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09-13
    ▲ 생전 올리버 색스의 모습.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뮤지코필리아’(2008) 표지를 장식했던 사진이다. /알마 제공​ 그는 의사였다. 유대계 영국인이었지만 미국 뉴욕이 주무대였던 신경과 임상의였다. 평생 다양한 증상의 숱한 환자들을 상대했다. 그가 만난 환자는, 적어도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엔가 장애 아니면 결손이 있는 우울한 존재였다.하지만 그와 더불어, 환자는 더 이상 그냥 환자로 머무르지 않았다. 그에게 환자란 남과 다를 뿐인 인간, 어떤 점에서는 남달리 특별한 인간이었다. 매번 그렇게 그는 다가갔고 그들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한껏 세웠다. 묻고 경청했고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그런 후엔 다시 생각하고 쉴새없이 써내려갔다.희대의 스토리텔러,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2015)의 탄생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달 30일 세상을 떴다. 눈의 암이 간까지 퍼진 결과였다. 그의 예고된 소멸 이후 그의 탄생을 다시 말하는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그는 지금은 전 분야에서 표준(normal)이 되다시피한 융합과 통섭의 선구적 실행자였다. 난청에서 색맹으로, 병리학에서 뇌과학으로, 과학에서 인문학으로, 몸에서 마음으로 경계 가로지르기를 쉬지 않았다. 호기심 넘치는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어렵지 않은 화법으로 말을 걸 줄 아는 작가였다. 손 대는 분야에 관한 한 누구 못지 않은 전문가이면서도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썼다.그의 글쓰기와 더불어 신음하고 좌절했던 ‘결손 인간’은 더 이상 소외된 주변인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자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품은 특별한 인간으로 비상했다. 건강과 장애의 이분법적 편견은 힘을 잃었다. 덕분에 인간 일반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깊고 넓어졌다. 한갓 진료실 파일박스에 묻히고 말았을 뻔한 임상 기록은 그의 손끝에서 문학과 경쟁하는 논픽션으로 둔갑했다. 숨이 가빠오던 해까지도 신문에 이어왔던 칼럼의 마지막 회 제목이 ‘안식일’이었다. 그렇게 떠났다. 그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갔지만, 스스로 지울 수 없는 기록이자 세상에 우뚝한 기념비가 됐다. 그는 무엇보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나누기를 즐겨한 인간의 표본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그러니까, 그는 떠나지 않았다.이제 그를 다시 읽는다. 생전에 출간된 그의 주요 저서를 장식했던 서문과 후기,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던 에세이의 반짝이는 대목들을 발췌해 소개한다. 그의 글도 삶도 오랜 누적과 아름다운 진화의 사례임을 알겠다.맨 끝에는 지난 4월 죽기 전 출간된 그의 자서전 ‘On the Move’의 마지막 몇 단락을 옮겨 싣는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했는지 먼 산처럼 다가올 것으로 기대한다.<단행본>편두통(Migraine, 1970)강창래 옮김|알마|630쪽|3만2000원1970년 초판 서문첫 환자를 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편두통을 단지 특이한 종류의 두통이라고만 생각했다. 더 많은 환자를 보면서 두통이 편두통의 유일한 증상도 아니고, 편두통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두통이 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문헌 속을 헤매는 동안 더 잘 알 것 같은 때도 있었고 더 헷갈릴 때도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편두통 환자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어떤 책보다 편두통에 대해 더 잘 설명해주었는데, 1000명이 넘는 환자를 본 뒤에야 비로소 편두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알게 된 많은 병력들은 워낙 복잡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즐거웠다...나는 또 일종의 복안(double-vision)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편두통은 신경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물이며, 동시에 정서적 또는 생물학적 목적을 위해 선택된 전략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몸과 마음은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되풀이해서 보게 될 것이다.1992년 개정판 서문이 책에서는 편두통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정도를 넘어서 건강과 질병에 대해, 그리고 인간은 왜 잠깐 동안이라도 가끔 병들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깊이 다룬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조화에 대해 숙고하고 슬라이드처럼 심신의 상태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 편두통을 고찰한다.깨어남(Awakenings, 1973)1973년 초판 서문나의 목표는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낸다거나 환자들을 이론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또는 세계의 다양함, 즉 이들 환자가 머무는 세계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런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통계적이고 체계적인 논술이 아니라 다양한 개념과 견해와 부딪치며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이 책을 관통하는 형이상학적인 화두가 있는데, 병을 순전히 기술적으로 혹은 화학적인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불충분하며 생물학적인 관점과 형이상학적인 관점, 즉 구조(organization)와 의도(design)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변화를 거부하는 습관의 위력(모든 사고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은 가장 복잡한 고통과 장애를 다루는 학문인 의학에서 극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안의 가장 뿌리 깊고 어둡고 두려운 부분, 우리 모두가 부인하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부분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1990년판 개정판 서문나는 늘 환자들과 함께하면서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도 메모하게 하고 나도 하루에 수천 단어 씩 써서 방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한 손에 펜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일이 나의 임무이자 기쁨이었다…처음에 나는 우리 환자들의 ‘사연’, 그들의 삶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에 크게 주저했다. 그러나 오히려 환자들이 나를 격려해주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해줘요. 안 그러면 영영 알려지지 않을 테니까요.”몇 사람은 아직까지 살아 있고, 알고 지낸 지도 스물네 해가 되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펼쳐진 차트와 편지 속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와 마주 보고 있다. 내게 그들은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살아 있다. 그들은 환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사이자 친구였으며, 그들과 함께한 세월은 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그들의 삶과 존재가 인간에게 닥치는 역경과 생조을 위한 투쟁의 본보기로 간직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특수한 사건의 증언이며 유일한 증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우화가 될 수도 있다.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A Leg to Stand On, 1984)김승욱 옮김|알마|290쪽|1만5000원1984년 초판 서문의학이 발전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질병과 부상 그리고 환자다. 이 책의 계기가 된 것은 어느 특별한 부상, 아니 적어도 특별한 효과를 지닌, 노르웨이의 산에서 벌어진 사고로 발생한 부상이었다. 직업이 의사인 나는 그때까지 환자가 되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그 사고 덕분에 의사이자 동시에 환자가 되었다. 나는 나의 부상(한쪽 다리의 근육과 신경이 심하게 손상되기는 했지만 복합적인 증상은 없었다)이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1991년판 후기1984년 1월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원고를 막 완성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사고를 당했다… (앞서 사고가 난) 1974년 나는 척수마취로 수술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같은 요청을 했는데,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척수마취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나는 다리, 즉 하반신의 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다리와 엉덩이가 수술대 위의 거울로 분명히 보이는데도, 그것이 ‘내 것’ 이라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런 현상에 겁을 먹기보다는 오히려 매료되었는데, 내가 오래 전에 반대편 다리로 경험했던 낯설어짐 현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10년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왜?”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운동능력과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지고, 다리 전체의 개념이 사라지는 현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현상들은 무시무시했고 내게 상처를 남겼으며, 깊은 걱정과 숙고의 주제가 되었다…우리가 결코 기계나 자동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은 옛날부터 직관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의 모든 경험, 모든 감각은 처음부터 자기참조적이며, 우리의 기억은 컴퓨터의 기억과는 전혀 다르다... 기계적인 모델의 기원은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몸’과 ‘영혼’을 구분했으며, 몸을 자동인형으로 보고 그 위에 지식과 의지를 지닌 ‘나’가 둥둥 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임상경험과 개인적인 경험, 즉 내가 이 책에서 밝힌 것과 같은 경험들은 이런 이분법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이는 고전적인 모델이 파탄 상태라는 것과 개인적인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우리의 신경과 뇌가 처음부터 우리 것이며, 그것이 인식하고 분류하고 기억하는 것들과 모델들, 그리고 새로이 떠오르는 개념과 의식이 모두 우리 것이고 철저히 자기참조적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기계적이고 ‘고전적인’ 모델에서 완전히 개인적이고 자기참조적인 뇌와 정신의 모델로 크게 도약하는 것은 이제 신경학의 몫이다.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and Other Clinical Tales, 1985)조석현 옮김|이마고|444쪽|1만4800원서문내 직업, 아니 내 삶은 병든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환자 그리고 그들이 걸린 병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나는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이제 나는 니체가 제기한 질문을 버릇처럼 입에 담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병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환자를 접하다 보면 의문이 끊임없이 샘솟았고,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환자 곁으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병력은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병력은 질병에 걸렸지만 그것을 이기려고 싸우는 당사자 그리고 그가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고전 속에서 영웅, 희생자, 순교자, 전사들의 원형을 만난다. 신경학의 환자도 다종다양하며, 우리는 그러한 인간의 모든 원형과 마주친다. 우리의 경험은 고전의 세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 담긴 기묘한 이야기 중에는 고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이 책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우리로서는 그런 불가사의한 나라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고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그 때문에 임상보고뿐 아니라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과학적인 것과 신비로운 것이 함께 얼굴을 내민다. 사실과 꿈 같은 이야기의 뒤얽힘. 이 책에 등장하는 환자들의 생애를 특징짓는 것은 그 둘의 뒤얽힘이다.▲ 1957년 영국 런던 센트럴 미들섹스 병원에서 의과생 동료들과 찍은 사진. 맨 가운데가 올리버 색스 /알마 제공목소리를 보았네(Seeing Voices, 1989)김승욱 옮김|알마|238쪽|1만3000원서문청각장애인들의 세계와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인 수화에 관한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새로운 탐구에 대한 의욕을 느꼈다… 수화와 청각장애인들의 상황을 연구하는 훌륭한 학자들도 만나보았다. 뛰어나고 헌신적인 그들에게서 나는 아무도 탐구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열정과 흥분을 느꼈다.이러한 탐구 덕분에 나는 언어에 대해서, 말하기와 가르치기의 본질에 대해서, 아동발달에 대해서, 신경계의 발달과 기능에 대해서, 공동체와 세계와 문화의 형성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내게 배움의 기회이자 기쁨이었다...나는 청각장애인들의 ‘의학적’ 상태를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들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독특한 언어, 감수성, 자기들만의 문화를 지니고 있다.선천적인 장애인의 비율은 인구의 약 0.1퍼센트밖에 안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로 인해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여러 가지 사항들은 대단히 폭넓고 심오한 의미를 지닌 문제들을 제기한다.청각장애인에 관한 연구들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징들, 즉 언어구사 능력, 사고력, 의사소통 능력, 문화적 능력 등이 자동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생물학적인 기능도 아님을 보여준다.그런 능력들의 기원에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면도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런 능력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선물,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선물이다.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문화가 천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시각적인 언어인 수화의 존재, 그리고 수화를 습득하면 따라오는 지각능력과 시각적 지능의 놀라운 발전은 뇌가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든 잠재력을 풍부하게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이라는 유기체와 신경계가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려서 반드시 적응해야 할 때 거의 무한한 유연성과 수완을 발휘한다는 것도 보여준다.화성의 인류학자(An Anthropoligist on Mars, 1995)이은선 옮김|바다출판사|440쪽|1만5000원서문의사인 내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자연의 풍요로움은 건강과 질병의 측면,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어떤 사람은 발달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이로 인해 특정 궤도나 행동양식이 파괴되면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어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인다…뇌는 색채와 운동 지각에서부터 개인의 지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지각과 행동의 온갖 측면을 담당하는 수백 개의 조그만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뇌가 어떤 식으로 협력하고 하나로 뭉쳐 자아를 형성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이 책에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뜻밖의 충돌을 빚은 일곱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곱 명의 주인공은 의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이들은 인간 특유의 놀라운(때로는 위험한) 복원력과 적응력을 통해 180도 달라진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했다… 정체성은 단순하게 보존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달라진 뇌와 ‘현실’에 적응하고 변화한다.색맹의 섬(The Island of the Colorblind, 1997)이민아 옮김|이마고|400쪽|1만4000원머리말: 어느 자연주의자의 우연한 여행이 책은 사실 두 권으로, 두 차례의 미크로네시아 여행을 각각 기록한 별개의 이야기다. 불시에 이루어진 이들 섬 방문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계획의 일부도, 어떤 논문을 증명 혹은 반증하려는 것도 아닌, 순수하게 관찰을 위한 것이었다. 충동적이고 무계획한 여행이었지만 섬에서 얻은 경험은 강렬하고 풍부했으며, 계속해서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지를 쳐나갔다.나는 신경의 혹은 신경인류학자로서 희귀한 풍토병(핀지랩과 폰페이에서는 유전적 전색맹, 괌과 로타에서는 치명적인 진행성 신경퇴행성 장애)에 주민 개개인이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 싶었다.그러나 나는 이들 섬의 문화와 역사,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동식물군, 독특한 지질학적 기원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환자를 만나고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하고 열대우림 속을 거닐고 암초 밑을 헤엄쳐다니고 하는 것이 처음에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았지만 점차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경험, 섬의 삶 자체로 녹아들었다.그러나 그 행위들의 연관성과 의미(혹은 의미의 일부)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 경험을 회상하고 또 곰곰 생각하면서 비로소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경험을 글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지난 몇 달 동안 글을 쓰면서 나는 기억 속에서 그 섬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또 그래야 했다.기억이란 에들먼의 말마따나 단순히 기록이나 재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범주를 재구성 -자신의 가치관과 관점에 따라 새로이 구성하고 상상- 하는 능동적인 행위인즉 기억 속에서 나는 이 여행을 재창조했으며, 어찌 보면 나는 내가 평생 간직해온 섬 사랑, 섬 식물 사랑에 심취하여 이들 섬을 괴짜스러울 수도 있는 내 개인 취향에 끼워맞춰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동물과 식물을 유달리 좋아했는데, 처음 이러한 생명 사랑을 키워준 것은 어머니와 이모였고, 다음으로는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들 그리고 그런 열정을 함께했던 학교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채집통을 등에 둘러메고 식물을 채집하러 나갔고, 이른 아침 냇물 탐험을 나가기도 했고, 해마다 봄철에는 보름간 밀포트로 해양식물 탐사를 나가곤 했다. 우리는 좋은 책을 찾아내 돌려 읽기도 했다…미크로네시아 여행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와 40년 동안 함께 해왔던 옛 책들, 오랜 관심사들과 열정들을 돌이켜보았고, 그것은 뒤이어 갖게 되었던 관심사들, 말하자면 의사로서의 본분과 결합되었다.엉클 텅스텐(Uncle Tungsten, Memories of a Chemical Boyhood, 2001)이은선 옮김|바다출판사|358쪽|1만1800원본문나는 열네 살때부터 장차 의사가 되는 게 ‘기정사실’로 굳어 있었다. 의사인 부모님과 의과 대학에 다니는 형제들을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과학에 푹 빠진 나를 나무라기는커녕 기특하게 여겼지만 이제 취미생활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1920년대 중반, ‘새로운’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전자는 궤도를 드는 작은 입자가 아니라 파동으로 인식이 되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어디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 ‘파동 함수’만 말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제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었다. 전자는 어디에나 있되 아무 데도 없는 존재였다. 새로운 양자역학이 등장한 이후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화학과 과학을 좋아한 이유는 확실하고 체계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사라져버린 셈이었다…1997년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을 무렵, 내가 어렸을 적에 화학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있는, 198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로알드 호프만(몇 년 전 그의 ‘상상의 화학’을 읽은 뒤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이 재미있는 소포를 보내왔다. 꾸러미 안에는 각 원소의 사진이 담긴 대형 주기율표와 직접 주문할 수 있는 화학용품 카탈로그가 들어 있었고, 꾸러미를 열자마자 매우 밀도가 높은 회색 금속 막대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는 프루스트의 기억법 역할을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윙칼라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텅스텐 가루로 까맣게 된 손을 놀리며 실험실에 앉아 있는 텅스텐 삼촌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뒤로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백열전구를 만들던 삼촌의 공장, 오래된 백열 전구와 중금속, 광물을 모아놓은 진열장, 삼촌에게 끌려 금속학과 화학이라는 놀라운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던 열 살 무렵의 내 모습…나는 텅스텐 삼촌을 소재로 짧은 글을 남길 생각이었지만 한번 봇물이 터진 기억은 끊길 줄 몰랐다. 이제는 텅스텐 삼촌뿐만 아니라 50여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결국에는 한 페이지로 시작했던 작업이 4년 동안의 방대한 발굴 작업을 거쳐 200만 단어로 확대됐고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오악사카 저널(Oaxaca Journal, 2002)김승욱 옮김|알마|212쪽|1만 2000원서문사실 나는 열네 살 때부터 일기를 쓰고 있다. 오악사카에 다녀온 뒤 1년 반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그린란드와 쿠바에 다녀왔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화석을 찾아다녔으며, 과달루페에서 기묘한 신경학적 증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 중에도 일기를 썼다…나는 왜 일기를 쓰는 걸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는 것, 내가 받은 인상을 정리해서 일종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특히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거나 자서전이나 소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야기를 변형시키지 않고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인지 모르겠다. 나는 애당초 책으로 출판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이런 여행 일기를 쓴다.뮤지코필리아(Musicophilia, 2008)장호연 옮김|알마|574쪽|1만9800원서문음악에는 개념도 없고, 내용도 없다. 이미지나 상징 같은 언어적 요소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뭔가를 표현하는 능력이 없다. 이 세상과 반드시 무슨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음악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 속에 워낙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선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스티븐 핑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는 우리의 음악적 능력이 -적어도 일부는- 다른 목적을 위해 이미 개발된 뇌 체계를 슬쩍 가져다 씀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인간의 음악적 능력과 감수성의 어디까지가 타고난 것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능력의 부산물이냐 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모든 문화에서 기초이자 중심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내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써야겠다고 처음으로 마음먹은 것은 1966년이었다. 심한 파키슨병 환자에게 음악이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한 나는 나중에 ‘깨어남(Awakenings)’에서 그 이야기를 썼다. 그 뒤로 음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내 주목을 끌었고, 뇌 기능의 거의 모든 측면과 삶 그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내가 무엇보다 주력한 것은 환자와 실험 참가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경험한 것을 상상하며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마음의 눈(The Mind’s Eye, 2010)이민아 옮김|알마|288쪽|1만7500원서문나는 의사와 의학에 대한 이야기가 넘치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와 형들은 일반의였고, 어머니는 외과의였으니까. 저녁 식사 때면 의료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지만, ‘사례’ 보고로만 끝나는 일은 없었다. 환자의 이야기가 이런저런 사례로 나오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대화는 질환이나 부상, 스트레스나 불운에 맞서는 사람들의 과정을 추적하는 전기로 발전하곤 했다. 어쩌면 내가 의사이자 이야기꾼이 된 것도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나의 병례사는 일반적으로 일반적으로 우연한 만남이나 한 통의 편지 또는 진료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주로 양로원에서 일하는 일반 신경의로서,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수천 명의 환자와 만났다. 환자들 모두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들과 만나는 일을 좋아했다…나는 환자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들의 경험에 대한 생각을 되도록이면 빠짐없이 임상 노트에 기록하려 최선을 다한다. 더러는 환자의 허락을 얻어서 그러한 메모가 에세이로 진화하기도 한다.환각(Hallucinations, 2012)김한영 옮김|알마|380쪽|1만7500원서문인간의 정신적 활동과 문화에서 환각은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실제로 환각적 경험이 예술, 민속, 더 나아가 종교의 발생에 어느 정도까지 기여했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편두통과 그 밖의 질환에서 나타나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호주 원주민의 모티프를 만들어 낸 재료가 아니었을까? 소인 환각(드물지 않다)이 동화 속의 엘프, 꼬마 도깨비, 레프러콘, 요정 등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악몽을 꿀 때 악한 존재에게 쫓기거나 목이 졸리는 식의 무서운 환각이 악마와 마녀 또는 나쁜 외계인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것과 같은 ‘무아경’ 발작은 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에 일조한 것이 아닐까? 유체이탈 체험 때문에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다는 느낌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환각의 비실재성이 유령과 혼령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화는 환각성 약물을 찾고, 무엇보다 신성한 목적에 그것을 이용할까?<뉴욕타임스 칼럼>▲ 1988년 베스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진료 중인 모습 /알마 제공올해는 생각을 바꾸세요(This Year, Change Your Mind) /2010년 12월 31일우리 뇌의 어떤 영역은 태어날 때나 어린 시절부터 단단히 결정지어져 있다. 반면에 다른 영역 -특히 감각과 운동 기능은 물론 언어와 사고 같은 보다 높은 인지 능력에 중추적인 대뇌피질에 속하는 영역- 은 나이가 들어가는 중에도 눈에 띌 정도로 바꿔나갈 수 있다.실제로 뇌가 손상을 입고 난 후에 보여주는 회복력은 놀라울 정도다. 심지어 시각이나 청각을 잃는 정도의 지독한 손상을 입었을 때도 그렇다. 내가 신경학적인 제약조건들을 가진 환자들을 다루는 외과의사이다 보니 그런 경우를 늘 보게 된다…그런 뇌의 신비하고 예사롭지 않은 학습과 적응, 성장 능력을 끌어내보겠다고 일부러 여러분이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이 돼볼 필요는 없다. 나는 뇌졸중이나 파킨슨씨병, 심지어 치매와 같은 다양한 장애를 가진 많은 환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새로운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고 그런 장애를 우회해서 적응하는 것을 봐왔다…뇌가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하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감각이나 인지 혹은 동작 능력을 잃은 사람이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환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일상 생활에서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학습이란 어릴 때 하면 더 쉽다는 말은 맞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날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우리가 오래 전에 익힌 기술을 연습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뇌에 있는 신경의 기존 연결은 강화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뉴런(신경 단위)들은 다른 뉴런과의 연결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심지어 새로운 신경세포들이 생성될 수도 있다…음악은 특히 (뇌 신경의 연결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특히 연주할 때에는 뇌의 수많은 상이한 영역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 관여하는 뇌의 다양한 영역들은 서로 죽이 맞아야 한다: 악보를 읽는 데서부터 손의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것, 리듬과 음조를 가늠하고 표현하는 것, 음악을 기억과 감정에 연결시키는 것에 이르기까지…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든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한다든가, 양봉에 대한 열정을 길러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오래된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해본다는가 하는 식으로, 우리 모두가 다가오는 새해는 물론 그 후로도 뇌가 성장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육체적인 활동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처럼, 뇌도 도전적인 과제를 부여해서 늘 깨어있고 활동하게 하고, 탄력적이면서도 쾌활한 상태로 유지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일 뿐 아니라 인지력의 피트니스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노년의 기쁨 - 농담 아님(The Joy of Old Age - No Kidding) /2013년 7월 6일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떤 것은 아름다웠고 어떤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또한 나는 10여 권의 책을 쓰고, 친구와 동료, 독자 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지를 받은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세상과의 소통(an intercourse with the world)’이라 부른 것을 누릴 수 있었던 데 대해서도 감사한다.반면, 나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한(여전히 낭비하고 있다) 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또한 나는 80세인 지금도 스무 살 때와 똑같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모국어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것도 그렇고, 다른 문화권으로 여행이나 경험을 더 많이 못해본 것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나는 사후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믿음도 (바람도) 없다. 내가 죽고 난 후에는 그저 친구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거나, 내 책 일부가 남아서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나의 부친은 94세까지 살았다. 그는 종종 80대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즐길 만한 10년 중의 하나였다고 했다. 그는 이 연령대가 되면 정신적인 삶과 시야가 오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고 느꼈다. 내가 지금 바로 그렇게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이맘때면 누구나 인생 경험이 아주 길게 쌓인다. 그 경험에는 자기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포함된다. 이 나이에 이른 사람은 그동안 살면서 영광과 비극, 호황과 불황, 혁명과 전쟁, 위대한 성취와 깊은 불확실성을 다 봐왔고, 거대한 이론들이 승했다가 완고한 사실들 앞에서 무너지는 것도 봐왔다. 아름다움마저도 일시적이며 덧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나는 노년을 인생에서 어떻게든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우울한 시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가와 자유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나이가 되면 그보다 젊었던 시절의 부자연스런 조급함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고, 평생의 생각과 느낌들을 함께 묶어낼 수도 있다. 나는 80세가 되는 날을 고대한다.▲ 2010년 작가, 예술가들을 위한 시설인 뉴욕주 블루 마운틴 센터에서 집필 중인 모습 /알마 제공나 자신의 인생(My Own Life) /2015년 2월 19일9년 전 내 눈에서 드문 종양인 안구흑색종이 발견됐다.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방사선과 레이저 시술 끝에 결국 그 눈은 시력을 잃었다. 안구흑색종의 경우 전이율이 50%쯤 되는데, 내 경우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전이가 되고 말았으니) 불운한 경우에 속한다.그래도 처음 진단을 받은 후 9년 동안이나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가오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 암세포는 내 간의 3분의 1을 차지한 상태다. 전이 속도를 낮출 수는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암은 막을 수는 없다.이제 내게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내게 달렸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풍요롭게, 깊이,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흄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그는 65세에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1776년 4월 어느 날 하루 만에 짧은 자서전을 썼다. 그는 제목을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붙였다...흄의 에세이에서 특히 옳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한 줄은 이것이다.“나는 지금처럼 인생에서 멀찍이 떨어져 관조해본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내 인생을 아주 높은 고도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풍경이었고, 모든 부분들이 한데 연결되어 깊은 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여기서 끝이라는 뜻은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지금 내가 살아있음을 아주 강렬하게 느낀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우정을 더 깊게 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더 많이 쓰고, 여력이 있는 한 여행을 하고, 새로운 수준의 이해와 통찰을 얻기를 원하고 바란다...사람이 죽고 나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다.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남길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독특한 개인이며, 자기만의 길을 찾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신의 죽음을 맞는 것이 -유전적인 동시에 뇌신경 측면에서도- 운명이기 때문이다.나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배적인 느낌은 감사함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많이 받았고 얼마간 되갚았다;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 작가와 독자의 특별한 교제를 누렸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느끼는 존재이면서 생각하는 동물이었다. 그것 자체가 막대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2006년 페루 마추픽추에 올라 일기를 쓰는 모습 /알마 제공나의 주기율표(My Periodic Table) /2015년 7월 24일나는 내 친구 케이트와 앨런에게 “내가 숨질 때 그런 하늘(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다시 봤음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밖으로 휠체어를 끌고 나갈게”라고 했다.지난 2월 내가 전이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해 쓰고 난 후 받은 수백 통의 편지를 통해 나는 위안을 얻었다. 그것들은 사랑과 감사의 표시였고,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좋은 삶 그리고 쓸모있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쁘고 감사한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날 밤 별이 가득했던 하늘만큼 내 마음에 강하게 와닿지는 않았다.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상실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잃는 것- 에 대처하는 방편으로 비인간적인 것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무렵 여섯 살의 나이로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보내졌을 때는 숫자가 내 친구였다; 열 살이 되어 런던에 돌아왔을 때는 화학원소들과 주기율표가 내 단짝이 됐다. 살아오는 동안 힘든 시기가 찾아올 때마다 물리학으로 향하거나 되돌아갔다. 그곳은 삶도 없지만 죽음도 없는 영역이었다…내 책상 위에 납덩이를 모아놓은 곳 바로 옆이 비스무트(질소족의 금속 광물) 지대다: 호주에서 자연 생성된 비스무트; 볼리비아 광산에서 나온 것으로 만든 작은 리무진 모양의 비스무트… 비스무트는 원소번호가 83번이다. 나는 83번째 생일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 주변에 ‘83’이 있으니 희망적이고 용기를 주는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더구나 금속 애호가들조차 종종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이 수수한 회색 금속 비스무트에 나는 각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잘못 대하거나 홀대하는 이들에 대해 의사로서 갖는 내 느낌은 무기물의 세계로까지 확장되면서 비스무트에 대한 감정에서도 같은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안식일(Sabbath) /2015년 8월 14일1960년 의사 자격증을 땄을 때, 나는 홀연히 영국과 그곳에 있던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신세계(미국)로 갔다.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머슬 비치의 ‘몸짱’들 무리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UCLA 신경과 레지던트 동료들과도 어울렸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좀 더 깊은 연결 -’의미’- 을 갈망했고, 그것을 찾지 못한 나머지 결국 암페타민(각성제)에 중독돼 자살 지경까지 갔다. 1960년대의 일이었다.재활이 서서히 시작되면서, 나는 뉴욕 브롱크스의 만성환자 요양 병원에서 의미있는 일을 찾았다. 나는 그곳 환자들에게 매료됐고, 그들을 전심전력으로 돌봤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내 사명 같은 것으로 느꼈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상황들이란 일반 대중은 물론, 상당수 내 동료들조차 사실상 몰랐거나 상상조차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나는 거기서 내 소명을 발견했고, 미친듯이 일념으로 몰두했다. 동료들의 격려라고는 없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의료계의 서사 전통이 멸종되다시피한 그 때에 나는 부지불식간에 스토리텔러가 됐다.이제 몸은 쇠약해지고 숨은 짧아졌으며, 한때 단단했던 근육들도 암 때문에 녹아내린 지금, 내 머리 속의 생각들은 점점 더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것보다는, 무엇이 좋은 삶이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 내 안의 평화로움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머물러 있다.나의 생각은 이제 한 주의 일곱 번째 날이자 아마도 인생의 일곱 번째(마지막) 날이 될, 안식의 날, 안식일(the Sabbath)로 흘러가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일이 다 끝났다고 느낄 수 있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쉴 수도 있는 그 시간 속으로.2015년 4월에 출간된 자서전 ‘On the Move: A Life’본문 마지막 부분사람들은 소년 시절 나를 ‘잉크투성이’(Inky)라고 불렀다. 지금도 나는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잉크 얼룩이 묻어있는 것 같다. 나는 열네 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드디어 천 편이 다 돼간다. 내 일기장의 형태와 크기는, 늘 갖고 다니는 작은 포켓용 노트부터 큼지막한 공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도 늘 노트를 놔둔다. 밤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물론 꿈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나는 수영장 풀이나 호숫가, 해변에 갔을 때도 곁에다 메모장을 두려고 애쓴다; 수영을 하다가도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나 단락 형태로 생각이 떠오를 때를 대비해서 그래야 한다. 실제로 이따금씩 그런 식으로 떠오르기도 한다.내 책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쓸 때만 해도 나는 1974년 내가 다쳐서 환자 신세가 됐을 때 써내려간 상세한 일기 기록에 많이 의존했다. 다른 책 ‘오악사카 저널’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손으로 쓴 공책에 크게 의존했다.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평생 기록한 훨씬 더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다시 꺼내보는 일은 드물다. 글을 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내 생각과 느낌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는 내 정신 생활의 중추적인 부분이다; 또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모양도 갖춰간다.내 일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것은 내게는 특별한, 필수불가결한 형식의 독백이다.종이 위에 뭔가를 써가면서 생각해야 할 때는 비단 공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봉투 뒷면, 메뉴판, 손에 잡히는 종이라면 뭐든지 쓴다. 나는 종종 내가 좋아하는 인용구를 옮겨쓴 후 밝은 빛깔의 쪽지에 필기나 타이핑을 해서 게시판에다 핀으로 꽂아 둔다. 시티아일랜드에 살 때 내 사무실은 인용문으로 가득했고, 책상 위로 드리운 커튼 막대에 매단 바인더 고리로 둘러싸여 있었다.서신 교환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 즉 특정한 타인과의 소통(intercourse)이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글 쓰기’가 불가능할 때도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쓰기(Writing)’가 무엇을 뜻하든 간에.나는 내가 받은 편지는 물론 내가 보낸 편지 사본도 다 보관한다. 지금 내 인생의 부분들 -가령 내가 1960년 미국에 온 아주 결정적인 중대사 같은 것- 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중에 이 오랜 편지들은 대단한 보물, 그러니까 기억과 환상의 속임수에 대한 교정자가 돼준다.막대한 분량으로 써댄 기록들은 내 임상 노트로 남았다. 그런 기록이 수 년 동안 쌓였다.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의 환자 500명, 리틀 시스터즈 요양원의 주민 300명, 브롱크스 주립 병원을 왕래한 환자 수천 명을 상대하면서 연간 천 편은 족히 넘는 노트를 수십 년간 써나갔다. 나는 그것을 즐겼다; 내 노트들은 길고 상세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가끔씩 소설처럼 읽힌다고 말했다.나는 좋든 나쁘든 이야기꾼(storyteller)이다. 추측건대 이야기, 그러니까 서사에 대한 느낌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다. 우리의 언어 능력과 자아 의식 그리고 자전적인 기억은 함께 가는 것이다.글을 쓰는 행위는, 잘 써지기만 한다면,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내게 준다. 글쓰기는 나를 이 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데, 무엇에 대해서 쓰든지간에, 그곳에서는 완전히 몰입할 수 있어서, 내 주의를 뺏는 다른 생각과 걱정, 상념을 잊게 해준다.심지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그런 드문, 천상의 정신 상태에서 나는 종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럴 때쯤이면 비로소 저녁이 찾아오고 내가 하루종일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평생에 걸쳐 나는 수없이 많은 글을 써왔다. 그럼에도 글 쓰기는 여전히 내게 새롭고, 많은 즐거움을 주는 것만 같다. 내가 근 70년 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올리버 색스1933년 영국 런던 출생. 옥스퍼드대 퀸스칼리지에서 의학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와 UCLA에서 레지던트 생활. 1965년 뉴욕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베스에이브러햄병원에서 신경과 전문의로 근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대와 뉴욕대를 거쳐 컬럼비아대 신경정신과 임상 교수, 영국 워릭대 객원교수, 뉴욕대 의대 신경학과 교수 등 역임. 2015년 8월 30일 별세.신경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만난 환자들의 사연을 책으로 펴내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에 관한 이야기로 호평받았다. 2002년 록펠러대학으로부터 과학에 관한 탁월한 저술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루이스 토머스 상’ 수상. 모교인 옥스퍼드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저서로 ‘오악사카 저널’ ‘목소리를 보았네’ ‘나는 침대에서 다리를 주웠다’ ‘깨어남’ ‘뮤지코필리아’ ‘편두통’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엉클 텅스텐’ ‘환각’ 등이 있다.<올리버 색스 저술 연표>▲ 알마 출판사 제공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1/2015091102579.html?main_issue 
  • 2015-09-05
    ​​▲ ‘그래서 나는 오늘 외국어를 시작했다’ 저자 추스잉 / 추스잉 제공“외국어를 배우지 않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낭비다. 마치 바닷가에서 싱싱한 성게가 널려 있는데도 어떻게 먹는지 몰라서 쳐다보기만 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칼과 지식의 종합체다. 언어를 도구로 사용해 문화를 감싸고 있는 뾰족한 가시와 단단한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면 환상적인 속살과 마주할 수 있다.”“많은 사람들이 외국어 공부를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몇 가지 언어를 할 수 있으면 인생이 다채로워진다. 초고속 무선광대역 네트워크가 깔려 있고 수많은 사이트로 가득 채워진 인터넷 세상에서 한 군데에만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외국어를 알면 그만큼 삶이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누가 모를까.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신있게 늘어놓는 사람은 조금 얄밉기까지 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만의 NGO활동가 추스잉(褚士瑩). 그는 10개 언어를 안다. 중국어는 물론 영어, 일본어, 한국어, 태국어, 위구르어, 광둥어, 말레이시아어, 미얀마어, 아랍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까지 동서를 오간다.이 중에는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현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수준에 그치는 말도 있다. 그래도 쉴 새 없이 배우고 말한다. 그가 그동안 익혀온 다양한 외국어 학습의 비결을 담은 책이 최근 ‘그래서 나는 오늘 외국어를 시작했다’(추수밭)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2013년 대만에서 ‘게이쯔지더스탕와이위커(給自己的10堂外語課, 나를 위한 10번의 외국어 수업)’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다.대만에 있는 그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외국어 실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지요?학창 시절에 싱가포르, 이집트, 미국에서 공부 했고 나중에 태국에서 퇴직을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방콕의 어학 학교에서도 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업무와 일상생활에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위주로 사용했습니다.지난 10여 년간 국제 NGO에서 근무하며 시골 마을에서 개발 업무를 하면서 업무상의 필요로 인해 3개월 내에 현지의 새로운 소수민족 언어를 익혀야 하는 일이 잦았어요. 그래서 위구르어부터 미얀마 샨주(Shan State)의 파이어(擺夷語)까지 배웠죠. 합치면 10여 종의 언어가 되지만, 그 모든 언어에 ‘능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제 필요를 충족시킬만큼은 됩니다. 언어는 많이 배운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요. 필요도 없는데 어학 자격시험만을 위해, 혹은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태국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입니다. 노점상들이 처음에는 제게 영어나 일본어로 호객 행위를 했어요. 하지만 제가 얼마간 태국어를 배우고 난 후에는 거리의 사람들이 제게 태국어로 말을 걸더군요.한 번은 어떤 단어가 태국어로 생각이 안 나 영어가 튀어나왔어요. 그러자 태국 어르신이 화를 내면서 이래요. “요즘 젊은 것들은 왜 굳이 태국어에 영어를 섞어 쓰는 거야! 돼먹지 못하게!”‘아! 드디어 됐구나!’ 싶더군요. 현지인과 생활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언어에 ‘능통’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기간에 외국어를 효과적으로 익힐 수 있는 비결이 뭐지요?옹알옹알 말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아기들은 한 단어를 익히면 소중한 보물을 얻기라도 한 듯이 그 단어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적용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최대한 그 단어를 사용하지요. 문법이나 단어, 문형을 완벽히 따진 후에야 입을 열고 첫 마디를 떼는 일은 절대 없지요.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언어 습득’의 상태입니다. NGO의 일선에서 일하다 보니, 저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마다 제 자신이 생활과 업무에서 어떤 어휘와 문형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교과서 진도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요. 제 경우엔 “이것은 연필입니다”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출혈성 뎅기열이요? 제가 죽나요?”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죠. 저는 업무와 생활에서 만날 법한 실제 상황을 떠올려서 익혀야 할 단어, 문법과 문형을 먼저 정리합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에게 제가 필요한 내용대로 수업을 해 달라고 말씀드려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식으로 그 안에서 이리저리 응용을 해봅니다.그런 식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교과서 진도에 의존했을 때는 10년이 지나도 익히지 못했을 매우 유용한 내용들을 배우게 됩니다. 각자 언어를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내게 ‘필요한’ 수준에 금방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투자해야 할까요?사람마다 학습 능력이 다르겠지요. 제 경험을 살펴보면 하루 두 시간씩 공부하면 100일 후에는 어느 정도 기초를 다질 수 있습니다. 영국 런던대학교의 소아즈(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에서 오래 강의한 교수이기도 한 제 미얀마어 선생님은 집중반을 개설해서 외교 인력과 국제 NGO 활동가들을 교육하면서 수업 시간을 최대 하루 두 시간으로 잡으셨어요.학생들은 매일 수업 진도를 따라가느라 정신 없었죠. 더 욕심을 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주 5일 공부하는 식으로 한다면 저한테는 벅찹니다. 하루에 최소 여덟 시간은 어학을 연습해야 하는데, 이러면 밥 먹고 잠 자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지요. 중요한 건 날마다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유산소운동 DVD 한 장, 또는 운동해설서만 있어도 혼자 다이어트에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게으른 사람은 헬스클럽에 다니든 개인 트레이너를 두든 다이어트에 실패합니다. 날마다 꾸준히 실천하지 않으면 운동이 효과를 내지 못하듯, 외국어 학습도 할 때는 매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많은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잊어버리지 않나요?저는 ‘언어 습득(language acquisition)’과 ‘언어 학습(language learning)’을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언어 습득이란, 나 자신을 신생아처럼 어떤 외국어의 환경 속에 처하도록 해서 익히는 방법입니다. 경청하고, 모방하고, 실수도 해가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거죠.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는 한 번 배워놓으면 오래 타지 않았더라도 일단 자전거에 오르면 몸이 금세 타는 법을 기억해 냅니다.이런 ‘언어 습득’의 방식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내용이나 교재가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속도가 느리고 학습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편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고 나면 오래 갈 수 있는 능력으로 바뀝니다. 반면에 ‘언어 학습’은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는 방식입니다. 수업을 통한 언어 익히기입니다. 이 경우에는 단기간에 집중해서 듣기와 읽기, 말하기, 쓰기 수준을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을 중단하면 금세 원점으로 돌아가는 위험이 있습니다. ▲ 추스잉은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부터 익히고 단어를 바꿔 적용하며 확장해 가면 자신만의 최고 어학 교재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 대만 타이탄(大田) 출판 제공- 독학으로만 외국어를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요?외국어를 배우려는 성인이라면 자신의 목적에 따라 필요한 어휘와 문형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것과 업무에 필요한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 필요에 맞게 자신만의 실용 외국어 교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고혈압을 앓은 만성질환자가 이민 갈 때 가장 필요한 말은 뭘까요? ‘저는 한국에 있을 때 고혈압을 앓았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식후에 한 번씩 A약과 B약을 복용한 지가 2년입니다’, ‘어제 하루 동안만 아침, 점심, 저녁에 한 번씩 설사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저는 항생제 알레르기가 있습니다’처럼 의사에게 설명해야 하는 중요한 정보들을 정리할 수 있겠죠. 여기서 세 가지 시제(현재형, 현재진행형, 과거형), 세 가지 시간(아침, 점심, 저녁), 먹는 것과 관계된 세 가지 중요한 동사(약을 ‘복용하다’, 밥을 ‘먹다’, 물약을 ‘마시다’), 전치사(식사 ‘전에’, 식사 ‘후에’) 그리고 여러 고유명사(한국, 고혈압, A약, B약, 설사하다, 항생제, 알레르기)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단어만 몇 개 바꿔 적용하면 다른 상황에서도 유용한 말을 익힐 수 있습니다. ‘저는 유행병에 걸렸습니다’, ‘매년 고정적으로 두 차례, 연초와 연중에 한 번씩 해외에 나간 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한 번씩 유럽만 네 번을 갔습니다’, ‘저는 매일 돈 벌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알레르기가 있습니다’와 같은 표현으로 바꿔볼 수 있는 거죠. 같은 문형을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만들고 무한히 확장해서 자신만의 최고 어학 교재를 설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외국어를 익힐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정작 어려운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한국 학생이 미국에 유학을 갔다고 칩시다. 토론을 하는데 한국말을 그대로 영어로 직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른 미국 학생은 초점이 무엇인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두 언어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어는 ‘앞쪽에 무게가 있는’ 언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은 항상 첫 세 마디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대부분의 아시아 언어와 비슷하게 ‘뒤쪽에 무게가 있는’ 언어지요.앞에서는 여러 인과관계를 늘어놓고 마지막에 가야 결론을 말하죠. 따라서 단순하게 언어만 바꾸고 머릿속 언어의 논리를 전환하지 못한다면 토플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 혼자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는 어떤 것이 있나요?한 번에 두 가지 언어를 공부하려 했던 게 제일 큰 실수였습니다. 대학 시절 일본어를 배운 뒤에 욕심을 내서 한국어와 광둥어를 동시에 공부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론 두 언어 다 잘 안됐습니다. 광둥어가 중국어의 방언 중 하나라서 대부분의 발음은 현대 중국 표준어와 비슷해 보였거든요. 하지만 자세히 들어가면 완전히 달랐습니다.한국어나 일본어 역시 한자 발음은 중국어와 비슷했지만 한자가 아닌 부분은 전혀 달랐고요. 그러면서 언어가 완전히 뒤섞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 ‘앉다(坐)’라는 동사를 한국에서는 ‘좌’라고 말하는데, 일본어로는 ‘스와루’, 광둥어로는 ‘초’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이걸 함께 공부하다보니 한국어로 읽어야 할 때 ‘초’가 튀어나오고, 광둥어로 읽어야 할 때 ‘좌’가 나오는 식이었죠. 결국 이 두 개 언어는 식당에서 겨우 음식을 주문하고 글자를 읽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한번에 여러 언어를 공부할 경우에는 서로 교란이 일어납니다. 동일한 어족(language family)에 속하는 외국어가 구조는 비슷해도 문법이 서로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이를 테면 일본어와 한국어 그리고 미얀마어는 문법 구조가 상당히 흡사합니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중국어와 광둥어, 또는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적으로는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언어 간에 여러 미세한 차이가 있고 문법적인 예외도 다양합니다. 심지어 같은 언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독일어의 경우 독일어의 표준 독일어와 오스트리아의 독일어, 스위스의 독일어가 다릅니다. 서로 어감이 다르고 외래어를 사용하는 습관이나 말투도 달라서 한꺼번에 배우면 굉장한 혼란이 생깁니다.한국어를 갓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표준어와 동시에 제주도 사투리까지 익힌다고 칩시다. 한 문장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전부 뒤섞어 넣으면 본인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굉장히 고달프지 않겠어요?한 번에 한 가지 언어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일정 수준이 된 후에 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두 언어를 한꺼번에 익히는 것보다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책에서 “성인이 더 외국어를 익히기 쉽다”고 했습니다. 보통 말은 어릴 때 배우는 게 좋다고들 하지 않나요? 보통 사람들은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작정 조기 교육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100% 영어 수업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을 보셨나요. 이 중에는 한국어도 안 되고 영어도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보셨을 거예요. 문장에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이고, 문법도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죠.부모들은 그런 조기 외국어 학교에 보낸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뒤죽박죽 증상은 심각한 경고 신호입니다. 그 뒤로 어느 한 가지 말도 온전히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싼 사립 국제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도 두 언어 모두 제대로 안 되는 비참한 상태를 이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반면에 성인은 외국어에 대한 학습 동기가 뚜렷합니다. 더 이상 부모나 학교에 떠밀려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잘 압니다. 이미 한 가지 외국어나 사투리를 성공적으로 익힌 경험도 있을 테고요. 두 번째, 세 번째 외국어를 배울 때는 앞서 성공했던 경험을 의식적으로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도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추스잉은 “언어는 불투명한 유리 같아서 윤곽을 가늠할 수 없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열쇠가 된다”고 말했다. / ⓒ최광렬, 추수밭 제공- 그렇게 애써 외국어를 많이 알면 뭐가 좋은가요?세상에는 평행하는 여러 개의 소우주가 있습니다. 언어와 종교, 인종, 지리적 위치, 정치적 입장 등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죠. 그런 상황에서 언어는 다른 평행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됩니다.마치 불투명한 유리 같아서 윤곽을 가늠할 수 없었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그 나라의 언어에 담긴 논리를 보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왜 비슷한 행동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생수병을 들고 다니는 독일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안전 기준에 맞는 수돗물을 바로 먹지 않고,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됐죠. 그런데 독일어에선 수돗물이 Leitungswasser로, 한국어의 ‘수돗물'처럼 '수도'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직역한 것을 알고서부터 번뜩 깨달았어요.실제로는 수질이 아무리 깨끗해도, 어감상 땅속에서 녹이 슬거나 갈라져서 불결한 송수관의 모습이 상상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영어 ‘tap water’에서 느껴지는 반짝반짝한 스테인리스 수도꼭지가 떠오르는 게 아니고요. 제가 태어난 대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은 일본어의 표현을 계속 사용해서 역시 ‘수돗물’이라고 하시거든요. 가정에서 ‘수돗물’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면 집의 수도꼭지에 가장 선진화된 정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팔팔 끊인 물을 마시고 싶을 겁니다. 이렇게 조금은 비이성적인 행동들처럼, 언어를 이해한 후에야 답안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외국어를 공부하면 자신의 모국어 환경을 돌아보고 그 동안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언어 논리들을 더 많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언어가 있나요? 앞으로 추가로 배우고 싶은 언어는?지금은 계속 미얀마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민 사회(Civil Society) 교육 등 때문에 종종 일선의 풀뿌리 NGO 조직들을 접하거든요. 이 일을 잘 하려면 언어의 힘을 빌려서 서로의 마음속 거리감을 더 좁혀야 합니다.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언어는 베를린 사람들의 독일어와 미얀마 북부 카친주(Kachin State)의 경파어(景頗語)입니다.- 외국어 공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끝으로 한마디 더한다면?한 가지 외국어를 제대로 완벽하게 익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공부한 후에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옹알이를 배우는 아이들을 본받아서 한 글자를 배울 때마다 용감하게 한 글자씩 사용해 보세요. 배운 만큼 쓰는 것이 인류 문명의 잔치인 언어를 누리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추스잉이 추천하는 단어카드 활용법단어카드 앞면에는 단어나 문장을, 뒷면에는 그 단어와 문장의 뜻을 손으로 쓴다. 뒷면의 여백에는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글자, 관련 단어, 반대말, 유용한 문장 등을 기록한다. 그리고 아래의 기준에 따라 세 묶음으로 분류한다.① 숫자, 인삿말 같은 기본적이며 간단한 어휘② 여러 번 암기해도 자꾸 잊어버리는 단어나 문장③ 새로운 어휘, 어렵지만 중요한 숙어, 완전히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은 문법 규칙세 묶음의 단어카드를 외출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마음 상태나 집중력에 따라 한 묶음을 골라 읽으며 익힌다. 첫 묶음은 대부분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 익히는 것이므로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실력이 쌓이면 두 번째 묶음에서 익숙해진 단어를 첫 번째 묶음으로 옮긴다. 첫 번째 묶음에서도 더 이상 잊어버릴 염려가 없는 단어들은 ‘은퇴’시켜 서랍 속에 넣는다. 이 단어들은 ‘0번째 묶음’이 된다. 이 단어카드를 버려서는 안 된다. 몇 년 동안 그 언어를 사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용할 일이 생기면, 서랍 속의 ‘0번째 묶음’부터 꺼내 복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 단기 해외연수 효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방법① 혼자 공부하러 가서 현지인 친구를 사귄다. 어울려 지낼 친구가 없으므로 모국어를 쓰지 않게 된다.② 홈스테이를 한다. 그래야 억지로라도 하루 종일 그 가정의 가족들과 내가 배우고 싶은 언어로 일상 대화를 나눌 수 있다. ③ 1대1로 배운다. 다른 사람과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 받는 방식은 시간 낭비다. ④ 현지 언어만 사용한다. 외국에 갔을 때는 같은 나라 사람과 대화할 때도 현지 언어만 사용한다.⑤ 현지 기사를 읽고 들으며, 현지 젊은이의 유행어와 핫이슈에 관심을 가진다. 매일 현지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들으며 익힌다. 현지인들과 나누는 대화가 훨씬 재미있어진다.⑥ 책을 읽는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쉬운 책을 골라 천천히 읽는다. 모르는 단어는 단어카드에 적는다.⑦ 현지 문화에 관심을 갖는다. 현지 문화를 볼 수 있는 공연이나 명절 행사에 참가한다. ⑧ 정확하고 멋진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단 몇 문장이라도 현지인처럼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⑨ 백지 단어카드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새로운 단어는 직접 듣거나 사용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곧장 적어놓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 추스잉(褚士瑩)대만 가오슝(高雄)에서 태어난 NGO 활동가. 이집트 AUC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학을 공부했다. 국제금융 전문 감찰기관인 BIC의 미얀마 연락책임자, 영국 환경컨설팅업체 에코 포지티브Eco Positive와 미국 그린에너지업체 KPC의 아시아 파트너로 일했다. 유엔 CDM프로젝트의 일환인 르완다 바이오에너지농장 설립에 참여했다. 지금은 대만에서 이민, 교육,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적장애인 가족 후원 활동을 하고 있다.   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4/2015090403080.html​ 
  • 2015-08-29
    ​​▲ 국내에서 유라시아사 연구를 선도해온 김호동 교수. 진정한 세계 제국이었던 몽골제국의 흥망사를 쓰는 것이 장기 목표라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이 책에서 나는 황하, 아니 그것이 표상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와 싸우며 또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여러 민족들, 특히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아 왔던 티베트족,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민족들이 걸어온 역사의 페이지에 배어들어 있는 고통과 소망을 독자들이 알고 또 공감토록 하는 데 있다…나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배자의 입장에 있던 러시아나 중국 측의 기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손으로 씌어진 글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지배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현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했다... 우리는 곧잘 강한 자와 강한 민족의 역사에 매료된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1999년 출간 ‘황하에서 천산까지’ 저자 머리말“필자는 수년 전 소수민족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동아시아사의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한족 중심의 역사 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제 다시 ‘이단’의 교파를 주제로 잡아 책을 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자의 전공 분야가 ‘변방’ 중앙 아시아의 역사이다 보니, 다수가 아닌 소수의 관점, 정통이 아니라 이단의 시각, 중심이 아닌 주변의 입장에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우리 학계도 남들이 흔히 하는 문제들만 치우치지 말고 희귀한 분야에도 눈길을 돌릴 만한 여유를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2002년 출간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저자 머리말“이렇게 해서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후반까지 1세기 이상 몽골 제국은 태평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문자 그대로 ‘세계 제국’이었고, 그 기간 동안 세계의 역사는 ‘몽골 제국과 그 주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대통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몽골 제국의 역사는) 다양한 언어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들에 기반을 둔 총합적 연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이 점에서는 종래 동아시아권의 역사 연구에서 독보적 권위를 누리던 한문 사료들도 제한적인 효용성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중국 측 기록들은 그 고질적인 중화 중심의 역사관과 세계관 때문에 몽골 제국의 ‘세계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것을 중국의 전통 왕조의 하나로 ‘개조’시켜버렸기 때문이다.” /2005년 출간 ‘칸의 후예들’ 역자 서문“유목민과 농경민은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 온 두 개의 수레바퀴였고, 그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세계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균형 있는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러시아를 위시한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통합한 몽골제국은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필자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2010년 출간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저자 머리말“두 사람의 기독교 수도사의 글을 번역하려는 생각을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들의 글이 역사적 기록으로서 가지는 진귀한 가치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 자신 기독교도로서 가진 개인적인 소명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거의 800년 전에 동방의 세계를 찾아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체험과 기록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겨울, 루브룩이 대칸 뭉케를 만나러 갈 때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관습에 따라 맨발로 가서 그의 천막 앞에 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마치 괴물처럼 바라보았다는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 나는 시공의 벽을 넘어 마치 내가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로마서 제 10장 15절)” /2015년 출간 ‘몽골제국 기행’ 역자 후기그는 개척자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유라시아사 연구의 험한 길을 일찍부터 앞장서서 걸어갔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전설’이었던 은사 민두기(1932-2000) 교수의 권유에서 시작된 여정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유학 시절에 만난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 Jr 1934-84) 교수의 문하에서 학문은 더 넓고 깊어졌다. 어느덧 발걸음은 몽골제국의 대평원에 가 닿았다.그의 학문적 성가는 해외에서도 정평이 난 지 오래다. 지금은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케임브리지 히스토리 시리즈의 몽골제국사 편 책임편집을 맡아 세계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선별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사 전임 국내 1호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다.1986년 귀국해 모교에 부임할 때 학과 ‘막내’였던 그는 어느새 최선임 ‘어른’이 됐다. 그동안 국내에서 유라시아사 분야의 주춧돌이 될 주요 고전의 역주서를 줄줄이 펴내는 한편, 이 분야 국내에서는 독보적이라 할 만한 저술들을 출간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얼마 전 ‘몽골제국기행’(까치)을 낸 데 이어 올 가을에는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사계절)를 펴낼 예정이다.국내에서도 새로운 프론티어로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요즘, 그를 만나 그동안 연구의 시작과 성과, 의미와 앞으로 계획을 들어봤다. 그는 ‘소수 학문’ 연구자로서 지금껏 걸어온 길이 너무나 즐겁고 보람 있었다고 했다. 뜻밖이었다.-새 책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번에 나온 ‘몽골제국기행’은 어떤 책입니까?제가 집중해서 연구하는 시기가 몽골제국사입니다. 물론 그 전에는 다른 시기를 했지만 조금씩 옮겨와서 10여 년 전부터는 몽골제국사만 하고 있어요. 몽골제국이라는 게 우리 고려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몽골이라고 하면 원나라를 떠올리는데 흔히 중국의 한 나라로 봤지요. 명이나 청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제가 연구해보니까 그게 아니고 원이라는 게 세계 제국의 일부였어요. 그러니 그 세계 제국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이 제국의 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여러 언어로 된 자료가 많아요. 지금껏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으로만 봤는데 그것은 아주 일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라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된 것까지 복합적으로 활용이 돼야 비로소 제국의 전체적인 면모가 나옵니다.몽골제국이 워낙 크다 보니 자료들이 많은데 그 중에 여행기가 많아요. 제가 앞서 번역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그렇고, 이번에 낸 플라노 드 카르피니와 윌리엄 루브룩의 ‘몽골제국기행’도 그 시대 대표적인 여행기 중 하나입니다. 13세기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몽골 기행에 나선 이유는 당시 몽골 군대가 유럽으로 가서 러시아도 쑥대밭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폴란드 가서도 전투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럽에서는 이들이 누군지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또 하나는 이들을 개종할 수 없겠느냐는 종교적 목적이 있었지요. 여러 사람이 갔는데 여행기가 남아있는 대표적인 두 사람의 작품을 번역하고 상세하게 주석을 단 것이 ‘몽골제국기행’입니다.-‘케임브리지 히스토리’ 시리즈로 몽골제국사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압니다. 어떤 작업이고, 어떤 의미가 있지요?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내는 히스토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세계 각국을 주제로 해서 내는데 중국 같은 경우 10권 이상 되지요. 한번은 이스라엘 학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케임브리지 히스토리에 몽골제국사도 포함시켜 보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최근 30년 사이에 몽골제국사 연구 방향이 많이 바뀌었어요. 저 자신이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해 나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맞춰 그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의미에서 가장 깊게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을 동원해서 써보자고 해서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 제안서를 제출했고, 심사 후 승인이 나서 계약을 했습니다.2년 전부터 이스라엘 학자와 둘이서 에디터가 돼서 학자 40여 명을 섭외해서 지금 원고를 받고 있는데 20편 이상 들어온 상태입니다. 이걸 다 읽고 논평해주고 보완 요구하고 하느라 할 일이 참 많아요. 이런 작업이 보통 빨라도 10년은 걸리기도 하고, 한 세대가 걸린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빨리 내려고 해요. 두 권으로. 한 권은 2017년, 그다음 것은 2019년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올 가을에는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사계절출판사에서 내는 아틀라스 시리즈의 마지막 다섯째 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중앙유라시아사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의 중앙’이 아니고 ‘유라시아 전체의 중앙’이라는 뜻입니다. 다루는 범위가 우크라이나까지 포함되니까.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여러 가지 지도와 중요한 그림자료, 연표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물론 설명을 담은 텍스트도 들어갑니다. 너무 생소하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니까. 이런 책이 의외로 외국에도 없어요. 중앙유라시아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출간되면 외국 사람도, 텍스트는 못 읽어도 지도나 사진은 볼 수 있으니 굉장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아틀라스 제작 과정에서는 지도 만드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직접 배웠다구요.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요. 저도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닌데 100여 장 되는 지도를 그렸습니다. 지도를 그린다는 게 그냥 그림 프로그램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고 옛 지명이라든가 고고학적인 발굴터 이런 것들을 정확히 GPS로 잡아서 찍어내면, 가령 그런 지명들을 한 몇 천 개 축적해 놓은 게 있는데 그런 걸 활용해서 지도를 그리니까 아무래도 정확하지요. 일관되게 그렸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동안 출간한 저서나 묵직한 역서들이 꽤 되지요. 갈래를 짚어주시겠습니까?저서 쪽부터 보면, 처음에 했던 게 19세기 중앙아시아사였습니다. 박사 학위논문이었지요. 그 후에는 시대를 올라가서 몽골제국에 관한 것이 3권 정도 됩니다. 그다음 동서문명 교류 측면에서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 하나 있습니다. 몽골제국사가 가장 많고 19세기 중앙아시아사, 동서교류 순이 되겠군요.역주서의 경우는 연구서라기보다 원자료를 옮기고 주석을 다는 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국내 학자들이 접근하기 힘든 페르시아로 된 것들이라든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3권까지 번역했고 앞으로 두 권을 더 해야 하고.그 다음 ‘동방견문록’이라든가 ‘몽골기행’ 같은 유럽인들 기행문 이런 것들을 냈습니다. 물론 영어를 기초로 번역했지만 여러 사본들을 교감한 텍스트를 가지고 여기에 주석을 자세히 단 것들입니다.-그동안 불모지를 개척하면서 후학의 연구나 2차 저술을 위한 기초 고전들을 많이 번역해왔습니다. 아직 남은 주요작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아주 많아요. 혼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 관련 문헌들도 중요한 것들이 안 돼 있는 게 많은데, 저쪽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지요.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사상과 관련해서도 중요한데도 번역이 안 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제 분야에 있는 중요한 것, 제가 관심 있는 것부터 하는 중이지요. 앞으로도 더 많이 돼야 합니다.-고전의 경우 교감본조차 안 된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심지어 국내 고전까지 그렇다더군요.얼마 전 학회에서 어느 분 말씀이, 심지어 고려사, 고려사절요까지도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교감본이 안 돼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마다 기존 책을 인용은 하는데, 교감을 거치지 않은 경우, 물론 몇 자 차이일 수 있지만 그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인도나 페르시아 문명만 해도 얼마나 오래되고 찬란한 것인데, 그쪽 유명한 고전들 교감본 텍스트가 이제야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정도입니다.-저서와 역주서를 말씀해주셨는데 그간 걸어온 학문 여정을 개괄해주시겠습니까?원래 학부 때는 관심이 중국사였습니다. 중국사를 하면서 동시에 중앙아시아와 연관되는 고리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19세기 위구르 지역이었어요. 당시 반란이 나서 독립이 됐는데 중국이 거기서 쫓겨나다 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중국 문헌에는 없어요.그 안에서 현지인이 쓴 자료들을 봤지요. 외국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구한 필사본, 페르시아어나 차가타이어(투르크어 한 갈래)로 씌어진 사본들을 다 모아서 한문 자료와 결합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그렇게 시작해서 국내에 들어온 후로 강의를 하다 보니 몽골제국이 점점 재미있어지더군요. 우리 역사와도 연관이 되고. 또 그 제국의 크기가 학문적인 도전욕을 자극했습니다.더구나 제가 이런저런 언어를 많이 했는데 그 다양한 언어들을 활용하기 좋은 연구 주제였어요. 다양한 사료들이 그런 언어들로 돼 있으니까.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쓰기 시작한 게 지금은 몽골제국 연구자가 된 것입니다.-중앙아시아사 연구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죠?대학 때 은사였던 민두기 교수께서 권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국내에 전공자가 없었습니다. 중앙아시아사를 제대로 하려면 그 지역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까 유학 가서 언어도 배우고 하라고 권하셨지요.-민 교수께서는 굳이 왜 그쪽으로 권하셨지요?동양사, 특히 중국사를 하다 보면 북방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지요. 당신은 못 하셨지만 필요하다고 보신 거지요. 국내 역사와도 관련이 깊으니까. 그 필요성에 대해 아신 겁니다. 그 전에 제 은사이기도 한 고병익 교수도 그쪽에 관심이 많으셨고 글도 쓰셨는데 현지 언어는 못 하셨어요. 몽골어나 터키어, 페르시아어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아무래도 연구에 제약이 있었고, 그래서 주로 한중 관계사 쪽으로 하셨지요.그러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그 지역 자료들을 보고 공부한 중앙아시아사 연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1986년에 들어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앙아시아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터키사를 공부하신 이희수 교수가 저보다 2, 3년 늦게 들어왔지요. ‘몽골비사’ 쓰신 유원수씨, 이런 분들이 다 우리 또래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고 할 수 있습니다.-80년대 서울대에서는 그나마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학과가 동양사학과일 거라고들 했지요.민두기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학풍이 워낙 엄해서 석사 논문도 4, 5년은 기본으로 생각했지요. 더 길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선생님이 귀감을 보이셨는데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기 힘들지요. 엄청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학생한테도 그렇게 요구하시니까 그 긴장감이라는 게 힘들 수밖에요.-민 교수님에 관한 특별히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몇 가지 일화들이 있습니다만 고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라서 자칫 누가 될까 꺼려집니다. 다만 강의 시간에도 혹독할 정도의 엄격한 가르침으로 유명했습니다. 자신의 연구와 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꼼꼼했고 철저한 정확성을 기했지요. 특히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시면서 정치적 접근을 항상 경계하셨습니다.-서울대에 중앙아시아사 전공 교수로 부임할 때가 국내 1호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가요?지난주에도 학회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대학 교수로 취직한 사람이 국내에서는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 점에서는 얼마간의 자괴감이 있습니다. 다들 중국사로 취직할 뿐입니다. 서울대의 저 말고는 아직도 다른 대학에 중앙아시아사로 독립된 교수 정원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동양사학과 전임으로 가도 중앙아시아사 정원으로 가는 것은 없습니다.-그 뒤 하버드대에서 플레처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연구 범위를 넓혀가셨지요. 또 다른 선회나 변화의 계기는 없었나요?몽골제국을 연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페르시아어 자료를 보다 보니 집사 책을 많이 보게 됐어요. 거기에서 몽골제국을 많이 다뤘어요. 페르시아 자료에 심취하다 보니 한문 사료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가 있더군요.야, 이거 재미있다 싶어서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사료도 읽고 하면서 몽골제국에 빠져들었지요. 몽골제국을 한문 사료가 아니라 페르시아 사료를 통해서 보면 하나의 실체를 동서로 양면적으로 조명해서 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동아시아의 사료적 콘텍스트와 새로 배워 알게 된 서아시아 컨텍스트를 결합시키자는 생각이었지요.그런 것이 때마침 몽골제국사의 최근 연구 경향과 들어맞은 거지요. 최근 경향이 뭐냐면 과거에는 큰 세계 제국의 덩어리를 지역별로 나눠 연구했습니다. 원나라는 원나라, 일한국은 일한국 역사로 본 거지요.20-30년 전부터는 몽골제국을 하나의 전체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내가 연구하는 것과 맞은 거지요. 케임브리지에 제안서를 낼 때도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지금까지 지역 단위 몽골제국사 연구를 극복하고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을 연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민두기 교수에 이어 플레처 교수 두 사람으로부터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거치셨는데, 교수님 자신은 특별한 교수법이나 스타일이 있나요?플레처 교수에 대해서는 항상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설명이 많이 기억됩니다. 저도 그냥 내가 아는 것을 성실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지, 특별한 교수법 같은 것은 글쎄요…(김 교수의 첫 제자인 정재훈 경상대 교수는 “학문적으로는 누구보다 엄격하시지만, 특별히 표나게 훈계를 하거나 야단을 치시기보다는 당신께서 먼저 본을 보이고 최상의 수준을 유지하시니까 제자들도 알아서 그런 스승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대학 때 동양사학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막연히 역사가 좋았습니다. 서양사나 국사와 달리 우리가 속한 지역이면서도 좀 더 넓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요.-일찍부터 학문에 뜻이 있었습니까?역사는 좋아했는데, 사실 학부 때는 역사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어요. 그런 쪽 활동 같은 것도 하다가. 군대 갔다가 제대한 다음부터는 학과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문학 활동 같은 거라면 동아리 말입니까?문학 동아리도 활동도 하고 시도 쓰고, 등단을 한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글을 쓸 때면 옛날에 그쪽 활동했던 게 도움은 됩니다. 글이 아주 건조하지는 않게 조금 다르게 쓸 수 있는 것 같아요.-에세이집인 ‘황하에서 천산까지’ 같은 책을 보면 ‘문청(문학청년)’ 같은 느낌이 납니다.그래요. 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중앙일보 주필도 지낸 권영빈 선배 그 분이 그 책을 보고 “어이 김 교수, 문청 냄새가 나는구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은 글 쓸 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건조한 학술적인 글이라도 어떻게든 독자들과 소통이 되게, 어려운 내용이지만 어떻든 읽히게 쓰자. 그렇다고 현란한 수사만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요.그 에세이 책은 주석을 달거나 논증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은 했어요.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라는 책을 쓸 때도 그렇게 시도는 했지요. 일반인들이 약간의 관심만 있으면 따라올 수 있게 썼어요. 그런데도 나중에 많은 분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더군요. 그거 보고 야, 이거 쉽지 않구나 생각했지요.사실 그런 경우에는 책에다 기본 지식을 깔아주면서 일반 독자가 따라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전문 학자들은 지면 낭비라고 생각하지요. 그게 고민입니다.-학자와 대중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수준의 저자들이 많아야 하는데 국내 현실이 그렇지 않지요.구미 쪽을 보면 학술적인 내용인데도 읽기 좋게 잘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국내에는 아직 내레이션(narration, 서술) 기법이 충분히 개발이 안 돼서 그런 것 아닌가도 싶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독자들이 당의정처럼 너무 쉬운 것만 요구하는 경향도 있고요.우리나라 책들을 보면 대체로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너무 적어요. 반면 서양은 빽빽하게 들어가거든요. 가령 펭귄북 같은 대중교양서도 활자가 작아요. 우리는 만화처럼 쉽게 넘어가야만 사람들이 읽으니까. 그 점만 비교해 봐도 벌써 책에 대한 독자들의 마음 자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국내 지식문화의 두께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자가 크고 분량은 적다 보니 호흡도 짧은 경향이 있습니다.학자들도 굳이 상아탑 세계에만 갖혀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대중과 소통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식이 문제지요. 지금은 설정된 방식들이 너무 쉽게 돼 있는 감이 있어요.여기저기 발표되는 글들도 보면 너무 뻔한 형식에 뻔한 얘기들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깊이 있게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요즘은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 개선이 되는 것 같습니다.전과 달리 제대로 된 학자들이 조금은 읽을 만하게 쓴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게 쌓이고, 또 사람들이 읽다 보면 조금 더 묵직한 것들도 읽게 되면서 점차 나은 방향으로 가겠지요.그럴 경우 구미 쪽과 같이 글자가 빽빽하고 학술적이면서도 읽기도 좋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건데, 아직은 학자와 독자 간에 간극이 있는 것 같아요.-그 간극을 메워줄, 인문학의 역량도 있으면서 대중적인 전달력도 있는 저자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네, 우리도 그런 중간 지식인층, 독립 연구자, 프리랜서 작가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외국에는 독립 학자(independent scholar)들이 많아요. 대학 교수는 아닌데도 방송이나 저술 활동을 하면서 상당한 연구도 하지요.이런 사람들은 1차 자료도 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2차 연구 자료들을 충분히 섭렵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하나의 틀을 가지고 씁니다. 전문학자들은 아무래도 사료를 중시하고 뭘 입증하는 데 신경을 쓰다보면 글이 어려워지는데, 그런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써나갈 수 있지요.실크로드 분야에서도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라는 사람이 있어요.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을 쓴 사람인데 대표적인 프리랜서 작가지요. 그 사람은 원 사료는 안 봅니다. 하지만 기존 학자들 연구 결과를 상당 부분 섭렵을 하고 그걸 기존 학자들보다 훨씬 더 잘 정리를 해요.그래서 그 사람 것은 우리도, 외국 학자들도 글 쓸 때 인용을 합니다. 워낙 정리를 잘 했으니까. 또 재미있고. 그건 한번 잡으면 밤새도록 읽어버리게 되니까요. 그게 문화의 깊이지요. 한 사회의 문화의 깊이라는 게 그런 사람들의 책이 팔리고 인정도 받고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글 출판 시장의 한계도 거론되곤 합니다.그래도 의외로 내 책의 경우, 가령 페르시아어로 된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역주 번역서만 해도 사실은 그렇게 쉽게 읽힐 만한 책은 아니거든요. 사료 번역이니까. 일반 독자를 위해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몇 천 부가 팔려요.이 사실을 일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깜짝 놀랍니다. 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 책은 그냥 도서관 같은 데나 팔리고 마니아들 일부만 사서 본다는 거지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료 역주서 같은 것은 양장본으로 내서 아주 비싸게 팝니다. 적게 팔려도 기본적인 수익은 올릴 수 있게.-출판 쪽 어느 분 말로는 국내에도 어려운 책을 소비하는(실제로 읽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문화 수요층이 일정 정도 있다더군요. 그래도 우리 사회를 보면 예전 문화유산인지 모르겠지만 지식이나 학습에 대한 존숭이랄까 높이 사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을 다녀 보면 그렇지 않은 나라나 문화권도 분명히 있거든요.내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연세도 꽤 된 대학의 연구소장은 퇴근하면서 조그만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가는데 연구소 흑인 관리직원은 하얀색 링컨을 타고 가더군요. 서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우리 경우 상당히 늦게까지도 지식에 대한 존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을 업으로 삼는 교수나 교사, 아니면 펜을 갖고 일하는 기자 같은 직군을 쳐주곤 했는데 그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 같아요.그래도 유교 전통인지 모르겠지만 잘 사는 사람들도 자식은 어떻게든 명문대나 좋은 학교 보내려고 하는 심리가 있지요.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암튼 요즘은 그런 게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오늘날 지식 사회, 지식 경제라고 해서 다시 혹은 여전히 지식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 아닌가요?문제는 젊은층이 디지털 화면에 빠지면서 독서 문화를 잃어간다는 거지요. 디지털 출판이 많아지는 것도 좋지만 책은 여전히 책대로 가야하지 않나 싶어요. 요즘은 강의도 PPT를 안 쓰면 학생들이 갑갑해 해요.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면 졸아요. 그래서 어떤 학과장은 이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요. 면대면 시선접촉이 중요하다는 거지요.사실 강의를 할 때 얼굴도 보면서 해야 몰입이 됩니다. 필요한 슬라이드만 보여주고 눈은 서로 딴 데 가있고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 싶어요. 디지털이 편리하고 좋은 점도 있지만 그런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지 큰 숙제입니다.-앞서 쓰신 에세이집을 보면 소수 민족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보이더군요.소수 민족이라든가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구는 동정심 같은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다 보니까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 경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몽골제국이라는 게 세계 제국이고 세계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너무 미약한 것도 마찬가지고. 돌궐도 그렇고 흉노도 그렇습니다. 실크로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연구는 깊지가 않아요.소수 민족 그 자체의 슬픈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보다는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여태 경시돼온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계사를 보다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역사만 해도 주로 주류 문명만 연구하고, 동양사만 해도 중국 아니면 일본사지요. 하지만 실은 중국 변방에 있는 지역이 중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데도 이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출발한 겁니다. 단순히 감상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예요.-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이미 패해서 사라진 다른 지역 다른 민족의 역사를 애써 연구해야 할 이유는 뭐지요?역사의 흐름을 보게 되면 중앙유라시아에서 주 동력이 유목국가이고 유목제국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사에서 굉장히 큰 동력으로 작용했는데,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한쪽을 러시아가 먹고 다른 한쪽을 중국 청나라가 먹어버리니까 중앙유라시아의 동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독자성의 세계가 사라진 거지요.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한 2000년 동안 중앙유라아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동력, 18세기 중반 이전에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했던 지역을 되짚어 보자는 학문적 지적 호기심의 추구라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하지만 동시에 그 지역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에 연구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지역이 다 독립을 했습니다. 중국이 물론 굴기하고 있지만 앞으로 중국의 장래에서 서북 지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과거 러시아와 청제국에 병합됐던 유라시아가 21세기 들어와서 다시 주요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과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아주 중요합니다.또 하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볼 때도, 저는 그걸 ‘유라시아 커넥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역사, 문화, 언어, 모든 면에서 그게 과거에 굉장히 강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를 걸쳐 심지어 조선 초기까지. 조선시대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성리학적인 구조로 바뀌면서 유라시아 커넥션이 끊긴 거지요.그러면서 마치 우리는 유라시아와는 관계가 없고 문화의 모든 모델은 중국에서만 온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 문화의 상당히 많은 깊은 원형들이 유라시아와 연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를 연구해야 합니다.어떻게 보면 우리 과거의 복원, 현재에도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갖는 중앙유라시아의 커넥션을 되살린다는 뜻에서도 우리가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유라시아 커넥션'의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고고학 미술사 분야에서 한국과 중앙유라시아(중앙아시아, 북아시아)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지적한 연구들(권영필, 최병현)이 있고, 역사학 분야에서도 고구려(노태돈), 그리고 고려 시대(이개석, 김호동)에 역사적 연관성에 주목한 연구들이 제법 있습니다.-우리 민족을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시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대중 차원에서도 있어왔습니다. 얼마 전 바이칼호 여행을 갔다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일행이 바이칼호의 알혼섬과 부르한 바위를 두고 한민족의 기원과 연결시키더군요. 이런 인종적 유전적 접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인종적 유전적인 측면에서의 분석도 필요하겠지요. 다만 그런 시도를 하는 분들이 대체로 '낭만적 민족주의'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서...-중국 접경 지역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현실 국가 권력과 충돌할 가능성도 높을 텐데요.대표적으로 신강, 제가 연구하는 티베트 지역이 그런데, 저는 정치와 학문은 구별돼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고려가 학문적인 판단이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제가 쓴 박사학위 논문이 나중에 미국 대학에서 영문으로 책으로도 나왔는데 제목이 ‘Holy War in China’입니다. 중국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목이지요.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떠나 중국에 소개도 인용도 잘 안됩니다. 사실 19세기 후반 신강 역사를 연구하려면 이 책이 필수적인데도 할 수 없는 거지요.그런 유사한 딜레마가 제가 연구하는 다른 것에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몽골제국사를 제가 연구하는 것도 중국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왜냐면 저는 이게 중국 왕조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중국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 이건 중국 역사인데” 그럽니다. 저는 그 지역 역사가 중국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합니다.그런 예민한 문제가 있지만 저는 적어도 정치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은 엄격히 구분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학문적인 어떤 성과가 정치적으로 ‘오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지요.-정치와 학문의 구분을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중국의 (관변)역사학이 정치권력에 복무하는 상황에서 여기에 반하는 학문적 견해는 충돌이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가령 티베트 역사의 독자성에 대한 연구가 정치적 독립의 정당성(=중국 병합의 부당성)을 부여하는 것 아닌가요? 학문적 의도와는 상관 없이 연구 결과의 의미가 현실 정치에 대한 발언으로 해석되지 않을까요?역사와 정치. 그렇겠지요. 비정치적으로 추진된 역사 연구의 결과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까지 역사가가 책임지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그러나 역사연구자가 처음부터 그러한 정치적 효용성을 생각하고, 특히 특정한 경향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티베트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베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을 갖고 출발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로서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을 투영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학계의 중앙아시아 연구에도 근저에 지정학적 관심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흔들 수 있으니까요.중국인 입장에서는 소수민족 이야기가 미 제국주의나 서구에 상당히 편향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가령 요즘 청나라 연구, 즉 ‘신청사(新淸史)’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중국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제가 몽골제국이나 원대 얘기하는 것도 사실은 거의 같은 얘기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만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볼 가능성이 충분하거든요.예를 들어 청제국은 중국 한인 왕조가 아니라 다민족국가였고, 만주족의 황제가 통치했다는 거거든요. 몽골제국, 원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몽고에 황제, 즉 칸이 있고 여러 다른 많은 집단들이 있었던 건데, 원이 중국 역사의 일부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역사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거지요.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안에 벌어진 많은 민족들의 역사를 자기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가령 흉노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은 맞지만 몽골제국의 일부이기도 했던 흉노를 몽골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중국이 앞으로 그야말로 선진국이 되고 문화적으로 성숙하려면 그런 것에 대한 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국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모든 걸 맞추려고 하면 안됩니다.지금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에 들어가는 지도를 그리는 중에도 제일 예민한 게 경계 영역 표시거든요. 이런 데서 당장 문제가 되지요. 그래서 내가 집필 중인 이 아틀라스책은 중국에서 절대 번역될 수가 없을 겁니다.(웃음)-선생님의 또 다른 학문 주제로, 농경민족 문명과 유목민족 문명을 세계사의 양대 축으로 보고 유목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이 있지요?유목국가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돼 왔었는데, 사실 유목국가는 사라졌지요. 하지만 지나가버린 죽은 문명이긴 해도 적어도 1700년대 중반까지는 유목국가라는 게 세계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인(factor)였어요.그게 지금은 사라졌고 그걸 표방하는 문화도 없고 그래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고대 스키타이 흉노부터 시작해서 중국사도 그렇고 러시아사도 중동사도 유목국가사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조하는 거지요.-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와서 ‘노마드’라는 개념과 함께 유목문화가 재조명되기도 합니다.과거 유목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기동성, 이동성(mobility)이었지요. 인구 백만도 안 되는 흉노나 몽골이 그 백 배가 넘는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비결이 이동성의 힘이었고, 그걸 극대화한 게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었지요. 그 시스템의 장점을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얘기지요.-하지만 몽골제국은 급부상 후에 빠르게 몰락했습니다. 이유가 뭐였나요?빠른 속도로 부상했다가 왜 급격히 망했는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하튼 제 나름의 견해로는, 성공의 이유는 우선 기동성입니다. 기마 문화를 기반으로 굉장히 빠른 타격전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물론 과거에도 다른 유목 기마 민족이 있었습니다. 칭기스칸과 그 계승자들의 군대는 그 기동성에 기율을 장착했습니다. 엄격한 군율과 기동성을 결합함으로써 그야말로 전쟁기계(war machine)라 할 수 있는 아주 막강한 군대가 생긴 거지요.그 외에 여러 지역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거 포용해서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인물과 문화 교류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광범위하게 갖다 쓴 거지요. 중국 사람 서쪽으로 데려가고 서방 기술자들 동쪽으로 데려가고 했습니다.그렇게 정복해 놓고 왜 급격히 무너졌나. 이건 미스터리입니다. 학자들도 분명히 설명하지는 못하는데. 한 가지 설명은 너무 규모가 커졌다는 겁니다. 폴 케네디가 제국의 흥망을 쓰면서 그런 얘기를 했듯이, 제국도 적정 규모가 있는데 너무 커져버렸다는 거지요. 대영제국, 오스만 제국 다 마찬가지였습니다.두번째, 칭기스칸 일족 내부의 분배 시스템, 상속 시스템을 이유로 들기도 합니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게 아니어서 서로 싸우게 되니까 상속 과정에서 분쟁들이 격화됐다는 거지요.마지막 하나는 자연 재해로 돌리는 설명인데, 흑사병을 듭니다. 1340-50년대에 흑사병이 터지는데 그 시기에 몽골제국이 다 무너집니다. 제국의 네트워크가 그때 붕괴됐다는 거지요. 그런 것들은 연구가 잘 안 돼 있습니다.-몽골제국 자체에 대한 연구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다는 이야기군요.물론입니다. 규모에 비하면 그렇습니다.-몽골제국을 통해 통합세계사를 그리려 한다고 하셨지요?흔히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고, 다시 동양은 중국, 일본사로 나눕니다. 그런 지역사를 기계적으로 합한 것을 세계사로 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월드 히스토리는 그게 아닙니다.서로 연관된 역사, 통합된 세계사를 한번 복원 구성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하나의 재미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이었기 때문이지요. 몽골제국 시대 세계사의 커넥션들이 어땠는가를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유럽, 중국 등의 단위 블럭으로 역사를 이해하다가, 그 틈새 공간을 되살리고 메우는 작업 같군요.비유하자면 그 전까지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유럽 이런 큰 덩어리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명권들이 경계가 딱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화시키자면 코어를 중심으로 서로 톱니처럼 돌아간다고 했을 때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그 사이에서 이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중앙유라시아가 했습니다. 이음쇄 역할을 한 거지요. 일반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건 아는데, 그냥 단순히 매개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윤활유 같은 걸로 본 거지요. 실크로드라는 것도 동서의 가교 정도로 봤습니다.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곳도 엄연한 하나의 현장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사물과 사람들이 만나고 변형돼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좌우의 톱니바퀴를 연결하는 윤활유가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의 톱니바퀴라는 거지요. 실크로드만 해도 선이 아니라 면이라는 겁니다. 문명들이 만나는 또다른 하나의 문명이라는 거지요.-그런 복원 작업 중의 하나가 ‘동방 기독교’ 연구였지요? 기독교가 일찌감치 몽골은 물론 중국까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재미있지요. 몽골제국을 연구하다 보니까 칭기스칸 집안에 의외로 기독교도가 많은 거예요. 며느리, 자식, 손자 들이 기독교도가 많아요. ‘어떻게 된 거지’ 하다가, 제가 기독교도이기도 해서 관심이 있어서 보니까, 이미 당나라 때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어요. 그 뒤로도 면면히 이어진 거지요.-그때도 ‘기독교’라고 불렀나요?‘기독교’라는 말은 없었어요. 당시 중국에는 여러 표현이 있었는데, 대진(大秦)이 로마를 가리켰는데 ‘로마에서 온 종교’라고 해서 ‘대진교’라거나, ‘아주 밝다’는 뜻에서 ‘경교(景敎)’라고도 했습니다.또 십자가에 절 사(寺) 자를 넣어서 ‘십자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었지요. 당시에 주요 경전도 번역되고 그랬어요. 그걸 쭉 한번 써본 게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었습니다.-그런 종교적인 연원을 연구하다 보면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지는 않나요?학문적인 연구 결과와 개인적인 믿음(faith)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내가 연구하는 내용이 신앙을 지켜주면 좋겠지만, 그게 반드시 일대일로 맞지는 않습니다.어떤 사물을 연구하는 내 영역이 신앙과 직접 배치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동안 알고온 유럽 전통의 기독교와는 다른 동방의 기독교를 알게 되면 종교도 결국 절대적 진리라기보다 역사 속의 일시적 사건이나 현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지 않나요?기독교에 대한 신앙 자체는 초역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형태는, 그러니까 종교적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을 취하느냐는 것은 지역과 문명과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요. 양상이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저 자신 믿음이 독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교회 다니고, 남들이 보면 독실하다고 보는 사람일 거예요 아마. 저는 항상 제가 하는 작업이 나의 믿음에 어떤 의미를 갖기를 바래요. 하지만 그게 일대일로 번역(translation)은 안 되거든요 사실은. 억지로 끼워맞추고 정당화하는 것도 좀 우습고.그런 면에서 ‘몽골제국기행’ 번역 같은 것은 두 가지를 다 충족시켜 줬습니다. 하나는 몽골제국 시대의 중요한 문헌을 내가 번역해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두번째는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복음이 13세기에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멀리 동아시아 지역까지 전달되는 과정에 대해 알려준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성공은 못했는데 그 추운 겨울에 대륙을 횡단해서 와서 쓴 글이지요.이 책은 한편으로는 내가 연구하는 역사적인 자료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활동 기록으로서 묘하게 두 가지가 상당히 충족되면서 번역을 하면서도 사실은 내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역사에 어떤 방향이 있다고 보십니까? 기독교 신앙과는 어떻게 연결지으시는지요?역사학에는 어느 특정한 방향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료를 근거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정한 종교의 신앙 유무가 이러한 일반적인 방법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역사학을 하는 의미나 의의, 역사학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큰 질문이네요. 저는 그냥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서 합니다. 나의 연구 결과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다소간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겠어요?-소수 민족에 대한 연구가 감상적인 동기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글의 행간을 보면 어떤 애정이나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제가 처음 박사 논문으로 쓴 게 위구르인들 역사였습니다. 그 사람들 글을 보다 보면 진짜 중국인에게 억눌린 게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가령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인들도 그렇습니다. 중국 버전으로만 보면 그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나는 위구르인들 언어를 읽어서 그 사람들 생각을 알기 때문에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거지요.-‘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에세이집을 보면, 대학 시절 큰 스님을 만나기 위해 삼천배를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대학 때 문청(문학청년)들이 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1년 휴학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철학, 문학 책도 많이 읽고 그랬지요. 중요한 철학책을 많이 읽었는데 읽어도 모르겠더군요.원문으로 읽어도 제대로 이해가 잘 안 될 텐데, 당시 초기에 나온 이상한 번역본들 보면서, 종교적으로 여러가지 방황도 하고 그랬지요. 당시엔 법대생들이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했는데, 내 친구가 거기 가 있어서 나도 가볼까 해서 한 달 정도 가 있었어요.그 때 친구 말이, “성철(1912-93) 스님이 대단하다더라. 한번 만나보러 가자”고 해요. 그래, 가자고 했더니, 그냥은 안 만나주고 삼천배를 해야 만나준다고 해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삼천배가 그렇게 힘든 건가, 에잇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그래서 한 거지요.결국 가서 만났어요. 삼천배를 하면 다리가 완전히 상해요. 하산할 때는 거의 기다시피하는데, 교통편도 마땅치 않고 해서 산을 몇 개 넘어 해인사로 찾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 젊은 날의 추억이지요.(웃음) -그때 성철 스님이 뭐라던가요?화두를 주셨지요. ‘불시심불시불불시물(不是心不是佛不是物)이니, 시심마(是甚麽)’라고 해서, 아주 유명한 화두지요.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게 무엇인고’라는 뜻이지요.-그때 어떤 깨달음을 얻었나요?그때 일은 젊은 시절 한때 방황할 때의 일로 끝났지요. 특별한 일이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요즘도 인터넷에서 ‘김호동 교수’로 검색을 해보면 하버드대 시절 은사인 플레처 교수와의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떠돌아 다닙니다.‘그는 내게 러시아어부터 배우라고 권했다. 어느 정도 러시아어를 읽을 만하게 되니 다시 페르시아어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몽골어, 터키어, 위구르어. 이런 식으로 그가 내게 다양한 언어의 습득을 요구한 것은 물론 중앙아시아라는 독특한 지역을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덕택에 나는 현지어로 된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맙게 느끼는지 모른다… 플레처 교수는 모국어인 영어를 빼고 14개국어 정도를 알고 있었다.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고,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티베트어, 그리고 고대 중세 현대 투르크어를 익혔다. 그리고 그가 마명심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뒤부터는 다시 아랍어에 몰두했다.’ (‘황하에서 천산까지’에 나오는 내용)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히 그런 이야기들이 와전되곤 하지요. 그런 외국어들은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문헌을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러시아어는 처음엔 ‘닥터 지바고’를 읽을 목표로 했는데 아주 어렵더군요. 그래도 지금도 러시아어는 사전을 안 찾고도 웬만한 책은 봅니다.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려면 러시아어가 굉장히 필요해요.-아랍어도 하십니까?아랍어는 배웠는데 잘 못합니다. 강의 듣고 혼자 몇 년 했는데도 어려워요. 좀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안다는 언어에 넣지 않아요. 러시아어보다 아랍어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플레처 교수는 어떤 학자였습니까?그분도 중국의 소위 변방 지대, 몽고라든가 티벳이라든가 신강 이런 지역 역사에 관심 많았고 필요한 언어를 다 했어요. 특히 신강 지역의 무슬림에 관심이 가 있었어요.그래서 제 박사 논문도 19세기 그 지역 무슬림의 반란을 하게 된 거지요. 그때 자료 수집 위해 외국에 나가는데 이 분이 암이 걸린 거예요. 병실에 찾아가서 당신이 못다 한 것 내가 다 하겠다고 했더니, 됐다 너는 네 공부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내가 자료 수집 여행 다니는 동안 돌아가셨지요.그분과 저는 연구 분야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제가 몽골제국에 집중하면서 달라졌지요. 그분이 이야기한 게 통합세계사였어요. 저는 몽골제국을 통해 그 통합사를 테스트해보고 싶은 거지요.-중앙아시아사가 대중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비인기 분야인데,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이나, 도중에 외롭다는 느낌은 없었나요?하는 게 재미있었으니까 한 거지요. 지금은 청년실업이 하도 많아서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다행히 그때는 취직이 잘 되는 편이었어요. 석사 논문만 쓰고도 바로 취직이 됐기 때문에, 취직 걱정보다는 내가 하는 게 재밌어서 거기에 빠져서 새 언어를 배우고 자료도 읽고 했지요.그래서 사실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또 학위 마치고 귀국해서는 제자들이 많이 생기니까 가르치는 재미가 있더군요. 또 내가 쓴 책들에 대한 독자들 반응이 비교적 좋았어요. 사서 읽은 분들이 이런저런 얘기들도 하니까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요.-의외군요. 소수 학문 연구자의 길이 외롭고 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행복했다는 말씀이군요.소수 분야였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다기보다 오히려 남들이 안 하는 것에 빠져들어 보는 게 좋았어요. 페르시아 자료 같은 것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희열이 있거든요. 햐, 이걸 보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는 거지요.또 그런 것을 학생들한테 가르쳐 주는 것도 즐겁구요. 그런게 지적 희열이지요. 소수만 읽을 수 있는 비경의 어떤 것을 내가 읽는다는 기쁨. 또 내가 그걸 가지고 책을 내면 많은 사람들이 읽고 호응을 해주고 그래서 상당히 나름대로는 보람을 느꼈습니다.-희귀 자료를 읽기 위해 여러가지 어려운 외국어까지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싶었습니다만.아니요. 외국어 배우는 것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그걸 배워 내가 그전에는 몰랐던 걸 읽게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오히려 재미있는 거지요.-연구하는 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드문 상황에서 번역서나 저작을 공들여 내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지는 않나요?그런 면이 있지요.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해나가는 거지요. 저는 문화라는 것은 언어로 축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영어로 써도 그것이 한국의 문화가 되지는 않습니다.제 책이 외국에서 출판됐을 때 리뷰 나오는 걸 보면 미국 학자로 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단은 번역서나 저술은 한글로 씁니다. 그 대신 연구 수준은 국제적인 수준에 맞추려고 합니다.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국내에는 잘 썼다, 못 썼다, 이거 틀렸지, 이런 걸 제대로 얘기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계속 해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선생님은 늘 자신을 낮춰 말씀을 하시는 편인데, 어느새 학과에서 가장 원로가 됐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이지만 국내 학계 수준은 어떻다고 보시는지요?동양사 쪽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봅니다. 1세대였던 민두기 선생님 그 분의 연구 업적이 국제적 수준이었고, 워낙 엄격하게 제자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나온 연구들은 꽤 국제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전체적으로 볼 때 동양사 특히 중국사는 상당한 수준이고 외국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사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앞으로 전문가들이 좀 나올 겁니다. 제가 키운 제자들도 있어서 이 친구들이 외국에서 활동하고 논문도 발표하고 하면서 국제적인 위상도 높여갈 걸로 기대합니다.중앙아시아사는 분야의 특성상 학자라면 국내 독자만 가지고는 할 수 없어요. 곧바로 나가서 외국에서 발표하고 토론도 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이 분야도 국제적 수준의 연구를 해야 하고, 그럴 거라고 봅니다.-한중일 세 나라를 비교하면 어떤가요?숫자로도 비교가 안 되지요. 중국, 일본은 굉장히 많습니다. 중국은 자국사의 함정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중국적 시각으로 자꾸 보려고 하니까.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어긋난 얘기는 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문제가 있고, 일본 경우는 옛날부터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해왔기 때문에 연구자 수도 많습니다.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숫자도 적고 수준도 그렇지만, 그래도 소수의 연구자들이라도 노력하면 전체적인 수준은 올라갈 것으로 생각합니다.-국내에서 이쪽 분야 학문을 해오면서 분위기나 기반 측면에서 어렵거나 아쉬운 점은 없나요?중앙유라시아사 분야가 사실 아직도 소수 학문이지요. 몽고나 티베트나 신강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취직에 어려움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국에서 중앙아시아사 전임 정원은 서울대가 유일합니다.조금은 더 국가적인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왜냐면 앞서 얘기했듯이 앞으로 국가 전략적으로도 그만큼 필요한 분야거든요.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동양사 분야에서 다양한 전공자를 받았으면 합니다.-요즘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어떻게 보시는지요?글쎄요, 제가 인문학 전체에 대해 언급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우선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들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에도 HK(인문한국) 사업 지원도 들어가고 하는데.국가 지원이라는 게 보면 조금 뭐랄까 너무 기획성이랄까 프로젝트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요. 연구 업적을 너무 단시간에 내야 하는 단점이 있지요. 가령 금년에 연구비를 받으면 내년에 내야 한다든지, 공동 프로젝트가 있으면 다들 몰려가서 그걸 해야 한다든지.연구자가 지원을 받는 것은 좋은데 그 조건을 탄력적으로 해서 자기가 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견고한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지금 사업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굉장히 빨리 성과물이 나와야 하다 보니,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잘 축적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둘째로는, 인문학이라는게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게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것이 학술적으로 견고한 연구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잘 나가느냐는 문제에 관한 한 아직 만족스러운 틀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인문학에 대한 여러 수요는 많은데 이 수요를 어떻게 학술적 연구와 잘 맞춰 충족시키냐는 거지요. 소화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죠. 아주 대중적인 차원에서 조금 고급스러운 단계까지 여러가지일 텐데, 그런 것들을 좀 잘 표현할 수 있는 포맷들이 정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대중 강연도 있을 수 있고, 대중적 글쓰기도 있겠지만 좀 더 높은 차원의 것들도 있었으면 합니다. 인문학이 제가 보기엔 좋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 교수는 일전에 “500명을 위한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5만명을 위한 책을 쓰는 저자가 있다”고 구분하시더군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500명을 대상으로 쓰지만 5만명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물론 욕심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얘긴데. 500명만 읽을 수 있는 연구의 깊이와 질을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해서 천명, 2000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아요.앞으로는 5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5000명, 만명 정도의 눈에 맞출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써야 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라시아사를 권한다면 어떤 이유를 들겠습니까?누가 그러더군요. 비타민이라는 것은 소량이지만 결정적인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극소량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처럼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앙아시아사 연구라는 것이 굉장히 소수인 마이너 분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세계사를 이해할 때 굉장히 핵심적인(essential)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잘 제시하느냐가 중요한데, 그게 되려면 연구가 깊이 돼야 합니다. 착실한 연구를 기초로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아, 이게 중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제가 그동안 노력했던 것도 그런 걸 한 겁니다.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절반의 성공은 거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이 연구를 시작할 때에 비하면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전혀 무익한 엉뚱한 쓸모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합니다.-곧 미국으로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9월부터 한 학기 연구년으로 가는 겁니다. 이번에 가서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에서 내가 맡은 장(章)을 하나 쓰고, 그걸 기초로 별도의 책을 하나 쓸까 생각합니다. 제목은 아직 미정인데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 정도가 될 겁니다. 그냥 연대순이 아니라 몽골인 자신들이 어떤 제도를 발전시켜서 세계 지배에 적용했는가 하는 측면을 다루는 겁니다.-앞으로 장기적인 학문 구상은 어떻습니까?몽골제국 연구를 더 하고 싶습니다. 몽골제국사를 전체적인 큰 틀에서 그려보고 싶어요. 좀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처럼 일반인들도 읽어볼 수 있는 ‘몽골제국흥망사’ 같은 것을 한번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담담하고 쉽게 세계 제국이 어떤 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그런 책은 아직 외국에 없나요?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간단한 개설서는 있지만 제가 본 관점에서 쓴 것은 아직 없습니다.-그 많은 연구와 저술을 소화하려면 일상 생활도 굉장히 조직적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남들과 똑같습니다. 특별히 잠을 적게 자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각고의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일 뿐입니다.-책은 전공서 외에 어떤 것들을 읽으시는지요?주로 내 분야 책인데, 가끔 이슬람이라든가 서양사 쪽 재미있는 책을 좀 찾아 읽기도 합니다. 문학 작품도 좀 찾아 읽고 해야 하는데 그런 정신적 여유가 안 돼서. 은퇴하고 나면 그것도 가능하겠죠.-공부 외에 다른 취미는 없습니까?(웃음)(웃음) 그거 사람이 무취미란 얘긴데,(웃음) 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전에는 테니스를 많이 쳤는데 요즘은 그것도 잘 못치고 운동을 못했습니다. 요즘 살이 쪄서, 이번에 가서 10킬로만 빼고 오려고 합니다.(웃음)-선생님 분야에서 일반 독자들도 꼭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신다면?사마천의 ‘사기’,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같은 것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김호동 교수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54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79년 서울대에서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앙아시아 위구르족의 독립 투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저서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황하에서 천산까지’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몽골제국과 고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등이 있다.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은 2004년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의 영문서로 출간했다.역서로는 ‘역사서설’ ‘유목사회의 구조’ ‘칭기스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슬람 1400년’ ‘라시드 앗 딘의 집사’(전 3권) 등이 있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28/2015082803382.html​     
  • 2015-08-26
    ​▲ 국내에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몰고 온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가 22일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이 저와 상담을 하곤 합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나 괴롭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불완전연소’했기 때문에 언제 다시 만날지 생각하는 겁니다. 그날을 정말 즐겁게 지내고 ‘완전연소’했다면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저는 삶을 댄스, 춤추는 것에 비유합니다. 춤을 춘다는 건 순간을 즐긴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추는 그 순간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누군가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아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생산성에만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중요한 건 용기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 공헌이란 특정한 행위를 통해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 자신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미움받을 용기’를 필두로 국내에 모두 10권의 책이 번역되는 등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국내에 몰고 온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가 방한해 강연했다. 남북 간 군사 대치로 긴장감이 팽팽했던 지난 22일이었다. 그는 교토대학에서 고대 서양철학을 전공한 뒤, 1989년부터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의 철학을 20년 이상 연구해 온 아들러 전문가다. 최근 후속 신간 ‘늙어갈 용기’ (문학동네) 번역 출간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숭실대 한경직기념관 무대에 섰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마치 한 사람을 상담하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이날 모여든 청중은 1200석 규모의 대강당을 80% 가까이 채웠다. 대학생부터 젊은 직장인, 아이 엄마, 직장에서 은퇴한 장년층까지 다양했다.질의응답을 합쳐 두 시간을 꼬박 채운 그의 강연 전문을 정리해 소개한다. 책을 통해 이야기해온 그의 핵심 메시지가 거의 다 담겼다. ◆자신이 가치 있다 생각할 때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오늘 오전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에 왔습니다. 사실 (북한 관련) 뉴스를 보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그래도 어떻게든 서울에 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여러분이 많이 참석해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웃음)오늘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젊은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참석해 주셨네요. 혹시 젊은 분 가운데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나요? 그런 분들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한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살아가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대인 관계에서 왜 용기가 필요할까요?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느니 차라리 학교에 가지 않거나, 혹은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은 없습니다.대인 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런 겁니다. 자신의 결점, 단점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집중력이 없다, 산만하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것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거지요. 많은 분이 스스로를 어둡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 성격이 어둡지 않으냐'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스스로 성격을 어둡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고의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굉장히 착하다고 여긴다면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가치는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에서 온다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을 인용한다면 이런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한다는 것. 더 쉽게 말한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공헌한다고 느낄 때, 자신에 대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또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공헌할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제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는 살아 계시긴 했습니다만 주변에 어떤 공헌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공헌할 수 없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따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한다, 할 수 없다로 판단할 때의 이야기지요. 그보다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아들러의 주장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병으로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주변에 공헌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도 2006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제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가족이나 친구에게 제가 민폐만 끼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봤습니다. 만약 제 가족이나 친구가 병으로 쓰러졌다고 말이지요. 만약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됐다면, 누구보다 먼저 병원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그리고 입원한 가족이나 친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자도, 그냥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예전에 저는 몇몇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학교에서 저를 해고했습니다. 그 학교에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상황이 좋아지면, 건강을 되찾으면 반드시 학교로 돌아오는 조건입니다.” 그때 저는 ‘나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아들러 심리학은 인간관계 속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다는 거죠. 혹은 도움이 됐다는 겁니다. 내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도움이 됐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갖게 되는 거죠. 저 역시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 혹은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상당히 기뻤습니다. 사람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지만 남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타인에게 공헌했다고 느낌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할 때 중요한 점은 절대로 ‘행위’에 주목하지 않는 겁니다. 행위로만 보자면 감사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의 경우, 아침부터 밤까지 부모 말을 듣지 않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부모는 아이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의 일인데, 밤늦게 저에게 “아빠, 오늘 고마워"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 참 놀랐습니다. 제가 그날 어떤 특별한 일을 했던가 생각해봤습니다만 그럴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이야기한 건 “오늘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는 뜻이었습니다.저는 그 덕분에 어떤 행위를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 표현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배웠고, 역으로 저도 아들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아닌, 존재하는 것만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성에만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면, 굳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보통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뭔가 특별하게 잘하려고 애쓰곤 합니다. 가령 부모의 기대를 많이 받은 자식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유명한 대학에 진학한다고 칩시다. 어떤 의미에서 그건 성공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때, 적극적인 성격의 어린이는 문제 행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소극적인 성격의 어린이는 학교에 가지 않거나,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특별히 잘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히 나쁘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보통으로 있는 것, 그 의미는 지금 당신이 있는 그대로도 좋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치매에 걸린 부모를 모시는 자녀라면,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라는 겁니다. 부모님이 하나하나 잊어버린 걸 가지고 일일이 불평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혹은 아침에 늦잠을 잔 자녀에게 “너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일어났니!”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늦게 일어난 자녀에게 “그래,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해보는 겁니다. 늦게 일어났다는 행위보다는 아이가 일어났다는 것, 눈을 떴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인간의 가치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생산성에만 주목한다면 훌륭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모두가 대등하며, 인간의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들러는 187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때가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닙니다만, 그 사상은 지금도 따라갈 수 없는 첨단 사상입니다. 인간의 가치에 상하 구별은 없다. 인간은 대등하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아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버렸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생각나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매주 아내와 자녀를 어딘가에 데려갔고, 1년에 한 번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경제적으로도 어떤 불편함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뭐가 문제고 뭐가 불만이냐”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바로 불만인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이 어디에 데려가지 않더라도, 남성이 경제적인 ‘우위’에서 부인을 돌본다는 것이 불만인 거죠. 어른과 아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나이 많은 어른이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어른과 아이도 대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나 경험의 양은 다르고, 책임지는 능력도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귀가해야 하는 시각을 오후 10시로 정했다고 합시다. 그건 그보다 늦은 시각에 귀가할 경우, 아이가 책임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른은 왜 귀가 시각을 정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점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생활에서도 분명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 가치의 상하 관계는 아닙니다. 회사에서 지위가 높다고 하면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서로 책임져야 하는 일의 양이 다른 겁니다. 저는 사실 이 시대가 아들러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병자나 노인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자 자신도 “나는 병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만으로 타인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가치는 어떤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에 있다한때 병원의 정신과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어느 날 50명 정도 되는 환자와 함께 요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회 복귀를 위해 요리를 해보는 거지요. 그날 아침 병원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장을 볼 텐데 도와주실 분은 함께 가자”고 했더니 5명 정도가 따라왔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요리를 하면서 “지금부터 요리를 시작할 테니 도와주실 분은 도와주세요”라고 했습니다. 15명 정도의 환자가 저를 도왔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냥 옆에 있었습니다. 그날 점심으로 카레라이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도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했습니다. 이런 걸 사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먹습니다.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을 권리가 없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도와준 사람은 컨디션이 좋아서 도와준 것일 수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도 가치가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스스로 일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타인보다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때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정년 퇴임한 학교 선생님에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서 누구도 자신을 선생님으로 불러주지 않을 때,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아주 힘듭니다. 왜냐하면 평소 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들은 ‘내가 교사라는 게 훌륭하다’ ‘나는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가 맡은 건 선생님이라는 역할입니다. 그 역할에 사람에 대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상당히 힘들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늙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가치를 없앤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가치란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제가 병에 걸렸을 때, 병에 걸려서 좋았다고 생각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자신이 병에 걸린 데에는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게 좋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다각도로 나를 바라볼 기회를 얻은 거지요.병에 걸리고 나니 내일이란 날이 온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1년 후, 2년 후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겁니다. 그때 저는 “나는 지금, 여기서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러는 ‘현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현실에 속한 삶, 그러니까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을 인식하고 오늘을 산다는 말이겠지요. 병에 걸린 사람은 앞날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신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 그것은 나의 본질과 상관이 없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낙담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방식일 뿐, 그 평가가 본질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평가에 좌우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자신을 어떻게 그에 따라 바꿀지 신경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타인의 평가를 계속해서 신경 쓰며 살면, 결국은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제 책 중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움받을 것을 권하는 게 아니라,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상황을 살아야 합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돈이든 명예든,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그런 게 의미가 없어지겠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과거와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자신을 산다두 번째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 실현된 뒤에야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습관적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간호학과 학생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국가시험에 합격해 간호사가 된다면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준비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지금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이런저런 게 실현된 뒤에야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하면 인생을 10년, 20년 뒤로 연기하는 거죠. 우리의 앞날이란 내일, 모레 일도 모르는 게 아닙니까? 제가 처음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오늘 밤에 잠들고 내일 아침에 눈 뜨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할 만큼 앞날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일을 생각하자고. 그 뒤로는 ‘내일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고 후회한다면 언제까지나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열심히 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에 눌려 신음하지 마라세 번째로 하고 싶은 말은, 자신에 대한 ‘이상’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자신을 바라봅니다. 이상적인 타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 ‘현실의 나’는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한정해서 보게 됩니다. 병을 앓아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재활 훈련을 할 때 갑자기 장거리를 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50미터 정도를 왔다갔다 해 보고, 그 뒤에 100미터를 가보는 거죠. 조금씩 조금씩 발전시켜 나갈 수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이상적인 자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나를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 번은 제가 3만 행짜리 코드로 이뤄진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출하기 하루 전날, 이걸 저장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실수로 삭제했습니다. 2~3일에 걸쳐 했던 작업이 쓸모없어진 거죠. 그 때 한 30초 동안 저는 굉장히 낙담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한탄하고 슬퍼해도 사라진 프로그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고민 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병에 걸린 것을 계기로 이런 것,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아도 아는 분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 생로병사를 네 가지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대인관계는 고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늙어가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 죽어가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죽음을 모르느니 죽음은 무서운 거라고 하자" 하는 식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만 합니다. 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막힌 혈관을 여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때 전신마취를 했습니다. 당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맥에 주사를 맞은 기억은 나는데, 그 뒤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그 몇 시간 동안 저는 죽음이란 게 이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린 죽음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닐 수 있습니다. ◆ 매 순간 완전연소하는 삶을 살자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이 저와 상담하곤 합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나 괴롭다는 겁니다. 늘 그렇게 괴롭다면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불완전연소’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생각하는 겁니다. 그날을 정말 즐겁게 지내고 ‘완전연소’했다면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산다면 그 다음, 그 뒤의 일이 신경 쓰이지 않을 겁니다. 다음 번이 신경 쓰인다는 말은 현재에 충실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함께 있는 동안에도 미래에 집착했다는 거죠.미래에 집착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해 보상받고 싶어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거나 칭찬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칭찬으로 인해 인간관계에 상하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대인 관계에서 칭찬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에서도 아래에 있는 걸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이에게 칭찬을 많이 했는데도 아이가 생각처럼 자라지 않아 고민이라면 이렇게 바꿔봅시다. 칭찬 대신 “고맙다” “네가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 겁니다.한 예로 제게 상담을 받으러 온 한 어머니가 3살 짜리 아이를 데려오곤 합니다. 아이가 얌전하게 기다리면 “너 훌륭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 “얌전히 있어줘서 고마워, 도움이 됐어”라고 해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도 ‘아, 내가 조용히 앉아 있었던 것만으로 엄마가 굉장히 고마워했지’라는 걸 알게 됩니다.죽음에 대해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제가 강연하는 도중에 마이크 전원을 끄면, 여러분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저는 말을 계속 하겠지요. 마이크가 고장 나는 건 우리 육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떠난 분을 직접 만나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더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한 그 분은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슬프지요. 슬픔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이 과연 그 슬퍼하는 모습을 본다면 기뻐할까, 그런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요.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춤추는 것, 순간을 즐겨라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살아간다는 건 처음과 끝이 있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일본 교토에서 왔는데, 오사카 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두 시간 걸렸고 지금 이곳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실 뉴스를 보고 오늘 한국에 올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저는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저는 삶을 댄스, 춤추는 것에 비유합니다. 춤을 춘다는 건 순간을 즐긴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추는 그 순간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른 나이, 스무 살이나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젊은이에게는 정말 안 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살았다면, 그 죽음은 그렇게 슬픈 게 아닙니다.아들러가 자신의 제자에게 들려준 이솝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놀다가 우유가 담긴 양동이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의 개구리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이 개구리는 양동이에 빠진 뒤 삶을 포기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마리의 개구리는 낙관주의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계속해서 생각하며 다리를 움직여 헤엄쳤습니다. 계속해서 다리로 우유를 휘저은 셈인데요, 그 덕분에 우유가 버터로 변했습니다. 그 개구리는 딱딱하게 굳은 버터 덩어리를 딛고 양동이를 빠져나왔습니다.홀로코스트 당시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도 끊임없이 자신이 어떤 쪽의 개구리인지 생각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수용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것으로 끝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이상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가혹한 현실 속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이 말은 심각하진 않지만 진지하게 살자는 겁니다.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살지만, 한 번 게임에 졌다고 해도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또 도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아, 내가 멀리까지 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늙음이나 병, 죽음을 맞는다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용기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 공헌이란 특정한 행위를 통해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 자신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할 때에는 용기가 필요하죠. 그런데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철 역에서 만난다거나, 같은 전철을 탄다거나.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인사라고 한다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겁니다. 그때 인사한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은 같이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해줬습니다. 나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건 컴퓨터 하드웨어를 바꾸는 것과 같지요. 그렇지만 자신을 ‘갱신’할 수는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계기로 타인에 대한 관점을 약간 바꿔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다르게 생각해보고 변화하는 시간이 되셨길 바랍니다. 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의 삶, 지금 제 삶은 여생(餘生)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플러스 된, 더 주어진 삶인 거죠. 제가 그때 죽었다면 이렇게 여러분과 만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다른 삶을 살았다면, 오늘 저와 이 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겠지요. 오늘 만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질의응답-‘늙어갈 용기’에서 대화할 때 ‘누구와 이야기하는지’를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무슨 뜻인가요?회사에서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상사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으로 부하 직원을 혼낸다고 해봅시다. 그때 ‘상사에게 혼났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어떤 내용으로 혼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이치에 맞는 것인지 보라는 겁니다. 그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저항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으로 혼내는데도 부하 직원이 참는다면, 어떤 목적이 있으니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사의 지시대로 하는 일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면 그 책임을 상사에게 전가하고 싶은 목적일 수 있죠. 상대가 상사냐 아니냐가 아니라 혼내는 내용이 맞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싸울지 안 싸울지, 대항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맞습니다. 그의 말에 수긍을 할 수 없다면 ‘또 시작이구나, 또 떠드는구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됩니다.(웃음) 정말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상사 때문에 소중한 삶을 불필요하게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회사생활을 할 때에는 일을 잘했다 못했다를 즉각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년 퇴임 한 뒤에 제가 하는 일이 공헌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에 대한 공헌을 바르게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인류라는 의미의 큰 공동체에 대한 공헌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반응을 곧바로 확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다못해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식사 후 가족들이 모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부가 설거지를 하지요. 다른 가족들은 주부가 설거지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설거지하는 주부는 ‘왜 나 혼자 여기에서 이렇게 설거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설거지를 한다는 건 가족을 위한 공헌이지요. 그렇게 여긴다면, 공헌하는 자신은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대인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왜 다른 가족은 안하나’ 생각할 수 있겠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다른 가족이 도와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 주부는 자신이 설거지함으로써 가족에게 공헌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그 공헌이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의존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남자가 어느 날부터 집 앞을 지나는 차에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다들 그 남자를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점차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출근할 때 그 집 앞을 지나지 않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보기 위해 일부러 그쪽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손 흔드는 행위에 대한 결과가 바로 돌아온 거지요.그런데 그 행위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큰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지역 신문이 이 이야기를 기사로 썼고, 그 이야기를 한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책에 실었습니다. 그게 일본어로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작은 마을의 한 무명 남성이 한 행동이 지금 한국, 서울에 있는 여러분에게까지 전달된 겁니다. 한 사람의 힘이란 의외로 큽니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전달될지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힘은 세계 저 끝까지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헌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공헌이 더운 한여름에 추운 겨울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한 번쯤 이런 공헌에 도전해보셨으면 합니다. -33살 직장인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타인의 칭찬에 연연하지 말고 용기 있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는 제게 결혼이나 직장 등 사회적 안정에 대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저를 낙오자로, 열등하다고 봅니다. 자꾸 자존감이 낮아지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어려운 질문이긴 합니다. 인간에겐 세 가지가 있는데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게 제일 낫겠지요. 그런데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은,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해야 하는 것이 훨씬 높은 곳에 있다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생기지요. 할 수 있는 것에서 해야만 하는 것을 향해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목표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동차를 갖거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는 것, 많은 재산을 쌓는 것. 그게 정말 가치가 있는 걸까요? 내가 병에 걸렸을 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에도 그걸 원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럴 때에도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 그런 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늘 작은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담아 다니곤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 아이가 손에 물을 담아 떠 마시는 걸 보고는 “이 아이에게 내가 졌다”며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버리는 경험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그 경험에서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일본 아이들을 예로 들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게임기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걸 왜 갖고 싶은지 물어보면 “다른 애들 다 갖고 있으니까”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에겐 게임기를 사 주면 안 되겠지요.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 게임기를 갖고 싶어하는 아이와 같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하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계속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 59)일본 교토대에서 그리스 로마 철학을 전공했다.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던 중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접하고 1989년부터 집중 연구해왔다. 저서로 ‘행복해질 용기’, ‘늙어갈 용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총 10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2013년 작가 고가 후미타게와 함께 펴낸 ‘미움받을 용기’가 2014년 11월 한국에 번역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유명세를 탔다. 현재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 고문이다.  윤예나 기자 yena@chosunbiz.com허인혜 인턴기자 bzhinhye@gmail.com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25/2015082502782.html​
  • 2015-08-15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 김지호 기자​모처럼 최고 지도자 입에서 책 이야기가 나왔다.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읽은 것이라고 했다. 제목까지 거명했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저자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미합중국인이다.그래도 한국 고전문학을 20년 가까이 공부했고 연암 박지원의 소설을 영어로 옮긴 학자로 일찍이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산 지 8년째다. 한국 이름까지 있다. 이만열. 결혼을 앞두고 한국인 장인이 지어준 이름이다.그런 그와 나는 구면이다. 3년 전이었다. 안동에서도 차로 30분을 더 들어간 군자마을에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가 선비 정신이었다. 한국사학계의 원로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담 상대로 나선 이가 그였다. 알고 보니 학벌이 길고 굵었다. 예일대 학사에 도쿄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차례로 거친 동아시아 문화 연구자라고 했다.그래 봐야 한국 전통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까. 입을 열 때마다 ‘썬비’ ‘썬비’ 하는 그의 발음만큼이나 학문적 내공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하지만 그의 책을 찾아 읽으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는 문제의식이 진지한 사람이었다. 한국에 대한 얕은 이해로 자기 몸값을 유지하려 드는 외국인 학자 같지는 않았다.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현재 상황에 대한 관찰과 보편적 해답의 모색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한국이 100여 년 전 구한말의 상황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 더욱 열심히 일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 않으면 언제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경고를 만고불변의 진리나 주문처럼 외고 있다. 한국이 여기서 경제 발전을 멈추고 근면한 생활을 중단한다면 또다시 저개발 국가로 주저앉을 수 있다는 우려감은 한국에서 가장 자주 동원되는 논리다.”“한국인들은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위대성을 이야기할 때는 1960년대 이후 기적적 경제 발전만 거론한다. 한국의 장구한 역사는 최근 50년의 기적적인 국가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극적 반전을 노리기 위해 등장하는 어두운 서막처럼 느껴진다. 이중적이다.”“한국인은 한국의 과거를 소개하지 않고는 국제 사회에 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한국이 담담한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한국을 국제 사회에 소개할 수 있다면 한국의 존재는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한국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색깔이 다른 또 하나의 멋진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제국주의 정책을 채택한 경험이 없는 선진 모범 국가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비록 두서가 없고 의욕이 앞선 글이기는 하지만 이 짧은 에세이 몇 편이 과도하게 위축된 한국인의 자신감과 지나치게 굴절된 한국인의 자존심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이를 통해 한국인이 더 많은 성취감을 얻고 더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9일 낮 서울 역사박물관 카페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대화는 시종 한국말이었다. 몇 차례 질문 속도가 빨랐을 때 되물어온 것 외에는 막힘이 없었다.-대통령이 여름 휴가 중에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읽었다고 해서 화제의 저자가 됐다. 언제 알았나?그날 회의 중에 누가 문자를 보내왔다. 방송에 나왔다고. 그전에는 전혀 몰랐다. 배경도 모른다. 두세 달 전에 한 일간지에 대통령의 방미 어젠더에 대한 기고문을 쓴 후에 청와대 홍보관인가가 누군가 찾아서 한 번 식사한 적은 있다. 한두 달 전에. 그게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기고문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길래?아베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박 대통령 다음으로 방미 앞둔 시진핑을 염두에 두라고 했다.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양국 조절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대통령이 당신 책 이야기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감은?글쎄. 기분은 좋지만, 동시에 걱정도 됐다. 사실 내가 한국을 대단히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교수이지 정치인도 아닌데. 어떤 의미에서 고맙고 영광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대통령이 굳이 왜 내 책만 언급해서 특별히 강조했는지 나도 궁금하다.지금으로서는 나는 교수 일과 아시아 연구소에서 세미나 기획하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주목을 받으면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싶지만,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다.-2년 전에 나온 책이다. 그때는 어떻게 출간하게 됐나?4년 동안 신문에 쓴 글을 묶고 확대 보완해서 내게 됐다. 사실 출판사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지금까지 얼마나 팔렸나?대통령이 언급하기 전까지 1만4000부 정도 나간 것으로 안다. 큰 히트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팔린 편이다. 대통령 발언 후에 5000부 더 찍었다고 들었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라니. 제목은 누가 지었나?처음엔 내가 ‘다른 대한민국’이라고 제안했는데 출판사에서 앞에 ‘한국인만 모르는’을 덧붙였다.-‘다른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은 무슨 생각에서였나?첫인상과 다른 대한민국, 한국 정부의 홍보물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대한민국이라는 뜻이다. 나는 한국만의 대단한 전통문화가 있다고 느꼈다. 한국인은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외국인에게 잘 안 알려주는 그런 것들 말이다.-한국인이 모르는 것들로는 어떤 것이 있나?가령 한국은 국내 정책과 제도에 관한 한 조선 시대에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만한 규모에 그토록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된 정부 시스템은 없었다.고려 시대의 다문화 전통, 조선 시대의 민본주의와 언로, 사랑방, 조선의 역관제, 중인들의 활약상 같은 것들은 지금 다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18세기 예학도 오늘날 법 적용이 어려운 네트워크사회에서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로 재해석할 수 있다.심지어 외교적 상상력도 과거 주변 강대국을 상대해온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에서 배울 것이 많다.1960년대 이후 한국이 이룩한 기적적인 성장의 경우에도 그 배후에 수천 년 지속해온 지적 전통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을 생략하는 경향이 많다. 한국이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한국이 지금 자랑하는 특정 기술이나 상품보다도 자신의 문화를 더 위대한 자산으로 인식한다면 한국은 세계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 잠재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책에 보면, “한국이 분야별로 뛰어난 것들은 많은데 유기적으로 연결을 못 시키고 따로 존재한다. 국가 브랜드와 통합하지 못하고 있어 존재감이 떨어지고 외국인이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고 했다. 가령 민주주의 얘기할 때 서양 고대 그리스부터 프랑스혁명, 미국 혁명 그런 민주화를 얘기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민주화는 80년대에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15세기부터 정부에 대한 투명성 요구하고 권력 견제하려는 시스템이 있었고 주장과 정책적인 시도가 있었다.그런 사람이 사대부였다. 한국 나름의 권력 분립과 견제 시스템이 있었다.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 역사에도 나름의 민주주의 전통이 있었고 어떤 면들은 현대 사회에도 배울 게 있다.선비 정신도 마찬가지다. 책임감 있는 지식인의 모델이다. 한국의 대단한 전통인데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내 친구 데이비드 메이슨 중앙대 교수가 최치원을 영어로 소개하는 책 편집을 거의 다 끝냈는데 아직 최치원을 영어로 소개하는 책이 없었다.세종대왕도 영어책은 몇 권 있지만 권위 있는 책이 거의 없다. 한국의 그런 전통을 한국인도 해외에서도 잘 모른다. 한국의 국가 브랜드에 얼마나 손실인지 모른다. -한국 정체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선비 정신을 들었는데.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의 핵심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국의 다양한 요소와 생활, 의식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야 한다. 한국인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틀이 되고, 외국인은 한국을 독특한 문화적 존재로 이해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지식사회로서의 한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나는 선비 정신의 전문가는 아니다. 한국의 지식을 유교 사상으로 보고 연암이나 다산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지식인이 있지만 특히 한국에는 책임감 있는 지식인 전통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지식인의 윤리적 행위의 중요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 말이다. 특히 정약용은 온종일 책을 읽으면서 항상 사회와 서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해외에 소개할 때 그런 전통을 소개하면 효과가 있겠다고 생각했다.-요컨대, 공부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감까지 겸비한 지식인 리더를 말하나?선비 정신을 연구한 전문가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이는 조선 시대를 말하고 어떤 이는 신라 시대, 단군까지 올라가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다. 선비 정신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내 목표는 아니다.외국인에게 한국 전통을 선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정도의 개념 이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행합일의 정신에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도 있고,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는 선비야말로 오늘날 세계 보편적인 지도자상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조선 주자학에 대한 변론도 눈에 띈다. 흔히 ‘추상적인 학문’으로 생각되는데, 그거야말로 진정한 ‘실학’이었다고 썼다.원래 주자 어록에 ‘실학’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남송의 사상 흐름을 보면 주자학은 오히려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에 가까운 개념이다. 유교, 불교, 도교를 통합하는 우주관이었다.주자학은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필요한 것이다. 과거 유학자는 책을 읽고 편지와 에세이를 썼다. 고전을 읽고 그 풍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아주 적은 물품만으로 검소하게 생활했고 행동은 절제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근본 원리에 대해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책 속의 무한한 깊이와 삶의 완전한 만족감, 나아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다.-한중일의 유학을 다 공부한 셈인데 삼국의 차이가 뭔가?미묘하긴 한데, 한국이 정통에 가장 가깝다. 일본은 불교가 강했다. 유교가 주류가 아니었다. 18세기부터 시작해서 뛰어난 유학자도 나오고 유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유교 제도는 별로 없었다. 과거시험도 없었고 제도적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한국은 복잡하지만 송나라 때 전통이 잘 보존됐다. 몇백 년 동안 전통을 승계하는 서원이나 학교가 남아있었다. 20세기까지도 계속 가장 오랫동안 유지됐다.중국의 경우 원과 명을 거치면서 역사적 격변이 많았고 전통이 단절됐다. 한국은 20세기에 와서야 단절됐지만 그전에는 잘 유지됐다. 중국은 유교가 그만큼 확고한 중심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명나라가 이데올로기로 보면 당연히 유교이지만 도교 관련 요소도 많았고, 청나라 때는 라마교가 상당히 많이 활약했고 이데올로기가 복합적이었다. 반면에 조선 왕조는 전반적으로 유교 지위가 높았다. -우리가 보기엔 조선왕조는 결국 열강에 시달리다가 일본에 강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지배 사상인 유학에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갖고 있다.일리는 있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 그런 생각은 일본 강점기 교육 탓이다. 일본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후진성을 강조했다. 근대화에 저항한 양반이 추상론에 빠져 실패했고 일본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많은 한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 신화는 성공했다.19세기 아편전쟁 때 서양의 군사력이나 기술이 중국과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아니었다. 그때는 유럽과 중국의 과학기술 제도에서 대단한 차이가 없다. 10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것이다. 그 시기 동아시아는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다. 반면 유럽은 계속 전쟁을 하면서 무기기술이 발달했다.이어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증기기관, 철강 제작 등의 기술, 세계적인 유통 시스템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18세기만 해도 영국보다 한국과 중국의 교육, 위생 수준이 높고 행정 시스템도 좋았지만 19세기가 되면서 정반대가 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이 격차를 만들었지만 원래 문명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과학기술이 문명의 산물 아닌가?물론이다. 하지만 18세기에 동아시아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대포 같은 무기를 개발할 필사적인 필요성 있었으면 오히려 이곳의 기술이 더 발전했을 수도 있다. 전통 문화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뒤처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일본의 침략 정당화 논리라고 했지만, 조선 지배층이 바깥 세상의 변화에 무지하고 안으로 권력 다툼을 일삼다가 나라를 뺏긴 것은 사실 아닌가?일부 맞는 말이다. 내 책에서 썼지만 한국인은 한반도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한국 문화가 뒤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전통을 잘 보면 아주 우수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모든 게 다 좋다는 게 아니다. 나도 조선 시대에 살고 싶지는 않다.-사실 우리 전통 문화가 위대하다는 이야기는 국내에서도 주장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하버드 박사가 말했다’는 것 말고 다른 게 뭐가 있나 반문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그런 전통론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나는 단순히 한국 것이 좋다고 한 게 아니라, 세계적인 기준에서도 통할 수 있고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가령 조선 시대의 춘추관과 그 결실인 실록 편찬은 대단한 것이다. 어떻게 500년이나 정부 기관이 그만큼 정확한 객관적인 정보를 정리할 수 있는지 아주 인상 깊었다.한국인이니까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한국인도 아니고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오히려 그만큼 우수한 행정시스템은 지금 같은 정보화 시대에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전 세계에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한국 유기농도 마찬가지다. 환경을 걱정하는 지금 시대에 아주 좋은 영감과 통찰을 제시한다. 현대적이고 세계 보편적인 적용의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전통이 세계적인 보편 가치나 기준의 관점에서 제대로 소개되거나 드러나지 못한 점에 주목한 것이다. 싸이월드도 페이스북보다 더 빨리 시작하고도 한국만 겨냥한 결과 그렇게 됐다.영어판을 만들었을 때 크게 투자하지 않고 실력 있는 외국 인력을 고용하지 않았고, 한국판과 영어판이 서로 교류하지 않게 했다. 한국 시장만 생각하고 해외를 사이드쇼로 봤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이 99%이고 한국이 1%여야 하는데 그걸 생각 못 했다. -그걸 당신은 ‘새우 콤플렉스’로 설명했다.새우 콤플렉스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비롯된 강박관념 같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주변 강대국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약소국 지위를 염두에 둔 채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자학적 공포심이 핵심이다.한국은 지난 100여 년 역사에서 엄청난 민족적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2등 국민 취급을 받았고, 일본이 항복한 후에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 합의로 국가가 분단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다음에는 북한의 공격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하지만 그 후에 성장을 이루고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르고 월드컵 4강에도 오르는 등 빠르게 위상이 올라갔다. 두 세대 만에 저개발국가에서 선진국 대열로 진입했다. 그러다 보니 이 과정에서 한국은 자기 위상을 제대로 인식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한국은 자기 위상에 대해 현실과 달리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시야도 좁다. 한반도에만 갇혀 있다.가령 네이버가 전형적인 경우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네이버에 투자했을 텐데, 네이버에서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아직 영어판, 중국판도 없다. 그만 한 검색엔진에 투자한다면 전 세계를 생각해야지.국내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중국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한다. 능력이 아니라 사고의 문제다. 한국은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한국이 국제적 위상이나 지위에 비해 책임감이 희박하다는 점도 문제라고 했는데.가령 한류라고 해서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 많이 본다. 그런데도 한국은 그 영향력을 별로 의식 안 하는 것 같다. 여기에 나오는 한국인은 호화롭게 살고 흥청망청 산다. 못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나 환경 문제, 사회 도덕 문제에도 무관심하다.한국 TV 보면 이상한 가족만 나온다. 이기적이고 패륜적인 사람만 나온다. 한국이 성형수술로 유명해지는 것도 자랑할 게 못 된다. 다른 선진국은 기술이 안 돼서 안 하는 것 아니다. 뛰어난 손재주가 왜 그런 걸로 알려져야 하나.-한국을 어떻게 선전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썼다. 부연한다면?한국이 지난 50년 동안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어느 대통령이나 장관들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전에 500년간 조선의 우수한 행정시스템의 경험이 있었다. 물론 조선 말기에 사회 모순이 많았다. 인정한다. 하지만 이어져 온 전통이 있었다. 아프리카와는 달랐다.한국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달랐기 때문도 아니다. 향교나 서원 같은 우수한 교육 제도가 있었다. 조선의 통치(governance) 시스템에도 우수한 부분이 많았다. 장기적으로 보고 50년, 100년 예측해서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지금보다 나았다. -“한국은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한다. 현대 대한민국도 과거 조선과는 끊긴 별개의 나라처럼 본다. 이 간극이 한국의 목표, 문화적 중요성, 자신감을 해치고 있다”고 썼는데.한국인들은 지금 한국의 모습이 1960년대부터 열심히 일한 결과라고 말한다. 1950년대 1인당 GDP가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 비슷했지만,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고 자랑한다. 외국인도 그걸 들으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국은 소말리아와 결코 같지 않았다. 똑같이 굶주려 있었어도 그중에 기계공학 박사도 있었고, 500년이나 이어온 학문의 전통을 이어온 사람, 행정을 잘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강의 기적은 맨몸, 맨땅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유구한 지적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잠재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조선과 비교할 때 흔히 일본의 앞선 개방과 근대화를 이야기하는데,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을 아시아에서 앞선 나라로 봤다.나도 1985년 대만에 유학할 때 잠깐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다. 아주 깨끗하고 살기가 좋아서 일어도 배우려고 했다. 일본에 대한 외국인의 전형적 경험을 나도 했다. 실제로 그때 일본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중국을 전공했지만 일본에 유학 가려고 했다.일본이 근대화에 앞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섬나라여서 중국 대륙과는 거리를 두면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 있다. 가령 18세기 일본 지식인 중에는 자신들이 동양인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반면 중국과 한국은 유교 사상의 중심에 있어서 혁신이 쉽지 않았다.19세기 아편전쟁 때 한중일 다 충격을 받았지만 한국과 중국은 철저한 혁신이 어려웠다. 자신의 문화 정체성과 관련된 혁신이어야 하니까. 혁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17세기부터 국학 전통이 있어서 중국에 대해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자기만의 대담한 정치적 혁신을 단행할 수 있었다.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한국의 갑신정변, 중국의 변법자강의 경위를 비교해 보면 분명하다. 한국과 중국은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중국은 나중에 공산주의까지 전면적 혁명으로 갔다. 일본은 전면적인 제도 혁신을 택하면서 혁명까지 가지 않았다. 아마도 중국 문화와 거리가 있어서 가능했다.-당신은 책에 “한국인들은 이상하리만큼 일상적인 관리와 보존, 재건에 무관심하다. 그 대신 특정 지역 전체의 재개발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서울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옛날 골목을 청소하고 꾸미는 사람, 미적인 도시환경을 만드는 생활 예술가”라고 썼다. 이 구절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리트윗이 500회를 넘어갔다.한국 사람들은 옛것을 없애고 새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앞으로도 농업에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들 직업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방에 가면 오히려 좋은 기회를 맞을 수 있다.-추석 문화도 다문화 사회에 걸맞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무 대화도 없이 시간만 보낼 게 아니라 선조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의 시간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고 썼다.이미 다문화사회인데 의식이 못 따라간다. 시골에 가도 외국인 다문화 아이들이 아주 많다. 우리 아들은 3년 전 서울에서 조그만 국제학교를 다녔지만 학생이 다 한국인이었다. 딸은 장충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국제학교보다 외국인 학생이 훨씬 더 많았다. 우즈베키스탄, 중국, 베트남 아이들이 많다. 대도시에도 시골에도 이제는 외국계가 적지 않다.그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자기 문화로 느낀다면 앞으로도 대단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단히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외국인이 어울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나?한국인이 의식을 바꿔야 한다. 외국인하고 한국인이 공동으로 뭔가 많이 해야 한다. 서로 어울려야 한다. 나만 해도 한국 문화를 어느 정도 공부하고 8년을 살았지만 같이 연구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없었다.아주 최근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예산 200만원 정도의 연구 제안을 받은 게 유일하다. 국내에 분명히 많은 학자가 한국 문화를 연구하고 있지만, 대개 한국인끼리 연구하고 맨 마지막에 외국어 번역 업체에 맡기는 식이다. 처음 기획 단계부터 외국인과 작업하는 것도 필요하다.  -요즘 TV에 외국인이 많이 등장한다. 미디어를 통해 견해를 발표하고 책을 내기도 한다. 어떻게 보나?사람들 의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효과가 있고 좋은 일이다. 다만 그 단계에서 머물면 곤란하다. 한국 전문가들 육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어 책을 읽고 한국어로 발표할 줄 아는 외국인도 필요하다.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국제학부에 가서 영어로만 읽고 쓰고 말하다가 간다. 실제로 한국어로 논문도 안 쓴다. 그러면 한국어 실력에 한계가 있다. 나는 도쿄대 갔을 때 일어로 수업 듣고 논문도 썼다. 그 결과 지금도 일어는 어느 정도 자신 있다. 그때 영어로 수업 들었으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가령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학생에게 엄격하게 한국어 실력을 요구하고 그만큼 좋은 교육도 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외국에서 유능한 사람 데려오려면 영어를 편하게 쓰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어가 걸림돌이 돼서 우수 인력이 안 온다는 반론도 있다.균형 있게 하는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기업에서 영어 잘하고 미국에서 MBA 한 사람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한국어로도 충분히 책 읽고 발표하고 실무를 볼 수 있는 외국인도 필요하다. 가령 인도 정도면 현지 인력에 한국어 교육을 충분히 해서 인재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지금은 우연히 그런 인재가 배출된다.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한국 기업 내에서도 외국인을 데려와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결정에서 배제된다. 다 한국인들이 한다. 외국인이 와서 큰 활동을 하려면 한국어 실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20-30대 우수한 외국인을 유치해서 1년 정도라도 어학에 투자하면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결국 해외에 한국을 알리려면 외국 지식인에게 한국을 묶어서 표현해 제시하는 좋은 영문 개설서나 문학 작품도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요즘은 오히려 외국에서 한국에 관한 심층적인 글과 책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애덤 존슨 스탠퍼드대 영문학 교수가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탈북자들을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북한에 대해 쓴 책이었다.미국에 있는 한국 전문가도 대개 북한 전문가가 더 많다. 한국 정부나 기업들은 워싱턴DC에 있는 정치 컨설팅업체에 엄청난 돈을 쓰고 있지만, 지한파 육성에는 돈을 안 쓴다. 단기적이고 일시적 기대 효과에만 연연한다. 일본은 로비스트들에게도 돈을 쓰지만 동시에 장기적으로 지일파 인재를 육성한다. -당신은 언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나?1991년 재미교포 한인인 대학 동창 결혼식 참석차 한국에 처음 왔다. 그때 나는 일본 도쿄대에서 유학 중이었다.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사람들이 무척 친절했다. 그전에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한국 문화 전통이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한국의 문학이나 역사는 배우기 전이었다.일본 고전 문학을 6년 공부했지만 한국에 대해 소개된 것은 거의 못 봤다. 동경대에 실력 있는 한국 유학생은 봤지만. 마치고 하버드대 박사 과정으로 갔을 때는 한국학 교수도 3명이나 있고 한국학 전공자 학생들도 많고 해서 한국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다.동경대에서는 19세기 중국과 일본 한시를 비교 연구했고, 하버드대에서는 17-18세기 동아시아 통속소설을 비교 연구했다. 그러다 1995년 하버드대 박사과정 중에 서울대에 교환 학생으로 왔다.-그때 인상은 어땠나?서울은 아주 복잡했고,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았다. 미적 감각이 일본에 비해 부족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단히 친절했다. 내 성격과 잘 맞는 부분이 많았다. 한국 전통 사상과 문학에 끌렸다. 나는 요즘 외국인들이 흔히 얘기하듯이 한류에 빠져서 온 경우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 유행가나 영화는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다.요즘도 그런 질문 받지만, 나는 지금도 매운 것 못 먹고,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고기도 안 하고, 다른 여러 한국 관습에 익숙한 것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은 다산의 사상이나 선비 정신, 조선의 위대한 행정 시스템, 뛰어난 무형 문화 전통에 있다. -한국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일본 유학 마치고 하버드 박사 과정에 가서 일본과 중국을 비교 연구하던 중에 그 사이에 있는 한국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연암 박지원 소설을 보고 상당히 깊이가 있는 작품이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성격의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나름의 전통을 더 공부하게 됐다.(그는 박지원(1737-1805)의 소설 양반전 허생전 등 10권 전 권을 영어로 번역해 서울대출판부에서 냈다.)하버드대는 한국학이 강하다. 우수한 학생도 많고. 그때부터 한국 전공 학생들과 교류도 많았고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어 수업도 있어서 들었다. 중국과 일본은 오래 해서 아는 것도 있고 해서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해보니까 언어도 재밌었고 한중일 고전소설 비교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또 선행 연구를 조사하면서 한중일 비교는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앞으로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교수가 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한중일 소설 비교 연구를 하면 주목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한국이 지금처럼 중요한 나라가 될 줄은 몰랐다. 공부하다 보니 한국에 초청도 받고 연구도 하게 됐다. 100% 내가 한국을 선택했다기보다 한국도 나를 선택한 측면이 있다.-그전에 동아시아 문화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미국 중서부인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에는 동양 사람을 못 봤다. 아버지가 샌프란시스코로 직장을 옮기면서 나도 따라가서 고등학교를 거기서 나왔다. (아버지는 교향악단 사장으로 20년 근무했다.) 그때 중국, 일본계 친구들 많이 사귀었다.대학에 들어갈 때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는데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 불어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른 방향으로 가볼까 생각하던 중에 앞으로 중국이 중요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자 공부도 재미있었다.-책에 보니 외할버지가 룩셈부르크 정부의 차관까지 지냈다고 썼던데.어머니가 룩셈부르크 출신으로 미국에 유학 왔다. 아버지는 미국 태생이긴 하지만 유대계 헝가리인이다. 120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온 집안 후손이다.외할아버지는 내가 6개월 때 뵌 적이 있다고 이야기만 많이 들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와서는 상당히 의식한다. 룩셈부르크는 미묘하게 한국과 유사한 점이 있다. 독일과 프랑스 대국 사이에서 시달림을 받았다.아버지 쪽 집안에는 나치 학살 피해자도 있고, 어머니 쪽 외할아버지는 친불계인데 그 형은 친독 나치당으로 활동하는 등 집안이 서로 갈라진 아픔이 있다. 내 혈통에 나치 지지자도, 학살당한 유대인도 있는 셈이다.그래서 비슷한 지정학적 처지에 있는 한국에 내가 끌린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 더 오래 했지만 한국과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서울대에 교환학생으로 자원해 온 건가?한국을 좀 더 깊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책도 좀 읽고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학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일본에서 6년 살았지만, 친구는 2-3명 정도였는데 한국은 1년 새 4-5명이나 생겼다. 아내도 만났고. 일본도 좋은 나라인데 코드가 맞는 사람을 못 만났다.-이만열이라는 한국명은 언제 지었나?18년 전에 장인 어른이 지어주셨다. 1995년 유학생으로 왔을 때 친구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났다. 중앙대 국악과 대학원 석사 과정이었는데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97년 결혼 후 미국으로 가서 11년간 살았다. 아내는 지금은 다시 대학원에서 한일 불교 미술사를 공부한다.-서울대 교환 학생 때 친하게 지낸 사람으로 지금껏 연락이 이어진 사람이 있나?교환 학생으로 온 것은 중문과였지만 국문과 수업도 많이 들었다. 정병설 지금 서울대 교수와 당시에 아주 친했다. 같은 고전소설 전공에다 비교 연구에 관심이 많고 해서.-학위를 마친 후에는?1997년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 한 학기 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일리노이대에 취직해서 8년간 교수로 있었다. 2005년 조지워싱턴대 교수로 있으면서 주미 한국대사관 자문 일도 잠깐 했다.-그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을 했나?처음엔 미국인 입장에서 미국이 한국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북한 전문가는 많아도 남한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한이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역할이 커지고 있는데 한국 자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그래서 나름대로 미국인들 상대로 한국의 중요성 알리는 활동들을 했다. 한국 문화원 자문도 하고 그곳에서 내는 잡지 ‘다이내믹’ 편집장도 하고 세미나도 열고 했다.-한국으로 와서 살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2007년 이완구 당시 충남도지사가 당선된 후 보좌관으로 오게 됐다. 이 도지사 밑에서 일한 최민호 박사가 안식년으로 워싱턴DC에 1년 와 있었는데 소개를 한 것이었다. 의논 끝에 우송대 교수로 와서 강의하면서 보좌관 일도 겸하게 됐다.그전에 2006년 고려대 국문과에서 교수로 초빙받은 적도 있다. 당시 총장이 국제화를 추진하면서 국문과에 외국인 교수도 받으려고 했다가 교수들 반발로 취소됐다. 나는 한국에서 교수를 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충청남도 도지사 보좌관 제의를 받으면서 외국인이 쉽게 알 수 없는 한국의 내부를 이해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막상 와서 겪어보니 좋은 점도 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아이들의 한국 적응도 쉽지 않았고 대학과 도청의 이견으로 인한 문제가 적지 않았다. 많이 배웠다.대전에는 4년 있었다. 충남도 보좌관 2년, 대전시와도 국제화위원회 같은 여러 곳의 자문 활동을 했다. 그러다 2011년에 경희대로 갔다. -책에 보니까 대전시 문장(emblem)도 만들고 했던데 혼자 만든 건가?그건 시청 자문으로 한 게 아니고 개인적인 관심에서 만들어 본 것이다. 나는 ‘대전 사람만 모르는 다른 대전’이라는 제목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대전에 대한 역사, 문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대전하면 주로 대덕연구단지와 과학도시를 이야기하지만, 그곳에 옛날 신라 시대부터 산성이 많은 곳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그때 대전 소개하는 웹 사이트도 개발하고 책도 쓰려고 했다. 대전시 지원도 없이 도안이 들어간 티셔츠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대전뿐만이 아니라 한국이 전반적으로 자기 고장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반면에 유럽에 가보면 작은 마을도 휘장을 만들어 자동차에 붙이고 다닐 정도다.-유럽은 오랜 봉건제 전통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물론 그런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한국에도 지역마다 향토사학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유산에 비하면 그것에 대해 주민이 갖는 관심이나 지식은 너무 부족하다는 얘기다. -자녀들은 한국 생활을 좋아하나?둘 다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왔고, 딸은 세 살 때 왔다. 아들은 모국어가 영어이고 딸은 한국어가 더 편하다. 아들은 2년 정도 한국 학교에 다니다가 적응이 안 돼 작은 국제학교에 보냈다. 딸은 계속 한국학교에 다녔는데 다음 학기부터는 국제학교에 자기도 도전하기로 했다.좋은 경험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 둘 다 한국 이름이 있다. 지민과 정민이다. 하지만 이제는 벤저민, 레이철이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학교 아이들이 한국인으로 인정을 안 해서다. “너는 외국인이니까 한국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서 다 포기했다. 이제는 한국 이름 절대 안 쓰겠다고 한다. 주변 아이들로부터 한국인으로 인정받았다면 훨씬 쉽게 생활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한국학교에 다니고 있을 텐데.-외모가 차이 난다고 따돌리는 건가?100% 그렇다. 아이들 보기에 조금 다르니까 외국인 취급하는 거다. 나 같은 어른이야 익숙하지만, 아이들은 힘들어한다. 그냥 친구랑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고 싶은데 항상 외국인 취급을 받고 하니까.-이제 우리도 다문화 사회라고 하는데 아직 그런가?큰 문제다. 한국은 지금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데. 레이철은 지금까지 장충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다문화반이 2년 전에 생겼다. 주 1회 다문화 아이들과 공부하는 시간도 생겼다. 하지만 그뿐이다. 지난 50년 동안 한민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걸 탈피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겠지.-지금 운영하는 아시아 연구소는 어떤 곳인가?경희대 교수 세 명, 숙명여대 교수 6명 등이 같이하는 싱크탱크다. 주로 대학생 고등학생 대상으로 문화, 국제관계, 환경 문제를 토론하고, 진지한 세미나도 연다. 어제도 경복궁과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 설명했다.원래 대전에서 시작했다. 그때는 주로 과학기술 관련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중국 일본 미국 등 연구원 국적이 다양하다. 청소년이 쉽게 참여할 수 있고, 국제관계와 문화도 같이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그때만 해도 별로 없었다.-혹시 그동안 글도 쓰고 책도 내고 하는 동안 한국학 전공자들로부터 섣부른 이야기라는 비판을 듣지는 않나?원래 내 전공은 고전 문학인데 정치외교나 과학기술 같은 다른 분야까지 글을 쓰고 활동하는 데 대한 지적이 비판의 80%쯤 된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고 인정한다.한국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런다는 지적은 별로 없었다.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어에 대해서도 오히려 엄격하게 지적해 주면 나로서는 좋겠다. 지금이라도 한국어 수업을 더 하고 싶다. 발음도 고치고 표현도 배우고 싶다.-전공 이외 이야기를 하는 데 대한 비판이 많다고 했는데 그래도 발언을 하는 이유는?그렇게라도 의견을 말하는 외국인이 별로 없어서다. 과학기술 분야는 내 전공은 아니지만 원래 관심이 있었다.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 한국의 전통 과학기술에 대해 잘 알면서 한국어로 얘기할 줄 아는 외국인은 몇 명 없다. 외교안보 분야도 마찬가지다.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도 여러 행사에 초대받고 특강도 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나 같은 외국인도 필요하니까 그 역할을 했다. 물론 내가 아주 잘해냈는지는 모르겠다.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판결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나는 한국이 ‘강남 스타일’ 같은 한류 음악 말고도 가치관에 있어서도 세계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나라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본다. 아직 거기까지 못 가고 있다. 동시에 미국인에게도 한국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그래서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 매체에 영어로 기고도 한다. 나는 한국 홍보맨이 아니다. 미국을 위해서도 미국인들이 한국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가 피상적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토론에도 참여시켜달라고 썼다.그런 경우가 많다. 한국인을 만나서 가벼운 이야기는 하는데 심도 있는 대화는 잘 안 된다. 한국인들은 외국인과 심도 있는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늘 “한국에 언제 왔느냐” “매운 김치 먹을 수 있느냐” “아이가 몇 명이냐” 매번 이런 문답만 주고받다가 끝난다. 오늘도 한국 신문을 읽었지만 이런 얘기를 한국인과 토론할 기회는 많지 않다.-고전문학 전공자인데 이제는 국제관계에 대한 글도 쓴다. 앞으로 계획은?나는 사실 고전문학자로 외교안보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국제정치에 대한 칼럼도 쓴다. 공부는 하고 있다. 뭐가 가장 바람직한 길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지난달에도 캐나다에 가서 중국의 고전문학과 춘향전 비교 발표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쪽에 연구에 몰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좀 더 다양하게 활동하면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 것 같다.건방진 얘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미국인으로 한중일 모두 소통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내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미국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다음 책은?서울이라는 도시를 소개하는 책을 쓰는 중이다. 빠르면 내년 초에 나올 것이다.◆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1964년 텍사스 내슈빌 출생. 예일대에서 중문학 학사(1987), 도쿄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1992),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1997) 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조지워싱턴대 역사학과 겸임교수, 주미한국대사관 홍보원 이사, 우송대 솔브릿지 국제경영학부 교수를 지냈다. 경희대 국제대 교수 겸 아시아 인스티튜트 소장으로 있다.저서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세계 석학들 한국 미래를 말하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연암 박지원의 단편소설’ ‘중일 고전소설의 세속성 비교관찰’ 등이 있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13/2015081301709.html​ ​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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