요. 시각예술에 특화된 온/오프라인 출판사(publisher)인 shots.net을 차려서 운영했어요. 잡지, 단편 광고, 동영상 같은 것을 제작했는데 꽤 잘 됐어요. 70개국에 진출했지요.그 다음에 테이트 갤러리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게 2002년이니까, 제 나이 서른일곱 살일 때였어요. 16세에 학교를 나와서 차린 회사 치고는 20년 사이에 꽤나 성공한 거지요.-그림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정규 과정으로 미술을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구요. 그냥 제가 미술 작품 보고 책도 보고 공부하고 글을 썼어요. 일종의 독학으로 큐레이터가 된 거지요. (그의 미술사 이야기가 왜 문외한에게 쉽게 이해가 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디렉터로 오래 일했더군요.테이트에서는 미디어 담당 디렉터로 일했습니다. 테이트는 관장(the director) 밑에 7명의 디렉터들(directors)이 함께 미술관을 운영합니다. 운영위원 중 한 명이었지요. 공공프로그램, 출판, 웹사이트 전략 같은 것을 담당했습니다. 제 역할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와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죠. 주제를 골라서 알기 쉽게 해석해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 런던 템즈강변의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테이트 모던 갤러리 입구 전경7년 동안 테이트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세계 곳곳의 멋진 미술관, 컬렉션들을 둘러봤습니다. 예술가들 저택도 가보고 부호들 소장품도 감상할 수 있었지요. 엄청난 액수를 불러대는 미술 경매를 지켜보기도 했지요.그러다 2009년 BBC 아트 에디터로 오게 됐어요. 지금은 예술 담당 선임 에디터입니다. 온라인 기사나 리뷰도 쓰고 방송 리포트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합니다.-이 책은 어떻게 해서 내게 됐지요?일간지 가디언을 위한 기사를 쓴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흔히 예술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을 이야기한 글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현대 미술에 대해 잘 이해를 못하는 이유에 대해 썼죠.그러다 200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연도 했어요.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으로 현대미술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내용이었어요. 누가 저보고 코미디 쇼 무대에 나가서 사람들 알기 쉽게 미술사 강의를 해 보면 어때, 하고 제의했었죠. 저는 코미디가 진실을 즐겁게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들 반응도 좋았어요.그러고 나니까 저보고 ‘왜 예술에 관한 책을 직접 쓰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때 쓴 것에다 예술가들 일화도 더 넣고 해서 보다 자유로운 문체로 써봤습니다.저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관람객들의 생각이나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직위를 떠나 비공식적으로 자유롭게 생각을 전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막상 책으로 내기까지는 2년이 걸렸어요. 원고를 볼 때마다 더하고 더하고 덧붙일 게 생겨서 그렇게 됐어요. 읽기 쉽게 쓰려고 애썼습니다. 많은 정보를 담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흐름을 갖고 쉽게 읽히게 하려니까 어렵더군요.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런 말을 했지요. 자료 조사를 열심히 많이 하고 나면 그걸 다 영화에 넣으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넘어 가면 잘못이다. 조사 후에 오히려 덜어내고 일관성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공을 더 많이 들여야 한다구요.-현대 미술(modern art)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모던 아트’라면 시점을 언제로 잡나요?1850년쯤에 시작됐다고 봅니다. 좀 더 정확히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가 활동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가 예술가와 근대적 삶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현대적 삶 속의 화가’라는 에세이였는데, 보들레르는 이 글에서 그때부터 예술가들이 고전 그림이나 옛날 것들을 보기를 중단하고 자기 주변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선언했지요.그때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던 시기예요. 예술가들은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우리가 하는 예술은 저런 사진과 뭐가 다를 수 있나? 자문하기 시작했지요. 그 고민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책의 첫 장을 마르셀 뒤샹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을 뒤샹 이야기로 끝냈더군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인가요?뒤샹은 예술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재정의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지요. 예술의 해방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단지 회화뿐만 아니라 돌이든 뭐든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지요. 거대한 진전이었어요. 그로 인해 예술이 완전히 바뀌었지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예술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후로 관객들은 현대 예술 작품을 두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만 하게 됐지요. ▲ 마르셀 뒤샹 ‘샘(Fountain)’ 1917년 /알에이치코리아 제공그런 점에서 뒤샹은 사실상 관객들에게 혼동을 안겨준 사람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예술 작품 앞에서 오히려 위축이 되게 됐지요. 작품을 보고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게 된 겁니다.가령 이전의 예술 작품을 보면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림을 보고 누구라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어요. 별 어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예술 작품이 어떤 예술가의 생각이나 관념을 담은 것이 되면서 우리로서는 훨씬 이해하기가 어렵고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물론 저 같은 사람(전문가)으로서는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졌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뒤샹은 예술의 규칙(rule)을 바꾼 예술가이고, 가장 중시해야 할 화가입니다.하지만 보다 선구적인 의미에서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는 세잔이라고 생각해요.-왜지요? ▲ 폴 세잔(1839~1906)현대미술은 1865년 세잔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잔은 처음으로 두 눈을 써서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데이비드 호크니(1937~. 영국 화가)가 말했지요.카메라는 하나의 렌즈로 모든 것을 담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짜라는 거지요. 그는 “우리는 인간이다. 두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했어요. 그전과 다른 관점에서 본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어요.세잔은 예술품을 마치 부동의 렌즈 하나로 보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당시 예술의 문제라고 봤어요. 진짜 모습이란 단일한 시각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시각에서 본 것인데 그 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 거지요.그게 바로 현대미술의 시작이었어요. 그 뒤로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거기서부터 입체파로도 가고 나중에 초현실주의로도 가고 했지요. 그런 점에서 세잔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잔이 없었으면 뒤샹도 없었어요.-그 뒤 예술사도 간단치가 않은데, 큰 흐름을 요약해주실 수 있나요?19세기 후반 파리의 예술가들은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했어요. 근대화와 산업화, 도시화 같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거든요. 지금 우리가 디지털 혁명을 겪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격변의 시기였지요. 예술가들은 그런 일련의 거대한 사회 변화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대응합니다.당시 예술가들도 어떻게 세계를 보고 그것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 당시 산업혁명이나 기술 혁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그런 시대에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고민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굉장히 열광하기도 했지요. ▲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1887년경세잔은 그전까지의 풍경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어요. 풍경의 모든 것에 초점이 고르게 가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봤어요. 자신이 풍경화를 그린 후에 이것이야말로 내가 본 대로라고 했어요.그는 일련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상으로 풍경을 파악한 거지요. 그게 진실에 가 닿는 방법이라고 본 거지요. 디테일들은 무시를 했어요. 가령 어떤 그림은 집에 초점을 두었어요. 그밖의 잔디와 들판, 나무 같은 것은 초점 밖이었어요. 초점 이외의 다른 모든 정보는 밖으로 추려낸 거지요.점점 시각적인 단서들을 제거해 가면서 추상화가 시작된 거지요. 자신들이 본 전체적인 진실, 느낌에 치중하기 시작했어요. 그 집약이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격자 모양의 굵은 선에 세 가지 색상으로 표현했지요.  ▲ 피트 몬드리안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 C(No. III)’ 1935년그 후 세계 대전이라든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을 겪으면서도 예술가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선언으로 대응했어요. 러시아에서는 해체주의가 나오고, 공산화 후에는 볼셰비키를 옹호하는 유파가 나오고, 이와 유사하게 미국에서는 자본주의를 위한 예술들이 나왔어요. 팝아트 같은 것들이지요.이런 현실적인 역사적인 맥락과 유리된 채로 현대미술을 그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으로만 볼 경우에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예술의 진면목은 우리의 실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거든요. 현실 세계를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에요.어떤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나라 미술관을 찾아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그 나라 사람들의 삶과 관심이 다 담겨 있습니다.-현대 미술(modern art)과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은 어떻게 다른가요?사슬고리처럼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차이라고 한다면 단지 시간이라는 변수 정도지요. 대체로 근대 미술이 끝난 시점은 1970년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때 폴락과 워홀, 다쿠닝 같은 예술가들이 많이 세상을 떴어요. 동시대미술가라고 하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영국 데이미언 허스트와 중국의 아이웨이웨이 같은 작가들이 되겠지요. ▲ 아이웨이웨이 ‘한나라 왕조의 자기를 떨어뜨리기’ 1995년-현대 미술이 점점 ‘아트테인먼트(art+entertainment)’가 돼간다고 썼더군요.아티스트는 늘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에 대한 우리의 관계도 변하고 있구요. 그게 꼭 부정적이라기보다 ‘삶의 현실(fact of life)’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술은 우리에게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우리는 쉴새없이 무언가로부터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하지요. 예술은 생산품(product)이 됐고 상품화했고, 생산 유통 소비되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앞다퉈 미술관을 짓는 것을 보세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 로마 국립21세기미술관(MAXXI), 이 모두가 1997년 이후에 설립됐어요. 중국만 해도 최근에 엄청난 현대 미술관을 새로 지었지요.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 마크 로스코 ‘빨강 위의 황토색과 빨강’ 1954년과거 현대 미술은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만 즐기는 여가 생활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현대 미술과 그보다 대중적인 영화나 연극, 관광 같은 여가 활동 들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졌어요.예술도 레저 활동의 일부가 된 거지요. 사람들은 TV를 보고 영화관에 가듯이 미술관과 전시장에 갑니다. 세상의 그 많은 전시 공간들을 채워야하기 때문에 또 엄청나게 많은 예술 작품들이 곳곳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그러다 보니 쏟아져 나오는 예술 작품들이 다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본래 정말 좋은 작품은 드물기 마련이니까요. 실제로 미술관에 가보면 좋지 않은 작품들도 많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문제는 점차 해소될 것입니다.저는 이런 전반의 현상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보다 더 많은 예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작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예술 작품들이 대량으로 생산된 적이 없어요.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먹고 살고 있어요.이 숱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중 일부는 장래에 아주 중요하게 평가받을 것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흥미롭지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지금 관심을 모으는 작품이더라도 나중에는 외면당할 수 있다는 뜻)-현대 예술가들 중에는 대놓고 상업성을 내세우거나 사업가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 고흐 같은 예전 화가들은 가난 속에서 자기만의 이상을 추구했던 것 같은데 반해... ▲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글쎄요. 꼭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반 고흐도 예술가이면서 엄연한 사업가였습니다. 예술은 사실 언제나 상업적이었습니다. 루벤스 같은 옛날 화가를 볼까요.그는 17세기 화가였는데 공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수도 있었고. 작품을 만드는 공정 체계가 있었어요. 유럽에서 자신의 작품을 파는 유통망도 있었고요. 일본의 경우에도 과거에도 예술 작품은 상품에 가까웠어요.반 고흐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아주 일찍 사망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의 인생 이야기가 아주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동생 테오를 통해 자기 작품에 대한 사업을 했어요. 아마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크게 성공해서, 동생과 함께 아주 큰 부자가 됐을지도 모르지요.하지만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요. 그래서 더 극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사망 후 10년 뒤부터 그의 작품은 알려지기 시작했고, 20년 후에는 좀 더 유명해졌고, 3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요. 그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여생을 살 수 있었다면 아마도 큰 돈을 벌었을 테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사뭇 달라졌을 거라고 봅니다.-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는 변한 게 없다는 얘기인가요?물론입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변한 게 없어요. 다만 지금은 예술품에 대한 수요가 훨씬 더 많아졌지요. 예술 시장에서의 판매 기회가 어느 때보다 커요. 예술품에 대한 구매 수요가 역대 최대가 된 거지요. 많은 예술가들이 시장을 위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이런 일이 그 전에는 많지 않았어요. 이제 예술가들은 시장을 위해,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작품을 생산합니다. ▲ 왼쪽 그림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년)을 재창조한 제프 월 ‘파괴된 방’(1978년)-오늘날 유명 미술품은 천문학적인 값으로 거래되고 갑부들의 축재 수단이나 투자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마치 금덩어리를 사뒀다가 가격이 올라가면 되팔듯이 하는 풍경도 봅니다. 부유층의 재산 보전이나 탈세, 상속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합니다.역사적으로 부자들은 늘 그래왔습니다. 부자들은 재산 관리에 능숙합니다. 자신의 부를 보존하고 자손에게 안전하게 물려줄 방법을 기어코 찾아내고 맙니다. 세계 어디나 그런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사실 부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지요. 당신이 그런 자리에 있다면 어떨 것 같나요?-예술가들마저 너무 상업적이고 돈에 타락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예술 세계는 타락(corrupt)했습니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술가의 전시회를 가 보면 그 전시관 브로셔에는 찬사 일색입니다. 예술가에 대한 비판은 조금도 없습니다.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리뷰란 것은 대개 칭찬과 함께 비판도 나오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모든 작품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들 뿐입니다.사실은 그럴 수가 없는데도 말이지요. 그게 타락했다는 뜻이지요. 그 이유는 돈 많은 작품 수집가들이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이사회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예술작품 후원가들이자 투자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그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됨으로서 생기는 가치의 수혜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아주 깊이 타락해 있지요. ▲ 데이미언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년(그의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업가정신을 가진 예술가가 되면 업계 다른 사람들처럼 몸을 사리고 편리주의라는 철학을 받아들이는 한편, 이따금 악마와 손을 잡게 된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과 한 배에 오른 이상, 위선을 피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미술관에서 보란 듯 준비한 정찬 모임에 참석했더니 옆자리에 투자은행의 우두머리들이 앉아 있는데 우연하게도 그들은 당신의 작품을 사들이는 수집가이자 고객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심원하면서도 반자본주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최근 25년간 걸출한 작가들은 이 사회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 앞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명성과 돈을 최고로 치는 승자독식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의 없었다. 세계화, 디지털미디어의 영향력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전위적인 예술가들이 가장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시기였을 때에도 분노에 찬 시선보다는 건방진 미소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는 조직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염두에 둔 것이다. 너무도 분명하게 혜택을 누리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이 사회의 부당함을 조망하는 회화나 조소를 만들 수 있겠는가? 본인이 속해 있는 기득권을 비난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 데이미언 허스트 ‘살아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 1991년-예술계가 타락한 상황에서도 좋은 예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인간 존재가 타락해 있지 않은 적이 있던가요? 예술 작품도 인간이 구성하고 제작한 것입니다. 타락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 위대한 예술 작품은 스스로 그것을 넘어섭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타락한 예술 세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합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지요.작품 자체가 진심(sincerity)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흔들림 없이 견고합니다. 그 어떤 것도 훼손할 수 없습니다. 부자 무기상이 샀든 돈 많은 미술상이 부당한 방법으로 샀든 작품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그것과는 무관합니다. 누가 가지고 있든지 위대한 작품은 위대한 작품일 뿐이지요.-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예술을 하려고 해도 집안이 부자여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합니다. 재능 있는 지망생이 경제 사정 때문에 꿈을 꺾기도 합니다.저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다면 결국에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가령 인상주의 화가 모네도 아주 가난했어요. 잭슨 폴록도 마찬가지였고요. 영국의 요즘 유명한 화가들만 봐도 그랬어요. ▲ 한스 나무트 ‘ ‘가을의 리듬’을 그리는 잭슨 폴록, No. 30’ 1950년1990년대 1980년대 후반, 트레이시 예몬, 데미안 허스트, 새러 루커스, 이들 모두가 가난한 집안 배경에서 나고 자랐고 돈이 없이 출발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됐지요.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주 재능있는 예술가가 돈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편입니다. 예술 유통의 체계에 대해 알고 나면 재능을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더 큰 문제는 기성 제도권 미술계의 미적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는지가 결정적이 되지요. 거기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그게 바로 17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기존 콩쿨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 배경이기도 했어요. 그 뒤 구성주의자들이 한 것이나 뒤샹이 한 것이 모두가 제도권에 맞선 것이었어요. 대개는 돈이 없는 것보다 제도권에 의한 검열권 행사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 세라 루커스 ‘계란 프리아 두 개와 케밥’ 1992년 ▲ 트레이시 에민 ‘나와 동침한 모든 사람, 1963~1995’ 1995년-최근 예술계에는 제도권이나 주류에 맞선 움직임이 있나요?물론입니다. 뱅크시(Banksy, 생몰년 미상)는 풍자를 곁들인 스텐실 벽화로 일약 유명인사가 됐지요. 그는 키스하는 경찰, 벽돌담 아래 거리에서 먼지를 쓸고 있는 것 같은 호텔 메이드 등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른바 거리 예술가들이지요.이들은 세계 전역에서 체제 밖에서 활동합니다. 그래피티나 영화 제작 아티스트들입니다. 다른 미디어들을 활용해서 제도권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작품 활동들을 하는데 아주 흥미롭습니다.-뒤샹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거리예술가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책에 썼지요?시장과는 아무런 연줄이 없이 그 밖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거리예술가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잃을 게 없습니다. 과거에는 하층민의 불법 행위로 치부되던 거리예술과 그래피티가 이제는 현대 미술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현대미술품 중 상당수에 뒤샹 특유의 우상파괴적 성격이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JR ‘도시의 주름’ 일부 2011년(그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2008년 테이트 갤러리 건물 북쪽 정면에 세계 각국 예술가들이 제작한 거리예술품 여섯 점이 걸렸다. ‘JR’(생몰년 미상)로 알려진 프랑스인 젊은 예술가의 작품도 포함됐다. 자신을 포토그래퍼(Photograffeur)로 칭하는 JR은 정치적 편향을 보여주는 흑백 이미지들을 제작해 변화인 양 건물에 붙인다. 그의 작품 중 태반은 정식으로 허가받지 않고 전시된다. 공식적으로 청탁 받은 작품도, 돈 많은 후원자가 마련해준 작업실에서 제작됐을 법한 작품도 아니다. 판매도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기업 후원을 받아 제작되는 상업적인 현대미술품과는 대조적이다. 거리예술은 원시시대 동굴벽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디지털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거리예술은 확산성을 가진 네트워크 수단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면서 영향력과 인기를 얻게 됐다.)-동시대 미술의 특징으로 참여를 꼽았는데요.팝 페스티벌이나 심지어 정치 시위 운동인 ‘월가 점령’ 운동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에 대한 반작용 같은데 가상 공간에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페북, 트위터를 통해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과 이야기하며 연결 맺고 대화합니다. 아주 외로운 존재로서, 체험을 공유하려는 아이디어가 예술 형태로 호소력을 갖는 거지요.예술가들도 이 점에 착안해 작품화하고 관람객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요. 그게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고 행위 예술입니다. 작품에 참여해서 그 순간 작품의 일부가 되려는 거지요.-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과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어떤 작품을 볼 때, 가령 어떤 작가가 거대한 어두운 진홍색 바탕에 회색을 그린 그림을 그렸다면, 그 그림을 갤러리에 봤을 때 외로움이나 슬픔을 느낍니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왜냐하면 그 예술가도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다는 얘기니까. 그게 모든 예술 작품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한 개인이 다른 인간 존재와 소통하려고 하는 시각 언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경우에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림에 그려진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생각(idea)을 상대하는 겁니다.-한국에서는 수 년 전에 유명한 큐레이터가 학위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현대 예술에 대한 해설이나 평가는 속임수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깊이 들어가면 모든 예술이 일종의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illusion)이지요. 예술품은 리얼이 아니라 일루션입니다. 캔버스 위에 그린 집은 집이 아니라 캔버스입니다. 집인 척하는 무엇이지요. 거기서 우리가 집을 볼 뿐입니다.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9년모든 예술은 실재(real)인 것처럼 제시되지만 실재는 아니지요.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유명한 그림 ‘이미지의 배반’이 있지요. 여기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This is not a pipe)’라고 쓰여 있지요.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사기라는 말을 함축한 거지요.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지각이니까요.영국 작가 중에 줄리언 반스가 한 말이 있어요. “예술은 아름다운 거짓말의 형식으로 말해지는 정확한 진실이다(art is an exact truth told in the form of beautiful lie).” 멋지지 않나요?-그러면 예술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지요?예술은 그 핵심이 상상력에 의한 아이디어가 됩니다. 개념적인 것(conceptual)이지요. 예술가는 그런 것에 뛰어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뇌의 그런 영역을 활성화하는 데 뛰어난 사람들이지요. 기계가 감히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창의력 말입니다.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화한 세계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들 수 있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아마도 그게 다음 운동이 될 것입니다.앞으로는 예술가가 정치인, 영화제작자, 교사도 되는 거지요. 모든 인간 활동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어떤 것이 좋은 예술인가요? 그 정의는 누가 내리는 거지요?바로 당신한테 달렸지요. 당신 자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당신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게 하고, 당신의 상상과 영혼을 자극하고 활성화하는 게 좋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요.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같이 느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류를, 다른 사람은 저런 류를 좋아할 수 있어요. 그래도 무방합니다. 일정한 잣대는 없습니다. ▲ 제프 쿤스 ‘메이드 인 헤븐’ 1989년-요즘 산업 제품에서도 디자인과 미학을 강조합니다. 디지털 기기들도 예술 작품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가령 아이폰의 미학이 바로 세잔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기하학적으로 재구성된 단순한 진리를 구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한다고 했지요. 그 연장선에서 조너선 아이브(애플의 디자인 최고 책임자)가 애플 기기들을 디자인한 겁니다.그러니까 세잔에서 시작된 추상주의와 미니멀리즘에서 영감을 얻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예술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폰이 예술인 것은 아닙니다. 기능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술 작품은 그 자체 이상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거나 빠르게 작동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존재할 뿐입니다. 창작자의 아이디어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이폰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기술 발달과 디지털 자동화 물결이 거셉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무용해질 거라고들 합니다. 예술은 어떻게 될까요?아직 기계에게는 없지만 우리만 가진 것이 상상력입니다. 뭔가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지요. 이것이 인간을 특별하게 합니다. 그럴 경우 다음 단계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예술가의 사고 방식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건축, 정치, 영화, 비즈니스를 포함해 모든 분야로 말이지요.앞으로는 예술가들의 사고 방식을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필요로 하고 적용하게 될 것입니다. 뒤샹의 생각, 즉 어떤 것이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이 한 차원 올라가는 거지요. 예술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단계로 말입니다. 큰 변화가 될 것입니다.-다음 책을 낼 계획이 있나요? 네, 이제 막 집필을 마쳤습니다. 제목이 ‘What is Creative?’입니다. 예술가들은 창작 과정에서 어떤 사고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다룬 책입니다. 상상력을 활성화하고 구현하는 것, 그것을 좀 더 낫게 하는 방법에 관한 책입니다.첫 책이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번 책은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방법에 관해 썼습니다. (이 기사를 출고하기 직전 아마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그의 책이 올라있었다. 제목이 살짝 바뀌어 있었다. ‘Think Like an Artist’.)◆윌 곰퍼츠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인 영국 테이트 갤러리에서 7년간 디렉터로 지낸 후 지금은 BBC 아트 디렉터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글도 쓰고 있다. 테이트 갤러리에서 일하는 동안 대중에게 현대미술을 보다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코미디쇼를 직접 제작해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선보였다. 현대미술의 대중화 노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BBC 아트 에디터로 발탁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24/2015072403323.html ​ 
  • 2015-07-18
    ​▲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포스트 본사 전경/워싱턴포스트 제공​워싱턴포스트는 미국에서 유력 신문의 대명사다.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그 이름 뒤에는 언제나 ‘워터게이트’라는 훈장이 따라붙는다. 이 특종 보도로 천하의 권력인 미국 대통령이 하야했다.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에 설치된 야당 선거운동본부를 도청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임기 중 불명예 퇴진했다. 언론이 제 4부임을 만방에 과시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워싱턴포스트는 숨가쁘게 변신하고 있다. 급격한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신문산업 퇴조로 한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던 이 신문은 이제 미디어 혁신을 선도하는 디지털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전환점은 베조스의 워싱턴포스트 인수였다. 2013년 8월, 온라인 서점 사업을 필두로 온라인 유통업계를 장악한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Bezos)는 깜짝 발표로 미디어 업계를 놀라게 했다.그는 130년이 넘는 역사의 전통 미디어 워싱턴포스트를 2억5000만달러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사내외를 막론하고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빈사 상태의 신문이 새로운 지원자를 맞아 기사회생하게 됐다는 낙관적인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얼마 남지 않은 관록의 유력지마저 냉혹한 디지털 혁신가의 손에 운명을 넘기게 됐다는 비관 섞인 우려가 들려왔다.그 뒤 2년. 회사 안팎 사람들의 시선은 점차 우려에서 안도로, 의구심에서 기대로 옮겨가고 있다. 베조스의 대대적인 인적, 물적 투자에 뒤이은 내부의 혁신 노력으로 워싱턴포스트는 최첨단 뉴 미디어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디지털 환경 변화에 맞춰 웹페이지와 앱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실험하는 한편, 이제는 자체 개발한 미디어 관련 소프트웨어까지 외부에 팔 정도다.지난달에는 홈페이지 순방문자(unique visitor) 수가 5540만명을 기록, 워싱턴포스트 역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워싱턴포스트 1층 로비 벽면에는 동영상용 웹페이지 포스트 TV, 워싱턴포스트 웹페이지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세 개의 모니터가 나란히 걸려있다./ 워싱턴 DC =윤예나 기자혁신의 현장 워싱턴포스트를 찾아가 봤다. 워싱턴 DC 시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워싱턴포스트 본사는 투박해 보였다. ‘혁신’을 말하기엔 고풍스런 느낌이 완연했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눈 앞 벽면을 뒤덮은 세 개의 모니터가 그나마 ‘요즘 미디어 같다’는 느낌을 줬다. 회사 관계자는 인근에 새 사옥을 짓고 있으며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편집국을 둘러본 뒤 스티브 힐스(Hills, 58) 워싱턴포스트 사장과 만났다. 1987년 워싱턴포스트에 합류한 그는 1993년 광고담당 부사장, 2001년 세일즈 및 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거친 미디어 마케팅 전문가다. 2002년 9월 워싱턴포스트 총괄 사장에 올랐고, 2008년 2월부터는 워싱턴포스트 미디어 그룹 총괄 사장으로 그룹 전체를 이끌고 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을 ‘각 잡아’ 빗어 넘긴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업무용 책상 위로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 파일과 함께 놓인 아이패드가 눈에 띄었다. 그에게 베조스 인수 이후 달라진 워싱턴포스트에 대해 물었다. ▲ 스티브 힐스 워싱턴포스트 사장/ 워싱턴 DC =윤예나 기자―경영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요?물론 베조스의 인수와 그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매우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죠. 그와 동시에 우리가 ‘기술 회사(technology company)’로 성장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습니다.우리가 미디어 기업인 동시에 훌륭한 기술 회사라는 점이 업계에 알려지면서 기존 기술 인력도 힘을 얻었고, 베조스 덕분에 우리는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인력을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베조스가 인수한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요?두 가지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한 가지는 ‘실험’에 대한 의지입니다. 우리 조직 전반에 걸쳐 ‘실험해 보자’는 의지가 강해졌고, 실행 속도도 매우 빨라졌습니다. 또 한 가지는 기술력에 대한 투자, 최고의 기술 인력을 끌어올 수 있는 힘입니다.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베조스가 투자한 덕분에 최고의 기술 인력을 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기술력이 뒷받침하는 덕분에 우리가 하려는 여러 실험도 훨씬 더 수월하게 실행할 수 있게 된 거지요.―베조스가 가장 많이 투자한 분야는 어떤 분야인가요? 구체적인 금액을 밝히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저널리즘과 기술 양쪽 분야에 대한 투자입니다. 양으로나 질로나 모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달 초 워싱턴포스트는 전 세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연결망을 구축하는 ‘탤런트 네트워크(Talent Network)’사업을 발표했다./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캡쳐―디지털 시대 워싱턴포스트의 혁신 전략은 무엇인가요?두 가지 갈래의 혁신 전략이라고 보면 됩니다. 최고의 저널리즘, 최고의 기술이라는 거죠. 지금 세계는 정보의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정보가 소음이고 어떤 정보가 신호인지 알아내기 어려워하죠.무엇을 취사 선택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찾아내야 하는 정보인지, 밝혀내고 보도해야 하는 정보인지 골라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정통 저널리즘에 대한 수요는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또 하나는 최고의 기술을 추구하는 겁니다. 디지털 혁명으로 소비 시장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이 어떤 형태로 뉴스를 소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휴대전화인지, 태블릿 기기인지, 데스크톱 PC인지, 원하는 콘텐츠는 영상인지 글인지 사진인지 말이지요.그걸 파악한 뒤에는 각 기기 환경에 맞춰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고객’의 흥미를 끄는 좋은 콘텐츠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구현하려면 최고의 기술력이 뒷받침돼야 하구요.다른 한 가지 전략을 덧붙인다면 우리 콘텐츠에 접근하는 길을 최대한 다양하게 확보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가능한 많은 회사들과 제휴를 맺고 있습니다. 더 다양한 뉴스 공급 채널을 확보하기 위한 거지요. 그것이 우리 전략의 핵심입니다.▲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모습(사진 왼쪽)과 태블릿에 최적화된 워싱턴포스트의 새로운 앱 실행 화면―아마존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추천 서비스로 잘 알려졌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이런 기술을 적용하고 있습니까?우리는 사내에 빅데이터 연구와 분석을 진행하는 팀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규모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비롯해 대단히 뛰어난 과학자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들이 빅데이터를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연구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빅데이터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 데이터가 보내는 ‘신호’가 달라지고, 어떤 게 강한 신호인지 혹은 약한 신호인지, 혹은 소음인지도 분간해 내야 합니다. 과학은 물론 예술까지 동원해 해석해야 합니다. 이 기사를 읽은 사람은 왜 이걸 읽었는지, 저 기사를 읽은 사람은 왜 저걸 읽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밝혀내는 겁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이제는 사람들이 원하고 찾는 기사가 무엇인지 예측해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기사를 읽은 고객이 다음엔 어떤 기사에 관심을 둘지 선별해서 추천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아마존이 하고 있는 서비스죠. “당신 취향에 맞는 책을 우리가 골라줄게” 하는 식이죠. 소비자는 “이게 뭐야, 나보다 날 더 잘 아네!” 하고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이런 방식은 광고에도 효과적입니다. 광고주들이 이런 종류의 기사를 읽는 사람은 어떤 광고를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특별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이제는 이 분석 결과를 광고 담당자와 함께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기사에 어떤 종류의 광고가 들어가면 적합한지 밝히기 위해 여러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업은 베조스가 인수하기 전부터 고민해온 일입니다. 베조스가 그 중요성을 인정했고, 그 덕분에 그가 온 뒤로 훨씬 제대로 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가 작년 3월 뉴욕에 개설한 웹·디지털 디자인 및 소프트웨어 개발 센터/워싱턴포스트 제공―워싱턴포스트는 지금 ‘디지털 회사’를 자처합니다. 회사 전략에는 얼마나 반영됐나요? 최근 구조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나요?이제는 엔지니어와 광고 담당자들이 나란히 앉아 일합니다. 그 점이 가장 큰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이들이 협력해서 일하면 기자가 기사를 쓰는 단계에서부터 도움이 됩니다. 기사를 쓰기 시작할 때 “이런 종류의 그림이 휴대전화에서 제대로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고 함께 논의하는 거죠. 기자는 기자의 일을 하고, 기술 전문가는 기술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담당하는데, 실전에서 협력하는 겁니다. 기사 작성 절차도 바뀌었습니다. 기사 작성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게 많으니까요. 기사부터 무작정 쓰면 여러 가지 유통 경로에서 잡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고품질의 인포그래픽이 필요한 경우처럼 ‘고객의 경험’을 중시해야 하는 기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행 협력(up-front collaboration)’이 굉장히 중요합니다.전통적인 저널리즘 방식대로 접근해도 괜찮은 게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전략적으로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리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워싱턴포스트가 자체 개발해 판매하는 콘텐츠관리시스템(CMS) ‘ARC’ 소개/워싱턴포스트 제공―이제는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까지 판매하고 있는데요.이런 말을 하면 자랑이 될 지 모르지만(웃음) 우리 기술 팀은 정말 뛰어납니다. 사실 과거에 쓰던 기사 작성 툴(tool)은 디지털 환경에 맞춘 다양한 작업을 실행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죠. 몇 번 요청을 하긴 했어요. “우리 이런 일도 할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아뇨, 지금 가진 기술로는 못합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지요. 그런데 두 달 뒤에 기술 팀 사람들이 와서는 “우리가 새로운 툴을 만들었어요. 이제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다양한 기능을 갖춘 새로운 콘텐츠관리시스템(CMS)을 만들어낸 거예요.오픈소스 방식으로 돼 있어서, 필요한 기능만 조합해서 쓸 수 있는 시스템이지요. 기술팀이 그 뒤 회사 측에 ‘이 소프트웨어를 판매해도 되겠느냐’고 묻기에 승인했고, 제휴한 지역 언론사를 중심으로 판매하게 된 겁니다.―소셜미디어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굉장히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홈페이지 트래픽(방문자 수) 증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입니다. 최근 언론업계에서 이슈로 떠오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소셜미디어에서 많이 공유된 기사가 마치 좋은 콘텐츠의 상징처럼 됐다는 거지요.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우리도 최대한 널리 공유되는 기사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공한’ 소셜미디어와의 제휴가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요. 트위터, 페이스북부터 스냅챗 등 모든 종류의 소셜미디어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어떤 종류의 콘텐츠가 널리 공유되던가요?특정한 유형에 쏠린 게 아니라 여러 유형의 기사가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정통 저널리즘에 충실한 기사가 큰 인기를 끄는데, 또 어떤 때엔 정말 가벼운 콘텐츠가 엄청나게 공유되곤 하거든요. 그래서 확실하게 ‘이런 게 많이 공유되는 콘텐츠’라고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사람들에게 재미를 느끼도록 하면서도, 브랜드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과제입니다. 잠깐 사람들의 눈길만 사로잡고 클릭만 유도하는 기사는 말 그대로 클릭용일뿐, 미디어의 브랜드 가치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7/2015071702375.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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