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10-27
    ​ 디지털 시대에 콘텐츠 산업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세계 출판업계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지영석 엘스비어 회장이 지난 10월 11일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특강했다. 주제는 ‘출판산업의 디지털화와 한국출판산업의 미래’. 국내 출판사 관계자와 편집자 들을 비롯해 일반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지 회장이 30분 정도 준비한 슬라이드를 시연하며 강연한 데 이어, 1시간이 넘게 참석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질문에 답했다. 출판은 물론 콘텐츠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주요 이슈가 거의 모두 거론됐다. 지 회장과 서울국제도서전 측의 허락을 얻어 강연 전문과 질의응답 내용을 소개한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물론 책의 미래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강연>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우리나라가 고도로 교육받은 국가로 성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문자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하지만 지난 20년에 걸쳐 세계는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한글은 물론 모든 문자 언어들은 유례 없는 새로운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자는 전통적으로 책, 신문, 잡지 등에서 활자 형태로 사용돼왔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대단히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표면적으로 출판 산업은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도서 판매부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출판 산업 매출도 2010년 이래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영화, 게임, 음악, 출판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중에서 출판만이 수익을 잃고 있는 유일한 산업입니다.한국에서는 지난 20년 사이 서점의 70% 가까이가 문을 닫았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사람들은 출판 산업이 지금껏 봐온 중에 가장 어두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합니다.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실제로는 기대를 가질 만한 변화와 새로운 성장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저 책을 인쇄하고 유통하는 사업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와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오늘 저는 이런 진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디지털 세계에서 출판사들이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도전 과제입니다. 둘째는 이런 변화의 물결을 타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기회로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우리 출판 산업은 가끔씩 따라잡기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속도로 움직입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출판사들이 직면한 도전 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술 발전의 빠른 속도. 둘째, 다양한 디지털 오락거리. 셋째, 디지털 콘텐츠의 홍수입니다.I. 도전 과제1.기술 발전의 빠른 속도지난 수년 간 인터넷에 연결된 모바일 기기가 확산되면서 전세계 수십 억 사람들은 이제 휴대전화를 엄지 손가락으로 쓱 문지르거나 노트북의 키보드만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온갖 정보와 온라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현재 인터넷을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 30 억명에 이릅니다. 70억 개 이상의 태블릿과 스마트폰이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보기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읽고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형식의 읽기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현재 전 세계적 도서 판매량의 약 30%를 전자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전자책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2009년 이래 전자책 판매량은 약 25-30% 증가했고, 매년 증가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통계를 봤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콘텐츠의 사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사용자들이 디지털 콘텐츠에 접근하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방식도 급변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전자책 독자의 절반 이상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같은 다기능 기기로 읽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저자, 출판사 들은 모바일 장치로 콘텐츠를 읽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매년 수 천 개의 새로운 앱을 개발함으로써 이러한 전환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애플 앱스토어에서 검색을 하면 5만8000개의 책 관련 앱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기술의 발달 덕분에, 독자들은 전통적인 출판사 도움 없이도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습니다.Wattpad, Lulu 같은 웹기반 출판 플랫폼들은 현재 사용자가 수백 만에 이릅니다. 전자책 셀프퍼블리싱(Self-publishing, 자가출판) 판매는 2013 년 판매된 전자책의 5 분의 1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또한, 네이버 같은 웹사이트들은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자신들의 웹툰 포털을 통해 재능 있는 젊은 작가와 예술가 들이 젊은 독자들과 만화를 공유할 수 있도록 통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2. 디지털 오락거리이러한 기술 변화들은 출판계 내 새로운 기술의 창조로 진행되고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새로운 다른 오락거리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소셜미디어, 인터넷, 게임 등 여러 방향으로 끌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소요 시간을 합산해 보면,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에 주당 30억 시간, 유튜브는 29억 시간, 페이스북은 23억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책 읽기에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한국에서는 사람들은 인터넷 서핑에 매일 약 2시간 15분을 쓰지만, 책을 읽는 데는 26분밖에 쓰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평균적인 한국인의 경우 책이나 신문, 잡지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5배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실제로, 18세 이상 한국인의 독서 비율을 조사했을 때, 1년에 1권이라도 책을 읽는 사람은 71%입니다. 유럽 선진국들보다 낮습니다. 한국 정부는 사회에서 책의 매력이 감소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고, 젊은이들이 더 많은 책을 읽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압니다.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의 독서 캠페인은 어린이 수준에 맞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아이가 책을 효율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부모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출판계는 이 세대가 책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될 것 같다는 걱정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3. 콘텐츠의 홍수디지털 콘텐츠 시장은 2019년쯤이면 549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술 발전 속도에 관해 앞에서 말씀 드린 숫자들을 기초로 보면,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 기반 또한 대단히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전자책은 일상이 되고 있고, 작가의 셀프 퍼블리싱(자가출판)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온라인 자료들은 전국에 중계되는 ‘먹방’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2009년 유럽연합에서는 51만5000종의 새로운 도서가 출판되면서 모두 640만종의 책이 출판됐습니다. 신규 도서의 종수는 2013년까지도 계속 증가해 56만종이 출판됐고, 전체 출판된 도서는 1600만종에 달합니다이것은 재출판과 주문형 출판이 크게 성장한 결과입니다. 특히 셀프 퍼블리싱과 틈새시장을 노린 출판물, 공유 저작물이 급증한 결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2013 년까지 미국에서 45만8564종의 셀프 퍼블리싱 도서가 출판되었습니다. 2012년에 비해 85%, 2008 년에 비하면 437% 증가한 수치입니다.II. 기회이러한 기술 속도와 디지털 오락거리의 다양화, 콘텐츠의 홍수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위협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러한 변화들을 위협으로 보기보다 좀 더 효율적이고 역동적이 될 수 있는 진화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지금이 창의적이 될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번영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그래서 저는 출판사들에게 ‘e-접근법’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이 접근법은 우리 출판산업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몇몇 글로벌 출판사들이 적용했던 e-volution(e-진화) 방식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향상(Enhance), 둘째, 참여(Engage), 셋째, 실험(Experiment), 이 세 가지입니다.1. 향상(Enhance)첫 번째 e-접근법인 ‘향상’은 출판사들이 기술을 활용해 지금까지 늘 해오던 것을 더 향상시키는 것입니다.-콘텐츠 혁신 (Content Innovation) 새로운 기술 덕분에 우리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콘텐츠의 질과 범위 모두를 향상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작가 켄 케세이(Ken Kesey)는 “단어들은 페이지에 놓여있도록 쓰인 게 아니다. 그것들은 일어나서 돌아다니게 돼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읽기란 상호적이면서 독자를 둘러싸는 경험이고 창의성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돼 있습니다디지털이 준 발전과 기회의 시대에, 우리가 독자들을 더 끌어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읽기를 좀 더 경험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축구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상암 경기장에서 축구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면 손흥민이 골을 넣을 때 흥분의 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TV 를 통해 무료로 경기를 볼 수 있지만, 돈을 주고 경기장에 가서 관중의 함성을 듣고 눈부신 조명을 느끼며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출판사들은 그저 페이지에 놓인 글자와 숫자를 읽는 것을 넘어 정보 탐색을 더 체험적이고 자극적인 경험으로 만들 기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전자책의 향상 (Enhancements in E-Books)전자책은 점점 상호적이고 비선형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전자책 기기들이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의 독자 수 통계까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알 수 있고, 이것은 모두를 위한 사회적 독서 체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다음 단계는 출판사들이 비디오, 오디오, 인터넷 생방송 같은 이질적인 미디어를 텍스트와 통합시킨 전자책을 개발해 독자들에게 상호작용적인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메타북(Metabook)과 인터렉티브 독서의 다음 단계이러한 첨단적인 특징들을 이미 채택하고 있는 출판 플랫폼의 한 예가 메타북입니다. 향상된 콘텐츠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입니다. 지난 2월 메타북은 미국 남부의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관한 베스트셀러 논픽션인 존 베렌트(John Berent)의 ‘선악의 정원’을 상상 버전으로 출시했습니다. 원전에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로써 그림을 그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살인사건에 연루된 어떤 사람의 사진도 싣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올해 출시된 메타북 버전은 엄청난 양의 콘텐츠 외에도, 등장인물들과의 인터뷰, 살인에 관련된 새로운 이야기, 범죄 현장의 인터렉티브 지도와 더불어 유명한 배우들이 목소리로 연기한 장편 오디오 드라마까지 포함했습니다.반응은 좋았습니다. 특히 대학생 연령대 독자들은 이 향상된 버전의 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추가된 서비스 덕분에 책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을 갖게 됐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반응들은 우리 출판계가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험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한국의 성장 잠재력디지털 기술과 혁신에서 한국이 지닌 강점을 고려할 때, 저는 이런 출판 분야가 한국 출판계가 앞서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숙련된 국내 인재 풀, 디지털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는 데 익숙한 견실한 소비자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게다가, 전 세계 사람들은 한국 앱들이 뛰어난 기능과 개인맞춤 같은 특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강점들을 감안할 때, 저는 한국 출판계가 체험적 콘텐츠 개발의 길을 선도할 커다란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미 한국 회사들이 개발한 훌륭한 도서 앱들의 사례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한 회사는 여행 안내책자를 앱으로 바꾸기 위해 출판사와 제휴를 맺었습니다. 앱이 출시되었을 때 한국 앱스토어 최고 수익 앱 목록에 올랐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반응은 한국 디지털 회사와 출판 산업 사이의 결실 있는 협력이 지니는 커다란 잠재력을 보여줍니다.체험적 콘텐츠가 국내 출판계에서는 아직은 상당히 새로운 전개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차 한국 출판사들이 이런 상호작용 흐름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발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 참여(Engage)두 번째 e-접근법은 ‘참여’입니다. 작가와 독자의 요구와 선호, 기대에 대해 좀 더 잘 알기 위해 이들과 관계를 더 깊이 맺는 것을 말합니다. 출판이란 결국 서비스 산업입니다.우리는 작가들을 독자들과 연결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이들의 다양한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고객 서비스를 위한 결정과 선택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이것을 효과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고객의 피드백을 열린 자세로 듣고 있으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소셜 미디어를 통한 공동체 구축이를 위한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소셜 미디어 활용이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출판 생태계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연결하고 강한 공동체감을 확립하는 것을 도와주는 데 있어 대단히 효과적인 도구입니다자기 자리를 확립한 주요 대규모 출판사들은 독자들이 출판사와 작가, 다른 독자들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통로로 의견 게시판을 제공합니다. 이런 플랫폼들을 통해 독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할리퀸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들과의 트위터 Q&A 시간을 주선하거나, 미래 작가를 위한 편집자 워크샵 같은 이벤트를 정기적으로 열어 독자들과 대화하고 관계를 유지하도록 합니다.스콜라스틱(Scholastic) 또한 트위터의 해시태그(#IreadYA)를 통해 젊은 독자들과 소통함으로써 자신들의 십대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책의 인용구나 읽고 있는 책과 관련된 기사,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예술 작품 같은 것들을 공유하기 위해 해시태그를 사용했습니다.이 해시태그의 반향은 컸습니다. 자신들이 읽고 있는 것을 공유하고, 새로운 작가들을 찾아내고, 옛날부터 좋아하던 작가들과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습니다.지금까지 모든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걸쳐 17만5000 명의 팬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은 스콜라스틱이 기록한 최대 소셜 미디어 성공 사례가 되었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좀 더 활동적인 학계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이런 노력이 호응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자들, 특히 젊은 세대의 독자들은 다른 독자들과 자신들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들이 존경하는 작가들과 관계 맺을 기회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온라인 공동체를 통해 강한 유대를 맺고 유지함으로써, 출판사들은 출판 산업을 지탱하고, 좀 더 중요하게는, 출판 산업을 발전시키는 폭넓은 열혈 독자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소셜 미디어를 통한 콘텐츠 홍보 및 브랜드 인식 구축출판계는 또한 책의 면에 쓰여있는 것을 넘어, 독자를 참여시키기 위한 새로운 콘텐츠를 홍보하는 목적으로도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콤플렉스(Complex),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같은 메이저 잡지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관련 자료를 매일 업데이트하고 비디오와 사진들을 올립니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들을 유인하는 데 있어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많은 독자들이 이런 게시물들이 제공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즐깁니다. 한 번의 구독에 그치지 않고, 이런 출판물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퍼 콜린스나 펭귄 랜덤하우스 같은 출판사들도 실시간 이벤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유튜브나 버즈피드(Buzzfeed) 같은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이런 제휴를 통해, 펭귄 랜덤 하우스와 하퍼 콜린스는 창작 과정에 대한 작가 독점 인터뷰를 싣거나, 특정 소설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고, 책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특별기사를 낼 수 있게 됐습니다.이 출판사들은 이러한 소셜 미디어 채널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충족시키는 한편 독자들이 출판업자들에게 피드백해줄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를 더 많이 개발하고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소셜 미디어를 통한 크라우드소싱끝으로, 출판사들은 소셜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이 출판하고 싶은 이야기를 크라우드 소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맥밀란은 작가들이 원고를 제출하면 독자들이 출판을 가장 선호하는 이야기에 투표할 수 있는 플랫폼인 스운 리즈(Swoon Reads)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2013년 이래 6편의 신작 소설을 출판했고, 참여를 통해 자기 의견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충성도 높은 독자층을 확보했습니다.영국 펭귄출판사의 경우에도 지난해 독자 의견을 얻기 위한 소스를 공개했습니다. 유명 작가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의 신간을 크로스 미디어로 제작해 발췌본을 공개하는 야심찬 크라우드소싱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독자들이 책의 미래를 결정하고 콘테츠와 멀티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펭귄은 프라이의 독자들을 위해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발췌본에 대한 독자들의 해석을 공유하고 거기서 논의된 많은 아이디어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형의 독자들의 공개 참여는 출판계에 더 큰 창의성의 흐름이 흘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독자들에게는 우리 출판사들이 그들의 의견 제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선호와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돼있음을 알립니다.3. 실험(Experiment)출판사들이 역할 확장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세 번째 e-접근법 ‘실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콘텐츠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독창적이 되어야 합니다.-새로운 비즈니스 모델(New business models)전환기의 디지털 환경이 야기한 또다른 도전 과제는 그로 인해 전통적인 출판 산업의 재정 틀이 파괴됐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먼저,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에 어떻게 접근하고 싶어 하는지, 돈은 얼마나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등을 파악하고 결정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출판사들은 서로 다른 사업 모델을 갖고 실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출판사들은 이미 신속 출판(Agile Publishing), 구독 모델(북 클럽), 프리미엄(freemium) 모델(시리즈 첫 권만 무료 제공), 온라인 신문 기사처럼 광고와 통합된 도서, 다른 제품과의 묶음 판매 같은 것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특히 새로운 모델을 통한 실험의 압박을 많이 받는 곳 중 하나는 미국의 교육 출판 부문입니다. 체그(Chegg)같은 웹사이트를 통한 교과서 대여나, 아마존을 통한 중고 교과서 구매가 가능해지면서 학생들은 대학서점 가격의 반만 지불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그 결과, 출판사들은 독자들이 교과서 중에서도 관심 있는 부분만 골라 선택할 수 있는 구독 모델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간 성공을 거뒀고, 출판사들은 계속해서 고객 필요와 콘텐츠의 가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올해 가격 모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또 하나 진행 중인 실험은 출판사들이 제 3자인 소매상을 통해 영업하는 대신, 고객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영국의 파버앤파버(Faber & Faber)는 독자들의 원활한 도서 쇼핑을 위해 웹 사이트를 재정비했습니다. 아셰트(Hachette)는 트위터를 통한 소비자 직판을 허락하는 검로드(Gumroad)와 협력해 소송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 출판사들은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우리가 제작한 콘텐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콘텐츠를 출판하는 새로운 플랫폼우리 출판사들은 저자들이 훌륭한 콘텐츠를 공유하고 출판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책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작가들이 작품을 공유할 더 나은 플랫폼 개발을 촉진하는 것입니다.그 성공 사례가 한국의 네이버 웹툰 포털입니다. 재능 있는 작가들이 자신의 만화를 여기에 올리고 독자들은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는 작가들이 인기를 얻게 될 때 보상을 합니다.다들 아시는 것처럼, 웹툰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팬덤을 구축했습니다. 그것들 중 다수는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거나 단행본으로 제작됐습니다. 작가와 예술가, 그리고 기타 콘텐츠 제작자 들이 자기 작품을 세상과 공유할 수 있도록 네이버 웹툰 포털 같은 플랫폼을 개발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출판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실험을 시도해본다고 해도,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우리가 몇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물들도 궁극에는 출판계의 모든 구성원들을 지원해주는 더 나은 방법들을 찾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저희 회사에서 혁신을 위해 내거는 신조는 “자주 실패하자, 일찍 실패하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패한 경험에서 배우고,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산업으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경주해야 할 것은 도전이고 인내입니다. 변화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일일 것입니다.III. 결론우리 산업의 디지털 변화는 그냥 무시해버릴 수도 없지만 절대로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독자를 즐겁게 하고 깨우쳐 줄 고품질의 콘텐츠가 있는 한, 출판사들은 항상 자기 자리를 가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출판사들은 변화를, 그것이 아무리 격변이라고 해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더 잘하고, 우리 역할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더 확장할 기회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질의응답>-현재 한국 출판계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돈입니다. 한국에서 나온 통계에 따르면 연매출 500억원이 넘는 출판사가 올해 처음으로 한 곳도 없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우리나라 출판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자금이 있고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기술 개발에 투자도 할 수 있고, 다른 산업과 경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들의 규모가 작다 보니 기술 개발에 한계가 있고 경쟁에 어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돼 있습니다.미국의 경우 최근 1위 출판사와 3위 출판사인 펭귄과 랜덤하우스가 합병했습니다. 이들은 더 커진 규모로 기술 개발 같은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대형 출판사가 생기면 중소 출판사들이 어려워지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형 출판사들의 우산 아래에서 함께 공생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중소 출판사들도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말씀하시는 중에 출판업에서 콘텐츠와 기술과 자본 세 가지가 중요한 요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콘텐츠를 갖고 있는 출판사가 기술를 받아들이고 투자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력이 있는 기술 기업이 콘텐츠 분야를 투자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해외에서는 아마존이 그런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존은 그 과정에서 출판계와 마찰도 있었고 논란이 계속돼왔습니다. 지금 해외 출판업계에서는 아마존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저는 기술 회사가 콘텐츠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독립성과 다양성입니다. 카카오나 다음, 또는 구글 같은 기술회사들이 콘텐츠를 갖다가 직접 사업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사이사이에 있는 이윤을 자신들이 다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출판업계)가 콘텐츠를 제대로 못 만들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만들겠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거래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이익을 가지려고 하니까 그게 흥정이 안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제 생각에 한국은 후자는 아니고 전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회사들한테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러면 출판사에 투자를 해라, 하지만 출판사는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도록 해라”라는 겁니다. 투자는 하되 당신들만 원하는 것이 아닌 콘텐츠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도록 놔두라는 거지요. 그런 조건을 달고 얼마든지 투자하라는 겁니다.문제는 그 사람들은 일단 수직적으로 통합하고 나면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딱 하고, 나머진 안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글이 안 나옵니다. 그것이야말로 출판업계의 역할이거든요.안 팔려도 내야 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이제는 전산화됐기 때문에 훨씬 더 싸게 낼 수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죽지 않도록 저희가 항상 키워야 합니다. 예전 시집 같은 것이 그렇죠. 이러다가는 시집이 다 없어지게 생겼어요. 수지가 안 맞으니까.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카카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출판사를 사겠다고 하면 저는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단, 그 회사가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도록 편집의 독립권을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돈이 아쉬워도 돈을 받지 말아야죠. 우리가 그 정도까지 타협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런 회사들은 자신들이 독점적인 콘텐츠를 갖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데, 저희는 그게 아니라 열린 콘텐츠로 가는 개념에 입각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출판인들은 먹고 살 길이 없을 테니까요. 따라서 그런 기술회사들이 큰 출판사들을 다 먹겠다 한다면, 그러니까 자신들 뜻대로 이 콘텐트는 꼭 여기서만 사야지 다른 데선 못 산다는 식으로 하게 되면 결코 좋지 않습니다.지금 아마존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어느 누구한테라도 아마존이 어떤 회사냐고 물어보면 ‘소매유통업자(retailer)’라고도 안 합니다. ‘전자상거래 유통업자(e-tailer)’라고도 안 합니다. 바로 출판사(publisher)라고 부릅니다. 그냥 ‘출판업 회사(publishing industry company)’라고 부릅니다. 모든 걸 다 하니까요. 공급 체인의 전부 다를 가지고 있으니까요.사람들이 아마존의 기기를 사지 않습니까, 이게 결국은 인쇄와 다름없는 거예요. 자기 기계 아니면 못 읽잖아요. 물론 이제는 아이패드나 태블릿 같은 데서 아마존 앱으로 내려받아 볼 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그 회사는 소위 문어발이 돼버린 거죠. 그게 길게 가면 결코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아마존의 베조스 CEO가 워낙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제가 함부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그와 같이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항상 제가 그럽니다. 당신, 잘하는 곳에서 가만히 있으라고요. 그쪽으로만 계속 투자하고, 우리가 잘하는 일은 우리가 하도록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그러면 베조스는 “너희들이 잘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들어간 것 아니냐”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저는 “당신 말도 일리가 있지만, 당신이 참을성이 없어서 그런 거지, 우리가 변화할 기회를 주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 안 그러면 당신이 왜 우리가 출판(공급)하는 100만종의 책을 아직도 다루고 있느냐” 그렇게 답합니다.아마존은 저희 출판 생태계에 꼭 필요한 회사고, 굉장히 많은 기여를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문어발처럼 여기도 들어가고 저기도 들어가고,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존이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렇게 잘하진 못해요. 하긴 합니다. 하지만 아주 잘하진 못합니다.참 다행히 미국 시스템에서 아마존이 독점적인 영역이 있다고 하면 그건 아무도 건들지 않거든요. 그런데 작가들도 생각해봤을 때 ‘어, (아마존이 점유한) 17%에선 독점적이지만 나머지 83%에서는 안 팔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하려고 하죠.그런 점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모든 생태계에 핵심 주자가 있기 때문에 서로 견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만약 출판업계가 그런 견제 능력이 없으면 다른 쪽에서 막 묵살 당하게 되는 거죠. 짓밟히는 겁니다. 그래서 대형 출판사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형 출판사를 반드시 2개 이상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 있으면 독재니까 안 되고요. 둘이 있어서 경쟁에 붙여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정말 이게 아주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는.-저는 예전에 출판사를 운영을 하다가 지금은 플랫폼을 만들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점점 안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나 게임 같은 다양한 콘텐츠 때문이기도 하지만 텍스트를 소비하는 채널이 책 말고도 블로그라든지 인터넷 웹문서라 같은 포맷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분산됐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소비하는 방식도 예전엔 서점에 가서 보고 샀다면 요즘은 SNS 같은 것을 통해서 콘텐츠가 배달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책이라는 포맷보다는 짧고 빨리 생산 소비되는, 짧은 텍스트 위주로 소비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이런 환경 변화 속에서 굉장히 공들여 제작 기간도 길고 몇 백 쪽에 달하는 긴 텍스트의 책이라는 포맷이 여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아까 말씀드린대로 콘텐츠 가치의 문제입니다. 블로그에 나와있는 공짜 글보다 돈 주고 사보는 책이나 e북의 가치가 더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먹고 살 길이 없어요. 공짜와 경쟁하기란 힘듭니다. 반드시 여기서 이 책을, e-book을 사서 보면 거기에 나와있는 요리 레시피는 훨씬 더 정확하고 훨씬 더 맛있고 신임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공짜로 갑니다.요즘 들어 다시 콘텐츠의 시대가 돌아왔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아무 콘텐츠나 말하는 게 아닙니다. 큐레이트된 콘텐츠, 손을 본 콘텐츠가 중요합니다. 콘텐츠의 홍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 꼭 필요한 그리고 시의적절한(right content, at the right time, in the right context) 콘텐츠는 돈을 주고 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옛날식의 것을 그냥 디지털로 바꿔서 판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아까 말씀하셨죠, 요즘 사람들 취향이 짧게짧게 본다고요. 맞습니다. 어떤 책들은 짧게짧게 만들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해야 팔립니다. 여러분 유튜브 보실 때 얼마나 오래까지 보실 수 있나요? 저는 2분 미만 아니면 거의 안 보려고 합니다. 건너뛰어 봅니다. 그만큼 생각하는 멘탈리티가 짧아진 거죠.그렇다면, 그분들에게는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어 주면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과는 정반대인 것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성이 숨쉬는 생태계를 만들어주셔야 돼요. 제 생각엔, 정보에 가까울수록 짧아야 되고, 오락에 가까울수록 길게 가게 됩니다. 간단한 답은 없는데, 확실히 출판사들이 그것을 주도해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반드시.-저는 출판사 편집자입니다. 15년 가까이 책을 만들어 오고 있는데요. 편집자라는 직업은 출판 비즈니스하고는 조금 다른 어떤 퀄리티를 갖고 있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변화에 밀리게 되는 부분도 있고, 변화에 소외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기존에 저희가 해왔던, 작가 관리 방식 같은 것에 있어서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으로 짜야 하는 것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경영자보다 더 복합적인 고민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으로 시간이 부족해 빨리 대응을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화나 게임 같은 다른 업계의 콘텐츠 제작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해외 우수 편집자를 많이 봐오셨을 회장님께서는 편집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히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차별화가 중요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자기만의 독특한 컬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하시려고 하지 말고요. 한 가지를 깊게 파세요.제가 보기에 변화에 대한 열망이 강하신데, 작가들이 변화를 안하려고 하면 과감히 떨어뜨리세요. 남들 주세요. 자기 갈 길 막는 분들 아닙니까. 한 길을 길게 가시다가 그게 지치면 또 다른 길을 가면 되거든요. 너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렇게 바꿨다 저렇게 바꿨다 하면 진짜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시게 될 거에요.제가 미국에서 제일 존경하는 퍼블리셔나 에디터들 보면, 역시 뭔가 한 분야에 최고인 분들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선회(pivot)한다고 그러죠, 그런 분들이 돌려서 새로운 것을 하면 또 그 분야에서 잘하세요. 그러니까 갑자기 여성소설(women’s fiction)하다가 갑자기 젊은성인(young adult) 분야를 해도 잘 하시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뭐든지 한 가지를 깊이 정확하게 하시는 분들이니까.15년씩이나 경력이 있으신 분이니까 확실히 믿고서 말씀을 드리는데, 너무 여러가지 하려고 하지 마시고 좀 쉽게 한두 가지만 집중적으로 하시면 훨씬 더 결과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이런 변화를 하시는 데 뭔가 만족감을 느끼실 겁니다. 하시는 것에도 결과가 보일 테니까요.-부친께서 70년대에 설립하신 회사를 지금까지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주로 농업 도서를 내는데 스포츠나 태권도, 아동 도서도 냅니다. 말씀 들으면서 99%를 디지털에 투자하시고 계신다는 말에 아주 놀랐습니다. 저는 한 50대 50 정도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는 농업 도서를 디지털로 바꾸는 데 있어서 많이 망설여집니다. 이런 농업 콘텐츠는 국가적으로 굉장히 필요한 콘텐츠이고, 살려야 한다는 사명도 있는데 투입 자본에 비해 수익이 얼마나 있을지 고민이 있습니다. 혹시 외국 사례나 좋은 혜안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농업 도서의 경우 수요가 크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하시는 걸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결국 출판의 비즈니스 모델은 세 가지밖에 없는 것 같아요. 크게 봐서 하나는 user pay, 보는 사람이 돈 내는 것, 또 하나는 maker pay, 만드는 사람이 내는 것, 개인 출판(private publishing)이 다 그렇지요.세 번째는 somebody else pay, 다른 누군가가 내는 것이죠. 이게 광고주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재단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해서 돈을 댈 수가 있습니다. 교과서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 가지 모델밖에 없어요.지금 말씀하신 출판사는 user pay가 적기 때문에, 그렇다고 출판사에서 maker pay는 안 하실 것 같고, 결국은 somebody else pay 모델을 찾으셔야 합니다. 미국에는 이런 자료들 경우 상당히 많은 비영리단체의 도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학출판사나 작은 전문 출판사가 주정부나 연방정부 연구지원금 같은 것으로 냅니다.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돈의 출처를 잘 알아가지고 책을 만들 수가 있어요.저희 회사도 somebody else pay 모델이 아마 10~20%, 아 광고가 있으니까 더 되는군요. 출판사에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를 내는 경우 그 필요에 공감하기 때문에 도와줄 그런 곳을 찾아야 합니다. 너무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아마 열심히 찾으시면 있을 겁니다. 특히 농업 관련해서는 우리나라에 필요할 거에요. -치의학 전문 서적을 내는 출판사 대표입니다. 우리나라 출판업계가 국제 경쟁력을 갖는 데는 언어적인 장애도 큰 것 같습니다. 어떻게 국제경쟁력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기회가 있을지 그런 부분에 대한 조언 부탁드립니다.국제 경쟁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해주셨는데요, 바로 언어죠. 전 세계에서 사용자가 1억도 안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수십억이 쓰는 언어하고 부딪치려니 쉽지 않죠. 우리나라에 한국문학번역원인가 하는 기관에서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던데, 번역 잘 하는 사람도 많이 키워야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 좋은 콘텐츠가 있다는 것을 국제도서전 같은 데 가서 계속 홍보도 해야 합니다. 국제 도서전이라든지, 엑스포라든지 그런 데 가서 많이 홍보를 해야겠죠. 그렇게 알려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지요.합작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저희 회사도 말씀하신 분야의 도서를 내는 곳이 있으니까, 콘텐츠 협력을 하시면 저희는 네트워크가 있으니까 콘텐츠를 영어로 옮겨서 전 세계에 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협력을 하세요. 직접 하시려고 하면 너무 힘드실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말한 도서 분야가 굉장히 좁으니까요. -업계 전체적으로 가장 고민하는 것은 사실상 독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특별한 독자 데이터가 없어서 특화된 시장을 겨냥한 출판도 하기 어렵고, 전자 출판 쪽도 e-reader를 사용해서 책을 읽는 독자는 별로 없는 상황입니다. 책 읽는 독자를 지금보다 늘리기 위해 제일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우리나라 같이 언어가 한정된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시장이 작으니까 정부 지원이 아주 없이는 힘들 겁니다. 정부 지원 없이 완전히 시장에만 기댄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입니다. 그렇게 나간다고 한다면 아까 말했듯이 다양성이 없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것을 좀 도와줘야 하는데, 문제는 정부도 도와주려면 업계가 잘 하는 게 보여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두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하나는 출판업도 중요하지만 출판에 관계된 업도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업종은 반드시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것은 외국에 있는 출판사, 호주에 있는 출판사, 하다못해 일본에 있는 출판사에도 해줄 수 있는 서비스업이거든요. 그런 쪽으로 커나가야죠. 현대자동차가 큰 게 우리나라에만 팔아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수출했기 때문이잖아요. 출판업도 수출업이 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 아주 잘 하는데 수출은 안 하고 있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출판업이고 그 다음이 교육업입니다. 우리나라처럼 교육 잘 하는 나라가 없는데, 외국에 교사를 몇 명이나 보냅니까. 수출 안 하죠. 옛날에는 광부들 수출했는데. 출판업계도 콘텐츠만 볼 게 아니라, 출판의 모든 생태계에 딸려있는 노하우를 다른 데에도 출판할 수 있는 그런 포부가 있어야 합니다.두 번째로, 한국 내에서 성장하려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누군가 리더십이 있어야 돼요. 과감하게 투자하는 대형 출판사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지원하는 정부의 보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마케팅 형성을 시켜놓으면 그 다음부터 저절로 굴러갑니다. 그러기 위해 누군가가 심어줘야 합니다. 5년 후에 만약 저를 이런 자리에 초대해주시다면 그때는 우리나라에 대형 출판사가 반드시 두 곳쯤 있어서 과감하게 투자를 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관련 기사 [미니북] 디지털 시대 책의 길 ◆지영석현재 엘스비어 회장이자 모회사인 RELX 그룹의 대외 정책 이사와 아시아 지역 사업 전략 이사를 맡고 있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출판협회(IPA) 회장을 맡아 지난해 4년 임기를 마쳤으며 현재 전임 회장으로 2년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과거 잉그램 북 그룹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시절 최초로 주문형 출판(POD) 배급사이자 e-북 서비스 회사인 라이트닝 소스를 공동 설립했다. 잉그램 북 그룹의 모회사에서 여러 고위 임원직을 지낸 후, 랜덤하우스 사장 겸 COO, 랜덤하우스 아시아 초대 회장을 차례로 역임했다.미국출판협회, 국제과학기술의학출판협회의 집행위원회 위원을 비롯, 프린스턴대, 한인커뮤니티재단, 맥카터(McCarter) 극단 등 다양한 자선, 교육, 산업 관련 위원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3/2015102302748.html​
  • 2015-10-18
    ​2015-10-17 전병근 조선비즈 기자“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나는 서울의 일본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도심 빌딩숲에서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그때 문득 눈에 띈 간판이 바로 ‘라면 전문점’(삼양식품 서울 옛 본사에서 운영한 라면 직영점)이었다. 한국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구나! 나는 기대에 부풀어 식당 문을 열었다. 주문한 라면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빨간 국물에 가라앉은 굵은 면발이 나를 압도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눈에 스몄다. 국물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워 보였다. 한 입 먹어보니 혀가 저리고 목구멍을 지나간 국물이 목을 찌르듯 매워서 그만 콜록거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국 라면과의 만남은 내게 충격이었다. 일본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을 식당에서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950~1960년대의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막 진입하는 중이었다.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간신히 일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았고, 서민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그리며 열심히 살아보려는 에너지가 물씬 느껴지던 시대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경영자 역시 그러한 시대적 뜻과 포부를 품고 저마다의 길을 걷다가, 운 좋게도 우연한 만남을 통해 더욱 거대하고 멋진 삶을 살았다. 라면이 한일 양국 간에 단단한 가교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역사의 거센 풍랑 속에서 당장이라도 고기밥이 되어버릴 것 같은 자그마한 배가 과감하게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것이다. 매콤한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심정을 함께 곱씹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한국어판 서문라면을 어떤 사람은 한국인의 ‘소울푸드’라고도 한다. 이 꼬불꼬불 튀김 면발의 뜨끈한 국수가 한 민족의 영혼을 위로한다고? 그 끊을 수 없는 애정과 입맛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에 관한 책들도 쉬지 않고 나온다. 얼핏 떠오르는 것만 해도 작년 5월. 네 명의 한국 작가가 저마다 라면에 얽힌 사연과 소회를 써서 묶은 책 ‘라면이 없었더라면’이 나와 눈길을 끌더니, 얼마 전에는 소설가 김훈이 ‘라면을 끓이며’라는 제목의 산문집으로 시선과 침샘을 함께 자극한다.여기에 또 한 권의 라면 이야기가 있다. 저자가 일본인이다. 색다르다. 라면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왔다는 이야기? 그쯤은 웬만한 한국인도 안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이 책은 평범한 음식문화사 이상의 의미와 메시지를 품고 있다. 지금처럼 식문화, 요리문화가 풍요롭지 못했던 시절의 얘기다. 가깝지만 먼 두 나라의 야심찬 기업인이 각각 어떤 우여곡절 끝에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고, 어떻게 서로 면발처럼 얽히게 되었는지 양국을 오가며 추적해 쓴 책이다.한 그릇 라면 뒤에 웅크린 사연들을 줄줄이 뽑아 올려 한 권의 책으로까지 엮어낸 이유는 뭘까?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 씨는 이렇게 반문한다.“일본의 라면이 바다를 건너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잖아요? 그 놀라운 이전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라면 면발처럼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알고 보니 그는 이전에도 한국에 관한 책을 낸 적이 있다. 한국의 ‘국민 배우’  안성기 평전인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를 2011년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 출간했다. 양국 사이를 연락선처럼 오가며 그 경계에서 저술 작업을 해나가는 그의 생각은 무엇인지 만나서 들어봤다. 서울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였다.-한국어가 유창하시네요.이렇게 이야기하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옛날에 한국어 통역도 했으니까요. 1990년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됩니다. 한국의 여러 단체에서 오신 분들이 일본 쪽 분들과 대화할 때 통역을 맡곤 했습니다. 안성기씨도 그렇게 해서 만났지요.-한국어 통번역사 과정 같은 걸 하셨나요?과정을 거친 건 아니고 한 20년 전쯤 일본 운수성(교통부)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한국어 통역 시험에 합격해서 자격증이 있습니다. 지금은 일본에서 한국어 학원을 하는데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학생들이 새로운 표현에 대한 질문을 하면 제가 답을 해야 하니까요.-학원 규모는 얼마나 되지요?지금은 크지는 않습니다. 학생이 27명입니다. 한국인 한 명이 교사로 같이 일합니다. 한류 붐이 한창일 때는 많이들 왔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습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중요해서 학원을 크게 하고 싶기도 하지만,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공부도 하고 자료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간혹 한일 관계에 대해 책을 쓰는 일본인 저자를 보게 됩니다. 그 중 한 분인 ‘흥남 피쉬로드’의 저자 다케쿠니 도모야스라는 분을 인터뷰한 적도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 온천 문화라든가 벚꽃 축제, 수산물 같은 걸로 인상깊은 책을 썼지요. 선생님의 책도 그런 맥락에서 눈에 들어왔습니다.네, 저는 라면을 매개로 한일 관계를 들여다봤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쌓이면 양국 사이의 불필요한 오해를 풀거나 상호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일본 작가들 책을 보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일본 사람들의 어떤 시각이 있던가요?-일본 사람의 특징 같은데, 아주 꼼꼼하고 치밀하게 들여다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가 처음에 쓴 안성기 선생 책을 냈을 때도 일본의 오타쿠 문화라고 평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흥남 피시로드’라는 책은 저도 조금 봤는데, 같은 일본인이지만 부산 어항에 가서 여러 사람과 인터뷰도 했고, 아주 깊이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한국에 살면서 조그만 서점인가 출판사인가 하고 계시는 도다 이키코라는 여자 분도 있습니다. 한국인과 결혼해서 사는데, 연변 지역에서 몇 년 지내셨다더군요. 그곳에서 한국인 자취를 찾는다면서 썼던 내용이 아주 귀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분 시각이,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 지배할 때 한국 내에서는 살기 힘들어서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그런 시각에서 추적한 겁니다. 일본인들 중에는 그런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사실은 처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아리랑’이라는 책이었습니다.-님 웨일즈의 책 말이지요? 80년대 한국 대학가의 필독서 같은 책이었는데요.그렇습니까? 저만 해도 옛날 일본의 사회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생각했던 세대입니다. 반면 젊은 세대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최근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기니까 조금씩 그쪽에 눈을 떠서 행동이 나오는 것도 같습니다.그런 젊은 세대와 비교를 하자면, 저희 세대만 해도 한국을 보는 것도 일본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쓴 책도 그렇지만, 안성기 선생 평전도 약간 의식적으로 그런 시각에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우리(일본인)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썼습니다.-일본인들은 한국을 언제 처음 알게 되고, 어떤 나라로 인식하게 되나요? 한국의 경우에는 대체로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민족에게 고통을 안긴 침략국가로 배우거든요.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살았고 전쟁에 가담했던 분들입니다. 그런 역사와 자신의 경험을 자식들에게는 제대로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점점 철이 들면서 그런 것에 대해 공부도 하게 되면서 ‘이래도 될까, 일본은 어떻게 죄를 저질렀는데도 보상도 하지 않고 모른 척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나’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습니다.-우리 세대라면, 실례지만 몇 년 생이시죠?1953년 생입니다. 학번으로는 72학번입니다.-6.25 전쟁이 끝날 무렵에 나셨군요.네, 휴전 협정을 맺을 때 태어났죠. 초등학생이던 1960년에는 일본과 미국이 안전보장 조약을 다시 맺는다고 해서 일본에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죠. 저도 그냥 뭔지도 모르면서 덩달아서 친구들과 같이 “안보 반대, 안보 반대” 하면서 뛰어다닌 기억이 납니다.(웃음)-그때 일본 국민들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나 보죠?그때 분위기가 그랬어요. 국민들은 대개 반대를 했어요. 참 희미한 기억인데.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 두 번째로 그런 운동이 일어났어요. 다시 미일안보조약 개정 시기가 찾아와서,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그 운동을 기축으로 해서 다른 공해 반대 시민운동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뭔가 변혁의 분위기가 넘치던 시기에 청년 시절을 났어요.-한국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습니까?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하다가 이웃나라인 한국과 중국, 대만 그런 나라들과는 어떤 관계였던가를 생각하게 됐죠. 제 경우에는 일본이 전쟁에 대한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았고, 그런 사실을 교육도 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처음 이웃나라들을 보게 되었어요.-혹시 가정에서 그런 문제를 두고 세대간 갈등이 있습니까?제가 젊었을 때 가끔씩 있었죠. 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냥 무시하셨죠. 그때가 일본 내에서도 세대간 격차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났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그 후로 우리 밑 세대는 그런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지금 저 같은 세대는 우리 아이들 세대와 사고 방식이 너무 차이가 나서 소외감을 느끼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중간에 낀 세대죠.-그게 전공투(全共鬪,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 연합체인 전학동투회의 약자) 세대였나요?네, 전공투 세대 끝물이었죠.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고, 선배들 하는 것을 따라가거나 부러워하던 세대였습니다. 결국 저 자신은 데모도 제대로 못 했지만 사회의식만은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대학 때 전공은 뭐였지요?일본역사학과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일어난 사회운동의 영향을 좀 일찍 받았습니다. 당시에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한번은 다른 학교 고등학생들이 우리 도서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깜짝 놀라서 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전경들이 밤중에 왔어요. 처음엔 전경들이 좀 더 기다려보자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학생들이 안 나오니까 최루탄을 쏘면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죠.그러자 우리 학교 학생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경찰 진입을 막았어요. 저는 그때 1학년이어서 어떻게 할지 관망하는 중이었는데, 그러다 너무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갔어요. 사실 그때 저 혼자 도망친 기억이 남아서 그 뒤에도 콤플렉스가 됐습니다.-대학에 들어간 후에는요?그 일이 계속 머리에 남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주변에는 (사회) 운동을 계속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저는 그럴 용기는 없었고 계속 지켜보기만 하고 책을 읽으면서 머리로만 사회 변혁에 대해 고민했죠. 그 후에 적군파 사건도 일어나고 학생운동권에서 비참한 일도 연출됐지요.-극좌로 치닫으면서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자멸하다시피했지요.그런 것도 저는 혼란스러웠어요. 결국 3학년 때쯤 자퇴를 했습니다. 교수님한테 가서 저는 공장에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만뒀어요. 그리고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국내 운동권학생들도 노동운동을 한다면서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죠.제 경우는 정말로 그냥 노동자가 돼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래도 부모님 밑에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별 불만은 없이 살았는데, 부모님이 나이가 들고 해서 제가 독립해서 살려고 하니 돈을 벌어야 했어요.그때는 운동 같은 것 다 잊고 오로지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마침 도쿄 공장에 한국인이 연수를 받으러 왔어요. 제가 일하던 곳이 피혁공장이었는데 기술을 배우러 온 거지요. 그분은 서울로 돌아가 창업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운 것을 아니까 사장이 저보고 그 사람과의 소통을 맡겼어요.-그전에 한국어 공부를 좀 하셨나 보죠?대학 때 아리랑을 읽고 한국 사람과 대화도 하고 싶은 생각에서 좀 배웠어요. 한국 YMCA라든가, 와세다대 부속 어학당 같은 곳에 찾아가서 배웠어요. 그때 한국어 선생님들이 대단한 분들이었어요. 와세다대 부속 어학당에서는 지명관 선생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때가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망명 와있던 시절이었을 거예요.그리고 현대어학숙이라는 곳에서 배울 때는 한국사학자로 이름 높은 가지무라 히데키라는 분이 가르쳐주셨어요. 한국 역사학계도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나도 언젠가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그러다 공장에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면서 더 끌린 거네요?그전까지는 책을 통해 머리로만 알았던 한국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일본에는 어떤 관심과 느낌이 있는지 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됐지요. 그분이 나중에 서울에 가서 자기 공장을 세웠을 때 다시 제가 기술 지원차 파견이 됐죠. 제가 한국을 방문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1976년, 77년쯤 됐을 겁니다. 그때 유행하던 한국 가요를 기억합니다. “이렇게도 싸랑이~”-아, 윤수일씨 노래군요.서울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알려줬어요. 같이 삼겹살, 아니 그때는 돼지 껍데기 같은 걸 먹으면서.(웃음)-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모습이 어떻게 비쳤나요?무엇보다 한국은 참 역동적이었습니다. 일본은 뭔가 매뉴얼적으로 다 관리가 돼있다 보니, 뒤에서 누가 조종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사람들이 굉장히 활기차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어떤 시스템은 있겠지만, 제 눈에는 그런 활기찬 모습이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였습니다.-그때는 한국에 얼마나 계셨지요?한 달 정도 있었어요. 일 때문에 처음 한국을 접하게 됐지만, 그 뒤로 한국에 대해 역사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울 곳이 별로 없었어요. 도쿄에도 서너 곳에 불과했어요. 한국어를 배우면서, 저는 점점 더 일본 사람들도 한국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하고, 이해를 하면 존경심을 갖게 되고, 좀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그 뒤로 일본에 돌아가서 한국어 학원을 시작한 겁니까?일본으로 돌아간 뒤 1년 쯤 뒤에 치바에서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사설 도서관 비슷한 걸 만들었어요. 한국과 관련된 일본책이 2000권 정도 됐는데 저 혼자서 모았다기보다 어떤 분이 저한테 맡겼어요. 그 책들을 유용하게 써 달라고. 그 아파트가 복층으로 돼있었는데 1층은 독서실로 쓰고, 2층 다다미방에서 제가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그것만으로는 생활을 못하니까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가르치는 식으로 몇 년을 했어요. 그러다가 아무래도 한국어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가서 더 배울 결심을 했죠.-책 날개에 보니까 ‘한국인의 영혼을 가진 일본인으로 자부하면서’라고 돼 있던데… 어떻게 한국에 대해 그 정도의 애착을 갖게 됐는지 궁금합니다.그건 제가 쓴 말은 아닙니다만, 제가 한국어를 훌륭한 선생님들한테서 배우는 과정에서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비롯해 한국에 대해 알게 된 것을 혼자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일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는 일이 의미 있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그 무렵 다른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한 생각이 어땠나요? 관심은 있었나요?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의 의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어요. 어쩌다가 한국 붐이 일었을 때도, 가령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가요가 인기를 끌었을 때나, 김치, 불고기 같은 음식이 좀 익숙해지고, 사물놀이 같은 문화적인 것이 들어와서 관심을 갖는 경우에도 그 일부 사람들에 국한된 경우가 많습니다. 마니아층 중심의 관심은 뜨겁다고 할 수 있지요.그러다가 88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 같은 것을 계기로 미디어를 통해 한국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고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표면적으로 많아졌죠. 하지만 저나 저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 일찍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은 조금 달랐어요. 자신의 인생관이나 살아가는 법 그런 것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좀 다른 차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까요.-다른 일본인들은 선생님 같은 분을 의아해 하지 않나요?제게 한국어를 배우러 온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재일 교포들이 지문날인 거부 운동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지원해야겠다는 운동이 있었죠. 제가 거기에 관여를 하면서 시청 앞에서 단식 지지 시위를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학생들은 굳이 그럴 것까지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그때 이미 선생님은 한국에 대한 단순한 호감 이상으로 한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군요.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라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해야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같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일찍부터 느꼈다는 사회적 부채의식 같은 건가요?그렇다고 할 수 있죠.-한국어는 어디서 배우셨지요?처음엔 고려대 어학당이었어요. 86년 12월인데 그때 처음 생겼을 때였어요. 때마침 방송국에서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을 하면서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 인터뷰를 했어요. 거기에 우연히 저도 출연했어요. 고대학당 상급반에 있었는데 6개월 있으니까 수료가 돼서 다시 연대 어학당으로 옮겼어요. 덕분에 고대, 연대 둘 다 나왔죠.(웃음)-고대 어학당 수료하고 귀국할 수 있었을 텐데요.한국의 1년 4계절을 다 살아보고 싶었어요. 덕분에 고대와 연대도 다 겪어보고 좋았어요. 두 대학이 완전히 다르잖아요.(웃음)-어떤 차이가 있던가요?교육 방식부터 분명히 다르더군요. 고대는 문법 교육 위주고, 매일매일 숙제를 내줬어요. 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온 상태라서 견딜 수 있었어요. 매일 일기를 쓰래요.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쓰려면 고통이죠. 그래서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것도 재밌더군요.반면에 연대는 숙제가 전혀 없었어요. 수업도 회화 위주였고. 물론 상급반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다 둥글게 앉아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어요. 재미교포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을 웃길까 그런 걸 고심하는 분위기였어요.-그 무렵 대학가에는 시위도 많았을텐데요.학생운동이 많았죠. 일본에 있을 때도 저는 실천은 못했는데, 그걸 가까이에서 봤죠. 그때는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여러 계층에서 참여했죠. 그전부터 느꼈는데 한국 사람들은 사회 움직임에 굉장히 민감하고, 자신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참여하려는 의욕이 아주 강한 것 같아요.그게 일본과 달라요. 일본 국민은 왠지 소외당한 것 같고, 개인이 너무 사회를 위하고, 관리당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답답함이 있었어요. 반면에 한국에 와서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어요.-그 말씀을 하셔서 말인데, 지난번 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 국민들 반응 보고 외신에서도 화제였지요. 처음엔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좀 지나치게 차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2011년인가, 큰 지진이 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제가 살던 교토에서 가까운 고베에서 지진이 났죠. 일본은 집중호우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아요. 그럴 때 인터뷰를 해도 거의 똑같았어요.우선,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 말부터 먼저 나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자기 탄식보다는,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주셔서 고맙다, 그런 말부터 먼저 합니다. 그전에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는, 좀 심한 말일 될지도 모르겠는데, 좀 징그럽게 느껴졌어요. 왜 그럴까,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그게 솔직하게 말한 게 아닌가요?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좋지 않나요?글쎄요,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자칫 조금만 더 잘못됐어도 자기가 죽었을 텐데, 가족을 못 구했을텐데, 그런 참사에 대한 자기 기분을 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은 거죠. 인간이라면.-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거지요?알게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누가 일부러 그렇게 교육시키려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원래 일본 사회가 사무라이 시대부터 그런 식으로 국민을 교육시켜 온 결과가 계속 이어져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자라는 동안에 그런 교육을 구체적으로 받은 게 있나요?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남에게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어요.-그건 좋은 것 아닌가요?항상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은 거죠. 그런 게 오히려 문제가 될 경우도 있어요. 그게 바로 군국주의 시대에 국민이 다 전쟁에 순응해서 따라간 결과를 낳았지요. 비판도 못하고.뭔가 옳은 말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활을 계속 했기 때문에 지금도 정부가 뭘 해도 대부분은 순순히 따라가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일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그래도 최근 들어 일본에서도 정부 우경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이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본 사회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나보다 전체를 앞세우는 성향이 오히려 국가를 잘못 나가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일본은 그래서 계속 나쁜 결과를 낳았어요. 한국에서는 시민들이 옳고 그른 데 대해 자기 주장을 마음껏 하잖아요. 그래서 사회를 바꿀 수도 있었고요. 87년에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저는 느꼈습니다.-학생들 시위에도 같이 참여하고 했나요?구경하러 따라간 적은 있어요.-위험했을 텐데요?물론 조심했지요. 저는 상관없지만, 저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과 접촉했다는 식으로 괜한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니까, 아주 조심했어요.-그때 한국인 부인도 만나셨나요?1년 한국어 공부를 마친 후에 서울의 일본어 학원에 잠시 일을 했습니다. 88년 4월부터 12월까지. 그때 만난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결혼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했습니다. 서울에서 일어 강사를 하니까 일어만 쓰게 돼서 제 한국어에는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아내도 교토에서 일어를 공부할 계획이 있어서 제가 먼저 귀국해서 집도 얻고 일도 찾아 준비한 후에 도쿄에서 결혼했습니다.그 무렵에 한국어 통역사 시험이 있어서 자격을 땄어요. 1990년 오사카 꽃 박람회를 계기로 한국어 안내원 일을 했어요. 그때는 양국 교류도 많았고 다양한 분들이 많이 와서, 일을 하면서도 많은 공부가 됐죠.원래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알려주려고 한국어를 배웠던 건데, 그때는 일본에 온 한국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일본을 설명하는 일을 한 거죠.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서로 이해를 돕는 거니까.하지만 안타깝게도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한국인들의 왕래도 줄었어요. 결국 2007년 교토에서 한국어 학원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강사로 들어갔다가 제가 인수해서 맡게 됐어요.-그 무렵에 안성기씨를 만난 건가요?제가 통역 일을 할 때 도쿄 국제영화제가 교토에서 열린 적이 있었어요. 교토가 수도가 된 지 1200주년을 기념해서 원래 도쿄에서 하던 행사를 교토에서 연 거지요. 그때 안성기씨가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왔는데 제가 통역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신기하게도 15년이 지나서 그분이 또 교토에 오시게 됐어요. 교토 시내 리츠메강 대학이 주최하는 영화제에 게스트로 초청받은 거지요.그때 뭔가 운명적인 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어요. 환영 만찬장에서 제가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고, 그 자리에서 허락을 받아 쓰기 시작했죠. 3년 후에 책으로 나왔습니다.-책을 쓰신 과정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어요? 직접 인터뷰한 분량은 2시간이라고 쓰셨던데요.일본에 있으면서 주로 자료 조사를 많이 했어요. 안성기씨는 마지막에 인터뷰가 성사돼서 서울에 와서 한 후에 책에 실었습니다.-주로 2차 자료에 많이 의존했더군요. 한국내에는 알려진 내용들을 잘 정리한 책이라고나 할까요. (안성기씨는 이 책을 보고 자료조사가 정말 철저하다면서 일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에 관해 자세한 책을 쓸 수 있는지 놀랍다고 했다고 한다.)네, 맞습니다. 그게 실은 약점이죠. 그 책을 쓰기 전에 일본의 여러 배우들에 관한 책도 읽어봤습니다. 어떤 것은 주인공 옆에 붙어 다니면서 오랫동안  취재해서 쓴 분들도 있더군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제 책은 창피할 정도지요.사실 제가 일본에 있으면서 써야 하는 제약도 있고 해서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책의 경우는 일본 독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대표적인 배우를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를 알리려는 생각에서 썼습니다.그래도 두세 시간 정도이기는 했지만 안성기씨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사실 확인도 받고 편집을 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설득력을 더하려고 했습니다.-안성기씨 영화는 다 보셨나요?다라고는 할 수 없고 50편 정도 봤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회원이 돼서 그래도 꽤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상영된 작품은 많지 않았거든요. -사전에 출판사와 기획하신 건가요, 그냥 원고를 먼저 쓰셨나요?마지막 인터뷰만 빼고 다 쓴 원고를 어떤 분 통해 이와나미서점(일본 최대 단행본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냈는데 좋다고 해서 출간하게 됐어요.-일본 내 반응은 어땠나요?한국 영화를 잘 아는 분들은 좋아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한국 현대사를 일본 사람들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살아있는 한국 배우의 인생을 연결시켜 보여주려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라도 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싶었어요.일단 언론에서는 호의적으로 많이 써줬고, 영화 관계자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일본의 유명 평론가이면서 한국 영화계와도 인연이 깊은 사토 다다오 씨가 추천서도 써줬어요.-안성기 평전의 경우에는 일본인을 위한 한국 영화사 입문 같기도 하고, 사회문화사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그렇게 살았던 영화배우가 일본에서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역시 한국 사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이 나올 무렵에 이와나미서점 편집자를 통해 한국의 ‘4월의 책’ 출판사도 알게 되어 양국에서 동시 출간하는 쪽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2011년에 같이 나왔어요.-이번 라면 책이 두 번째 책입니까?일본에서 한국 속담에 관한 책도 낸 적이 있어요. 제목이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였는데. 한국 속담이나 격언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든가 ‘님도 보고 뽕도 따고’처럼 함축적인 표현이 많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통해 그 배경에 있는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알 수 있는 말이 많은데, 그걸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작은 책으로 냈습니다.그리고 2013년에 전태일씨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책을 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것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죠.-이전부터 작가가 될 생각도 하셨나요?그 전에 소설을 좀 써본 적은 있어요. 예전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반도에서 나와라’(한국 번역본 ‘반도에서 나가라’)를 읽고 나서 이런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써본 적도 있어요. 원고지 500장 정도의 긴 소설이었어요.70년대 일본과 8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일본 남자와 한국 여자의 러브 스토리. 열심히 써서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출판사는 관심이 없더군요.(웃음) 논픽션은 안성기 선생님이 계기가 됐어요.-이제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1960년대 삼양식품 서울 공장을 방문한 일본 묘조식품의 오쿠이 사장(맨 왼쪽)과 전중윤 회장. /21세기북스 제공일본 묘조식품 본사 응접실. 오쿠이 기요스미와 전중윤은 처음 만났다. 오쿠이의 나이가 마흔한 살, 전중윤은 그보다 세 살 위였다.오쿠이: “이번에 전 사장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부끄럽게도  거의 모르고 있더군요.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말이죠.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에 대해 많이 가르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한다는 사업에 대해서 전 사장은 어떤 전망을 갖고 계십니까?”전중윤: “제가 라면이라는 새로운 상품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서울 시내에 있는 남대문 시장 거리에서 미군 병사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에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나서입니다. 그 광경은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오쿠이: “삼양식품이 독자적으로 생산이 가능할 때까지 기술지원은 우리 묘조식품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지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건 무상 제공입니다. 어떠십니까, 전 사장.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지요? 로열티도 필요없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고통과 슬픔을 주었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본은 패전 후의 극도로 악화된 경제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한국 특수가 우리 일본에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고, 일본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 정도는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사장,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미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입니다. 우리 함께 시작합시다! 힘이 닿는 데까지 제가 돕겠습니다.”“전 사장님. 실례인 줄 알면서도 기술제휴와 관련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이 귀하의 신원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의 일들와 한국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일, 전쟁이 끝나고 보험회사를 운영하면서 대단한 실적을 올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전 사장이 성실하고 청렴결백하게 사업을 이루어온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묘조식품에서 며칠 동안 함께하면서 제게 보여주셨던 양심적인 경영인으로서의 모습도 잊지 않고 고이 간직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의미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스프 배합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 관계자 몇 명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일본 업체들에게 누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전 사장의 인품을 알기에 그런 걱정은 기우로 묻어두려고 합니다. 부디 한국에서 이번 경험을 잘 살려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고픈 서민들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드시기 바랍니다.”(오쿠이 기요스미 사장이 전중윤 사장에게 전한 쪽지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에 수록)▲’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일본어판 표지 /21세기북스 제공-양국 간의 라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책으로 쓰시게 됐지요?안성기 선생 평전을 낸 후에 우연히 삼양식품 홈피에 들어갔다가 웹툰을 보게 됐습니다. ‘식품 황제 전중윤’이라는 건데 거기에 일본의 묘조식품 사장을 만나서 라면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양국 관계가 좋지 않았던 상황인데 어떻게 두 분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서 기술 전수가 성사됐느냐는 것이었어요.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올해가 한일조약 체결 50주년이지 않습니까. 양국 정상화가 있기 바로 2년 전인 1963년에 그런 ‘라면 교류’가 있었다는 게 믿기 어려운 일이죠.국교가 없었다면 민간 차원의 교류도 활발하지 못했고 양국의 여론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무상 기술 협력이라는 아주 어려운 성과를 끌어낼 수 있었는지 그걸 밝혀내고 싶다는 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그런 걸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앞으로 두 나라가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존경하고 도와주면서 보다 높은 단계로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제 바람도 있고요.-집필 과정에서 관련 회사들의 협조나 지원이 있었습니까?우선 묘조식품에서는 고객상담실장이라는 분이 담당 창구가 돼서 친절하게 여러가지를 알아봐 주고 자료도 찾아줬습니다. 그게 50년 전의 일이라서 당시 사장을 직접 아는 분이 거의 없었어요. 그건 삼양식품도 마찬가지였습니다.다만 가까이서 지냈다는 한 분이 아직 살아 계셔서 책에 소개를 했습니다. 미야모토씨라는 분인데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묘조식품 담당자가 준비를 해줬습니다.삼양식품은 최남석 홍보실장님이 창구가 돼주셔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삼양식품 30년사’ 같은 책은 서점에도 없고 국립중앙도서관 정도에만 있는 아주 귀한 책이라고 했는데, 저한테 대출을 해주셨어요.삼양식품 창업자인 전중윤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언론에 보도된 것이나 연재한 내용도 참고했습니다.  오히려 일본 쪽 자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50년이란 세월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데도 의외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분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웠습니다.-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 일본에서 라면 기술을 들여왔다는 사실은 한국에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 회장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일본에 소개된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더군요. 반대로 묘조식품 창업자의 라면 개발 과정이라든가 삼양의 전 회장에게 기술을 전해주기까지 협력 배경 같은 것들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읽을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제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동기는 한일 양국의 관계가 이럴 수도 있다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싶었어요. 꼭 어느 나라를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일본에도, 한국에도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이 책도 동시 출간됐나요?작년 12월 말에 일본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한국어판은 8월 12일에 나왔지요. 일본판을 낸 출판사가 일본에서도 굉장히 양심적인 출판사로 꼽힙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일본에서 혐한(嫌韓) 도서들이  많이 나와서 서점에 쌓여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잖아요.이 출판사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한일 관계를 좋게 봤거나 좀 더 양심적인 내용의 책들을 따로 모아서 전시회도 했어요. ‘혐한이 아닌 도서전’이라는 제목의 행사를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제 책도 이 출판사에서 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내게 됐습니다.-지금까지 반응은 어떤가요?아무래도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양국 국민의 인식 차이가 있는 것 같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라면이 생활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관심도 많고요. 반면, 일본 사람에게 인스턴트 라면은 주식(한끼 대용품)이 아닌 간식거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도 한국만큼 높지는 않아요.-한국도 라면을 제대로 된 식사라기보다는 간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그래도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식사로 팔고 사먹잖아요.-일본은 그렇지 않은가요?인스턴트 라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원래 일본에서는 그전부터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진짜 라멘이 있었어요. 이 라멘은 식당에서만 만들 수 있는 거에요. 가정 집에서는 그걸 쉽게 흉내내기가 어려워요. 반면에 인스턴트 라면은 간편하게 언제든지 싸게 먹을 수 있는 즉석식으로 개발된 거죠.제가 이번에 책을 쓰면서 알아봤더니 일본에서 라멘에 관한 책이 얼마나 나왔냐 하면 만 권이 넘어요. 물론, 어느 집 라면이 맛있다는 리포트류까지 다 포함해서요. 하지만 이 많은 책 중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책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어요.사실 저는 라면 자체에 대한 정보를 담은 책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물론 두 나라의 기업가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경제 경영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제 욕심 같아서는 인문서로 취급받고 싶은 생각이었어요.“일본 라면은 무게가 80~90그램 정도인데 비해, 한국 라면은 120그램을 쉽게 넘겼다.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라면을 간식 정도로 여기지만 한국에서는 당당히 한 끼 식사로 라면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인에게 라면이란 식당에서 정식으로 사 먹는 ‘진짜’ 라면만 식사라고 부를 수 있지, 인스턴트 라면은 임시적이고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스프 한 그릇을 만드는 데만 몇 시간씩 육수를 끓이고 정성을 들이는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일본의 풍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본가로 숭상하는 ‘진짜’ 라면 같은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간단하고 싸다는 이유만으로 인스턴트 라면이 서자 취급을 받을 까닭이 없었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한국어판 서문-선생님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세요, 전통 라면과 인스턴트 중에서.각자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익숙한 건 전통 라멘입니다.-일본 라멘은 지금도 집에서는 못 먹고 밖에서 먹나요?그렇죠. 물론 집에서도 비슷하게 생라면으로 만든, 반가공 라면이랄까요, 그렇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주방장이 정성껏 준비해서 만든 것과는 다르죠.-일본 라멘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지요?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말도 있고, 일본의 전통 면 요리에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미각 같은 것을 더해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300년 전에 도쿠마 구장이라는 사람이 라멘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그 때 라멘이 있었다면 아마 외국과 접촉이 많았던 나가사키항에서 들어온 중국산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한국 라면은 언제 처음 맛보셨나요?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라면이 일본에 수입이 안 됐어요. 제가 한국 라면을 처음 맛본 것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시절이 아니라 일어 강사를 할 때였어요. 라면 전문점이라고 해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일본에는 없었던 맛이었고, 충격적인 맛이었죠. 아주 자극적인 맛이라고 할까. 자극적인 것은 아무래도 습관이 되죠. 중독성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계속 좋아하게 됐죠.-앞서 일본에서는 일부 마니아층 말고는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은 편이라고 하셨지요. 지금은 어떤가요?한류 붐이 있었잖아요. 그게 어느 정도는 아직 계속되고 있어요. 한국 연예인에 대한 인기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한류라는 게 양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까지 퍼졌다고 하기는 어려워요.그걸 어떻게 하면 심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 있겠지만, 결국 어떤 계기에서든 서로 왔다갔다하면서 접점을 넓혀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지금처럼 정치 외교적으로 갈등하는 뉴스들이 자꾸 부각되고 나쁜 것만 강조되어서는 양국에 대한 진지한 관심의 싹마저 자르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30년 가까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양국 관계를 봐오셨는데, 조금이라도 좋아진 것 같습니까?문호는 넓어졌다고 할까요. 물론 지금도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무슨 뚜렷한 의식이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것은 아닌 사람이 대부분이죠. 그렇더라도 그냥 놔둬서 양국 간에 이해가 심화가 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딘가에서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알려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좀 더 서로 간에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한국문화원 같은 기관이나 단체에서 매년 한일 축제도 하고 교류의 기회도 만드는데, 왠지 관에서 만든 느낌이 들어요. 그보다는 좀 더 순수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그런 교류의 기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변에서 퍼져나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그랬으면 하는 바람 이전에 냉정하게 평가하면 어떤지요?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양국의 시선은 요지부동인가요?저는 꼭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거나 비슷하다는 면이 확실히 있긴 합니다. 아주 깊은 문제가 있죠. 역사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역사를 모르니까 당연히 미래도 볼 수가 없지요.예를 들어 독도 문제나 종군위안부 문제 같은 것에 대해 일본 사람들은 그 역사를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나쁜 일 한 게 없는데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불평만 하는지 싶은 거죠.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좀 더 공부해야 하고 알아야 해요. 제 책에 한국의 역사를 조금씩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최근에 한국 내 베스트셀러를 보면 일본 책이 많습니다. 그런 걸 보면 한국내 반일 감정과는 별개로 일본 저자의 책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요즘 들어서는 특히 10, 20년 사이에 한국 사회와 일본 사회가 굉장히 균일화됐다고 할까, 비슷한 면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전에는 한국 것이 제게는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접해 있고 서로 얼굴도 비슷한데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가 하는 것이 있었어요.한국의 경제 성장과 세계화, 도시화와 함께 지금은 두 나라의 생활 문화도 많이 비슷해졌어요. 한국에서 일본 문학 작품이나 자기계발서가 많이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두 사회가 비슷해져서 책의 내용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그러면 역으로 한국 저자의 책도 일본에서 자연스럽게 읽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글쎄요. 거기에는 좀 저항감이나 무관심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진.-며칠 전에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 간부와의 인터뷰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한국 책뿐만 아니라 외국 책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관심이 높지 않다고 하더군요.그런 부분이 있긴 있죠. 아시다시피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 문물을 적극 흡수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도 대체로 관에서 처음 추진한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그것을 접해보니까 괜찮다, 좋다고 해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게 된 건데, 그건 대중 스스로가 받아들인 것이라기보다 위에서 주도해서 이뤄진 것 같아요.한국에서는 늘 해외로 눈을 돌려 어떻게 하면 외국으로 진출할까 고민하지요. 시장도 외국 시장을 겨냥해서 수출을 많이 할 생각을 하지요. 반면 일본은 항상 국내 시장에 주목합니다. 거기서 수익이 나오기 때문에 외국에 굳이 많이 안 팔아도 된다는 체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경제 위기도 거기서 비롯되긴 했지만요.이제는 국내만 보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점점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게 됐어요. 경제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럴 경우 문화적인 면에서도 좀 더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자기 반성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까지 그런 움직임이 뚜렷하지는 않습니다.-조금 전에 한국이 일본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고 한 것은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지요?일본은 너무 관리화되어 있어서 개인의 마음을 자유롭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잖아요? 그에 비하면 한국은 좀 더 자유롭게 자기를 내세울 수 있어요. 가령 사물놀이나 풍물, 민중 가요, 학생운동 가요 같은 것을 보면 그래요. 농악이나 판소리, 탈춤 같은 것들도 다 서민의 예술이지 않습니까?일본은 예전에는 서민적인 문화였던 것도 너무 고급화해서, 예를 들어 가부키 같은 고전 예술이 서민들이 접하기에는 너무 입장료도 비싸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후계자도 찾기 어렵고. 문화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즐기면서 살아가느냐에 있어서도 한일 간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는 한국 쪽에 더 매력을 느꼈다고 할까요.-다음 책 계획이 있습니까?남대문 시장 상인에 관해 쓰고 싶어요. 어떤 것이 될지 아직은 확실치는 않은데 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87년 6월 민주항쟁 때 제가 데모하는 사람들 따라가다가 남대문 시장으로 흘러들었어요. 그때 상인들이 무료로 수박도 나눠주고 하더군요. 감동적이었어요.그 뒤로 그곳 상인들은 어떻게 거기서 터를 잡고 생활하게 됐는지 좀 알아보고 싶었어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안성기 선생이나 전중윤 회장만 해도 한국의 엘리트인데 서민층의 생각이나 삶도 일본에 소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대문시장의 경우 일본인들 사이에도 쇼핑 장소로는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인 유래나 그곳 사람들 삶은 잘 모르거든요.-출판사와는 이야기가 됐나요?아니요, 아직 머릿속에 있을 뿐입니다. 원래 제가 처음에 글을 쓴 게 소설이었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오고 계속 읽게 되는 그런 모험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게 남대문 시장과 어떻게 연관이 될지는…연구를 해봐야겠죠.(웃음)◆무라야마 도시오한국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책도 쓰는 일본인. 195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74년 대학을 중퇴한 후 공장에서 일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6년말 서울로 어학연수를 와 고려대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1988년 서울의 일어학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한국인 아내를 만났다. 일본 귀국 후 통역 등을 맡으며 수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그 중에 배우 안성기가 있었고, 그의 평전 ‘청춘은 아니라도 좋다’를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동시 출간, 호평을 받았다. 2007년부터 교토에서 한국어학원 ‘녹두학원’을 운영 중이다.◆라면에 관한 깨알 지식①인스턴트 라면의 유래: 중일전쟁 당시 중국인의 전시 비상식량인 건면을 일본에서 정제 우지로 튀겨 인스턴트 식품으로 만들었다는 설과 1958년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가 국수류를 개량 발전시켜 인스턴트 식품으로 맨처음 상품화했다는 설이 있다. ②인스턴트 라면의 영양가: 라면 한 개의 열량은 450~500㎉ 내외. 스프에 야채, 버섯, 해물 등이 첨가되어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등 영양소가 균형적으로 함유된 식사 대용식으로 먹을 수 있다.③면발이 꼬불꼬불한 이유: 좁은 공간에 많은 양을 담기 위해서다. 면발을 곡선으로 만들게 되면, 기름 흡수와 수분 증발에 드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더불어 조리 시간도 줄여주고 유통시 파손도 방지할 수 있다. 라면 한 봉지에는 약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간다. 한 가닥의 길이는 보통 65㎝, 한 봉지의 총 길이는 49m다.④라면 스프는 정말 해로울까: 라면 스프는 ‘MSG 덩어리’라는 오해가 많다. 그러나 스프는 쇠고기, 간장, 핵산조미료, 포도당, 마늘, 양파, 고추 등 수십 가지의 재료를 배합해 만들어진다. 주원료를 고압에서 처리한 뒤 진공농축, 건조, 분쇄 과정을 거쳐 베이스를 만들고 조미료와 향신료를 섞는다.⑤라면의 짠맛에 대한 오해: 라면은 나트륨이 많이 들어가 짜고, 그래서 해롭다는 게 라면에 대한 선입견이다. 라면의 나트륨 함량은 국물을 다 먹을 경우 1700~1900㎎ 정도, 국물을 다 마시지 않으면 나트륨 섭취량은 1000㎎ 이하로 떨어진다. 반면 짬뽕은 4000㎎, 우동 3396㎎, 열무냉면 3152㎎, 쇠고기 육개장 2853㎎으로 라면보다 훨씬 높다.⑥라면은 기름에 튀겼기 때문에 나쁘다?: 라면을 튀기는 팜유는 오히려 다른 식물성 기름보다 산화안정성이 좋고, 동물성 지방보다 100배가량 많은 생리활성물질을 갖고 있다. 라면은 신선한 팜유로 면발을 튀겨내는 ‘연속식 튀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름을 반복해 쓰는 패스트푸드나 도넛, 치킨 등과 다르다. ⑦컵라면은 왜 빨리 익나: 끓지 않는 물에도 컵라면이 잘 익는 것은 감자 전분 대문. 감자 전분은 봉지 라면에도 섞여 있는데 면발을 쫄깃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컵라면은 밀가루보다 빨리 익는 성분을 가진 전분의 비율이 높다.⑧라면의 칼로리를 줄이려면: 끓는 물에 면을 한 번 데친후 물을 버리고 면을 다시 끓이면, 지방이 3분의 1로 줄고 열량은 100㎉ 이상 줄어든다. 라면 국물은 되도록 남기고 면만 건져 먹으면, 열량과 지방, 나트륨을 줄일 수 있다./‘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부록에서 발췌▲1963년 국내 최초로 출시된 삼양 라면부터 같은 회사의 2014년 생산품까지 포장지의 변천 /21세기북스 제공
  • 2015-10-06
    2015-10-05 전병근 조선비즈 기자​​​“책은 언제나 그만의 독특한 가치를 제시해왔습니다. 디지털 세계라고 해서 이런 사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잘 짜여지고 큐레이트된 독특한 콘텐츠에, 사용 범위를 넓혀주는 기능과 사양을 더해간다면 책은 언제나 독특한 가치와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온라인의 지식, 정보들을 보면 잘 편집된 책 콘텐츠만큼 잘 구성된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책이 광고가 붙는 무료 콘텐츠와 경쟁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품질의 믿을 만한 콘텐츠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분명히 가치가 있습니다.”“출판사는 이제 콘텐츠 회사로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콘텐츠 창작자와 사용자를 연결시키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창작자와 이용자 모두의 경험을 키울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한국 출판계를 보면 몇몇 대형 출판사들이 그에 걸맞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출판사들이 단기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중소 규모의 창의적인 출판사들이 대형 출판사와 함께 공존하는 풍요롭고 다양한 생태계를 허용해야 합니다.”세계 최초 주문형 e북 서비스 회사의 공동 창업자. 랜덤하우스 아시아 초대 회장. 첫 아시아인 국제출판협회(IPA) 회장… 현재 세계 최대 출판사인 엘스비어(Elsevier)의 지영석 회장을 소개하는 글에 따라붙는 이력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하나 같이 출판 역사의 한 획이었다. 목하 그는 지식산업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미디어&데크놀로지 혁신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힌다.그가 오는 7~1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특별 강연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이 후원하는 이 행사는 올해로 21회를 맞는다. ‘출판! 광복 70년을 읽고 미래 100년을 쓰다'를 주제로 내걸었다.지영석 엘스비어 회장은 최근 국내 방송을 통해 입지전적인 사연이 소개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연중 300일 가까운 초인적인 해외 출장 중에도 틈틈이 국내 강연이나 자문 초청에 응한다. 이번 방한에 앞서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출판계를 비롯한 지식 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현안과 그의 남다른 이력에 대해 물어봤다.-엘스비어는 어떤 회사이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엘스비어는 의학 과학 기술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세계 최대 출판사입니다. 학술지 ‘랜싯(Lancet)’과 ‘셀(Cell)’을 내는 회사로 유명하지요. 전 세계 3000만명 이상의 의료인, 학생, 과학자들에게 전문 자료를 제공하는 글로벌 회사입니다.저는 회장으로서 전 세계의 고객기관, 연구기금지원기관, 연구정책 결정자, 협회, 미디어 등 외부 관계자들을 만나고 업무를 봅니다. 또한 엘스비어 CEO와 함께 직원 역량을 개발하는 일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전역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해외 출장이 아주 많습니다. 1년에 300일 가까이 됩니다.-현재 가장 큰 현안이나 역점을 두는 일은 무엇입니까?아마도 현재 우리 회사의 최우선 관심사는 전통적인 콘텐츠 발행 회사에서, 우리가 보유한 막대한 고품질의 콘텐츠와 기술적 전문성을 활용해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로 변신해 나가는 것입니다.이런 변화는 이미 지난 10년 동안 계속돼온 여정입니다. 그 덕분에 엘스비어는 지속적으로 가치를 더해가는 솔루션을 고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프린스턴 대학 시절 단짝인 존 잉그람의 부친 브론슨씨(당시 출판기업 잉그람사의 회장으로 포브스 집계 세계 부호 50위 안에 든 부호) 집에 처음 저녁 초대를 받았을 때,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되었나?”라고 물었다지요. (브론슨씨는 한참 후에 “열심히 하면 운이 따른다”는 답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부자가 관심사였습니까?저는 외교관(공무원)의 자녀로 자랐습니다. 금전적인 부를 목표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잉그람씨는 대단히 성공한 기업인일 수도 있지만, 제가 그분을 존경한 것은 금전적인 성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그가 그런 부를 가지고 사회를 위해 아주 사려깊고 관대한 자선 사업을 하는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제가 하는 일에서 어떤 성취를 거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늘 세상을 더 낫게 바꾸는 저만의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작년 10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사회 속의 과학과 기술’(STS) 포럼에 참석한 지영석 회장. /엘스비어 제공-27세에 금융회사인 어메리칸 익스프레스 전무로 일하다가 잉그람 마이크로에 인턴 사원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당시 연봉도 이전의 17%만 받는 조건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과감한 선택을 했지요?그때 제 나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당시에도 잘 커나가고 있던, 요즘으로 치면 스타트업 같은 새로운 벤처에 합류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빠르게 (약 5년 만에 연 매출이 20억 달러에서 320억 달러로) 성장할 회사의 일원이 되어 잉그람씨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야말로 저로서는 놓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약 그렇게 해서 모든 게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 없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정해진 성공 이력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더라도 사회적인 (실패의) 낙인이 찍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1997년 세계 최초 주문형 출판회사를 세웠습니다. 일찍부터 IT 기술에 밝았나요? 어떻게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앞서서 실천할 수 있었습니까?대학 생활을 화학공학도로 시작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기술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은행에 있을 때도, 은행 운영 개선에 컴퓨터 기술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저는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이런 경험들을 쌓고, 또 컴퓨터와 주변기기 유통 사업체인 잉그람 마이크로에 5년간 일을 한 후에는 기술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생각했습니다.-2001년 랜덤하우스 사장으로 있을 때 밀리언셀러 ‘다빈치 코드’를 출간했다고 했습니다. 그 책에 얽힌 기억 나는 일화가 있나요?그 책은 2003년 랜덤하우스의 임프린트 중 한 곳인 더블데이(Doubleday)에서 출판했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요. 그 책이 성공하는 과정에서 제 눈에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작가 댄 브라운의 겸손함이었습니다.처음 그를 만났을 때 어찌나 소박하고 소탈한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의 그런 대단한 인품 때문에 저는 그가 꼭 성공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물론 그 책 자체가 뛰어난 창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의 인품에 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출판이라면 전통적으로 (종이)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출판(publishing)이란 말은 라틴어 단어 ‘publicare’에서 왔습니다. ‘공표하다(make public)’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동안 출판의 역할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 중요한 것, 지금 우리에게 관계가 있는 것, 우리 가슴을 끌어당기는 것들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텍스트 기반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콘텐츠로 저자와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변함없는 출판사의 역할일 것입니다. 출판의 유형이 종이에 찍어내는 형태이든, 다른 디지털 매체 형식으로 출판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한 인터뷰에서 “e북이 대세가 되겠지만 종이책도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이책은 어떤 형태로,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남을까요?종이 위에 있는 콘텐츠가 무엇이냐에 달린 문제이지만, 종이 형태의 출판물이 다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콘텐츠의 경우에는 종이 형태는 완전히 낡은 포맷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콘텐츠가 어떤 유형이냐에 달렸습니다.-업계 최초로 주문형 출판(POD·Print On Demand)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종이책(포켓북 종류)은 자판기로 내려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리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경제적 가치도 생각해야 합니다.-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이라면 아마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통계의 절대 강자로서 출판사들과도 마찰을 많이 빚어왔습니까? 현재는 어떤 상태이고, 어떻게 보십니까?아마존과 출판사들의 관계는 상당 부분 출판사들이 아마존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장에 적응하는 데 느렸던 출판사들로서는, 한동안 아마존이 갖고 있는 놀라운 고객 서비스 주도권에 의존해오다가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란 상당히 힘들 것입니다. 자신들이 분명한 수완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할 수 없을 것입니다.-아마존이 킨들을 선보인 이후 e북 전용 리더가 인기를 끌다가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 생활이 집중되면서 독서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활용한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미래 독서와 관련해 e북 전용 단말기의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요?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 의견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시선을 붙잡기 위한 경쟁은 어떤 도구에 달린 문제는 아니라는 점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기가 됐든) 그런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콘텐츠에 비하면 그것은 주변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용도의 기기와 다목적 기기를 모두 도입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출판사들에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오늘날 출판물 이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들이 온라인 디지털 그라운드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끌기 위해 경쟁하는 양상입니다. 여기서 책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을까요?책은 언제나 그만의 독특한 가치를 제시해왔습니다. 디지털 세계라고 해서 이런 사정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잘 짜여지고 큐레이트된 독특한 콘텐츠에, 사용 범위를 넓혀주는 기능과 사양을 더해간다면 책은 언제나 독특한 가치와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1월 3일 KBS1 TV 신년 기획 ‘글로벌 리더의 선택 3편, 세계 지식산업의 리더 지영석’ 편 화면-책 이외에도 온라인에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납니다. 꼭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온라인에 올라있는 지식, 정보들을 보면 잘 편집된 책 콘텐츠만큼 잘 구성된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독자들은 득실을 따져봐서 선택을 할 것입니다. 광고주 지원을 받아 무료로 제공되는 어떤 류의 온라인 콘텐츠들과 책이 경쟁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품질의 믿을 만한 콘텐츠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은 분명히 가치가 있습니다.-지식과 정보의 양이 개인의 수용 능력을 넘어섰다는 말도 합니다. 좋은 책이 읽히려면 출판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소비자는 어떻게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을까요?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읽고 싶은 모든 것, 읽어야 할 모든 것을 읽을 만큼 시간이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따라서 좋은 책이란 그런 (콘텐츠 과잉) 상황에 처한 독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어떤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포괄성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신뢰성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영구성 혹은 속도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책을 구입할 때 추천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 소비 습관을 우리가 다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한 인터뷰에서 “출판사들이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잘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출판인들이 아직도 떨치지 못하거나 깨야 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창의적인 생각을 얻기란 아주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의 좋은 생각을 다시 응용해 ‘짝퉁’ 책들을 펴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습니다만, 우리가 독자들에게 보다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우수한 콘텐츠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책으로 몰려올 것입니다.-저널리즘도 일종의 지식정보산업입니다. 출판과 마찬가지로 변화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에 대한 의견이 있습니까?저널리즘도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콘텐츠 포맷과 그 이면의 비즈니스 모델 양쪽 모두에 걸쳐 온갖 종류의 시험과 실험이 저널리즘 분야에서 진행되는 것들을 보면서 힘을 얻곤 합니다. 저널리즘계도 자연스러운 지속가능한 목표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출판계나 저널리즘 쪽의 여러가지 파일럿과 실험들을 늘 눈여겨보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그 중에서 몇 가지 사례를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어떤 점에서 그런지요?도서 출판이든 저널/뉴스 발행이든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들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유료회원제, 일부 콘텐츠의 제한적 유료화, 광고 수익 모델, 스폰서 모델, 하이브리드 모델 등. 각 실험들이 시도되고 결과들이 공유되면서 이런 발전들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저는 월가에서 사용하는 복수 모델(여러 수익 모델을 병행)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더 복잡해지더라도, 이것이 미래의 다양한 고객들에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출판과 저널리즘이 디지털 변화의 시대에 공생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협력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씩 저널리즘의 적시성과 책의 깊이를 결합한 아주 뛰어난 협력 프로젝트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기술을 받아들이라. 지금 같은 변화의 시기가 무궁무진한 기회의 시기다. 경계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술 변화를 공부하십니까? 현재 어떤 기술에 가장 주목하십니까?물론 저는 늘 기술에 대해 공부합니다. 저 자신이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엘스비어 경영인, 한 사람의 출판인으로서 우리만의 독특한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누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매일 학습합니다.저는 기술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출판계에 적용하는 스마트한 방식을 계속해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엘스비어는 IT 분야 직원이 편집자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스스로 디지털 기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출판사도 이제는 엔지니어가 더 많아야 하는 걸까요?꼭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콘텐츠 회사로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콘텐츠 창작자와 사용자를 연결시키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작자와 이용자 모두의 경험을 키울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출판 산업이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이해하고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모두가 우수한 콘텐츠의 큐레이팅/조직화/구현에 달려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면 기술 도구를 활용해야만 합니다.-인공지능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한 글쓰기는 로봇이 해내고 있습니다. 로봇 작가 시대가올까요? 저술 출판 분야에서 로봇의 활용은 어디까지 와있고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어떤 것들은 로봇 인공지능에 의한 저술이라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로봇이 모든 콘텐츠에 대한 인간의 창의력을 대신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마 비슷하게도 못할 겁니다. 인공지능의 응용력은 오리지널 콘텐츠의 창작보다는 기존 콘텐츠를 재가공하는 데 쓰는 게 낫습니다. 제 평생에는 그 정도가 예상할 수 있는 전부일 겁니다.-한국의 경우 출판 시장이 광고나 물량 공세에 휘둘려 양질의 책이 오히려 밀려나거나 몇몇 책이 휩쓰는 쏠림 현상도 심합니다. 대중은 자극적인 저질 콘텐츠에 끌린다는 말도 합니다. 책의 품질과 다양성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군중 심리’가 있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읽기 때문에 따라 읽는 책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책들을 읽고 싶어합니다.따라서 우리 출판인들은 독특한 콘텐츠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단지 ‘해리 포터’가 대성공을 거뒀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똑같은 청소년 판타지 장르에서 ‘제 2의 해리 포터’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랜덤하우스 아시아 창업 회장으로도 일하신 적이 있지요. 한국 출판계는 생산이나 소비 양 측면에서 디지털 혁신이 더딘 편입니다. 출판사들이 작고 영세해서 필요한 투자를 과감하게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제가 수년 동안 강조해온 핵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 출판 분야를 보면 몇몇 대형 출판사들이 그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출판사들이 단기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뀌어야 합니다. 중소 규모의 창의적인 출판사들이 대형 출판사와 함께 공존하는 풍요롭고 다양한 생태계를 허용해야 합니다.-한국 출판계에 혁신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정부 차원의 개입이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출판계 차원에서 어떤 노력이 선행돼야 할까요? 개별 출판사들에게는 당장 어떤 조언을 하고 싶습니까?이 문제가 정부 지원이나 개입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출판의 미래를 믿는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이며, 출판업계 스스로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생태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각 출판사는 변화를 위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하고 적잖은 자본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다른 콘텐츠 산업에 비해 출판업계의 구조를 더 취약하게 유지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고 있습니다.한국 출판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국외자인 제가 감히 훈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출판업계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다 자본 집중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지 회장님에 대해 알고 있는 많은 것은 성공 이후의 모습입니다. 좌절을 느낀 적이 있나요?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나요?사람들이 제 인생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꼽는 성공보다 두 배쯤의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종종 이야기하듯이, 실패에서 뭔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전을 한 후에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오히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육체적인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이거나(가령 아팠거나 다쳤을 때 말입니다) 개인적인 문제(친구나 선생님, 동료들 등)가 있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보내면서 한 학기 등록금만 주셨다고 했습니다. 원래 독립심이 강했습니까?저는 3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아마도 형님과 누님의 경험이 제게도 은연 중에 전수되어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형님이 제게는 중요한 롤 모델이었습니다.-국민학교 4, 5,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시절만 한국에서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어가 유창하더군요.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TV에 방영된 가족 모습을 보면 두 따님은 영어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요즘 교포나 조기유학생들이 많습니다만, 한국어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십니까?저의 한국어 능력은 두 가지 면에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말하기와 쓰기입니다. 한글 실력의 경우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세련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말은 꽤 합니다. 하지만 어휘력에 한계가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제 한국어 실력이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제 딸들은 한국에 살아도 될 정도로 한국어를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고 한국 TV의 드라마와 뉴스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공개석상에서 말하는 것은 꺼립니다.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봐서입니다.▲ 2014년 1월 3일 KBS1 TV 신년 기획 ‘글로벌 리더의 선택 3편, 세계 지식산업의 리더 지영석’ 편 화면. 왼쪽은 둘째 딸.자랄 때 주말 한국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테네시 내슈빌에 있는 한글학교도 다녔는데 이 학교는 저와 아내, 그곳 일부 주민들이 함께 설립했습니다. 우리 딸들과 같은 차세대 한국계 미국인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에게도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줘야 합니다.하지만 강요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할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한국어를 아는 것이 우리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득이 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대학 때는 화공학과로 입학했다가 경제학 전공으로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출판 전문 경영인입니다. 일찌기 책을 좋아하거나 특별한 관심이 있었습니까?어렸을 때 남달리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위인 전기, 역사, 과학, 창의력에 관한 책 같은 논픽션들을 특히 좋아했습니다.-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너무나 많이 받았다. 이제 내가 줄 차례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종교가 있습니까?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치는 것 같은 사회에 그런 베푸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입니까?저는 개신교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가족과 건강, 친구, 기회 들을 비롯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들을 저 혼자만 갖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그것들은 제가 잠시 누릴 수 있도록 주어졌지만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릴레이와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이 이기심 없는 태도로 사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것이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방법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지금도 전 세계에 멘티가 300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지요?현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서로 대면하는 기회 말고도 폰, 문자 메시지, 동영상 대화 같은 것들을 적절히 활용합니다.-업종을 바꿔 건널 때마다 사람이 다리였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좋은 사람 있으면 기꺼이 다리를 건넌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좋은 다리가 되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고 그럴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저를 중요한 구성요소로 보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기꺼이 운을 걸어볼 의향이 있을 때는 당신도 당연히 그런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늘 표정이 밝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특히 기분이 좋았거나 보람을 느낀 성취가 있다면 무엇입니까?저의 멘티 중 한 사람이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는 것을 볼 때마다 어마어마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들과 긍정적인 정신 자세(PMA, Positive Mental Attitude)를 나누는 것이 저의 기쁨의 원천입니다.-평생 곁에 두고 보는 책이나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 책이 있습니까?몇 권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좋아하는 저자가 있습니까?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소설보다는 논픽션을 훨씬 더 많이 읽고, 전기물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자서전을 쓴 작가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나 스캇 버그(Scott Berg) 같은 전기작가도 좋아합니다.-지금이나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꼭 권하거나 선물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까?최근에 누군가가 허허당의 ’당신이 좋아요 있는 그대로’(RHK)를 선물해 줬습니다. 이 책에서 지혜로운 구절을 꽤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낸 앤드류 호지스의 ‘앨런 튜링: 에니그마’(동아시아)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주 알찬 책입니다. 세상을 바꾼 사람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인물 전기를 즐겨 읽으신다고 했습니다. 혹시 자서전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읽기 외에 쓰기도 하시는 편인가요?자서전을 낼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쓰라고는 했지만. 그런 책이 재미있을 것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인터뷰들을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데다가, 세상에 제가 기여한 것이 책 한 권 분량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것과 그렇게 쓴 것을 강연을 통해 전하는 것을 저는 즐깁니다. -몇 시 일어나고 잠드는지요? 연 출장일이 300일쯤 된다고 들었습니다. 초인적인 일과 속에서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루 바쁜 일과 중에 꼭 빼놓지 않는 습관적인 일(ritual)이 있습니까?가급적 자정과 오전 4시 사이에는 잠에 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짬이 날 때마다 몇 시간씩 더 잡니다. 모자라는 잠은 비행기 안에서 보충합니다. 인터넷 연결이나 간섭도 없이 아주 조용한 시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매일 호텔 방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운동이나 멀티비타민을 복용하는 것 외에도 헬스나 수영, 골프, 테니스, 스키 등, 1년에 약 200회는 운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최근에는 한국에 사는 한 친구가 비타민을 소개해줘서, 식단의 보조식품으로 아주 조심해서 매일 한 알씩 복용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건강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리추얼이라면 저와 가족들이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인생의 절반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더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저는 배울 게 너무 많고, 지금은 아는 게 너무 적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만,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배워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역사도 더 배우고 싶고, 예술과 음악, 휴먼 스토리, 기술도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밖에도 많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지금 현재 모습이 어릴 때 자신이 그리던 모습입니까? 더 도전하고 싶은 큰 목표나 꿈이 있습니까?저는 늘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글로벌 시민이 되는 것, 큰 조직을 이끄는 것, 내가 접하는 것들에 변화를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아끼고 또 나를 아껴주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이런 열망 위에서야 비로소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내가 사는 곳이라든가 직업적인 일, 친구들 같은 것은 제가 젊은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것이 제 과거 꿈들과 일관되는지 여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말 중요한 것은 제가 과거에 상상했던 기본틀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일관되는지 여부입니다. 그 점에 관한 한 저는 언제까지나 감사할 따름입니다.-이번에 서울국제도서전 특강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실 생각이십니까?저의 PMA(긍정적 정신 자세)를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한국이야말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고, 사회가 어떻게 유지돼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놀랄 만큼 많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분들과 창의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지영석현재 엘스비어 회장이자 모회사인 RELX 그룹의 대외 정책 이사와 아시아 지역 사업 전략 이사를 맡고 있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출판협회(IPA) 회장을 맡아 지난해 4년 임기를 마쳤으며 현재 전임 회장으로 2년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과거 잉그램 북 그룹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시절 최초로 주문형 출판(POD) 배급사이자 e-북 서비스 회사인 라이트닝 소스를 공동 설립했다. 잉그램 북 그룹의 모회사에서 여러 고위 임원직을 지낸 후, 랜덤하우스 사장 겸 COO, 랜덤하우스 아시아 초대 회장을 차례로 역임했다.미국출판협회, 국제과학기술의학출판협회의 집행위원회 위원을 비롯, 프린스턴대, 한인커뮤니티재단, 맥카터(McCarter) 극단 등 다양한 자선, 교육, 산업 관련 위원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5/2015100500788.html​ 
  • 2015-10-01
    2015-09-30 전병근 조선비즈 기자​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사도세자(思悼世子) 이야기는 요즘말로 ‘국민 비극’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극으로 드라마로 제작됐다. 영화로도 일찌감치 1956년에 선을 보였다. 반 세기 만인 지금 또 한번 ‘사도’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돼 화제에 오르내린다. 이번엔 ‘왕의 남자’로 호평받은 이준익 감독의 솜씨다.개봉 후 첫 주말,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2012년 출간)이다. 사도의 죽음을 보는 시각, 주요 얼개가 비슷했다. 문득 정 교수에게 영화 리뷰를 한번 맡겨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125분. 짧지 않은 영화가 어느새 끝을 맺고 엔딩 크레딧(영화 제작진을 포함해 기여자들 소개 자막)이 올라갔다. 훑어 내려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참고 문헌으로 정 교수 책이 떴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한중록이라는 1차 사료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용 이외에 사도의 죽음에 관한 연구서로는 유일하게 거명됐다.정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영화 제작 관여 여부부터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말을 아꼈다. “지금 그 문제로 영화 제작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며 “결론이 나는 대로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1주일쯤 지났다. 그는 “일이 다행스럽게도 해피엔딩으로 잘 끝났다”고 했다. 한 주 전과 달리 밝은 목소리였다. 인터뷰는 그 다음 날 이뤄졌다.문답 내용에 ‘해피 엔딩’으로 끝난 지난 일의 과정까지 굳이 포함시킨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관심이 고조된 콘텐츠 창작의 저작권 문제와 그와 관련된 우리 문화와 관행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자는 뜻에서다.-영화 ‘사도’ 자막에 참고문헌으로 ‘권력과 인간’이 올라가더군요. 이번 영화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셨습니까?작년 4월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면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제가 시나리오를 봐주면 되지 않겠나 했는데, 직접 학교까지 찾아왔어요. 보내준 시나리오를 읽고 만나서 이야기도 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니까 기본적인 시각이 제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이더군요. 처음에 그 부분을 이야기했어요.-제작진과 만날 때는 어떤 역할로 만난 거지요?사도를 다룬 ‘권력과 인간’을 쓴 저자이니까 도움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실 이전에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를 찍을 때 저작권과 관련해서 좋지 않은 이야길 들은 게 있는 상태였어요.‘왕의 남자’가 나오기 전에 극작가 김태웅씨가 ‘이(爾)’라는 희곡을 발표했는데 영화 제작진이 그 원작을 샀죠. 하지만 사실 ‘이’라는 희곡 자체가 제 대학 동기인 사진실(史眞實, 지난 8월 별세) 교수가 수업 시간에 과제로 내서 제출이 됐던 거였고, 그 아이디어는 사실상 사 교수에게서 나온 것이었어요.법적으로 따지기는 어려운데, 어쨌든 원 아이디어가 김태웅씨한테 갔고, 그게 다시 이준익 감독한테로 가서 영화가 만들어진 거거든요. 그런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사 교수가 안타까워했죠. 그래서 사도 제작진에게 제가 그 얘기를 먼저 했어요.그랬더니 자기들이 한번 사실 관계를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이준익 감독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자신들도 저작권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있어서 아주 존중하는 입장이라고 하더군요. ‘왕의 남자’ 때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소송을 낸 적 있는데 “영화사에서 고등학생까지 소를 거냐”면서 오히려 여론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저작권 보호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고 했어요.그래서 제작진과 만나게 된 거죠. 서로 의기투합해서 많은 걸 얘기했고 제 자료도 더 주고 했어요. 저는 학계의 연구 성과가 영화계에 반영돼서 우리 문화의 수준이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후 저는 작년 7월 미국으로 안식년을 갔다 왔어요. 영화는 아마 10월쯤 완성된 것 같아요. 하지만 얼마 전 시사회 때 가서 보니까 참고 문헌 중 하나로 처리됐더군요. 제 기대와는 달랐던 거죠.영화의 내용은 제 연구 성과를 상당히 많이 옮긴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그저 참고 문헌으로 소개한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작년에 국내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경우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면 ‘슈테판 츠바이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거든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원안에 대한 존중을 기대했는데 아쉬웠죠.그래서 이의를 제기했어요. 다행히 그쪽에서도 이해를 하더군요. 상의 끝에 우리 학교에 일정액을 기부하는 것으로 보상에 갈음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추후 흥행 성적에 따라 추가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학계와 영화계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 셈이 됐습니다. 지금은 저로서도 영화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이 장학금 혜택을 더 받게 되겠죠.-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지 않은 탓도 있겠군요.그때는 저도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고 해서, 아무리 좋은 관계여도 저작권 문제는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저작권료까지 언급했지만, 그쪽에서 열악한 제작 환경을 들어 사정하길래, 제가 돈 문제는 양보하겠다, 대신 예우는 해달라고 했죠. 하지만 마지막에 나온 결과가 제 생각과는 달랐던 거죠.-국내외에 이런 사례가 많을 텐데 어떤 기준이나 관행이 서 있는지 궁금하군요.국내에서는 아마 이번 같은 경우가 처음일 것 같아요. 이른바 정통 사극이라는 것들은 상당 부분 사료에 기초해서 극을 만드는 거거든요. 하지만 사료의 경우에는 원 저작자가 없잖아요. 널리 통용되는 사료, 이번 영화 같으면 한중록이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곳에 나오는 내용이라면 특정인의 것을 가져다 썼다고 하기가 어렵죠.하지만 널리 알려지기 전에, 어떤 특정인이 처음 보고한 저작에 근거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번 영화의 경우 제가 보니까 제 책에서만 왔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30곳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 저작권을 어떻게 인정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것도 결국에는 다른 연구자들이 제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료에서 온 거니까.-개별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들이라도 구성 과정에서 창작의 가치가 새로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거기에 나오는 사료를 우리도 직접 봤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래도 저는 저작권 문제가 불투명하게 넘어가기보다, 이번 경우에 필요하면 소송도 가서 따져도 보고 선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처음에는 있었어요.물론 그렇게 법정까지 가는 것보다는 원만하게 타결되는 것이 가장 좋죠. 어쨌든 앞으로는 영화계에서도 다른 자료를 이용할 때 좀 더 조심하고, 가급적 선의를 갖고 다른 사람의 노력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우리가 이 책에서 어느 만큼 가져갈 테니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이렇게 먼저 제의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영화계보다 사정이 더 어려운 출판계도 웬만하면 그렇게 하는데, 영화사도 미리 투자를 받고 일을 진행할 때에는 조금이라도 원 창작자의 몫을 떼서 존중하는 관행을 만들어가면 좋겠어요.지금은 영화 제작진이 제가 기여한 부분을 정당하게 평가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기금도 내놓기로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창작자가 대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보면 밀리거나 묻히는 경우가 많지요. 그 과정에서 창작 의욕도 꺾이고...심지어 유명인사도 그래요. 제가 한중록 완역서를 2010년에 냈는데 그후에 혜경궁을 다룬 연극이 나왔어요. 거기서 혜경궁 홍씨 기록인 한중록에 기초했다고는 했지만, 한중록만 해도 이본(異本)이 20종이 넘어요. 한중록이라고 하면 다 같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같은 책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보면 어느 한중록인지 다 알아요. 제 책을 가지고 썼다고 해서 나쁠 게 없을 텐데, 제가 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밝히지를 않았어요.정작 그 연극의 해설에서는 다른 책을 인용해 놨어요. 그러면서 공연을 진행한 국립극장에서는 제게 강연을 청했어요. 국립극장은 그 사정도 모르고 불렀겠죠. 결국 저는 제 공은 제대로 인정 못 받고 가서 강연만 해주고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저작권이 왜 이런가 싶더군요.물론 엄청난 표절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잘 압니다. 분명한 타인의 공은 인정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걸 서로 존중해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런 것도 어물쩡 넘어가면서 무슨 좋은 창작물을 만들겠습니까. 그런 창작자의 결과물은 믿을 수도 없어요.-그걸 인정하면 그에 따른 저작권 비용이 추가될 거라는 걱정 때문인가 보지요?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리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남의 것 따왔다고 하면 계약도 해야 하고 나중에 소송이 따를 수도 있을까봐 그러는 거겠지요.-최근 유명 작가의 표절 논란도 있었고, 국내에도 판단의 기준과 범위에 대해 경각심이 고조된 상황입니다. 이번 사례도 앞으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저도 이번 일 처리 과정에서 수소문을 하면서 좀 더 알게 됐지만, 그동안 창작자들이 느껴온 불만이랄까, 낭패감 같은 것들이 적지 않더군요. 인터넷에 보면 그런 사람들끼리 연대도 좀 하자는 목소리도 있어요. 하지만 정작 법정까지 가는 과정에서 승산은 높지 않고 상처만 커지는 것 같더군요.-영화의 자막도 ‘참고 문헌’ 수준에서 바꾸기로 했습니까? 그래야 일반 관객들도 알 텐데요.그래서 저희(정 교수와 책을 낸 출판사)가 처음 요구한 건 엔딩 크레딧을 바꾸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영화사 대표 말로는 그게 더 어렵다고 해요. 영화가 개봉되고 배포가 된 상황에서 다시 바꾸려면 심의도 새로 받아야 하고, 디지털 복제방지 해제 같은 문제도 있고 해서 난색을 표하더군요.결국 절충해서 매듭을 지었습니다. 무작정 상대에게만 엄격하게 요구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요. 나도 그렇게 철저히 다 못하는 때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흔히 책 쓰고 뒤에다 ‘저작권에 이의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구절을 넣곤 하잖아요. 그것도 따지면 다 편법인데.서로가 노력해서 조금씩 수준을 높여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번에 결과적으로 좋은 선례를 만든 셈이고, 어쨌든 학계 성과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는 그 수익 일부를 학계에 환원하기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을 때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처음부터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셨던가요?시나리오를 봐주고 이상한 부분들을 지적했죠. 저는 사극이 역사와 꼭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게 자주 나옵니다.가령 궁궐 장면에서 옛날 관료들 계급장 역할을 하는 게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관자고, 하나는 관대입니다. 옛날 최고 계급인 임금이나 세자는 민옥관자를 했어요. 하지만 요즘 사극에서는 대부분 아주 큰 금관자를 많이 써요. 이건 하급이 쓰는 것인데도 보기가 좋으니까.그런 것들을 지적하면서, “금관자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민옥관자다. 알아서 하라.”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하죠. 그래도 사극이 곧 역사는 아니니까, 나중에 보면 자기네들 상상이 들어간 게 꽤 많아요.예를 들어 이번 영화의 3정승 자살 사건이 그래요. 1760년 정초에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 한 달 사이에 다 죽어버리죠. 사료에 나오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유는 정확히 몰라요. 노인들이니까 세 명이 동시에 죽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전염병이 돌았으면 모를까 가능성이 낮아요. 사료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은 없어요. 영화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도록 명령하니까 그들 입장에서 차마 실행을 못하고 목을 매서 죽는 것으로 그려놨잖아요. 그건 사료에 근거가 없는 해석이죠. 아마 제작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그런 부분들이 결합된 결과라고 봐야겠죠.-사실과 상상을 말씀하셔서 말인데, 영화 도입부에 사도가 영조 거처까지 육박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그것이 화를 자초한 사건임을 알리잖아요. 그건 기록에 나오나요?그 정도로 상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한중록에 보면 사도가 칼을 들고 수구를 통해 나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밖에 없거든요.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은 없어요. 여러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재구성해보면, 그날 저녁에 비가 왔어요. 승정원 일기에 그날 우(雨)라고 적혀있어요.거기에다, 옛날에는 사극을 보면 임금이나 세자가 궐밖으로 미행을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몰래 비서 한 두어 명 데리고 민가에 가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적어도 50명, 많으면 100명을 수행을 하고 간 걸로 돼있어요.그러면 어느 정도 그날 밤 그림이 그려지는 거죠. 비오는 밤에 사도가 광증이 오른 나머지 1급 무관들을 거느리고 칼을 뽑고 갔으리라는 것은 몇 가지 사료를 보면 추정이 되는 거죠. 그런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가슴이 뛴다, 그런 이야기를 제가 여러 군데에서 했는데, 아마 영화 제작진에게도 했을 거예요.수구를 통해 갔다면, 옛날에는 창경궁의 수구가 바로 청계천으로 통하게 되어있었어요. 거기서 쭉 따라가면 경희궁으로 가거든요. 실제로 어디까지 간 건지는 몰라도 아마 세상에 알려지도록 간 건 맞겠죠. 영화에서는 경희궁, 심지어 영조 바로 옆까지 간 걸로 돼있죠. 그건 영화 제작자들이 상상을 가미한 부분이죠.-영화가 나온 후 보신 소감은 어땠습니까?사실은 제가 사극을 잘 못 봐요. 요즘은 아예 팩션 사극이라는 장르까지 나왔지만, 사극에 하도 엉터리가 많아서. 얼마 전에 개봉한 ‘암살’도 일종의 역사물이라고 하는데, 사실 액션물이지 역사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예요. 가령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김구 선생이 “어이, 약산 김원봉이” 이렇게 부르는데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약산’이라는 호는 윗사람한테 부를 때 쓰는 건데, ‘약산 김원봉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른 걸로 다 연결돼 있으니까 엉성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객 천만을 돌파하잖아요.처음에 ‘사도’ 제작진이 제게 의견을 구했을 때 저는 “흥행에 구애 받지 않고, 완성도 높은 인간을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 한번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도세자야말로 사료가 가장 풍부한 사극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한중록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인간 내면을 그토록 풍부하게 드러낸 기록이 조선시대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 역사 전 시기를 걸쳐 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제작진에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을 그려냈으면 좋겠다, 책도 50년 가는 책을 만들 듯이, 50년 가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그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실제 영화 제작 과정에서는 이런저런 제약 조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들을 다 감안하면 저는 이번 영화의 경우 아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물론 저로서도 불만이 없지는 않습니다. 뒷부분에 굳이 소지섭이 정조로 등장하는 장면은 좀 이상했던 것 같아요. 감독이나 팬들한테는 죄송한 얘기지만 제 눈에는 군더더기 같더군요.-사료에는 없는 장면이죠?허구일 뿐 아니라 좀 지루하게 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마지막에 영조가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저로서는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영조라는 인간은 철저하게 영조라는 인간으로 가야 제대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도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영조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잖아요.영조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 연민, 후회 같은 것을 내비치는데, 제가 아는 영조의 본래 모습과는 다른 부분이니까요.책에도 썼지만, 영조는 사도가 숨질 무렵 환궁을 하면서 개선가를 울려요. 개선가라는 것은 역적을 토벌했을 때 울리는 겁니다. 적어도 기록상에는 영조가 사도의 죽음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영조의 후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 거지, 사료에는 그런 사실이 없어요.사도세자가 죽고 몇 달이 지난 후 영조가 쓴 글을 봐도 후회는 없고 분노만 있어요. 그런데도 어떤 분들은 분노로 쓴 글을 후회로 읽으려고 합니다. 한문을 부분적으로만 따서 오독을 해가면서요.어쨌든 마지막 영조의 캐릭터를 더 영조답게 분명히 보여줬어야 인간을 더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됐을 텐데, 영조를 후퇴시킨 감이 있습니다.-책 제목처럼 ‘권력과 인간’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라셨나 보죠?저는 사실 인간에 더 집중을 했으면 했어요. 권력이라는 것도 권력자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사도세자 앞에는 늘 ‘비운의’라는 수식어가 따릅니다. 엄한 아버지의 강압이나 고도의 당쟁에 억울하게 희생된 인물이라는 시각이지요. 선생님은 ‘권력과 인간’에서 이런 해석에 반대하면서 ‘사도는 죽을 만했고, 영조는 죽일 만했다’는 점을 부각시켰지요?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그전의 해석과 제 견해가 다른 것은 승정원일기를 봤느냐 여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종전의 논의는 사도의 아내인 혜경궁이 쓴 한중록과 아들 정조가 쓴 사도세자의 전기인 현륭원행장(顯隆園行狀)에 나오는 둘 사이의 모순을 두고 나왔어요.후자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훌륭했는데 나쁜 신하들 때문에, 노론(노론은 그 다음에 나오지만)의 모함에 빠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거지요. 하지만 한중록에 보면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등한히 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사고를 쳤어요. 그러다 결국 아버지를 광증으로 해하려고 하다가 죽은 것으로 나와요.두 가지 대립된 그림을 조정할 만한 사료가 없었어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그러니까 영조실록을 잘 보면 그걸 조정할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신중하게 안 읽었어요. 실록에 보면 나오거든요. 사도세자가 내관들을 베어 죽이고 영조가 그걸 갚아줬다든가, 사도세자가 병이 있다는 것도 적시하고 있어요.승정원일기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핵심 사안들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다 지워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워낙 방대하니까, 중간중간에 보면 사도세자가 어떤 인간인지,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요.승정원은 왕의 비서실인데, 거기서 날마다 적은 방대한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像)이 분명해지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상은 아버지한테 엄청나게 구박받고 두려워했고 사고도 많이 치고 벌벌 떨었던 인물이예요바로 혜경궁이 그린 상과도 일치해요. 오히려 한중록이 전모의 일부만 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건 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료의 문제예요. 왜 사료를 안 보고 다른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당쟁희생설에 근거한 것으로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책이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이었지요. 이걸 두고 공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요.사실 당쟁 희생설은 이덕일씨가 먼저 제기한 게 아니고 한국외대 이은순 교수가 1960년대부터 주장을 했어요. 일종의 가설로. 하지만 근거가 약하니까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식이었어요. 여기에다 이덕일씨는 이야기를 더 갖다 붙였죠.저는 애초에 이덕일씨 책을 한중록 관련서 중의 하나로 읽다가 소설 같아서 버렸어요. 근거가 제대로 안 나와있어서 내가 인용할 만한 책은 못 되는구나 싶었던 거지요. 제 책을 내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이덕일은 어쨌는데…” 그러더군요.그래서 그 책을 다시 사서 봤어요. 그때는 제가 공부가 어느 정도 된 상태였는데, 이 책에 엉터리가 한두 곳이 아닌 거예요. 주변 학자들도 정식으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더군요.사실 제가 나선 게 아니라 등을 떠밀린 셈이예요. 고민을 하다가, 나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보니까, 역사학계도 상당수 그 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전국역사교사모임 같은 곳에서 나온 책들도 대개 그래요. 그래서 한번 문제삼아야겠다 싶었던 거지요. -우리가 아는 ‘비운의 사도세자’상(像)은 1960년대에 처음 나온 건가요?당쟁모함설 이전에 광증으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운의 주인공으로 각인될 만하지요. 영화로 사도세자가 처음 만들어진 게 1956년일 거예요. 우리 무속에서도 가장 많이 섬기는 신이 사도세자일 겁니다. 세자로 나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실만으로도 이미 비운의 사도세자인 거죠.거기에 하나가 더 붙은 거죠. 훌륭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아주 좋은 성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식으로. 1960년대 한국당쟁사를 쓰신 고려대 철학과 성낙훈 교수님의 책도 그런 시각이었는데, 사료보다는 소문에 많이 의존한 책이에요. 시대적 한계였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지금은 승정원일기 같은 자료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승정원일기의 사료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다음에는 지금 해석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신뢰도에 대한 평가는 끝났습니까?아니죠, 그런 기록들 역시 계속 주의해서 읽어야죠. 학자들 중에는 실록을 좀 과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사관들이 아주 그냥 직필로 쓴 것처럼 말하지요. 물론 그런 때도 있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그렇게 적용되기는 어렵지 않았나 싶어요.기본적으로 실록은 왕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왕대에 실록청을 세우고 편수관들을 임명해서 씁니다. 선왕대의 시정기라든지 여러 사료들을 가지고 편찬을 해요. 편찬이 끝나면 사고에 보내 보관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임금이고 신하고 아무도 못 보지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못 봐요. 순전히 기록으로 보관하는 거죠.-가령 고종이 세종실록을 참고하고 싶어도 보지 못하나요?못 보죠. 대신 그런 기록 열람서 역할을 하는 게 승정원일기에요.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계속 기록하고 보관하는 건데, 누구나 보는 건 아니지만 대관이나 관련 신하들은 참조할 수 있었어요. 실록도 비공식으로는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실록들을 보면 ‘개수(改修)실록’ 이런 것들이 많잖아요.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것도 있고.실록을 편찬해서 보관했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개수를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보관된 실록을 거의 격년에 한 번씩 밖에 꺼내 말리는 작업(포쇄)을 할 때, 포쇄관이 파견됩니다.그때 “신이 우연히 봤사옵건데 무슨무슨 조항이 잘못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사옵니다” 이런 식으로 상소를 올리고 개수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당시 임금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었다는 거죠. 우리가 공식적인 것은 물론 비공식적인 루트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영조실록의 경우, 사도세자 관련 부분은 상당 부분 빠져 있습니다.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 편수관을 임명하고 이런 걸 다 조정했어요. 요즘은 실록청의궤라고 해서 실록이 편찬된 과정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정조가 특정 시기는 빼라고 해요. 그러니 완전한 자료라고는 볼 수 없죠. 왕의 입김이 작용한 자료죠.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직필하려는, 완곡하게라도 사실을 제대로 기록해나가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임금의 시선을 피해 에둘러 적은 게 많아요. 특히 왕실 관련 부분이 그렇습니다.그래서 번역본을 보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뒤주도 ‘일물’이라고 부르잖아요.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돼있습니다. 이게 실록의 성격입니다.승정원일기는 그날그날 써놓은 것들로, 거의 1차 사료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부분을 다 찾아서 없애지 않는 한 줄거리가 달라질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겠죠-요약하면, 궁궐의 일을 기록한 1차 사료가 승정원일기이고, 승정원일기를 포함해 여러 사초를 집대성한 것이 실록이군요.그렇죠. 승정원일기가 1차 자료죠. 워낙 방대하고 기록도 ‘해서체’가 아닌 행초서에 가깝기 때문에 그 동안 옮기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용을 잘 못했죠. 아직 번역이 다는 되지 않았지만 최근에 현대 활자체로 옮기고 구두점도 붙여주고 해서 훨씬 쉽게 찾아 읽을 수 있게 됐어요.-다 데이터베이스화했습니까?원문 자체는 다 돼 있습니다. 이제는 눈만 고생하면 다 찾아 읽을 수는 있는데, 번역은 아직 멀었습니다. 승정원일기 외에도 한중록뿐만 아니라 혜경궁의 반대파, 예컨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나 아버지인 김한구 같은 인물의 집안 문집들도 다 공간이 돼있고, 권력에서 밀려난 제 3자의 기록도 볼 수 있어요. 이런 걸 다 망라해서 전체 그림을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사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근대 초기에도 학자들 이런 사료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형편이 못 됐어요. 삼국유사만 해도 초기에는 일본 학자들이나 보고 있었습니다. 책을 소장하지 못했으니까. 중간에 듣는 소문하고, 한두 가지 자료만 있으면 글을 쓰고 그랬거든요.옛날 분들이 한문 실력은 훨씬 낫겠죠. 하지만 사료 접근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가 오히려 1차 자료를 폭넓게 활용해 궁중 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거죠.-선생님은 고전문학을 전공한 국문학자인데 어떻게 사도세자를 연구하게 되셨지요?한중록 때문이죠. 한중록의 경우, 가람 이병기 선생이 처음 발표했을 때 위당 선생 같은 분은 진위조차 의심했어요. 혜경궁 이름으로 썼지만 여자가 왕실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던 거죠.하지만 이제 실록이 다 공개되면서, 고종 실록을 보니까 한중만록도 나오고 관련 기록으로도 사실 관계가 확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가지 사료들로 검증이 되고 하니까, 이제는 문헌 자체의 진위성이 의심받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국문학계에서는 한중록을 국문학의 중요 고전으로 높이 평가해왔어요. 사실 관계를 떠나 한글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봤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사실 관계 자체가 맞지 않는다며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어왔지요. 1960년대 이은순 선생을 비롯해 그후로도 비판적인 견해가 주류였어요.예컨대 1795년 정조가 혜경궁에게 “다음 갑자년 1804년이 되면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는데, 이걸 ‘갑자년 구상’이라고 불러요. 이것마저 역사학계에서는 부정했어요. 한중록에만 나오고 다른 어디에도 안 보이니까 꾸며냈을 거라고 보고, 한중록을 믿기 어려운 책이라는 근거로 들었어요.하지만 다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한중록에서밖에 없던 사실이 확인되면서 오히려 역으로 한중록이 고유한 사실을 담은 것으로 인정받게 됐어요. 최근에는 역사학계에서도 몇몇 분들이 한중록의 사료 가치를 달리 평가하는 것 같아요.얼마 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역사학자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발표를 한 후 적어도 사도세자가 광증을 가졌던 걸 부정하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합의에는 도달했어요. 사료가 있으니까 부정할 수 없게 된 거지요.-사도세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중록이 중요 텍스트여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 내용이 사도였다는 얘기군요.그렇죠. 우리 고전문학계 최고의 고전인데 제대로 온전한 주석이 안 돼있다고 생각을 한 거죠.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이건 출간이 된 책도 아니고 일반 독자를 위해 쓴 책도 아니에요.크게 나누면 3부인데, 대상 독자가 달라요. 두 개 부는 손자인 순조에게 주려고 쓴 글입니다. 일종의 편지하고 비슷해요. 그래서 큰 맥락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 문화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1960년대에 김동욱 선생 같은 분이 좋은 번역서를 냈지만 빠진 구석이 굉장히 많았어요.이제는 다른 관련 사료들이 많으니까 전모를 되살려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한번 도전해보자 결심을 했고, 정말 풍부한 사료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아 거의 완전하게 복원을 했다고 자부합니다.학생들과 같이 독회도 하면서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애를 많이 먹긴 했지만 아주 좋은 경험이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선배 학자들보다 더 똑똑해서도 아니고 순전히 오늘날 사료 접근이 용이해진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사도의 죽음에 관한 한 관련 자료는 다 섭렵하신 셈이겠네요?스무 종에 이르는 한중록 이본들을 다 봤고, 알려진 연구들은 다 봤습니다.-그렇게 볼 때 영조는 어떤 인물이었나요?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깐깐하고 잘하려고 했어요. 실제로 잘한 부분도 많고.-좋은 임금이었습니까?좋은 임금이고자 했죠. 상대적으로는 좋은 왕에 속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일종의 장악력도 뛰어났고요. 그런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왕정에 한해서입니다.그러나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혼란스럽고 미숙했던 것 같아요. ‘분노의 제왕’이라고 하지요. 화내는 부분이 워낙 많으니까. 신하들이 제발 화 좀 그만 내라고 할 정도였지요.예컨대 ‘명기집략’이라는 명나라 역사책에 조선 임금에 대한 부분이 좀 왜곡이 됐다고 해서 그 책을 수입한 사람, 소지한 사람, 판매한 사람을 다 잡아 죽이거든요. 엄청나게 가혹한 거죠. 그 사건 때문에 연암 박지원이 과거 시험을 단념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죠.사도세자와의 관계에서도 자기 감정을 못 다스린 것 같아요. 그 배경을 알고 있었던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영조라는 인간의 성격이 잘 나오지요. 인간 내면을 그렇게 깊이 그린 책은 세계에도 드물 거예요.정신분석학이 나오기도 전인데, 영조가 어릴 때 겪었던 심적 고통, 트라우마를 묘사합니다.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이 되지 못했을 때 느낀 자기 운명에 대한 불안감, 자신을 조롱한 사람에 대한 모멸감, 이런 것이 전 생애를 지배한 것 같아요.궁녀의 천한 몸종의 아들이라는 태생 컴플렉스도 결부되었던 거죠. 그런 것 때문에 얕보이지 않으려고 더 잘하려고 했던 왕 같은데. 그 바람에 분노조절장애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공적인 영역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좋은 임금이지만, 사적인 영역, 감정의 영역으로 가면 정말 대하기 싫은, 나 같아도 모시기 힘든 임금이었던 거죠. ‘삼성가의 사도세자’라고 할 수 있는 이맹희씨 자서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한중록과 너무 닮아서.요즘도 비슷하게 파악될 수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로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겠죠.-영조는 세자에게 공부를 그렇게나 강조하던데 자신은 공부를 많이 했나요?많이 했지요. 책도 많이 썼고. 사실 영조는 뒤늦게 왕세제로 책봉되는 스무 살 전까지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왕자였어요. 그래서 임금이 된다는 생각을 못 했고,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는 거죠. 여건이 안됐으니까.비실거리던 황형 경종이 죽고 갑자기 왕세제가 되니까 그때부터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 거죠. 그때부터 자신은 열심히 했다는 거예요. 아들한테 “봐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임금이 됐냐. 그런데 너는 좋은 여건에서 왜 그러냐”라고 말하는 거죠.사도는 어릴 때 바로 세자를 만들어주고, 일급 선생 붙여 공부시켜주고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 아이는 공부에 별 뜻을 보이지 않으면서 어긋났던 거죠.이 과정이 승정원 일기에도 잘 나옵니다. 8살 무렵이던가 사도세자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 날, 영조가 물어보죠. 세자가 동몽선습을 읽었는데, 영조가 “어땠니?” 하고 물으니 “간신히 마쳤는데 힘들었어요”라고 답해요. 그때부터 실망하는 거죠.또 사도가 눈이 어지럽다고 하소연하니까, “너 언제 어지럽니?” “책 읽을 때 어지럽지?” 이런 식으로 따져 묻습니다. 그러고 또 실망하고 야단 치고. 그게 사도가 열 살 무렵일 때부터 그래요. 한중록에서는 얼핏 지나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그런 대목들이 아주 많아요. 사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죠.-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버지를 잘못 만난 겁니까?잘못 만났죠. 그런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것이 비극인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견디기 어렵고 찍혀 나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성향 자체가 상당히 달랐어요. 옛날에 한중록 읽을 때는 사도세자를 두고 체격이 ‘석대하다’고 돼있어서, 체격이 건장한 것으로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건 좋은 해석이고, 승정원일기를 통해 보면 뚱보예요. ‘체심비풍’이라고 해서, ‘몸이 아주 뚱지다’ 이렇게 표현해요.영조도 그런 점을 야단친 대목이 많아요. “너는 내가 스무 살 때 탄 가마를 열 살인데도 들어가지도 않아!”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사도가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일종의 스트레스성 아동비만이라고나 할까요.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같은 증세도 어릴 때 보이고. 그래서 더 어긋났는지도 모르지만. 요즘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몰라요.-사도가 기록상으로는 비만이었다고 하셨는데, 영화에서는 최고의 아이돌 배우가 연기를 했지요.최근의 극 중에서는 유일하게 사도세자 모습에 가까웠던 게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붉은 달’에 나온 배우였어요. 그 드라마 제작자는 되도록 사료에 맞게 연출해보고 싶었나 보죠. 영화는 아무래도 흥행을 고려해서 배우를 기용했겠죠. -사도가 처음부터 이상이 있었다기보다 성향이 다른 아버지의 과잉 기대에 어긋나면서 관계가 뒤틀리고 발작 증세도 생기고, 급기야 반역에 해당하는 행동으로까지 치닫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영조도 어느 순간에 기대를 접었던 거죠. 발작이 일어나면서 사람도 죽이고 할 때 기대를 접었다고 봐야죠.-그래도 굳이 뒤주에 가둬 죽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냥 폐위를 시키던가 귀양을 보내 객사하게 할 수도 있지 않나요?워낙 엽기적인 죽음이었으니까 다들 그 점을 궁금해하죠. 제가 복원을 했던 부분도 그 대목인데. 일단 세자를 만들어 놓은 후에 폐세자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조가 신하들에게 폐세자반교를 쓰라고 했는데도 감히 쓰려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오죽하면 자기가 직접 썼어요. 처음에는 뒤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이려는 시도도 했어요. 사도에게 칼을 주고 자결을 명했지만 신하들이 막았잖아요. 사도가 옷을 찢어 목을 매려고도 했고,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고도 했지만 매번 신하들이 막았어요.그때 정황을 보면, 영조가 처분을 하러 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동궁 관리들 상당수가 도망을 갔어요. 사도가 어찌되면 근처에 있는 자기들도 온전치 못하다는 생각을 다들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에는 반역죄로 처벌받은 상황이지만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요.조선의 역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그자리에서 사도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으면 자기 혼자 죽는 게 아니라 그 집안이 완전히 망한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다들 목숨을 걸고 말리는 거죠. 그러니 영조는 죽이려 해도 죽이기가 쉽지 않았어요.그러던 중에 누군가에 의해 뒤주 아이디어가 나왔고, 영조는 그 속에 사도가 스스로 들어가도록 했던 겁니다.-사도 이야기의 토대가 된 한중록이 중요한 저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영역본을 두고 정치철학 텍스트로 아주 높이 평한 외신 리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영역이 여러번 됐습니다. 그 중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낸 김자현(JaHyun Kim Haboush) 전 컬럼비아대 교수(2011년 작고)의번역본(The Memoire of Lady Hyegyoung)이 가장 잘 됐다고 하더군요. 김 교수님이 콜롬비아대에서 동양고전 선독 같은 과목을 강의할 때, 일본의 겐지 모노가타리와 중국의 무슨 작품과 같이 읽혔는데 학생들 반응이 가장 좋은 게 한중록이었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김 교수님의 번역서가 나온 뒤로 새로 발견됐거나 해석이 돼 나온 자료들이 많아서 한중록 영역도 새로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 고전도 정치철학 텍스트로 읽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한중록을 ‘권력과 인간’으로 읽어내셨는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나요?우선 권력 문제를 생각하자면, 인간이 권력자가 되면 권력이 곧 자기고 자기고 곧 권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체로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군림을 하려드는 거죠. 그런 정서가 지금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북한 체제를 희화화하지만 우리 정치권이나 재계에도 그런 모양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권력의 속성은 밖에서는 별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한 번씩 내부의 숨은 치부를 드러내지요. 저는 그걸 균열이라고 부르는데, 평소에 그렇게들 아름다운 모습으로 명절에 모이고 하다가도, 갑자기 자살 사건이나 갈등이 불거지면 숨은 실상이 드러나지요.사도세자 사건은 조선 왕실의 균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고. 그 균열을 통해 권력 속의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훈을 통해 지금 권력들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지요.교육적인 부분으로는, 자기 기준으로 끌려고 하는 엄한 아버지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의 불행한 관계를 보여주지요. 그리고 그동안에는 잘 조명되지 않는 부분이 또 하나 있어요. 혜경궁과 정조의 모자 관계입니다.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통해 부자 관계가 멀어질 경우에 겪게 되는 실패를 봤어요. 그래서 조손 관계를 잘 맺게 하기 위해 정조를 사도세자 사망 직후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보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엔 어머니인 자신과 정조의 사이가 멀어지고 말아요.한중록을 보면 자기 친정이 박살난 이유의 일부를 거기에서 들고 있어요. 요즘 부모들이 자기희생해가면서 자식들을 조기 유학도 보내고 하는데, 정작 나중에 돌아오는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그 외에도 많습니다. 가령, 혜경궁은 당시 궁의 최고 권력자로 있었어요. 궁궐에서 70년 있었으니까.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어요. 모든 1급 정보를 다 가진 위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심경이 다 나옵니다. 잘난체하고 깨끗한 척하고 신의 있는 척하지만, 우리한테 들어와서는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인간의 표면과 이면에 대한 기록들이 아주 풍부해요.사도세자 이야기가 워낙 강해서 다른 부분들이 가려져 있는데 제대로 조명되고 해석해서 얻을 것들이 참 많아요.-이번 영화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와 영조의 대결도 인상적이더군요. 영조가 퇴위하겠다고 시위했을 때 대왕대비가 관두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이 압권이었죠.한중록에 나오지요. 그런 장면들이 사실 빛나는 장면들인데, 그전에는 사도에만 집중하니까 무덤덤하게 넘어갔던 부분이에요. 아까 한중록 쓸 때 혜경궁이 최상위 권력자라고 했는데, 임금과 부딪힐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 대왕대비잖아요.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어요. 정조도 정순왕후랑 부딪혔고, 그전에 연산군 사극에도 그런 게 나왔죠. 제일 막강한 권력자끼리 부딪히는 건데, 한중록만 보면 그 이유가 분명치가 않아요.요즘은 실록이나 다른 사료들도 같이 보니까 관계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요. 영화에서는 그런 여러가지 해석들을 종합해서 입체적으로 구성하게 된 거죠.-권력과 인간을 말씀하셨는데, 권력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는 것이 많지 않나 싶어요. 사도세자는 물론 영조도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지요. 권력으로 인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지경 말입니다.영조가 왕자였던 연잉군 시절 초상을 보면 비쩍 말라서 불안하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에요. 그때 실록을 보면 연잉군의 부채를 받은 신하들이 탄핵당하곤 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영조 정도 머리가 되면 아는 거죠. 그러다 살아남은 사람이니까.거기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정권을 뺏길 뻔했잖아요. 반란 세력이 거의 서울 근교까지 왔지요. 혜경궁도 지적했지만, 영조도 젊었을 때부터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걸로 볼 수 있지요.사도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지요. 죽음을 예감하는 얘기를 계속 하죠. 무덤을 파놓고 거기다 병장기 숨겨놓고 하는 기행도 벌이고. 그렇게 보면 권력이라는 게 무서운 현장이고 치명적인 영역인 거죠.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또 하나 의문은 조선 시대 인간의 이해도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성리학이 마음을 탐구하는 심학이었고 수준도 꽤 깊었는데, 왜 공부보다 그림이나 활쏘기를 좋아하는 사도 같은 인물의 성정을 포용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을까요?그렇지는 않았어요. 다른 임금들도 대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숙종도 좋아했고, 영조는 잘 그렸어요. 정조도 전해오는 그림을 보면 잘 그리지는 않았어도 좋아했어요. 임금들 소일거리가 그림이었죠. 활 쏘고 칼 쓰는 것도 좋은 취미였던 거죠.그런 걸 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도의 경우 공부를 너무 등한시한다는 게 문제였던 거지요. 조선시대 기록, 야담 같은 것을 보면, 어릴 때 장난꾸러기이고 개구장이였지만 영특해서 발탁된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건 문제 될 게 없어요.영조는 자기 자식은 그런 것 말고도 기본적으로 공부를 중시해야 한다고 본 거예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기보다 자기가 볼 때 기본에 해당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고 본 거죠.조선 시대 왕자 교육에 대해서도 자칫 과장돼온 측면이 있어요. 몇 가지를 추려서 과거엔 아주 교육을 잘 받았고 좋은 시스템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지금 우리가 배울 게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저는 견해가 좀 다릅니다.왕세자 교육은 반사회적인 요소가 많은 교육이었습니다. 자기 옷도 자기가 못 입고, 다른 애랑 놀아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입니까. 다른 인간의 이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교육입니다. 이전에 어린 왕자에게 또래아이인 ‘배동’을 붙여줘서 사회성을 길러줬다고 하는데, 배동은 친구가 아니라 그냥 어린 시종이었어요. 배동을 통해 사회성을 길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요.-성군이 나온 게 오히려 이상한 건가요? 왕조가 500년이나 나름대로 유지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문제가 많은 교육이었다면 보완이나 개선이 따르지 않았을까요?조선 왕조의 500년 지속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하지요. 오래 이어졌으니 훌륭하지 않겠느냐는 가설에 근거해서 글 쓰는 분도 있지요. 저는 시각이 좀 다릅니다. 이건 사실 판단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긴 한데, 저는 왕조가 오래 계속되면서 오히려 국민을 연약하게 만든 것 같아요.가령 지금 북한에서도 응당 일어나야 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민을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조선 시대에도 일반 백성은 워낙 가난하고 피폐해서 혁명의 기운이 없어 왕조가 유지된 것 아닌가 싶은 거지요. 좀 먹고 힘이 있어야 혁명도 하는 것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백성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왕조였다는 뜻인가요?혁명은 부르조아가 일으키는 것이지 농민이, 빈농이 일으키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합니다. 조선은 거의 빈농 사회여서 어렵지 않았나 싶어요. 지배층이 잘해서 혁명이 안 일어난 게 아니라 피지배층이 너무 허약해서가 아닐까 싶은 거지요. 이 문제는 학문을 약간 넘어서는 부분인 것 같아요.-한중록 이전에는 맨 처음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게 ‘왕월회맹연(玩月會盟宴)’ 연구였지요? 어떤 책인가요?조선을 대표하는 최장편 소설입니다. 18세기 중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글 소설입니다. 모두 180권인데 서울대 출판부에서 500면 분량으로 12책을 냈어요. 박경리 토지보다는 길다고 봐야지요.저자는 전주 이씨 여성 작가로 추정합니다. 전부 3대에 걸친 대하소설인데, 집안에서 일어난 이야기, 집밖으로 가서 자손들이 공을 세운 이야기 이런 것들입니다.그전까지는 조선에 장편소설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대 문학 초기 작가들만 해도 조선은 장편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후에 많이 보고가 됐죠. -18세기에도 소설이 대중적으로 읽혔나요?필사본이 읽혔죠. 그 당시 유한 계층 여성들은 긴긴 밤에 소일거리가 없으니까, 당시 기록을 보면 한 번에 속독을 했대요. 잘 읽는 사람은 열 줄을 한 번에 그냥 훑어서 읽고 넘겼다고. 그러니 하루에도 열 권 스무 권도 읽고. 책을 빌려주는 곳이 서울에 많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 시대에 유통이 된 소설입니다.-그 뒤 저서로 ‘나는 기생이다’ ‘조선의 음담패설’을 내셨지요. 주로 주변부 문학을 탐구한 이유가 있나요?한글 문화가 주변 문화입니다. 저는 궁정이나 중앙 관료, 선비보다도 민중, 여성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요. 한중록도 궁중 문헌이긴 하지만, 궁중 내 여성 기록이라서 제 시야에 들어왔던 거고.-‘구운몽’을 완역하시면서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어떻게 봐야 하죠?구운몽은 위안의 소설인 것 같아요. 크게 말하면, 어른들의 동화라고 보면 됩니다. 어른들이 고단한 현실에 지쳤을 때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나쁘게 말하면 당의정 문학인데, 쓴 현실에 달달한 설탕을 바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마 20세기 리얼리즘 시대에는 비판을 받을 만한 작품이었고,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우리 국문학계는 그걸 사상 소설로 포장했어요. ‘유불도(儒佛道) 삼교 융합’이라고. 사실은 그런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소설의 본령은 그런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위로받는 작품입니다. 예컨데 영조도 구운몽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예요. 승정원 일기 보면 말년에 신하들에게 이 책 누가 지었냐, 잘 지었다고 해요.이승만 대통령도 옥중잡기 보면, 감옥에서 구운몽을 두 번 읽었다고 나와요. 현실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거지요.-장기 베스트셀러였네요.조선의 유일한 베스트셀러죠. 임금부터 기생까지 다 읽은 국민 문학인 셈이죠. 그런 것들을 다른 여러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 같은 분은 영국에 셰익스피어 나온 다음에 우리는 구운몽이나 짓고 있었다고 비판했다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훈계를 가르치려면 교훈서를 보지 왜 문학책을 보겠어요. 문학은 삶의 아름다움도 담고 때로는 잊게도 하고 위트도 담고 유머도 담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이해 못하고 한 말 같아요. 문학이 논어 대학 중용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남들한테 훈계하는 그런 것은 재미없다고 보는 사람이거든요. 인간이 안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읽으면 재미가 없어요. 인간이 들어있는 게 텍스트로 더 소중하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겨우 이뤄낸 성과들을 그렇게 버리면, 가령 한중록 버리고 구운몽 버리고 하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지요. 부모가 마음에 좀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다 버리면 뭐가 남겠습니까.-‘조선의 음담패설’은 어떤 책입니까? -조선 후기 풍속을 담은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은 한국에 남아 있지도 않았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이런 류의 구전 문학이 남아 전해진 경우가 드뭅니다. 음담패설과 관련된 것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역수입된 거에요. 우리는 다 버려버렸어요. 일본 사람들은 한국어 공부한다고 그걸 가지고 썼어요.-우리는 그런 책을 낮춰 본 건가요?낮춰 본 거죠. 조선에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어요. 이리 버리고 저리 버리고 해서. 기이재상담이라는 책도 제가 찾은 게 아니고, 제가 아는 친한 일본 교수가 후쿠오카에서 찾아냈어요. 제가 보고서 깜짝 놀랐죠.복사본을 받아서 번역서를 냈고, 출간하면서 한국에는 없는 책이니 기증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지금 규장각에 기증을 했어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게 유일본입니다.이 안에 보면 그전에 잘 몰랐던 조선의 풍속 현실이 아주 잘 담겨 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님이 열심히 조선시대 호적 분석을 해서 혼속 정리를 해놓은 게 있는데, 이 책 보면 다 나와요. 여성도 본남진(본남편), 소대남진(일시적으로 관계를 맺는 남성)이라고 해서 남자를 여럿 거느리고, 남성도 화처를 여럿 거느리는 현실이 그려져 있어요.이런 자료 없으면 그런 사실을 몰랐죠. 그런 걸 모르면 이상의 ‘날개’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도 ‘음란한 얘기’가 좀 있다 싶으면 다 버려요. 지금도 비슷해요. 제가 그 책을 낸 다음에 인문대 학장님한테 드리러 갔더니, 마침 어느 고위 보직 교수님이 와 있어요. 소개를 했더니 책을 보고 픽 웃더군요. 그런 분들이 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것을 가지고 저는 작업들을 많이 했어요. 우리의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나는 기생이다’는 어떤 책이지요?그 책도 마찬가지로 주변부 연구에 해당합니다. 기생 자료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기생이 자기 입으로 자기 일생을 말한 유일한 자료예요. 가령 그전에는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다가, 님 오신 밤에 서리서리 펴리라’를 보고 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했죠.당시 기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살아갔는지를 알고 나면 그걸 사랑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남자 손님의 비위를 맞춰준 거죠. 그런 것들을,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는 그런 소중한 텍스트들을 우리는 안타깝게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겨요. 얼마 남지 않은 자료들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까 안타깝지요.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제가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만.-지금은 무슨 연구를 하고 계시죠?두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소설들이, 정보가 어떻게 유통이 되어왔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소설의 유통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세계적으로 정보 유통의 효시가 된 것이 소설 유통이에요. 근대 초기에 소설이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소설책이 요즘 소셜 미디어 같은 역할을 했다는 건가요?그렇죠. 엄청나게 많이 유통이 됐어요. 제 말로 하면, 조선시대에 이미 정보 유통의 고속도로가 하나 놓였다고 하지요. 조선 시대 문맹률이 굉장히 낮아지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주요한 것이 소설 유통이에요. 우리는 그것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없어서, 소설 유통과 정보 유통에 대한 책을 하나 써서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이라는 제목으로 나올 예정입니다.다른 하나는 오는 11월 대산재단에서 발표할 건데 ‘한국문화의 성격과 위상’이라는 글입니다. 한국 문화가 가진 주변적 성격에 대해 제가 오래 탐색해온 결과물입니다. 한국 문화는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것을 한국 문화라는 좁은 테두리가 아니라, 세계 문명사적 차원에서 좀 넓게 조망을 하려고 합니다. 그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고요 정리 단계에 있어요.-같은 서울대 국문과에 계셨던 조동일 선생의 오랜 연구 주제와 비슷하게 들리는군요.사실 국문학자라면 대부분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우리 과 선생님들 이야기해보면 다들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죠. 꼭 조동일 선생님이 아니어도 공유하는 문제의식인데 표현해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게 정리돼 나온 책들은 많지 않아서. 학회에도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논리화하는 작업은 별개의 문제니까.-세계 문학 속의 한국 문학의 위상은 많은 학자들 화두인데, 조동일 선생이 일찌기 구체적인 발언을 하셨지요. 그 작업이 계승이 되고 누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조동일학’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서도 영화사가 천만 관객 돌파하면 일정 기금을 학교에 출연하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금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저는 선학 이병기 선생의 호를 따서 ‘가람 연구기금’이라고 붙이고 싶어요. 요즘 참 안타까운 현실이, 캠퍼스에 돈 낸 사람들 흉상밖에 없어요. 학문의 전당인데 학문을 가져왔다든가 일으켰다던지 그런 사람의 기념물은 없어요. 건물 이름도 대기업에서 붙인 것이고.-대학 발전기금 마련이라는 당면 현실 때문이겠지요.그래도 이건 지나치게 본질을 외면한 것 같아요. 예컨대 규장각 장서만 해도 옛날 어려운 시절에 선배 학자들이 자비 아껴서 산 책 수천 권을 기증한 게 많아요. 그 과정이 가람 일기에 잘 나옵니다. 지금은 그 책들 상당 수가 국보급이죠. 그런데도 후배 학자들이 그 공덕을 기리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서울대 70년사에 아직 가람 선생 책을 가지고 기념 학회 한 번 열어준 적이 없어요. 한번은 모 관장 계실 때, 외국 대학의 어떤 교수 한 분 추모학회를 연다고 해서 제가 우리 선배 학자들 추모해본 적 있느냐고 고까운 소리도 한 적이 있어요.단순히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도 소중한 작업들을 했는데 제대로 기려본 적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조동일 선생님 같은 경우에도 한평생 열심히 하셨어요. 후반에 너무 앞서 가셔서 대중적으로 다소 괴리된 부분이 있지만, 저는 그런 것도 학문적으로 따져서 극복을 해야지 외면하거나 비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한때 조동일 선생님 글이 학계의 관심사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 선생님 글이 나오면 거기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했던 시절이 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걸 넘어 혼자서 치고 나가면서 아무도 못 쫓아가게 된 거죠. 그래도 학문의 이념을 세운 부분이 있으니까, 검증을 하고 따지고 하는 작업을 후학이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안타깝죠.저는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조동일 선생님이 계시고, 후학들도 그걸 이어서 극복을 해나가야지 피해가서는 안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정병설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다. 한글 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 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해왔다. 저서로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및 ‘조선의 음담패설-기이재상담 읽기’ 등이 있다. ‘한중록’과 ‘구운몽’을 번역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한문과 한글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일고(一考)’ ‘조선 후기 한글 출판 성행의 매체사적 의미’ ‘무정의 근대성과 정육(情育)’ 외 다수가 있다. 한국 문화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는 연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30/2015093000121.html​
  • 2015-09-29
    ​2015-09-26 전병근 조선비즈 기자​​▲ 사람들이 세상에 마모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백서원을 지었다는 전영애 교수 /전병근 기자​ ​​“무어 거창하게 ‘공동체의 이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고, 세상이 너무도 각박해서, 아끼는 귀한 젊은이들마저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런 이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 잠시라도 숨 돌리고, 자기도 돌아보고 세상도 돌아보는 그런 자리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저 맑고 귀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굳게 서주기를, 저 혼자만 살겠다고 남들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지혜를 깨쳐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것이 서원을 짓는 이유이기도 하다.콘도며 펜션, 리조트, 온갖 연구소도 널려 있는 세상에서 굳이 서원이라는 형식을 택한 것은, 지켜가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을 탓하고 공격하는 데는 능란하지만, 사람 도리 하고 살려는 자세라든지, 옷깃 여미며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라든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당연한 도리라든지…”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그런 마음에서 생겨났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맑은 뜻 위에 자비(自費)와 주변의 도움까지 더해 작년 10월 문을 열었다. 천정을 가로지른 대들보에는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라고 적어놨다. 서원의 모토다. 말 그대로다.전 교수는 여기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는다. ‘오마토’와 ‘시마토’라고 해서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학교 수업으로 인연 맺은 제자들과 정례 모임도 한다. 책을 읽고, 밥도 해 먹고, 각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날이 새기 일쑤다.직접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작년말에 출간된 그의 책 ‘인생을 배우다’를 읽고 나서였다. 지금까지 수십 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써낸 전 교수지만 에세이집으로는 첫 책이다. 지금껏 수많은 학생과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온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일기처럼 적어놨다. 한 부분을 옮겨보면 이렇다.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해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학회에서였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 씨는 사람들을 아끼고 인연을 중히 여기는 분이었다.몇 해 전 성탄절 무렵, 나는 그 댁을 찾아 격식을 갖춘 식탁에서 홀레 씨 내외와 함께 식사를 했다.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홀레 씨는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더욱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셨다. 후식을 들 차례가 되었는데 정중하게 아주 미안해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중에 들으니 당시 홀레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심폐기를 달아야 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며칠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위중한 상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손님과 정중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의 메인 코스를 마치신 것이다.서울의 학교로 돌아오니, 책 200여 권이 담긴 상자들이 항공우편으로 도착해 연구실에 높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홀레 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내신 것이다. 내가 괴테 공부를 한다고 괴테의 ‘서·동 시집’ 초판본(1819년), ‘파우스트’ 희귀본을 전해 주셨는데, 이제 그와 같은, 그 가치를 평가조차 할 수 없는 귀중본들이 담긴 상자들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 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내게로 보내셨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나는 홀레 씨 말고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든든한지.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전하고 싶은 욕심,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30년 가까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 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찾아가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서원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마을 주민회관 앞에 이르러 전화를 하니 먼 발치에서 전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목과 팔 쪽이 늘어진 줄무늬 스웨터에 무릎이 튀어나온 작업용 바지 차림. 교수님의 아우라는 어디로 가고, 밭 매다 온 시골 아낙 같은 분이 먼 데서 온 손님을 반겼다.“여기가 우전(友田)입니다.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찻잎을 따서 갖고 들어갑니다. 그걸 뜨거운 물에 우려내 대접하지요.” 서원 입구 자그마한 주차장 옆에 그보다 작은 텃밭이 있었다. 전 교수는 우뚝하게 자란 식물의 잎을 한움큼씩 따서 챙기고는 서원으로 앞장섰다.입구에 우람한 비석이 가로놓여 있었다. ‘如白서원’이라는 글자를 새긴 뒷면에는 이름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다. 와공, 구들공까지 적어 넣었다.▲ 서원 입구 비석 뒷면.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 이름이 다 적혀있다.“여기 있는 것들은 사연이 없는 게 없어요. 이 비석은 이웃에 조각가 한 분이 있는데, 사모님이 작품 하라고 준 돈을 여기 돌을 장만하는 데 내놨어요.” 함께 걷는 내내 전 교수의 ‘사연’이 이어졌다.“여기는 나무 고아원이에요. 그냥 보면 번듯한 것들을 사서 심은 것 같지만, 계단 틈 같은 곳에 나서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는 것들을 구출해서 옮겨 심고 한 것들이 많아요. 한 10년 되니까 이렇게 많이 컸어요.”나무들도 이름이 있다. 아버지를 기린 여백송, 잔가지가 많은 후학송, 어머니를 생각하고 심은 모송, 가운데가 구불구불한 시송, 괴테송… 그야말로 작은 식물원이다. 뒷마당은 제법 널찍해서 공연을 하거나 캠프파이어도 할 수 있게 돼있다.-여백(如白)이 무슨 뜻인가요?본래 아버지 호입니다. 성품이 맑다고 친구분들이 지어준 거지요. 저는 이 서원이 말 그대로 ‘여백 같은 공간’인 동시에 ‘맑은 사람들을 위한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이름을 따서 붙였습니다.아버지가 2010년 12월 돌아가실 때 91세였어요. 킬리만자로는 세계 두 번째 고령 등정 기록을 세웠고,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셨지요. 일찍 부친을 여읜 아버지께서 증조부(부친의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는데 증조부께서는 향리에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어요. 증조부는 아주 잠깐씩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원장도 지낸 선비였어요.구석구석에 싯구를 적어 놓은 돌판들이 보인다. 독일 현대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들이라고 했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전 교수의 독일시 스승이기도 하다.5분여를 올라가니 자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詩亭(시정)’이라고 적혀있다. 현판 글씨는 부친의 것이다. “아버지가 시(詩)라는 한자어를 좋아했어요. 문자를 쪼개 보면 말씀(言)인데, 흙(土)에서 나와 마디(寸)만 한 것이라는 뜻이 되잖아요. 시라는 말이 함축한 것을 잘 나타낸 것 같아요.”“여기서 10년 동안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이것 하나만 지어서 건너편 마을의 집과 여기를 왔다갔다했지요. 저기 있는 제 책들이 다 여기서 쓴 것들이지요. 전기도 수도도 없이 깜깜한 곳을 왔다갔다 했어요. 밤이면 무섭기도 했어요. 고라니도 자주 왔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글 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어요.”이 ‘시정’은 독일에도 하나가 더 있다. 남동부 도나우 강가 파사우라는 작은 마을이다. 앞에서 말한 전 교수의 시 스승 라이너 쿤체의 집이 있는 곳이다. 쿤체 시인이 사후에 시인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생각했던 자택 뜰에 귀한 자리를 얻어 한옥 정자를 지었다.한국에서 장인들이 설계해서 지은 것을 다시 분해해서 배로 실어 날라 현지에서 짜맞추는 ‘대역사’를 거쳤다. 그곳 정자에도 똑같은 ‘시정’ 현판을 걸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그 과정에 오간 편지와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도 엮었다.이윽고 언덕 위 전망대에 이르렀다. 공사용 가건물처럼 철골로 얽어올렸다. 외관은 그리 볼품이 없지만 올라와 보니 그럴듯하다. “여기 찾아오신 분들이 더울 때는 이곳에 올라와서 시원하게 전망도 즐기라고 지어 올린 거예요. 아끼는 제자들 가끔 와서 숨도 고르기도 하고. 일출 때는 여기 풍경이 기가 막혀요.”땀도 식힐 겸, 이곳에 주저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인생을 배우다’가 첫 에세이집이라구요. 제목처럼 인생에서 배운 지혜랄까 철학 같은 것이 잘 나와 있더군요.이곳 서원 개관을 기념해서 냈어요. 저는 요즘 제 약력을 써놓고 보면 너무 번듯해서 겁이 나는데, 사실 저는 굉장히 어렵게 공부했어요. 어릴 때 경북 영주에서 35리나 떨어진 산골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 때 다니던 등하교길을 30년이 지나서 차로 한번 가보니 왕복 11.6킬로미터가 되더군요. 비가 와서 외나무 다리가 떠내려 가면 그날 학교도 못 가곤 했어요.부모님의 삶도 참 파란만장했지요. 아버지는 장손이어서 한학을 증조부한테 배우다가 12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 때 결혼을 하고는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요. 집안에서 그래도 너는 장손이니 신학문을 해야 한다고 해서 뒤늦게 서울 휘문중고등학교를 갔어요. 졸업 후엔 일본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이 났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갔는데 또 6.25가 터졌지요.아버지가 그때 정치사회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서 교사로 일하던 중에 5.16 쿠데타가 났어요. ‘군사혁명’ 초반에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정치를 해보려고 하시다가 다시 관뒀어요.그 사이 어머니도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16세에 결혼하고는 곧장 큰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으니까요. 결혼 18년 만에야 저를 낳았고, 나중에 8년 차 나는 동생이 생겼어요. 저는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치고는 서울에서 혼자 살았어요.-어떻게 그 나이에 혼자 살게 됐지요?어느날 아버지가 부르더니 “너 서울 가서 공부 안 할래?” 하셔요. 속으로 너무나 놀랐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했어요. 그 다음 날로 아버지가 서울에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 서울은 제게 지금 미국, 독일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어요. 6시간 동안 통통거리는 기차를 타고 가서 서울에서 6학년부터 혼자 살았지요. 아버지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서는 제게 생활비를 부쳐주셨어요.-어린 나이인데 겁이 안 나던가요?그냥 살았어요. 겁도 모르고.-원래 어릴 적부터 당찼나 보지요?아뇨, 순 바보예요.(웃음) 그 뒤에 제가 중 3때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서울로 왔어요. 병원 있는 데로. 그때 어머니도 수발하느라 고등학교 때 좀 힘들었지요. 그래도 대학은 잘 들어갔어요.-혼자서도 공부를 잘하셨나 보네요.아니에요. 그때 일 중에 지금도 안 잊히는 게 있어요. 경기여중 시험을 보고 왔더니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이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편한 바지를 사주셨어요. 그때는 체력장을 봐야 했는데, 다음날 달리기 잘하라고 격려해주신 거지요. 그거 입고 열심히 뛴 기억이 나네요.(웃음) -대학 때 독문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18,19세 때 뭘 알았겠어요? 그때 집에서 돈을 부쳐주시는데 다른 데는 쓸 줄을 몰라서 당시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족족 샀어요. 혼자 있으니까 책을 참 많이 봤어요. 이것저것 많이 읽었어요.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선명했는데, 국문학은 좀 아는 것인 것 같고, 영문학은 많이들 하는 것 같고, 경기여중고 다닐 때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어요. 또 릴케니 괴테니 이런 독일 작가들에게 매료가 됐지요.-그때는 서울대에 지방 출신이 많았지요?그럼요. 가난한 지방 유학생이 많았아요. 캠퍼스가 동숭동 대학로에 있을 때인데, 도서관 계단 밑에 매점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멀건 콩나물국물만 사서 밥만 싸온 도시락이랑 같이 먹곤 했지요.계단 위에 올라가면 바로 철학과가 있었는데 누가 목청 높여서 플라톤이 어쩌고 하던 시절이었지요. 그 기억 때문에, 처음 제가 독일에 공부하러 갔을 때 딴 사람들은 대학식당 밥이 맛없다고들 했는데 저는 그 친구들 생각이 나서 목이 메었어요.-대학을 졸업한 후에는요?대학원까지 줄창 6년은 공부를 잘 했는데 그 다음 길이 없어진 거예요. 왜냐하면 유학을 가야 하는데 그때는 박사과정 원서도 함부로 못 냈어요. 서열이 있어서. 유학을 가려면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에 선발이 돼야 했어요. 정원이 전국에서 한 명이었어요. 보통은 학과 조교를 하고 나면 시험을 봐서 가곤 했어요.저희 학년 전체가 20명에 여학생은 저 혼자였는데, 졸업 때 성적이 좋아서 무급 조교 1년을 했어요. 그 다음에 유급 조교가 될 차례였는데, 어떤 남학생이 제대하고 복학을 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갑자기 저는 길이 끊기면서 희망이 사라진 거예요. 그때는 여자들은 ‘논외’였던 시절이었어요.그 뒤로 한 5년을 그냥 있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학교에 가봤더니, (그때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상태여서) 온통 낯선데 독일 유학생 선발 공고가 떡 붙어 있는 거예요. 마감 며칠 전이었는데 지원을 해버렸어요.다급한 마음에 조교 우선 지원 관례 같은 것도 안중에 없었지요.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되고 학과 조교는 떨어져버린 거예요. 붙었으니 안 갈 수도 없고, 학교에는 (관례를 어긴 셈이니)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 됐지요.그때는 캠퍼스에 최루탄이 터지고, 학생들은 시국사범으로 잡혀 가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도 참 불편하고 염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또 마침 (대학 졸업하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없던) 애가 생겼어요.그래서 처음 독일에 가서는 세 학기만 하고 왔어요. 2개월짜리 아이를 두고 가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불경죄’에다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서 도무지 희망을 갖기 어려웠어요.석사 끝내고 10년을 낭패 속에서 지내는 동안, 혼자서 있는 책은 다 읽고 번역했어요. 번역서를 출판한다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때는 컴퓨터가 나오기 전이어서 한 번 번역하려면 원고를 타자기로 한 다섯 번은 쳐야 했어요. 손쉽게 교정이 안되니까. 하도 타이핑을 많이 해서 저녁에 젓가락질이 안 될 정도였어요. 아이도 어렸을 때라 참 힘들었어요.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때 열심히 읽은 게 결국 힘이 되더군요. 인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읽는 힘 같아요. 나중에 독일에 가서 보니, 거기서도 선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독일 교수처럼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더 정밀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거나 놓치는 것도 꼼꼼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그때 번역해놓고도 아직 출판 안 된 게 많아요. 한 60-70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는 공부할 기회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배우려고 했어요.그러다가 전두환 정부 때 대학을 많이 늘리면서 서울대 대학원에 응시하라는 연락이 왔어요.(전 교수는 서울대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 대학이 난립하면서 작은 사립대에 가서 11년간 있다가 1996년 서울대에서 오라고 해서 가게 됐어요.-2011년에 ‘괴테금메달’을 받아서 화제가 됐지요?너무나 뜻밖이었어요.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라고 있어요. 금년에 130주년 되는 유서 깊은 학회입니다. 거기서 괴테 연구자들 대상으로 격년제로 주는 상이에요. 100년쯤 됐는데 그때까지 외국인이 받은 일은 거의 없었어요. 나중에 찾아봤더니 동양인으로는 제 앞에 일본인이 한 명 있었고, 제 뒤에 중국인이 한 명 받았어요.그동안 제가 발표한 논문과 괴테 시를 전부 번역한 것, 관련 저술 낸 것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였어요. 그때 놀라서 수상 연설에서 “이제 비로소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춰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2011년 6월 시상식 때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는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교수가 번역한 작품들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생각하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입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돼요,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 하고요.”)-연구 업적으로 큰 상을 받은 그 해에 ‘서울대 교육자상’도 받으셨지요?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가 인기 높다고 들었습니다.사실 제가 좋아서 하는 수업이에요. 서울대에 부임한 것이 1996년이었어요. 가자마자 그 다음 학기부터 시작한 ‘독일 명작의 이해’를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연구 학기 말고는 빠지지 않고 매년 했어요.보통 강의는 똑같은 것을 두 번 하기도 어렵거든요. 하지만 그 수업은 달라요. 제가 사회만 보고 수업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니까. 한 학기를 마치고 나면 마치 제가 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여기 서원도 그 수업을 들은 제자들을 위해 만든 거예요.(2011년 서울대 교육자상 수상 감사 연설에서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받은 것은 정말 얼마나 많은지요. 한 학기가 지나면 처음에는 그저 ‘학생’이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야말로 조각처럼 뚜렷해져 있는 것을, 앞으로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한 역할을 다부지게 해갈 든든한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젊은이들의 그런 놀라운 성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자인가요.”)오월 마지막 토요일, 시월 마지막 토요일을 ‘오마토’ ‘시마토’라고 해서 모입니다. 저는 오는 사람들을 다 알지만, 온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몰라요. 그래도 같이 있다가 밤늦게 제가 잠이 들면 그 사람들끼리 밤새 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 수업을 통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수 있어서 감사하고 황공할 따름이지요.우리가 사는 세상을 누군가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크게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너무 마모되지 않은 채 세상에 온전히 좀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까 싶어요. 서원 일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에요.▲ 전영애 교수의 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 수강생이 만든 책-책에서도 수업을 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의 인연을 많이 언급하셨더군요.수업에서 사실 저는 별로 하는 게 없어요. 학생들이 읽어온 책을 가지고 진행해요. 그 책이 아주 중요한 것이면, 제가 몇 마디 하고.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경우엔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별도의 커리큘럼도 없어요.학생들에게 “에베레스트 올라갔다 온 사람이 관악산을 못 가겠느냐” 하면서 파우스트를 읽힙니다.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작품이어서 조별로 역할을 배정해 한 달 간 읽게 합니다. 다들 즐겁게 읽고 조별로 회의록을 씁니다. 저는 회의록을 보고 거기 나온 질문이나 읽기에 도움 될 말만 조금 거듭니다.학생들은 독회가 끝나면 거기에 대해 글도 씁니다. 마지막에는 이 서원으로 와서 다같이 몇 십 명 둘러 앉아서 다 읽습니다. 그러고는 조별로 밥 해 먹고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공연합니다. 저기 무대는 그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여기 시정에 와서 시도 한 편 읽고.그 다음 중요한 독일 작가들을 정해주면 학생들이 내키는 대로 작품을 골라 읽습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거지요. 무엇보다 읽고 난 후에는 반 쪽이라도 글을 쓰게 합니다. 학생들끼리도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학기말에는 각자 책을 만듭니다. 얼마나 정성껏 만드는지 몰라요.전망대에서 내려 오는 길에 ‘괴테 오솔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시비가 놓여 있다. 노년기 시들이다.-괴테는 만년 청년이었던 것 같아요.파우스트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60년 동안이나 쓰고, 죽기 바로 전 해 여름에 “이제는 다 끝났다”면서 밀랍으로 봉인을 해서 넣었다가, 죽기 바로 전(3월 20일)에 다시 꺼내서 또 고쳤다고 해요.이제는 여백서원 지붕 안으로 들어와 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까 대문 앞 텃밭에서 따온 찻잎으로 우려 낸 차를 앞에 두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전 교수는 깜박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가서 보따리를 들고 왔다.서원에는 귀중한 글들이 있다. 내 어머니가 읽으신 책. 반가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에도 못 가셨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사시면서도,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다 필사를 해서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어 다 외우셨던 어머니의 그 간절한 필사본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책이 그토록 귀하게 읽혔던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또 시 선생님이신 라이너 쿤체 시인의 책들. 내 작은집 팩스로 부쳐주신 수백 통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들, 내 수업 듣는 학생들이 한 학기가 끝날 때면 어김없이 정성껏 만들어내는 책들,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들어 오는 책들.. (‘인생을 배우다’ 중에서)여기 온 분은 이걸 꼭 보여드립니다. 어머니가 어릴 때 필사한 책이예요.-선생님 학구열이 어머니를 빼닮은 건가 보네요.어휴, 저는 발치도 못 따라갑니다. 어머니는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나이 열여섯에 결혼하시고 큰 살림을 꾸려가야 했지요. 요즘은 책이 흔하디 흔해졌지만, 저희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갔어요. 그 와중에도 책만 보면 이렇게 죄다 베껴 썼어요. 보세요. 너덜너덜하잖아요. 이렇게 되도록 읽고, 읽은 책은 다 외웠어요. 열두서너 살 때였다고 해요.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나 컸나 몰라요.두루마리 가사집은 참 많은데 책으로 남은 것은 ‘강릉추월전’ 이것뿐입니다. 고생하면서 사시는 동안 이걸 읽고 외우고 하면서 견뎠던 거지요.제가 어릴 때 육전(六錢)소설(옛 문고본)도 어머니랑 같이 다 읽곤 했어요. 저는 이런 걸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요즘은 귀한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걸 꼭 보여줍니다.이건 제 책 서문에도 썼지만, 홀레씨가 제가 남겨 주신 장서 200여 권 중 하나입니다. 1823년본으로 굉장히 귀중한 책입니다. 여기 1819년에 출간된 괴테의 서·동시집도 있어요.당신 자녀분들도 다 훌륭한데, 이 귀중본을 굳이 제게 남겨준 것은 이 책이 어디로 가야 가장 귀하게 보관되고 읽힐까 생각한 거지요. 여기 ‘세기의 판본’이라 불리는 1854년 파우스트본도 있어요. 사실 이런 게 도서관에 하나 있기만 해도 굉장한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희귀본이지요.이 사진이 홀레씨입니다. 그분을 처음 뵙게 된 게 기차 안이었어요. 6명이 타는 칸이었는데 저와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앉아계셨지요. 그때 바로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람이 다음 교통 편인 비행기를 놓칠까 봐 굉장히 불안해 해요. 모르는 사람이지만 제가 그곳 상황을 좀 알고 있어서 위로를 했어요.그 사람이 공항에서 내리고 난 후에 기차가 프랑크푸르트까지 10-15분을 더 가는데 갑자기 이 분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히시그라벤에 한번 가보라고 해요. 그 순간 깜짝 놀랐아요. 거기가 괴테하우스의 주소였거든요.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200여권의 장서를 전 교수에게 물려준 홀레씨그 다음 괴테 250주년 때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뵀는데 사모님이 같이 왔어요. 제가 그때 괴테의 서·동시집에 대해 강연했는데, 끝난 후에 당신 댁에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해요. 고사를 하고 호텔에 갔더니 과일 바구니를 보내셨더군요.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쪽지와 함께.할 수 없이 갔는데, 그때 제가 관심 있을 만한 책과 기사 들을 꺼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걸 다 읽고 오느라 열하루가 걸렸어요.-독일에 한국식 정자를 지은 일도 난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조그만 정자인데도 사연이 얼마나 긴지 몰라요. 천안에서 지어서, 일산에 가서 소독 포장해서 부산에 가서 다시 선적했어요. 레고처럼. 문이 22짝 들어갔는데 보석상자처럼 지었지요.(전 교수는 독일에 한옥 정자를 짓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고민하던 중에 쿤체 시인의 승낙을 얻어 그의 집 뜰에 정자를 짓게 됐다. 전 교수는 이 과정에 오간 편지글과 메모, 기록,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비매품 도서로 제본했다.)-쿤체 시인은 어떻게 시의 스승으로 삼으시게 됐습니까?쿤체 시인은 옛 동독 출신입니다. 1960-70년대 국내에서는 금서였던 그의 첫 시집 ‘민감한 길’(1969)과 산문집 ‘참 아름다운 날들’(1976)을 제가 번역했다가 해금 뒤인 1989년에 출간한 것이 인연이었어요. 1994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 독문학회에서 첫 대면한 후로 독일시의 스승으로 삼게 됐습니다.학회 때 그분 시에 대해 발표를 했다가 우연히 그분도 그곳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허락도 없이 시를 번역해서 책을 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팩스로 시를 주고받으며 제 시의 스승이 되셨습니다.2005년에 한국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한 단체의 작가포럼 초청은 두 번이나 고사하다가, 제가 “학생들이 선생님 시를 듣고 싶어해요”라고 했더니 자비로 날아와서 낭독회를 하셨어요. 일주일 머물면서 한국에 관한 시도 열두 편 짓고 시집으로도 냈지요.마침 지난 주에 그분 댁에 갔더니 그 사이에 귀빈이 다녀갔다고 해요. 메르켈 총리가 다녀간 거예요. 여름 휴가차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에 갔다고 하더군요. 6시에 베를린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있다면서 일어났다고 해요. 총리가 휴가 때 조용히 시인의 집에 찾아오다니 놀랍지 않아요?▲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여름 휴가 때 남편(맨 오른쪽)과 함께 쿤체 시인(맨 왼쪽)의 집에 들러 찍은 사진 /전영애 교수 제공-이건 뭐지요?아버지가 직접 옮겨 쓰신 증조부 문집입니다. 제 아버지는 90세까지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세요. 그 해에는 갔다오시더니 “이번엔 덜 올라갔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너네는 어쩌니, 거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할 텐데” 하시더군요. 그때 벌써 담도암 2기말이었어요. 91세 되던 해 1월 5일 6시간 반 수술을 받았는데 결국 돌아가셨어요.그래도 하시던 일을 다 마무리하고 가셨어요. 이게 그때 남긴 증조부 문집인데, 한학자도 아닌 분이 공부를 해가면서 다 번역을 하셨어요. 옥편 여덟 질(한 질이 스무권)을 옆에 놓고 옮겨 내려가신 거예요. 여기에 ‘울면서 피로 번역했다’고 쓰셨어요.-왜 그러셨지요?후손들이 읽게 하기 위한 거였지요. 가령 저만 해도 오래 전 먼 이방의 괴테 책은 줄줄 읽으면서 정작 증조부 글은 못 읽잖아요. 뭔가 이어주시고 싶은 게 있으셨던 거지요.이것들은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만든 ‘나의 책’이에요. 한 학기 끝나면 한 권씩들 만들어 제출했어요. 아이디어들이 기발해요. 저는 학생들 쓴 글에다 감평을 짧게 써서 나눠줍니다.-오마토, 시마토 모임은 사전 공지를 하나요?전혀 없어요. 올 사람은 알아서들 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은 대구에서 밤 11시에 온 사람도 있어요.-여기서 숙식도 하나 보지요?침낭이 많이 있어요. 각자 알아서들 합니다. 여긴 자력갱생이 모토예요. 다들 빈손으로는 오지 않아요. 뭐라도 하나 들고 와서 자기들끼리 여기서 먹고, 이야기하다 자다가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아침에 국 끓여주는 게 유일합니다. 이곳이 정말 여백 같은 곳이 됐으면 해요. 호흡도 좀 가누고,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려면 하고, 글도 써오면 읽기도 하고, 악기가 있으면 연주도 하고. 각자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요. 딱딱하게 프로그램을 짜서 돌리지도 않아요.이곳에서 생산적인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와서 쉬고 책도 보고 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게 결국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테니까요. 그걸 간절히 바랬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제도 어떤 분이 오셔서 그냥 계속 책만 읽다가 가셨어요.-독일 문학을 전공하시면서 번역서를 누구보다 많이 내셨습니다.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살아있는 분으로는 쿤체 시인입니다. 평생 독학을 하다보니 선생에 목말랐는데 저는 뒤늦게 다 만났어요. 학문의 선생님은 49세에 만났고 시의 선생은 55세에 만났어요.-학문의 스승이라면 누구 말씀인가요?헨드릭 비루스라고, ‘괴테 서·동시집 연구’를 내신 분입니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자이지요. 제가 그분 책도 번역했고, 에세이집에서도 따로 소개도 했지요.(한번은 독일의 아주 조그만 시골에서 열린 주말 세미나 모임에 찾아갔다. 내가 관심 있게 읽고 있던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인 석학이 이끄는 블록 세미나였다. 내가 -나중에 그분의 표현으로-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들었는지, 휴식시간에 그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셨다. 마침 세미나 주제로 쓴 글이 있어 그 이야기도 했더니 내일 저녁에 그것 좀 발표해 보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밤새 원고를 손질해서 다음 날 저녁 정성껏 발표를 했다. 이번에는 그분이 그야말로 눈을 반짝이며 경청해 주셨다. 끝나고는 아주 내 옆자리로 와 앉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판으로 함께 걸어나가게 되었는데, 낮이 긴 여름이라 이제 막 어스름이 내리고 첫 별이 뜨고 있었다… 처음 간 바이마르가 그때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내가 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라는 책으로 묶어낼 정도로 나는 기나긴 편지들을 썼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소리로 그런데 그 책은 제 스물일곱 번째 책이에요,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느닷없이 자기가 키스를 좀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다… 장한 아이에게 아버지가 하듯이 그렇게, 내 키의 두 배는 될 법하신 분이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이마 위에다 가볍게 키스를 해주셨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인정이었다… 나는 당시 마흔아홉이었는데, 지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그리 오래 찾던 선생님을, 학문의 스승을 이제야 만난 것이었다. 그동안은 노상 혼자 공부하다시피 지내다 보니 평생 스승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세상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바로 외로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 이치를 젊었을 때는 몰랐다. 그분, 평생 찾아온 스승인 헨드릭 비루스 교수를 만난 후로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했다.)-독일 문학과 문인들을 오래 공부하고 접하셨는데 어떤 특징이 있나요?좋은 의미일 수도 나쁜 의미일 수도 있는데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물론 저는 좋은 의미로 말을 하는 겁니다. 흔히 사변적이라고들 하지요. 독일을 보면 제일 부러운 게 있어요. 어느 나라나 다 고급 문화, 저급 문화가 있잖아요.독일도 둘 사이 간극이 크긴 한데, 고급 문화를 돌보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있는 것 같아요. 이른바 ‘교양시민층’입니다. 독일인 자신들도 요즘은 그 시민층이 사라진다고 개탄들을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보면 여전히 부럽지요.가령 홀레 씨 같은 경우만 해도 그저 작은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인데, 그렇게나 성심껏 문학을 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저 같은 외국 학자도 그렇게 자상하게 보살피니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요.그분이 괴테학회 재정감사도 맡아서 했는데, 저는 그저 가끔씩 돈을 기부하는 역할인가 싶었어요. 알고 보니 그 정도가 아니라, 우선 문인들이 계산에 능하지 않은데 그런 재정회계 일을 다 해주고, 사업가들과 연결해서 후원금도 받아주는 일을 해요. 끊임없이 책도 읽고. 그렇게 문화를 지켜가는 층이 상당히 두꺼운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데 그게 부러운 거지요.또 늘 제가 하는 얘긴데, 독일은 위아래가 안 보여요. 독일에 있다가 미국 가면 계급사회라는 첫인상을 받는데 독일은 안 그래요. 돈 많은 부자도 분명히 있을 텐데 겉으로 별로 안 보여요.쿤체 선생의 일화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어요. 그 집에는 매년 좋은 와인이 와요. 한번은 낭독회를 마치고 옆 사람이랑 한창 얘기하는데, 무슨 일 하느냐고 물었더니 농사를 한다고 하더래요. “내가 망치는 있는데 모루가 없다. 그걸 구할 길 없느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그때가 여름인데도 큼지막한 모루를 짊어지고 쿤체 집에 찾아왔더래요. 알고 봤더니 그분이 ‘왕’(제후)이었어요.독일에는 아직도 지방에 그런 왕들이 있어요. 왕이란 사람이 그 무거운 걸 지고 시인의 집에 온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넓은 영지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매년 보내준다고 해요. 아까 메르켈 총리도 그렇잖아요. 지도자가 그 귀한 휴가를 이용해 시인 집에 찾아올 생각을 한다는 게 상상이 가요?메르켈 총리의 남편이 화학 교수인데, 좋은 시를 발견하고는 작가가 누군지 구글로 찾아보다가 쿤체 시인인 걸 알고 둘이서 휴가에 그 집에 왔다고 해요. 그것도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히. 다녀가는 동안에도 동네 사람들은 총리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해요. 그처럼 소리 없이 문화를 지켜가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참 부러워요.-독일에 있다 온 분들은 그곳 독서 문화를 많이 얘기하더요.많은 사람들이 차만 타면 책을 열어요. 예전에 동독은 더 심해서 ‘독서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지요.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고 하니 더 그랬던 거지요. 독일은 TV가 참 재미가 없어요.-우리와는 대조적이군요.우리는 TV가 너무 재미있어서 국민이 그것만 들여다봐서 걱정이지요. 소비도 너무 조장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이제는TV 좀 덜 보고, 책도 좀 보고 했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조종되기가 쉬운 건가요. 이거 좋다고 사라고 하면 다들 사고 그러지 않나요. 뭘 하든 한쪽으로 쏠리기 쉽잖아요. 결코 건강한 게 아니지요.-선생님께서 이런 서원을 짓고, 학생들 문집도 내게 하는 것도 다 ‘교양시민 문화’를 위한 밑거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 게 독일에서는 그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누적된 거지요. 우리는 상대적으로 희박하지만 이제라도 해야지요.저는 젊은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만 하고 영어만 하지 말고, 일도 좀 하고 풀도 좀 뽑고 땀을 흘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기 오면 다들 일을 합니다. 얼마간 노동의 기쁨도 알고 땀의 맛도 알고 그래야 개인이 잘 서고 그래야 사회가 잘 될 것 같아요.각자 맡은 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보람을 느끼고, 또 남의 일도 도와주면 좋겠어요. 자꾸 남들 따라가려고 하고, 남을 누르려고 들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들은 불특정 다수이고 나는 혼자인데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요. 따라가려면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점점 스스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요.나 나름의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시간이 있어야지요. 지금도 저 어린 친구들이 와서 열심히 꽃도 심고 해요. 나중에 와서 내가 심고 키운 것이 자란 걸 보고 하면 기분 좋거든요.-“20대에 일찍부터 내가 하는 대로 살아보겠다, 그래도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책에 쓰셨더군요.남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별 잔 재주, 잔 계산 없이 살아도 잘 살아진다는 것을 내가 해 보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고집이었을 거예요.힘든 시절에도 그랬어요. ‘이 어둠이 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막 읽었어요. 다른 건 모르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니까. 거기서 뭔가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사실은 그 책을 쓴 사람들도 알고 보니 다들 숱한 고생 끝에 그 높이에 이르렀더군요. 그래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정말 다들 힘든 인생을 그렇게 감내하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볼 수 있었어요.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정말 얼마나 부자인가 싶었어요. 책을 쓴 사람과 그것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과 엄청난 유대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 힘든 것도 좀 의연하게 감당하게 되고.글을 읽을 줄 알아서, 그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 많은 좋은 사람들을 직간접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젊은날에 가졌던 약간의 불만 따위는 허황하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우뚝우뚝 서서 같이 가야 잘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삶에 자부심이 있어야 남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본업이 잘 안 되는데 딴 걸로 메우려고 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흔히 남을 도와준다면 자선사업이나 고아원 같은 거창한 일을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중에 떼돈 모아 희사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일상 생활 중에서 한 사람한테 말 한 마디라도 나쁘지 않게 하고 잘 대하는 것만 해도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범위 아닐까 싶어요.-시도 쓰셨지요? 독일어로 시가 터져나온 게 40세 전후라고 쓰셨던데.나오는 대로 쓸 뿐이지요. 예전에 문단에도 잠깐 나가본 적이 있는데 저는 안 되겠더군요. 굉장히 독보적인 재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문단 취향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시를 쓰면서 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명시를 써서 이름을 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저는 글 쓰는 시간은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글이란 장사하기 위해 눈물, 콧물 묻히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냥 수양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시집은 독일에서 나온 것도 있고 한국 것도 있고 한데, 처음에 모르는 출판사에서 조금 내다가 그 다음부터는 내지 않고 있어요. 관심 있는 제자들 주려고 묶어놓은 것들은 있어요.사실 책을 낼 때 출판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잘 다듬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창작 부분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인쇄소에 부탁해서 책을 내면서 일반용으로 출판하지 않은 예쁜 책들이 많아요.-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결국 궁극적인 것은 학문이든 시든 예술가든 마찬가지일 텐데, 시인도 바른 삶의 장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물론 시인은 섬세한 사람이고 여러가지 파행적인 실험을 시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또한 주변부의 상황 요인도 있겠지만 근본에서는 바른 삶에 대한 생각과 닿아있는 것 같아요.그런 심지가 없으면 어떻게 세상 만물에 애정이 생길 수 있겠어요. 바른 삶에 대한 뿌리가 없으면 그건 질투로 갈 수도 있고 질환으로 갈 수도 있지요.바른 삶에 대한 지향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만큼 유난스러워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좀 표현을 해보려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만큼의 자격은 안 되는 것 같고, 그냥 조금이라도 시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높은 산’ 비유를 자주 하는데, 올라갈 때 어느 길로 가느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산의 발치에서는 사람들도 바글바글하고 외롭지도 않고 좋지요. 중턱쯤 올라가면 고요하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정상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이 다 반갑습니다. 다들 나름의 고생을 하고 올라왔을 테니까 그런 거지요.학문이든 예술이든 사실 인류가 사랑 이상의 복음을 찾은 것은 없지 않나 싶어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반이 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전영애 교수의 2011년 강연집. 그는 모든 기록을 책(비매용)으로 남겨둔다.-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들이 많은데, 대중 강연도 하시나요?저도 가끔씩 강연 같은 데 불려갑니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성심껏 얘기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면 감사할 일이지요. 그분들이 사실 술 마시고 다른 것 할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어찌됐건 목적이 무엇이건 누군가가 그걸 듣겠다는 것은 너무 소중해서 성심껏 가서 얘기합니다. 요번에 귀국한 날 그냥 2시쯤 도착해서 6시반부터 10시까지 했어요.-어떤 자리였지요?경영인 역사포럼이라는 덴데 오래전 약속이라 도착하자마자 아예 강연 열리는 호텔에 방 빌려 2시간 누웠다가 강연하고 거기서 자고 내려왔어요.-강연 주제는?거기서 정해줬어요. 파우스트 읽는 법이라고.-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하하, 2시간짜리 강연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상세히 설명했어요. 원래 파우스트 이야기가 오래 전 기독교권의 권선징악을 담은 나쁜 설화에서 나온 거거든요. 욕심이 많아 영혼까지 판 나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괴테가 “멈춰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할 때까지 가는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 사이의 계약으로 바꿨어요. 그럼으로써 얼마나 큰 이야기의 폭이 생겨날 수 있었나 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육십 년 동안 걸려 쓴 거지요.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구절이에요. 그것 한 줄만 알아도 사실 파우스트 다 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걸 극단적으로 달리 번역하면 ‘인간은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은 결국 어딘가 갈 곳이 있는데, 즉 마음 속에 어떤 솟구침이 있는데, 그래서 바로 그 솟구침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뜻이지요. 지향점이 있기 때문에 헤맨다는 거지요.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요. 지금 내가 방황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내가 갈 곳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이 한 줄로 요약이 되는 걸 가지고 1만2111행이라는 정교함의 극치에 달하는 시를 만들었거든요.복숭아로 비유를 들자면 가운데 박힌 씨앗만 먹어도 되겠지만 굳이 그 숱한 이야기를 통해 시고 단 과육을 먹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스물한 시간짜리 파우스트 공연 장면을 보여드립니다.그 장시간 공연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딱 한 번 있었어요. 1년 하고 2개월 쉬고 4개월 또 했는데. 대단하죠. 그런 장면들을 보여드린 후에 이 단순한 권선징악의 설화를 어떻게 근대인의 드라마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지요. 말이 그렇지, 공연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보는 관람객도 대단하지 않아요?그리고 어떻게 그 압축적인 모순 어법, 즉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는 말이 얼마나 큰 뜻인가, 계속 실수하고 실패하는 그런 얘기들인데도 거의 3000년을 넘나드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작가가 60여 년에 걸쳐 썼다(물론 매일은 아니고 집중적으로 네 시기에 걸쳐 썼지만), 요즘 온갖 명품들 사려고 목을 매는데 기왕이면 정신적인 것도 명품을 읽으면 어떻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쁜 생활 중에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것을 찾는 것 같아요.저는 그런 분을 볼 때마다 일(노동)을 해보라고 해요. 요즘 사람들이 운동(헬스)의 중요성은 다들 인식해서 신경을 씁니다.하지만 돈을 주고 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게 아니고 어디서든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현대의 많은 문제가 노동과 유리되면서 발생하는 것 같아요.예전에는 농사를 지으면 씨를 뿌려서 그것이 나서 그 전모를 다 보고 내가 수확을 해서 기쁘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우선 일이라는 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줍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친구들이 계속 이곳을 돌보고 토마토 지주도 세워주고 풀도 뽑고는 너무들 좋아해요. 저 꼬마 친구도 여기 오면 이전에 자기가 심은 국화가 잘 자랐나 보곤 합니다.애들도 그냥 공부만 하라고 하지 말고, 어떤 일을 맡겨 보세요. 그 일 하나는 그 아이가 없으면 구멍이 나는 그런 일을 맡겨보세요.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얼마나 자부심이 생기는지 몰라요. ’나 없으면 우리 집이 안 되지’ 이런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직장에서도 자기가 존재할 자리가 있고 그 가치가 인정 받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노동이라는 게 꼭 곡괭이 들고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일이야말로 세상과 나를 붙여주는 것 같아요.“아, 똘똘이가 있으니까 쿠션도 의자도 다 똑바로 놓여 있구나” 하면서 서로 즐거워 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그 사회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거지요. 꼭 어디 가서 거창한 노력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예요. 물론 그런 것도 가면 좋지만, 그냥 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맡아서 하면 되는 거예요.-세상이 점점 자동화하고 인공지능 같은 것도 발달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 소외를 걱정하기도 합니다.사람은 점점 불필요해질 텐데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만 혈안인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해야겠지만, 어딘가에 자기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삶에 사람을 밀착시키는 것이거든요.릴케가 말하는 것 중에 ‘예술 사물(Kunst-Dingen)’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우리가 사물들을 너무 아무렇게나 휙휙 내버리고 살지는 않나 하는 거지요. 그럴 경우에는 결국 우리 존재도 다 그렇게 쓰레기처럼 되고 만다는 얘기입니다.많은 물건이 아니어도 볼펜 하나를 볼 때에도 ‘아, 이건 내가 예전에 이걸로 뭔가를 썼었지’ 혹은 ‘어떤 친구가 준 거지’ 혹은 창문 하나를 볼 때라도 ‘아 내가 저 창가에서 언젠가 어떤 좋은 생각을 했지’ 이렇게 추억을 묻히고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사물이 다시금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술 사물 개념입니다.꼭 무슨 값비싼 예술품이 아니어도, 우리가 물건 하나하나, 다른 무엇 하나라도 귀하게 바라보고 귀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 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백서원 뒷편 언덕 위 전망대에 놓아둔 돌판. 괴테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꼭 해야 되는 일이다 싶으면 힘에 넘치는 일이어도 하곤 한다. 늘 두렵다. 이것저것 하며 사는 걸 보고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힘들다. 힘든 정도가 아니고 가끔씩은 정말로 죽을 것 같다. 그러나 힘들어도 하면 한 가지 일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그 하나도 안 된다. 다음 일은 더더욱 안 되고. 몸이건 머리건 움질일 수 있는 한 움직인다 생각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야 더더욱 그러해야 하리라. 이제는 조금씩 손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간, 좀 더 전하고, 좀 더 나누며 살고 싶다.” (전영애, 2015년 5월 3일 메모 중에서)◆전영애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튀빙엔대학과 칼대학에서 수학했다. 1996년부터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다. 2008~201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겸임했다.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가 주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했다. 같은 해 서울대 교육자상을 받았다. 서울대에서 20여 년 동안 교양 과목으로 ‘독일 명작의 이해’를 강의했다. 수업을 통해 연을 맺은 제자들은 졸업 후에도 오마토(5월 마지막주 토요일)와 시마토(10월)란 모임으로 만난다.‘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 ‘괴테와 발라데 ‘서·동 시집 연구’(공저) ‘독일의 현대문학: 분단과 통일의 성찰’ 등 많은 연구서를 국내와 독일에서 펴냈다. 시집으로 ‘카프카, 나의 카프카’와 독일어로 쓴 ‘Regenbogen für Franz Kafka(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무지개)’가 있다. 번역서로 ‘괴테 시 전집’ ‘서-동 시집’ ‘데미안’ ‘나누어진 하늘’ ‘보리수의 밤’ 등 60여 권이 있다.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25/2015092503068.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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