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11-14
    ​​▲ 이동춘 사진작가가 경주에서 촬영한 사진 중 한 컷. 이하 사진은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이 작가가 촬영, 제공한 것이다.​​“자네, 거기 서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찍으시게.”처음엔 그곳에 딸린 전속 사진사를 보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2011년 초여름 경북 안동 선비수련원에 체험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풀 먹인 도포 차림의 어르신들이 ‘자네’ ‘자네’ 하면서 부르는 쪽을 보니, 렌즈통이 긴 카메라를 목에 맨 중년의 여성이 이러저리 앵글을 바꿔가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후줄근한 등산복 같은 차림을 한 행색이 아무리 봐도 공식 수행 사진사 같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현지에서 소개받기로 한 프리랜서 사진가였다. “이동춘입니다.” 눈이 렌즈만큼이나 크고 동그란 그는 나와 의례적인 수인사를 나눴다.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게 사실 전부였다. 나중에 보내온 사진들을 모니터에 불러내 보고서야 와-, 나도 모르는 새 입밖으로 짧은 탄성이 새나왔다. 기록 사진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예전에 잡지사 기자를 10년쯤 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전문 사진 작가라고 했던가.촬영 현장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일찌감치 사진과의 결혼을 선언했을 법한 독신녀 분위기가 물씬했지만, 알고 보니 50대 나이에 한 남편의 아내이자, 20대 딸 둘을 둔 엄마다.서울의 집은 뒤로 한 채 안동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그곳의 묵은 종가(宗家)를 촬영한다는 말을 들은 지가 언제인가 싶은데, 경주를 테마로 한 사진집을 냈다는 새 소식이 들려왔다. 다들 최신과 혁신을 말하고 첨단의 트렌드를 좇아 뛰어가는 요즘, 그는 왜 점점 뒤를 향해 걷는가. 서울 통의동 류가헌에서 사진전 ‘경주, 풍경과 사람들’을 열고 있는 그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경주 촬영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신 거죠?저 같은 사진가는 매년 특정 절기 때마다 이번엔 어디서 뭘 찍을까 생각합니다. 정월 대보름 같으면 보름달을 어디서 보면 좋을까 고민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이번엔 경주를 가게 된 거죠. 어차피 내려갈 거면 일찍 가서 일출도 보자, 그렇게 해서 찍기 시작했어요.-왜 하필 경주였지요?한동안 계속 안동에서 작업을 해왔어요. 10년이란 오랜 시간을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작업을 해왔는데, 다른 지역을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고 멀리 호남 쪽으로 가기에는 장소 헌팅이 미처 안 돼있었어요. 달 사진을 찍을 때는 성공률이 낮기 때문에 장소도 미리 물색을 해둬야 하거든요.그래서 가까운 경북 어디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동안 작업해온 게 조선 문화에 해당하는데, 그보다 앞선 시대가 통일 신라였으니까 근처 서라벌 경주로 한번 가보자, 이렇게 된 거죠.대보름 전날 밤에 출발해 경주에 도착해서는 먼저 일출을 찍으러 감포로 갔어요. 거기에 문무대왕릉이 있거든요. 정월 대보름이면 신명나는 굿판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구요.-정월 대보름달을 찍으러 갔다가 작업이 커진 거네요.네. 그때 문무왕릉을 보다 보니, 아, 그래도 저 분이 천 년 전에 묻힐 때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테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바다에 수장하면서까지 유지를 잇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텐데, 결국 후대에 신라도 망하고 다시 고려가 들어섰다가 또 망하고 조선도 들어섰다가 또 망하고 그랬구나...처연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는 문무왕의 꿈이랄까, 염원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을 사진에 담아보면 어떨까 싶었어요.아니나 다를까 그날 주변은 온갖 굿판이더군요. 수백 명쯤 모여들었을 거예요. 그런 굿이나 민속 관련 기록을 남기는 친구 사진가도 우연히 거기서 만났는데, 꼭 인도 바라나시랑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그 길로 더 남쪽으로 내려갔어요. 해안가를 끼고 내려가면서 굿을 더 봐야겠다면서.저는 예전부터 종가(宗家)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양동마을로 들어갔어요. 가보니 길놀이며 고사를 지내고 있더군요. 안동에서도 종가 촬영을 오래 했지만 여전히 찍을 게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결국 보름달은 어디에서 찍은 거죠?시내로 들어와서는 어디서 달을 찍을까 고심했어요. 월출 시각은 점점 다가오는데 어디서 무엇과 같이 찍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처음엔 쥐불놀이 장면을 생각했는데, 그냥 하천 주변에 불이 타는 장면보다는 기왕이면 초가집이나 기와집도 보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양동마을을 들어갔던 거예요.그런데 양동마을이 민속 마을이고 화재 위험이 있으면 안되니까 쥐불놀이는 하천변에서 한다는 거예요. 순간 마음이 바뀌었어요. 제가 구상했던 이미지가 아니었거든요. 그 대안으로 왕릉 위로 뜨는 보름달을 생각하고는 차를 몰고 돌아다녔어요.그때 문득 첨성대가 떠오르더군요. 옛날에 기상을 관측했던 곳이니 달과도 어울리겠다 싶었던 거죠. 곧바로 그리로 이동해서 찍었죠. 안타깝게도 날이 흐려서 기대했던 그림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았어요.-거기서 끝나지 않았나요?그날이 평일이었는데 찍고 나니 저녁 7, 8시쯤 됐어요. 시내가 일순간 썰렁해지더군요. 인적도 사라졌는데 왕릉에는 불이 들어와 있더군요. ‘저기 잠든 분들도 주무셔야 할 텐데’ 싶은 생각도 들고, 기분이 참 묘했어요.저기 누워있는 분들의 꿈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또 그런 생각을 혼자 해봤어요. 지금까지 종가를 찍는 작업을 해왔는데, 종가가 탄생하기 전의 변천 과정을 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혼자 머리 속으로 묻고 답하면서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녔어요.그때 눈에 들어온 왕릉이 그렇게나 커 보이더군요. 원래 계획은 그날 안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경주에서 자고 이른 새벽에 다시 나갔어요. 새벽 느낌은 어떨까? 싶었지요. 해도 뜨기 전이어서 칠흑 같이 깜깜했어요. 길에 드문드문 가로등만 있고, 그때는 왕릉을 밝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봉황대 쪽으로 갔어요. 저로서는 봉황대가 처음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봉분 위로 몇백 년 된 나무가 자라고 있는 거에요. 왜 이 나무들은 안 베어졌을까 생각하면서 찍고. 그 바로 앞에는 서봉총이라는 봉분이 있는데 도굴설이 무성한 곳이예요. 여기 누워있던 분은 도굴당할 때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또 찍고. 왕릉이 품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장면들을 담았어요.사실, 왕릉은 서울에도 많지요. 중학교 때도 소풍을 왕릉으로 많이 갔어요. 서오릉, 서삼릉... 하지만 왕릉에 대한 기억은 별다른 게 없어요. 경주 왕릉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강석경 선생님의 ‘능으로 가는 길’ 같은 책도 읽게 됐어요.-경주에는 얼마나 머무르신 거죠?그때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 일주일 있었어요. 감포에도 갔어요. 거기에 주상절리도 있으니까. 감포항도 5년만 있으면 개항 100년이 된다고 하더군요. 제물포항과 같은 시기에 개항이 됐지만 목적은 서로 달랐던 곳이지요.감포가 일찍 개항하게 된 것은 일제가 경주 유물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최단거리 항구였기 때문이래요. 일본의 어디를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포항이 열리고 수많은 유물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대요. 그런 슬픈 이야기도 있고 해서 여러 갈래로 찍어봤어요.그 뒤 서울로 돌아와 있는데, 3월이 되면서 파릇파릇 새순이 돋기 시작했어요. 왕릉도 누런 잔디가 파란색으로 바뀔 때잖아요. 그걸 찍고 싶더군요. 다시 내려갔어요. 보문단지에 벚꽃이 만개해있더군요. 그것도 열심히 찍으러 다녔어요.반월성은 궁궐터인데, 한쪽에서는 발굴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내가 문화재청장이라면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보전하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나야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니 이걸 열심히 찍어나 둬야겠다 싶었어요. 옛 토성의 흔적들과 사람들이 걸어 다닌 발자국들을 다 말이지요.경주박물관도 처음 갔는데, 비천상, 사천왕상 같은 유물들도 찍었어요. 다들 천 년이 넘은 것들인데, 앞으로도 천 년, 이천 년 보존을 잘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찍다 보니 경주 곳곳이 콘텐츠의 보고였어요.그렇게 석 달쯤 지나니 경주를 알 것 같은 거에요. 그걸 모아서 책으로 내고 싶었어요. 서울에 와서 수소문 끝에 출판기획자와 연결돼 책까지 내게 됐어요.-그렇게 충동적으로 작업하실 때는 비용 걱정은 안 하시나요?제가 거의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상대가 한국관광공사예요. 관광 관련 사진은 잘만 찍어 놓으면 그곳을 통해 여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거든요. 경주도 기록을 잘 남기면 차비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다행히 경주시와도 닿아서 일부 지원도 받았어요. 세계문화엑스포를 앞두고 있을 때여서 시가 VIP 선물용 화보집으로 기획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양장본에 포장박스까지 좀 고급으로 제작했어요. -사진 작업은 어느 시간대에 주로 하세요?제 경우에는 보통 알람을 오전 3시에다 맞춰요. 해가 뜨기 전에 촬영 장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알람이 울리면 곧장 잠자리에서 튀어나가요. 왜 그렇게 하느냐면 일어나서 꼼지락대다 보면 늦기 십상이거든요. 만약 2시 50분에 맞춰 놓으면 10분 여유가 있다고 꾸물대게 돼요. 그 시간에 양치하고 세수하고 물도 마시고 어쩌다 보면 10분이 아니라 20분, 30분 길어지지요.그래서 딱 3시에 맞춰 놓고 그 시간에는 무조건 일어나서 그대로 나가요. 아직 졸음이 쏟아질 때지만, 곧장 나가서 잠을 깨요. 씻지도 않아요. 어차피 그 시간에 볼 사람도 없으니까. 제 코란도 스포츠를 직접 몰고 가요. 촬영 장소에 도착해서는 그때부터 어디서 어떻게 찍을지 고민이 시작되죠.사진에 따라 특정 색감을 살리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시간을 잘 맞춰야 해요. 종종 사진을 찍고 난 후에 이 색이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남거든요. 그런 후회를 안 하려면 일찍 가서 살피는 게 나아요. 최고의 시간에 최고의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준비를 하는 거죠.-사진이 잘 나오는 시간은 보통 언제인가요?피사체에 따라 다르지만 제가 주로 찍으려는 사진들은 해 뜨기 한 30분 전쯤이 좋아요. 그때 하늘이 제가 원하는 색을 띄거든요. 해가 뜨고 나면 태양이 밝아서 그런 색이 안 나와요.-해 질 녘은요?그때는 해가 지고 10분, 20분 후쯤? 계절에 따라 달라요. 특히 지방에서는 조명이 거의 없어서 해가 지면 곧바로 칠흙 같은 밤이 돼버려요. 그럴 때 하늘은 오히려 열려 있어요. 사실은 그때부터 작업이 시작되지요. 같은 장소에서 시간대별로 여러 색이 나오도록 찍어요. 그러고 난 후에 골라요.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4시 반이나 5시부터 가 있어요. 아직 해가 밝을 때, 이 각도가 좋을지 저 각도가 좋을지 계속 찍어놔요. 처음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도 많아요. 해가 기울다 보면 예상했던 각도가 아닐 때가 왕왕 있거든요. 그럴 때는 재빨리 자리를 옮겨야 해요. 그냥 몇 발짝 옮기는 정도가 아니라 차로 10분, 20분 가야 할 때도 있어요.그래서 낯선 장소에 갔을 때는 4시, 5시부터 계속 살펴봐야 해요. 오늘 날씨는 어떨지, 해는 어디로 질지, 구름 상태는 어떨지, 바람 속도는 어떨지 혼자 고민을 하죠.-늘 날씨에 신경을 쓰시겠군요.요즘은 스마트폰 앱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실시간 지역 날씨가 다 나오니까. 수시로 봐요. 태풍 정보도 있고, 위성 영상도 볼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끼고 있죠. 원하는 날씨가 아닌 것 같으면 ‘오늘은 휴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날은 그 동안 찍은 사진들 확인하고 정리하고 그럽니다.-끝내 원하는 장면이나 색감이 안 나오는 날도 있겠네요.사실, 놓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일주일, 심지어 몇 달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잠은 언제 자나요?아침에 나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들어오게 되면 오전 9시 정도 되거든요. 그때쯤이면 식당들도 문을 엽니다. 아침밥을 먹고 들어오죠. 그러고는 숙소에서 자요.-밤낮이 바뀌는 거군요.네, 낮에 자요. 한 서너 시 정도 되면 다시 나가죠. 오후 작업 하고는 들어와서 9시나 10시쯤에 잠자리에 듭니다. 또 3시 되면 나가고.-이게 그 첨성대 사진인가 보군요?그믐날 찍은 게예요. 첨성대 앞에 가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본래 기상관측을 했는지 천문관측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을 보면 동양 최초로 천문관측을 위해 지은 석조 건물이라고 나오거든요. 그래서 함께 별을 찍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시 불빛이 너무 밝은 거예요. 결국 별 대신 달로 표현을 했어요.해 뜨기 2시간 전에 그믐달이 뜨거든요. 그 시간에 맞춘 거에요. 하지만 봄이다 보니 황사도 끼고 날씨도 뿌옇고 하니까 안 맞는 거예요. 그 뒤로 그믐날만 되면 첨성대에 가 있었어요.그렇게 한 넉 달 동안 그믐날은 첨성대에서 보냈던 것 같아요. 그냥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어렵게 찍은 사진이에요. 그래서 제일 애착이 가는 사진이기도 해요.-이 기둥 위로 굴뚝 연기 같은 구름이 뜬 사진은 뭐죠?황룡사 터에 갔을 때 당간지주 위쪽 하늘에 구름이 모여든 장면이예요. 마치 황룡사 터 위로 황룡이 날아드는 형상이지요. 저것도 어렵사리 잡은 컷이에요. 저 용 모양의 구름은 30초도 안 돼서 다시 흩어졌어요. 이번 사진집 ‘풍경’ 편 표지로 실었어요.-경주는 작업이 끝난 건가요?엑스포에 맞춰 책을 서둘러 내느라 일단락짓긴 했는데, 아직 찍을 게 남았어요. 명색이 한 도시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라면 사계절 모습이 다 들어가야 하는데 모자란 부분이 좀 있었어요. 올 겨울도 찍을 생각이고, 다른 계절도 더 나은 장면을 위해서는 내년에 다시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계속 부족한 부분들이 보이고, 알면 알수록 재미도 있거든요-경주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매력적이던가요?가령, 이번에 6부촌 양산제 제사를 들어가서 본 적이 있어요. 기록을 보면 기원전 57년에 사로국의 6촌장들이 모여 나라를 건국했다고 나오거든요. 기원전 57년이면 2000년이 넘은 거잖아요. 아직도 6부촌 촌장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더군요. 제례 방식은 조선 시대 유교식이었지만.기왕이면 신라 시대 복식으로 제를 지내면 더 좋았겠다 싶었지만, 조선 관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데 안동의 종가하고는 또 다른 거에요. 그것도 기록으로 남긴다는 마음에서 열심히 찍었어요.-제례에 관심이 많으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누가 그러더군요. “자네는 제사 전공이야”라고요. 하지만 사실 저는 ‘예수쟁이’거든요. 그러니까 제사 자체에 특별히 관심이 많아서라기보다 그것이 소중한 우리 문화 유산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예요.그것들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거나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유교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 문화이기 때문에 저라도 기록을 하려는 거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예배나 제사나 그 중심의 마음은 같다고 생각해요.-혹시 경상도 지역과 연고나 사연이 있나요?저는 고향이 서울이에요. 아버지는 서울시청 공무원이셨는데 이북에서 월남하셨어요. 북청에서요. 사람들이 말하는 북청 물장수, 그 함경남도 북청요. 아버지는 눈 감으실 때가지 생전에 두고 오신 이북의 가족을 굉장히 그리워하셨어요.제가 초중고 다닐 때 새 학기가 되면 항상 사회과부도 책을 가져 오래요. 그러고는 지도를 펴고서는 고향 땅을 찾아보시곤 하셨어요. 늘 “죽기 전에 한 번 가봐야 할 텐데” 하셨어요. 남북이산가족 프로 같은 것 할 때는 잠을 거의 못 주무셨어요. 그렇게 힘들어 하셨어요.-혼자 월남하셨던가요?고모하고 단 둘이 월남하셨어요. 이북에 있을 때 아버지(저의 할아버지)께서 사진관을 하셨대요. 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 이야기만 하면 울컥해서 제대로 말씀을 못하실 정도였어요. 가끔 명절 같은 때 식구들이 모이면 이야기를 하셨어요.옛날에 북한 고향에 살 때는 씨족마을이어서 많은 일가 친척들이 마을을 이뤄 살았다고 해요. 딱히 몇 촌이라고 할 건 없지만 어느 집을 가도 다 이웃이고 가족이었다고 하셨어요. 겨울에 밤참으로 남의 집 항아리에서 김치 서리하던 얘기도 하시곤 했어요. 하지만 저는 서울에 살면서 그런 분위기가 감이 안 왔거든요.아버지는 그러시다 1987년에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어요. 63세 나이에. 집에서 간호중일 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어요. 우리 집이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100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느날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만 신고 산에 올라가시는 거예요. 어디 가시냐고 했더니 집에 간데요. 이북에 있는 집. 여기는 가짜 집이라면서.-아버지가 생전에 그리워했던 가족의 원형 같은 것을 안동 종가에서 찾으신 건가요?아버지가 그렇게나 찾았던 집이 어떤 것인지 저는 늘 궁금했어요. 나중에 안동에 가서 한옥과 종가를 찍으면서 뒤늦게 알게 됐어요. 명절이나 제사 지낼 때 굉장히 많은 가족들이 모이잖아요. 아버지가 찾고 싶어했던 게 이런 가족 모습이었겠다 싶었어요.-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선생님은 몇 살이었죠?스물일곱이었어요. 그때까지 결혼도 안 했어요. 우리 집이 딸만 여섯인데 맏딸로 불효를 했죠. 저희 제일 가까운 친척이 12촌인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어르신들한테 2박 3일 동안 혼났어요.-사진은 언제 시작하신 거죠?고등학교 때부터예요. 집에 독일제 카메라가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사진을 했으니까. 옛날 집에 암실도 있어서 사진도 뽑았어요. 아버지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저희를 많이 찍어주셨어요.저도 덩달아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 카메라로 많이 찍었어요. 국민학교 때 소풍 가면 엄마가 찍어주는 사진보다 제가 찍은 게 더 잘 나왔어요.(웃음)지금 디지털 세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흔히 저지르는 사고가 필름을 그냥 쭉 뽑아버린다든지, 카메라 뚜껑을 열어 본다든지 하는 거잖아요. 저는 일찌감치 다 겪어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어요.그만큼 사진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필름 값도 비싸고 사진 뽑는 것도 비쌌잖아요. 그래서 부모님은 저한테 “사진 하지 마라, 돈 많이 든다”고 말리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결국 사진가가 되셨네요.운명이었던지, 이화여고에 입학했는데 거기 사진반이 있는 거에요. 거기 가입하면서 인생이 결정됐어요. 이제 사진을 찍는 게 ‘합법’이 된 거에요. 그전에는 사진을 찍을 때도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람만 찍었어요. 하지만 사진반 들어간 뒤로는 사물을 찍기 시작한 거죠.어느 날 그림자를 찍었어요. 벤치에 친구들이 앉아 있는데 석양에 비쳐 길게 드리워진 모습을 뒤에서 찍었어요. 그림자를 크게 부각시켜서요. 사진반 지도 선생님이 그걸 보고 칭찬을 해주신 거예요.“너는 다른 애들과 시각이 다르구나. 어떻게 그림자를 찍을 생각을 했니. 네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게 평을 멋지게 써주신 거예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그때부터 공부는 접고 쉬는 시간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찍어댔어요.-그게 몇 학년 때죠?고 1 때 입학하자마자였어요. 그러니 수업 외 시간에 더 관심이 많았죠. 가을 체육대회를 하는데 사진반 학생들이 흩어져서 대회 스케치 사진을 찍었어요. 그걸 가지고 문학의 밤이니 뭐니 사진전도 하고 시화전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찍은 사진이 학교 벽에 떡 걸려 있는 거예요.전시회가 끝난 후 학교 행정 선생님이 제 사진을 소장가려고 하니 얼마 주면 되겠니, 하고 물으셨어요. 순간적으로 액자 값이랑 들어간 비용을 떠올리고는 “5천원요” 했어요. 그랬더니 “사진은 그렇게 받는 게 아니야” 하시면서 2만5천원 정도를 주셨던 것 같아요.그때 ‘사진을 직업으로 삼아도 되는 거구나’ 싶었어요. 그 뒤 대학도 사진과를 갔고 쭉 사진을 하게 됐어요.-일찌감치 외길을 가신 편이네요?저희 아버지가 고모와 월남할 때, 할아버지가 “너는 남자니까 어디 가서 동냥짓이라도 해서 먹고살 수 있지만 네 동생은 여자니까 공부를 시켜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아버지는 원래 의대를 가고 싶었는데 야간대학에 들어가고 고모를 의대에 보냈대요. 결국 고모는 의사가 됐어요.아버지는 의사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지 저한테 의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사진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의대 갈 성적이 안 되는 거에요. 이미 고 1 때 부모님 뜻과는 길이 엇갈린 거지요.부모님은 의대 안 가면 등록금도 안 준다, 그때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한의사였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여유가 있었어요. 저는 외할아버지가 재벌인 줄 알았어요. 원래 외할아버지가 손녀한테는 ‘봉’이잖아요. 어느 날 할아버지를 찾아가서는 “긴히 상의 들릴 게 있습니다” 그러고는, 대학 들어가면 열심히 하겠다는 각서도 쓰고 결국 사진과를 들어갔어요.입학하면 먼저 광고 사진을 할지 다큐 사진을 할지를 결정해요. 저는 사진이라면 다큐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졸업 후에는 광고 스튜디오에 들어갔어요. 다큐를 하려면 사진을 더 잘 찍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배운 걸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광고 스튜디오에 가서 더 배울 생각이었어요.그때 들어간 광고 스튜디오에서 당시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의 하청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디자인하우스가 월간 ‘디자인’에 이어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을 창간할 때 대표님이 저보고 일을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월간지로 가게 됐어요. 그때는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했어요.하지만 거기서 일하면서 결혼도 하고 애들도 낳은 후에는 호흡이 긴 다큐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월간지 일만 해도 그저 단답형으로 끝이 나거든요. 그러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회사를 그만뒀는데, 집에서 놀려고 하니 정신병자가 될 것 같은 거에요.잠깐 베이비 스튜디오도 해봤어요. 하지만 IMF가 터지는 바람에 곧바로 말아먹고, 다시 ‘행복이 가득한 집’ 프리랜서로 일을 했어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기내 잡지, 기업 사보 사진 일도 했구요.그러다가 운 좋게 철도청 용역 일을 맡게 됐어요. KTX 개통을 앞두고 홍보 관련 일이었는데 1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였어요.-그때 KTX 사진이 다 선생님 작품이었나요?당시에 다른 기자 선배 한 분이랑 둘이서 찍었어요. 요즘은 홈페이지를 안 들어가봐서 모르겠지만, 처음 홈페이지 열고 올린 자료 사진들은 다 우리가 찍은 거였죠.하지만 KTX도 완공이 되고 얼마 후 철도청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진짜 백수가 돼버린 거예요. 이젠 뭘 할까 고민하다가, 어렸을 때 살았던 한옥을 머릿속에 그려봤어요. 명절 때가 되면 외갓집에 삼촌, 이모들이랑 한 방에서 북적북적대면서 살던 그런 집을 찍어야겠다 싶더군요.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경상도를 무척 싫어했어요. 간혹 취재 갔을 때 그 지방 어르신들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관향(=본관)을 어디 쓰는가” 이런 것들인데 굉장히 부담스러웠거든요. 방에라도 들어가면 맞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하고. 그런 게 너무 불편했어요.‘행복이 가득한 집’ 사진을 찍을 때 한옥들을 연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찍었던 집들을 다시 돌아가면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찍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명원문화재단의 예천지부장님이 “진짜배기를 보려면 안동을 들어와야 돼” 그러시는 거예요.그래서 그분을 따라 안동까지 간 거에요. 거기서 비로소 임란 이전에 지어진 ‘진짜’ 한옥들을 보게 된 거죠. 제가 월간지에 연재했던 한옥만 해도 가깝게는 서울 북촌의 100년 내외 한옥들, 고궁의 한옥들이었거든요. 전라도 쪽 것도 100년, 200년 된 것들이었어요.그러다가 이곳 한옥들을 보니까, 막 심장이 벌렁거리는 거에요. 이거구나 싶더군요. 예천지부장님이 안동문화원장님을 소개시켜줬어요. 광산 김씨 예안파 종손이라고 하셨는데 그 집을 간 거에요.그 집에 후조당(後彫堂)이라는 집이 있는데, 그 집이 450년 이상 된, 명종 때 지어진 한옥인 거에요. 그 전까지 제가 봐온 것들과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어요. 마치 인쇄된 그림만 보다가 원화를 본 기분이었어요. 첫눈에 반해서, 저걸 찍어야겠다 싶었어요.하지만 찍긴 찍어야겠는데, 오랜 한옥인 데다,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문이 다 닫혀 있잖아요. 저는 문을 활짝 연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 며칠을 머물면서 주인하고 친해진 다음에는 문 한번 열어 봅시다, 이럽시다 저럽시다 설득을 했어요. 그 집에만 1년을 넘게 공을 들였을 거예요.-어떻게 1년을 그럴 수가 있죠?그 집에 살았다는 건 아니고 그 집에 집중적으로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이에요. 그 마을이 ‘군자리(君子里)’라고 해서 5명의 군자가 살았다고 하는데, 사위까지 해서 ‘칠군자리’라고도 하지요. 40년 전 안동댐을 만들 때 수몰을 피해 이건(移建)된 한옥들이 10채가 넘어요.그런데 집들이 다 달라요. 후조당, 탁청정(濯淸亭), 계암정(溪巖亭), 이런 정자들을 하나씩 돌아다니면서 이 모습 저 모습 보다 보니까 1년 넘도록 그 마을에 머물게 된 거죠. 어떤 때는 1박2일, 2박3일 길게는 일주일, 열흘 머물면서 다른 동네는 안가고 그 곳만 찍고 있었어요.-그때는 사진집을 낼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있었다는 말인가요?네. 무작정. 그때는 철도청 일을 끝낸 후였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좀 있었어요. 그 집만 1년 가까이 찍다가 제례도 보게 된 거예요. 어느 날 어르신들이 도포를 입고 나타난 거에요.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이 제삿날 아이가(아닌가)” 그래요. 드라마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그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그 옷에서 묻어나는 연륜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헉-, 했어요. 저것도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 어른들 얼굴 사진만 하나씩 찍어도 드라마 이상이겠다 싶었어요. 허락을 받으려고 문화원장님께 말씀 드렸더니 “안 돼, 자네는 여자라서 사당 안에는 못 들어오네” 그래요. 결국 그날은 못 찍었어요.그런데 1년 후에 또 나타난 거예요.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찍어야겠다 싶어서, 다시 원장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문을 닫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래요.한 시간 동안 문밖에서 마음을 졸이고 앉아 있는데, 안에서 으흠 하고 기침소리가 나더니, “자네, 밖에 있는가?” 그래요. 목소리도 낮춰서 “저, 밖에 있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문을 열고 들어오시게” 해요. 들어갔어요.어르신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도포 입고 갓 쓰고 쫙 앉아 계신 거에요. 20-30명 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어요. 종손 어른께서 입을 여시는데, “저 친구가 저렇게 찍고 싶다고 하는데 찍어도 되겠는가?” 하고는 그분들한테 묻더군요. 아마 이미 다 숙의를 끝낸 후에, 제가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얘기하는 모양새를 취하신 거겠죠.그분들도 저를 다 알어요. 1년을 거기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제가 떡도 돌리고 별 짓을 다했거든요. 그렇게 허락을 받아서 한 집을 찍고 나니까, 또 다른 집이 궁금한 거예요. 그때서야 불천위(不遷位, 큰 공훈이 있어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향사(享祀, 제사와 같은 말)를 안 거예요.다시 문화원장님한테 부탁을 했어요. 어느 날 어느 집이 불천위향사인데 사진 찍으러 들어갈 수 있게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한 집, 한 집 들어가면서 야금야금 찍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도산서원도 병산서원도 들어가서 찍게 됐죠.-한옥에서 제례로 사진의 초점이 옮겨가신 거네요.그 다음이 선비정신이었어요. 안동에서 사진 작업을 하다 보니, 제사를 지내면서 이 어른은 어떤 분이었고, 저 어른은 어떤 분이었고, 그 삶이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이 종가에서 아직도 그분 제사를 지낸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또 서원에 들어가면 지금 배향하는 어른이 어떤 분이고 그 어른의 제자는 이랬고 저랬고… 듣다 보니 궁금해졌어요. 대체 어떤 분들이길래.-한옥에서 시작해서 제사 지내러 온 분들 외양에 매료됐다가 다시 고인의 인품에 빠져들었다는 얘긴가요. 그걸 전하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게 됐고?사명이라는 생각까지는 안 했고요. 저는 어디까지나 기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기록으로 남겨 놓으면, 누군가가 제대로 된 선비정신을 이야기할 때 그것에 대한 사진을 제공할 수는 있겠다 싶은 생각이예요. 사진 기록이 있으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그렇게 오랫동안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나요?틈틈이 회사 사보 일들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했어요. 관광공사 일도 했고요. 남편한테 긴급 지원을 받을 때도 있고.-종가나 제례 이야기하실 때 그 쪽 식견이 보통 아닌 것 같은데 공부를 따로 하셨나요?사진을 찍으면서 관련된 것들을 계속 보고 배웠죠. 최소한 사진 설명이라도 달려면 알아야 하니까.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지금은 그걸 알아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이제는 어르신들이 제사를 지내면 1박 2일 같이 잠을 잘 때도 있어요. 그냥 여기서 자, 그래서 한 이불 덮고 같이 자기도 해요.(웃음)-한 일가 식구처럼 된 거네요.그분들은 저를 여자로도 안 봐요. 연배 높으신 분은 “이놈아” 그래요. 저도 사당에 들어가서 제사 사진을 찍다가 공간이 잘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툭툭 치면서 “비켜봐” 이래요. 어떤 어른은 “에이, 찍지 마” 하면서 장난도 걸고, 어떤 어른은 자기를 찍으라고도 하시고 그래요.(웃음)-선비정신과 종가 사진전은 해외 순회도 했지요?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 헝가리 한국문화원, 불가리아 국립문화궁전에서 했어요. 작년 UC버클리, UCLA에서도 했고요. ‘선비 정신과 예를 간직한 집 종가’ 라는 제목이었어요.-안동 사진 작업은 얼마나 더 하실 거죠?사실 이 작업을 하면서 진짜 찾고 싶었던 것은 우리 문화 속의 진짜 선비 정신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어요. 흔히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토록 오래 안동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한 겁니다. 아직도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예절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요. 지금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예의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의와 예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저는 거기에 제가 찍은 사진을 제공해서 책이든 전시 형태든,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런 글을 써줄 필자를 찾고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 학식이 깊지는 않고, 지금부터 공부를 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저는 사진에 몰두할 뿐이죠.-사진이 뭐라고 생각하세요?우선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친구죠. 찰칵, 셔터를 누를 때 소리가 가장 좋아요.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지금도 싫지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그림을 카메라에 담았을 때,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죠.대학 때 선생님이 “오늘을 기록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당시 청계천에도 가서 찍고, 달동네에 가서도 찍으라고 하셨어요. 교수님은 “세상은 변한다. 사진만이 기억하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기록하라”고 하셨죠.그때는 귓등으로 흘려듣고 하나도 안 찍었어요. 지금은 매순간 그 말씀이 떠오르죠. 눈에 보이는 오늘을 기록하는 것이 제 삶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그 말씀 하신 분이 안장헌 교수님인데, 지금도 경주를 촬영하고 계신다고 든긴 했는데 졸업 후 한 번도 뵌 적은 없어요.-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 순간은 언제였나요?KTX가 개통해서 시속 300킬로미터로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를 찍을 때였는데, 어느 순간 딱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왔을 때였어요. 또 맨처음 안동에 들어가서 도포 입은 어르신들을 보고 반해서 어렵사리 사정 끝에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그리고 퇴계 종택의 15대 종손이 돌아가시고 오일장을 치르는 데 그댁에서 발인하면서 상여가 나갈 때였어요. 만장을 든 사람들 행렬 사진을 찍는데 수많은 깃발을 보면서, 아 이게 만장이구나 싶었어요. 그런 자리에서 그날 그 장면을 기록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좋아하는 국내외 사진가가 있나요?최민식 선생을 들고 싶어요. 그분도 돈이 안 되는 일에 매진해온 분이지요. 어떤 사업에 엮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해내고, 기록하고 싶은 것을 기록하는 사진가라고 생각해요. 저도 따라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어요.-남은 과제나 목표가 있나요?체력이 숙제예요. 요즘 계속 어깨가 아파서 치료를 받는데, 우선 몸이 안 아파야 작업을 할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일감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죠. 남편한테 손 안 벌리고 살아가는 게 목표예요.(웃음)사진 작업의 테마로는 전통에 관련된 것을 계속하고 싶어요. 이번에 경주를 했으니 다음으로 부여 백제 쪽을 보고 싶은데, 아직은 비용 문제 때문에 선뜻 가지는 못하고 있어요. 경주 작업으로 약간이라도 비용이 마련되면 다음에는 부여로 가보고 싶어요.-가족 관계를 물어봐도 될까요? 가정과 사진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회사원인 남편과 20대 딸이 둘 있어요. 큰 딸은 직장인인데 한국전통음식문화를 전공했어요. 요즘은 바느질에 빠져서 주말마다 일산까지 배우러 다녀요. 둘째는 광고가 전공인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면서 해외여행 여비 마련하느라 취직해서 저축 중이에요. 싼 비행기표 구하느라 인터넷 검색에 바빠요.(웃음)시어머니는 뭐든 제가 열심히 하는 게 좋다고 하세요. 하고 싶은 것 하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남편은 제가 밖에 있으니까 홀가분해서 좋다고 하다가도, 직접 운전도 해주기도 하고 그래요. 가족들은 저를 원망도 하고 지원도 하고 그러지요.(웃음)저는 사진 찍을 때만큼은 가족도 다 잊고 무념무상이 돼요. 이런 저를 보고 제 딸은 엄마한테도 가족이 있느냐고 물어보라고 해요.(웃음) 그래도 제가 사진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 있기 때문이에요. 가족이 없었다면 방랑자처럼 마냥 떠돌아다니기만 했을 거예요. 가족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또 다른 사진을 꿈꿀 수 있게 하지요.◆이동춘1961년생. 이화여고 재학중 사진반 활동을 통해 사진 세계에 눈을 떴다. 신구대 사진과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1987년부터 10년간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에디토리얼 포토그래퍼로 일하면서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 ‘월간 디자인’의 여행, 리빙, 푸드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 철도청 KTX 개통을 전후해 1년간 프로젝트 사진 작업을 맡아 했다.그 후 안동의 유서 깊은 종가 문화 사진을 촬영하면서 예(禮)와 선비정신을 비롯한 우리 전통 문화를 오늘의 시선으로 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개인전으로 ‘선비정신과 예를 간직한 집 종가’ 순회전을 미국,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등지에서 열었다. 책으로 ‘차와 더불어 삶’ ‘오래 묵은 오늘, 한옥’ ‘도산구곡 예던 길’ 등이 있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3/2015111303293.html​   
  • 2015-11-09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기원전 3세기 초였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의 분열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제국이 건설될 무렵이었다. 몽골 초원에서는 흉노(匈奴)라 불리는 유목 세력이 월지(月氏)를 물리치고 일취월장하고 있었다.진시황제(秦始皇帝, 재위 기원전 221년~210년)는 중국의 통일을 다지기 위해 흉노의 성장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흉노를 황허 북쪽으로 밀어올린 후 장성을 쌓았다. 이때 얻은 땅이 신진중(新秦中)이었다.하지만 진시황의 통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중원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틈을 탄 흉노는 다시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양관(둔황)에 있는 장건상 / 정재훈 교수 제공◆초원의 흉노가 중국을 굴복시키다중국에서는 그 뒤 한 고조(高祖, 재위: 기원전 247년~195년)가 다시 통일의 여세를 몰아 북벌에 나섰다. 흉노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한 고조는 흉노의 계략에 속아 백등산(白登山)에 포위됐다. 뇌물을 주고서야 가까스로 풀려나는 참담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더욱이 한 고조는 이후 흉노와 화친하는 조건으로 형제의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물자 등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러한 양국 관계는 그 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중국과 초원 세력 관계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때 흉노가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비결이 있었다. 이들은 초원 출신이었다. 불리한 생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은 유목이었다. 계절에 따른 이동을 통해 가축을 기르는 생산 양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했다.특히 초원에서 말을 길들여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초원은 말의 생육 조건에 맞았다. 그 결과 흉노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은 그 뒤로도 정주 농경 세계와 때로는 대등하게, 심지어 정복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몽골 초원의 여름 / 정재훈 교수 제공반면, 농경 민족은 정주를 택했다. 이들은 말타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수레에 연결해 교통이나 군사용으로 사용했다.초원의 유목민들은 말을 잘 길들여 직접 올라탈 수 있었다. 말에 올라타 활을 쏘는 기술을 통해 기동력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기마궁사(騎馬弓士)’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유목민들은 훗날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군사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흉노가 한나라에 대해 우위를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은 많은 물자를 얻어냈고 이것을 다시 동서로 연결된 통상로를 통해 유통시킴으로써 보다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즉, 유목국가는 단순히 초원의 유목이라는 경제 기반만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한 곳(地大物博)’인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얻어내 이것을 오아시스 주민을 부려 서쪽으로 유통시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을 기반으로 했던 것이다.특히, 흉노는 한조에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많은 물자를 손쉽게 확보한 후부터 유통마저 자신의 통제 하에서 두게 됨에 따라 교역은 더 활발해졌다. 이로써 ‘비단길’ 즉, ‘실크 로드’라 불리는 통상로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활성화의 계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길을 따라 중국에서 얻은 비단은 서쪽으로 오아시스 도시들과 인도, 그리고 파르티아(지금 이란)를 거쳐 멀리 로마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 흉노시대 카펫에 그려진 기마 전사 / 정재훈 교수 제공◆한 무제, 장건에게 서역행을 명하다한편, 수세에 있던 한나라에서는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56~87년)가 등극한 후 황제권 강화에 나섰다. 나아가 대외적으로도 자기 위상 제고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당시 최대 숙적인 흉노를 제압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이 무렵 한 무제는 흉노 포로로부터 “대월지의 왕이 흉노의 선우에게 죽임을 당해 그 두개골이 술잔이 되었고, 그 백성들은 서쪽으로 도망가 흉노를 원망하면서 함께 흉노를 공격할 나라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무제는 서쪽으로 이주한 대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때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장건(張騫)이었다.여기에는 흉노 협공을 위한 외교 전략도 담겨 있었지만, 그가 “흉노의 오른 팔을 잘라버린다”고 한 것처럼 유목 제국의 기반인 오아시스를 분리시켜 흉노를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도 숨어있었다.장건은 기원전 139년경 통역 감보(甘父)를 비롯한 백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하지만 월지에 곧바로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서(河西)를 지나다가 흉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곳에 10여 년이나 억류당했는데, 심지어 결혼까지 한 다음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그러다가 그는 끝내 탈출에 성공해 텐샨 산맥(天山 山脈)에 있는 거사국(車師國, 지금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짐사르)과 구자국(龜玆國, 지금의 쿠처)을 거쳐 현재 키르기즈스탄의 페르가나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는 다시 현지의 도움을 받아 현재 카자흐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강거(康居)를 거쳐 비로소 아무 다리아를 건너 월지의 본영까지 갈 수 있었다.하지만 당초 장건이 계획했던 월지와의 동맹은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월지 왕은 대하국(大夏國, 지금 타지키스탄)을 차지한 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흉노에 복수하려는 생각은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장건은 할 수 없이 그곳에 1년여를 더 머물다가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예전의 아픈 경험을 생각하고 흉노를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길을 바꿨다. 지금 칭하이 성(靑海省)에 살던 강(羌)의 지역을 경유해 귀국하려고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마침 흉노 내부에서 선우 사후 분란이 일어나면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드디어 기원전 126년 그는 장안(長安)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전한시대 흉노인을 밟고 있는 말의 석조각 / 정재훈 교수 제공장장 13년에 걸친 여정이었다. 고난의 길이었지만 소득은 적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여행을 통해 무제는 중국의 서방 즉, ‘서역(西域)’에 있던 로마로부터 파르티아, 대월지, 강거, 대하,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무제는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욕심에 다시 장건을 파견하려고 했다.장건은 첫 번째 여행에서 흉노의 포로로 고생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이전 여행길에서 옛날 촉(지금 쓰촨 성)의 물품이 대하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린 그는 서남이(西南夷) 거주 지역(지금 중국 윈난 성(雲南省)과 미안먀 등지)을 지나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를 경유하는 노선을 선택했다.하지만 두 번째 여행은 도중에 인도에 이르지도 못한 채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다. 본국으로 귀환한 장건은 이번에는 자신의 귀국 전부터 본격화된 흉노 원정에 참여했다. 교위(校尉)라는 직책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갔다. 장건은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불편 없이 지냈다”라고 한 한서의 기록처럼, 그는 흉노 밑의 오랜 포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군사를 잘 운영했다. 그 결과 박망후(博望候)에 책봉될 수 있었다. 그 뒤에 출병 기일을 어긴 죄로 서인으로 전락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무제의 부름을 받고 흉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됐다. 그는 흉노의 서쪽에 있는 오손국의 왕 곤막(昆莫)의 탄생 설화를 얘기하면서 그와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무제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장건은 명을 받아 다시 세 번째 서역 여행을 떠났다. 그는 기원전 119년 오손에 도착해 오손 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흉노 협공 동맹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오손에서는 내부 권력 다툼이 심했고 흉노에 대한 두려움도 워낙 커 한나라와의 동맹을 주저했다.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장건은 자신의 부사들을 서쪽의 여러 나라로 파견하고 자신은 기원전 115년 장안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는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대행령(大行令)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숨을 거뒀다. ▲ 막고 굴 322굴에 남아 있는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 벽화 / 정재훈 교수 제공◆사마천 “장건은 구멍을 뚫었다”서방 여행의 선구자였던 장건의 여정은 파란만장했다. 그와 거의 동시대인인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장건을 두고 “구멍을 뚫었다(鑿空)”고 기록했다. 그처럼 자신과 그의 부하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정보를 통해 그전까지 닫혀있던 서방 세계와의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는 대단히 높게 평가된다.그의 여행 이후 한나라는 서방의 여러 나라와 본격적인 교류를 ‘공식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과거 간헐적이고 비밀스럽게 이뤄진 사적 차원의 동서 교류는 공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물론 장건 이전에도 중국은 서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상호 교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는 다양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장건의 서역 여행 역시 가능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그럼에도 장건의 여행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한나라가 그때부터야 본격적으로 자신이 획득한 서방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 대한 본격 경영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그동안 흉노로 인해 막혀 있어 교류가 불가능했거나, 너무 멀어서 교류가 없었던 나라의 공식 사절을 받는 등 이들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 노력할 수 있었다.▲ ‘한서'의 장건열전 / 정재훈 교수 제공일부 논자들은 장건의 서역 여행을 두고 한무제의 장수욕심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흉노 정책과 더불어 자신의 불노장생 욕심이 작용했고, “서북으로부터 신령스러운 말이 온다”는 점괘에 혹해 장건을 서쪽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다.이것은 이후 무제가 이광리(李廣利)를 시켜 대완에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설명도 있다. 또한 하신(河神)의 소재지를 탐색하기 위한 목적과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어찌됐건 장건의 여행이 황제의 명령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황제 개인의 취향이 반영됐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무제 시기의 흉노 정책은 단순히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동으로는 조선을 무너뜨린 다음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고, 서로는 서남이와 월남(越南)에 대한 원정을 벌이는 등 전방위적인 성격을 갖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 한혈마(천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답비연(馬踏飛燕) / 정재훈 교수 제공◆흉노와 장건은 동서교역의 기폭제였다게다가 장건의 여행 이후 서방과의 교류는 과거와 달리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흉노 견제와 관련해 그가 전략적으로 제안했던 오손과의 동맹이 실현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흉노는 서쪽과 단절되면서 내분에 빠져들었다.급기야 군주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로 피신했다가 세력을 회복하는 등 일련의 사태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한나라가 서방과의 교통을 통해 흉노를 약화시키려 했던 전략이 맞아떨어졌음을 보여준다.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견제 정책 성공의 효과는 한나라의 위상을 확고히 해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양 문물과 문화가 유입됐다. 보석류,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과 같은 새로운 물자만이 아니라 서커스 같은 교예단이 들어와 한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반대로 서방에서도 중국 특산물인 비단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일어나 이것을 들여오려는 교통로가 아시아 내륙을 따라 활성화되었다. 이때 확립된 동서 교통로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따라서 실크로드는 단순한 물자 교역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 여러 문명권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로 역사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한시대 서커스 공연 모습을 보여주는 용 / 정재훈 교수 제공여기에는 장건의 여행이 기폭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로 인해 사람들은 서쪽 여행을 떠난 최초의 인물로 그를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서 교역로의 활성화 과정에서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장건의 여행 이전에 초원을 통일하고 오아시스를 지배하며 융성했던 흉노라는 유목제국이 400 여년이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흉노는 중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동서 교통로를 장악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장악함으로써 크게 성장했고, 이런 움직임이 궁극에는 동서 교류의 활성화를 촉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흉노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가 직접 나서게 됐고, 그 결과 동서 교통로는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얻어 다방면에 걸친 문화 교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그 뒤에도 흉노를 이은 여러 유목제국의 등장과 이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계속된 노력으로 반복되었다.이것은 동서 문명권을 잇는 ‘실크로드’의 발전사에 바로 전근대 세계사를 이끈 두 수레바퀴인 정주 농경 세계와 유목 세계의 지속적인 대립 갈등의 역사가 내재돼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정재훈 (丁載勳)현재 경상대 사학과 교수이면서 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 및 중앙아시아사(고대 투르크 유목민족사)가 전공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연구소 방문학자를 지냈다.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있다. 공저로 ‘몽골의 역사와 문화’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과 꿈’ 등이 있다.<이전 기사>[新 실크로드 열전] 기획을 시작하며: 유라시아로 시간 여행[新 실크로드 열전] ① 5천년 전 실크로드의 주인공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06/2015110602972.html​  
  • 2015-11-09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된다. [편집자주] ◆실크로드는 선이 아닌 점들이었다실크로드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신강성과 그 안에 있는 사막을 이해하면 편하다. 실크로드는 신강성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 남로와 북로로 나뉜다.실크로드 북로의 북쪽에는 다시 준가르 초원과 칼라마이 사막이 있다. 그 위로는 유라시아 초원 길이 지나간다. 한마디로 실크로드는 사막을 뚫고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며 시작된 것이다.특히 실크로드 남로는 지금도 사막폭풍이 제대로 몰아치면 며칠 동안 고립되는 것은 기본이다. 당연히 이곳에 대한 유적 조사도 쉽지 않다. 현지 학자들조차 여간 조심하지 않는 코스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빙하기가 끝난 후 사방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가 되어서도 이 지역은 여전히 텅빈 황무지였다. 이 거친 사막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실크로드의 미라를 관람하는 위구르족 여성 /강인욱이 황량한 실크로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새롭게 개발된 목축경제 덕분이었다. 농사는 지을 수 없는 초원지대라도, 풀을 먹는 동물을 키울 수 있다면 사람은 살 수 있었다.다행히 당시 이곳 기후는 지금보다 온화했다. 그 덕에 오아시스와 목초지가 군데군데 발달하면서 실크로드에도 하나둘 목축민들의 터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실크로드’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번듯한 ‘길(road)’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실크로드는 선이 아닌 점들이었다. 사막과 초원 군데군데에 세운 거점들이 기원이었다. 그러니까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에 들어와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서히 생겨난 실크로드 위의 기존 거점들이 교역로로 이어진 것뿐이다.누란, 크로이나, 투르판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들은 바로 수천 년 전 사막에 터잡았던 생활력 좋은 유목민들의 노력이 그 기원이었다.◆‘죽음의 사막 속 진주’ 로프노르 로프노르(타클라마칸 사막의 유적지)의 최초 유목민은 외형으로는 유럽인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기마와 목축 경제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고고학 용어로는 ‘야마 문화’라고 한다. 야마는 러시아어로 ‘구덩이’라는 뜻으로 이 유목민들이 만든 구덩이 무덤을 지칭했다.▲ 로프노르(샤오허) 묘지 전경_/문물(文物) 2007년 10호 수록이 첫 실크로드인들이 남긴 대표적인 무덤 유적이 샤오허(小河) 묘지다. 아마 실크로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도 이 이름은 생소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유적은 신(新)중국 이전에는 ‘로프노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20세기 헝가리 출신 영국 탐험가인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은 이 지역에서 떠도는 도시의 소문을 들고 탐사에 나섰다가 안내원의 잘못으로 물 부족에 시달린 나머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이 유적은 신중국(1949년에 생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와서 샤오허로 개명되었고, 최근까지도 조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당시 목축민들은 나무로 만든 배로 관을 짜서 공동묘지 삼았다. 그것이 지금껏 유물로 전해지는 선관장이다.마치 저승 세계를 헤엄쳐 가듯이 가운데 큰 나무를 중심으로 배로 만든 관들이 배치돼 있고, 그 안에서는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미라들이 발견되었다. 아마 그들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 강을 건너 갔다고 믿었던 것 같다.▲ 로프노르(샤오허) 무덤에서 출토된 어린이 미라 /강인욱안타깝게도 스타인의 발굴 이후 이 유적은 숱한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보물찾기에 나선 사람들에 의해 미라가 사방에 팽개쳐지는 야만적 행위가 자행됐다. 다행히 그 뒤로 전면 재조사가 이뤄졌고, 이곳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많은 정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샤오허 유적에서는 미라 외에도 의복과 약초들도 고스란히 발견됐다. 이를 통해 결코 녹록지 않았을 사막 생활의 어려움을 견딘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무덤 안에는 마약의 주재료로 알려진 마황이 많이 발견되었다.마황 속의 에페드린 성분은 환각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지만, 진해거담 치료에 효과가 아주 좋아 전통적으로 감기약으로 애용돼왔다.얼마 전까지도 환각 작용이 일어나는 감기약 때문에 종종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바로 감기약 속의 에페드린 때문이다. 하지만 5000년전 실크로드 인들에게는 마황이야말로 모래바람 몰아치는 건조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마운 약제였을 것이다.샤오허 묘지를 만든 사람들은 글자를 남기지 않아서, 그들이 누구인지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한나라 시대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유럽인 계통의 토하르인이나 월지(月氏) 들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이 샤오허 묘지 사람들이 지난 5000년간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생활해온 유럽인 계통 사람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기원전 4세기 고깔모자 사람들▲ 신강성 치에모에서 출토된 고깔모자. 내몽고박물원 소장 /강인욱기원전 6세기 근동 지역에는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있었다. 대표적인 유적인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벽화에는 당시 왕에게 인사 온 주변국의 다양한 사절들이 묘사돼 있다. 이 중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단검을 허벅지에 찬 일련의 사람들도 보인다. 이들은 ‘사키’라 불렸다. 중국어로는 색인(塞人)이라고 했다.바로 기원전 8~3세기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에 넓게 번성했던 이란 계통 유목민들이었다. 유라시아 초원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와 함께 유목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고깔모자의 사키인들은 북쪽으로는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문화를 남겼고, 남쪽으로는 차마고도 지역까지 널리 흔적을 남겼다.최근에는 중국 서북부 감숙성의 마자위안(馬家塬)에서 고깔모자를 쓴 인물상이 화려한 사키문화의 황금유물, 마차, 유리병 등과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북방은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융적(戎狄)’이라 불린 유목민들이 발흥하던 시기였다. 감숙 마가원의 유적은 융적의 일파인 서융(西戎)의 자취다.이 유적에서 바로 사키인의 흔적이 나왔으니 장건의 서역 착공 훨씬 이전에 이미 실크로드의 사람들은 감숙 회랑을 건너 중국 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융적)로 부르던 사람들의 일부가 사키인들이었다.이 실크로드를 넘어온 이란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동물 장식으로 화려한 황금 장식을 만들었다. 동물 장식은 원래 스키타이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 널리 퍼졌다.▲ 감숙 마자위안에서 출토된 황금 장식 /강인욱그런데 스키타이계통의 문화권보다 더 남쪽인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던 사키족들의 동물 장식은 얼핏 보면 스키타이식 동물 장식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사키의 동물 장식은 뿔이나 부리가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괴수문이 특징이다.기원전 4세기 중국 북방에서도 이런 환상적인 괴수의 황금장식이 널리 유행했는데, 바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실크로드의 사키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온 길은 감숙 마가원 유적인 실크로드뿐만이 아니었다. 훨씬 남쪽의 차마고도로도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지금의 중국 사천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거쳐 인도 북부를 지나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도 있었다.티베트와 사천성 산악 지대에서는 전형적인 사키인들의 철제 거울, 동물 장식, 황금 장식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지금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 남쪽 산악 지역까지 사키 문화가 진출했던 것은 바로 중국과의 교역이 엄청난 이익을 냈기 때문이었다.장건이 목숨을 걸고 서역의 험한 길을 지나 대하국에 도착했을 때의 재미있는 일이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전해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장건이 중국인 최초로 서역에 진출한 감격을 누리며 저잣거리를 산책하다가 깜짝 놀랐다. 대하국의 시장에는 촉나라의 옷감과 중국 공(邛,사천성 서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대나무지팡이들이 버젓이 팔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장건이 알아보니 이 물건들은 인도(신독국)를 거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인도 북부에도 사키인들이 살고 있었다. (석가모니도 사키인의 후예다). 사키인의 자취는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거쳐 인도 북부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이어졌다.이러한 흔적은 운남성 대리시 근처의 석채산 문화의 청동기에도 잘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한 청동기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남방으로 퍼져나간 사카인의 모습. 운남성 석채산 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 중국국가박물관 전시 /강인욱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는 감숙회랑까지 이어진 고깔모자의 사키인들은 바로 2500년전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당시 이 이란계 사람들은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주역이면서 동서교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라시아 경제를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얼마 전 성룡 주연의 ‘드래곤 블레이드’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로마의 군부대가 실크로드를 건너와 중국인들과 갈등하며 정착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한 상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영화는 지금도 감숙성의 리첸(骊轩)이라는 마을에는 옛 로마 부대의 후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중국과 전쟁하다 포로가 된 로마 부대가 감숙성에 눌러앉게 됐다는 스토리는 제법 그럴듯하지만 근거는 희박한 가설에 불과하다.실크로드의 로마병사설이 등장한 것은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로마와 중국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사실 로마와 중국은 ‘실크로드’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 당시 나라 사이의 교류도 극히 단편적이었다. 양국 사이에 어떤 교역로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한마디로 실크로드의 주역은 중앙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도시를 세워 교역했던 사람들이지, 로마와 중국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중국과 로마를 실크로드의 중심에 둔 정착민들의 생각이 지금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실크로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험난한 여행일 것이다. 하지만 5000년도 넘게 이어진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 위를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그 위에 터전을 만들고 교역로를 개척한 사람들이다. 20세기에 다시 주목받는 실크로드의 열풍 이면에는 서양인 우월주의가 깔려있다.▲ 리첸 마을 주민 /바이두 검색수천 년 실크로드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를 봐도 그렇다. 대부분 서쪽에서 사람들이 왔고, 서양인 계통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혀있다. 처음 목축이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서쪽이고 유럽인종임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를 확대 해석하는 것은 20세기에 득세한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양인 중심주의의 발로일 뿐이다.아메리카 대륙만 해도 처음 발견하고 인간의 땅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3만 년 전 베링해를 건넌 시베리아의 맘모스 사냥꾼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미 대륙의 발견자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와 메이플라워호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한국의 실크로드 인식도 20세기 이후 우리를 지배해온 서양, 특히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크로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기껏해야 스벤 헤딘, 아우렐 스타인 등 100여년 전 서구 여행가들만 떠올린다.하지만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5000년 전 황량한 이 사막 지대를 개척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목축이라는 새로운 경제에 기마술이라는 신기술로 무장하고 사막 속에 자신들의 거점을 만들고 교류의 길을 이어갔다.따지고 보면 이태백도 키르기스탄 출신이고, 수많은 서역 출신의 사람들이 동아시아 역사 곳곳에 숨어있다. 그들을 굳이 동서양의 계통으로 가르는 것 자체가 실크로드에 대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요, 그 위를 지나간 여행자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바로 지난 5000년 동안 험난한 실크로드에서 정착해 도시를 만들어 거점을 만들었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실크로드의 주인이었던 것이다.◆강인욱현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인문대 연구원, 서울대박물관 특별연구원, 부경대 사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도쿄대, 베이징대, 스탠퍼드대 등에서 방문학자로 있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북방 지역 고고학이 전공이다. 주요 저서로 ‘유라시아 역사 기행’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고고학으로 본 옥저문화’ ‘춤추는 발해인’ 등이 있다.지난 기사 [新 실크로드 열전] 기획을 시작하며: 유라시아로 시간 여행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3/2015102301834.html  
  • 2015-11-09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된다. [편집자주] 유라시아대륙에서도 중앙부에 자리잡은 건조지대를 통칭해서 ‘중앙아시아’라고 한다. 이 지역이 요즈음 과거 어느 때보다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련이 붕괴한 지 사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개별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각축의 현장이다. 여기에 과거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와 이 지역에 대한 경제 진출을 강화하려는 중국,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움직임까지 교차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이 지역은 오늘날 국제적 차원의 정치, 경제적 중요성이 새삼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국내 또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3년 10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시한 바 있다. 한반도와 아시아, 유럽을 잇는 유라시아 대륙을 단일 경제권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신유라시아 건설 구상이다.이 지역을 두고 벌어지는 각국의 관심과 진출 경쟁을 두고 혹자는 ‘거대 게임(Great Game)의 재판(再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19세기말부터 이 지역을 둘러싸고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러시아와 벌인 경쟁 비슷한 양상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유라시아 대륙의 연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과거 동서 간의 교통로였으며 문명 교류의 장이었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에서도 확인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것을 ‘신실크로드 전략’이라고 불렀다.지난 8월 21일 경주에서 개막해 10월 18일까지 계속되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주제가 ‘실크로드 경주 2015 – 유라시아 문화 특급’이라는 사실은 우리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열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본래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였던 페르디난트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 ‘중국(China)’이라는 책에서 '비단길(Die Seidenstraße)'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이 용어가 단순한 지리적 명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제국주의의 진출이 본격화하면서부터였다. 이 길을 따라 유럽인들의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고대 유럽 문화가 멀리 동아시아까지 전파된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기원전 4세기 알렌산드로스 대왕(BC 356~323)의 동방 원정 이후 전파된 그리스의 조각이 불교와 만나 간다라 양식이 생긴 후, 이것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국까지 이어지면서 엄청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이것은 당시 유럽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관련 기사: [미니북]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또한 자신을 유럽 문명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재현하고자 했던 유럽 제국주의자를 본딴 일본으로서는 이것은 아시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중요한 이념적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결과 한동안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중앙아시아라는 독자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움직임을 정리하고 설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국과 유럽을 그저 매개하고 연결시켜준 교통로라는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실크로드에 대한 국내 인식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탐험가들이 보여준 ‘대탐험’의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차원에서만 실크로드를 이해해왔다.특히 여기에는 1980년대 초 일본 공영 NHK에서 제작한 20부작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큰 영향을 끼쳤다. 화면 한가득 그려진 사막과 오아시스, 그리고 초원과 험준한 설산을 타고 넘는 카라반(隊商)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강한 잔상으로 남았다.이런 이미지는 그 후에도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몽환적 이미지를 덮어쓴 체, 환상과 신비가 가득한 곳으로 한 번쯤 탐험을 해야 할 것 같은 미지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다.더욱이 이 미지의 땅이 사실은 우리와도 예전부터 문화적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증거가 확인되면서 마음 속의 동경은 더 심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 고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경주의 불교문화 유산이 간다라 미술의 동진(東進) 결과라는 의견이 제출됐다.그밖에,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찬란한 황금 문화와 대륙 초원 문화의 동질성, 한반도에서 파견된 사신의 모습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된 것, 그리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고구려의 후예로 알려진 고선지의 원정과 탈라스 전투 이야기 등은 우리와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육로와는 별도의 바닷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9세기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게 조명되었다. 실크로드에 대한 높아진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연구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차원에서의 해석에 국한될 경우에는 자칫 실크로드를 단순히 과거 문화 전달의 가교 정도로만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실크로드의 무대였던 중앙아시아는 초원과 오아시스라는 독특한 인문 지리적 배경을 토대로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이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단위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관련 기사: [미니북] 왜 우리는 유라시아를 알아야 하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 우리 역사와 직접 관계된 것에만 관심을 갖거나 아니면 유럽이나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접근해온 경향이 있다. 이제는 이를 극복하고 실크로드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전개 과정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평가를 토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이러한 접근은 자국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보편주의를 회복해 중앙아시아의 독자적인 문화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문화 현상을 동등하게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문화적으로 교감하고 수평적으로 교류하는 미래지향적 태도이기 때문이다.이런 태도는 세계인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실크로드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틀이자, 중앙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해 방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공감대를 이뤄 협력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본 기획은 이런 관점에서, 독자들이 비교적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인 실크로드의 역대 주요 여행가들을 재조명하려고 한다. 친숙한 소재라고는 하지만 이 내용 역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여행 목적만 하더라도 정치적 교섭부터 무력 정복,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상, 종교적인 선교와 구법, 그리고 20세기 제국주의자들의 탐험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뿐 아니다.이동 방식 역시 일시적 여행 혹은 이주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판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대였던 통로 역시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사막의 길만이 아니었다. 초원, 산악, 밀림, 그리고 바다 등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이런 다양한 내용들을 한번의 기획으로 다 포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새로운 접근을 위해 먼저 실크로드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편견을 불식시켜 나갈까 한다.이와 더불어 실크로드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을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보다 구체화시켜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관련이 깊은 인물은 물론 우리에게는 좀 낯설 수 있지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인물들을 통해 실크로드의 역할과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보려고 한다.일반 독자들도 이번 연재를 통해 실크로드가 단순한 호기심이나 관광여행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새 관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진정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도할 수 있는 인식의 기초가 되었으면 한다.본 연재에 참가하는 필진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 실크로드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전문 연구자들로 짜였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기초로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재훈 (丁載勳)현재 경상대 사학과 교수이면서 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 및 중앙아시아사(고대 투르크 유목민족사)를 전공했다. 2006년과 2013년 미국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있었다.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 공저서로 ‘몽골의 역사와 문화’ 등이 있고, 공역서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등이 있다.​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8/2015100802965.html​ 
  • 2015-11-01
    ​​▲ 세계 최대 출판 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 북페어가 10월 14~18일 열렸다. 4200여 개 행사가 약 28만명의 방문객을 맞았다. 디지털 시대 콘텐트 산업의 방향을 알리는 자리였다. 전시장 일부. /퍼블리 제공 매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큰 장이 선다. 국제 출판 박람회인 북 페어(Book Fair)다. 자타 공인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역사도 오래됐다. 시작은 구텐베르그가 활자 기술을 발명한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500년이 넘게 세계 출판인의 축제로 이어져 왔다.단지 오랜 역사가 오늘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변화의 물결을 놓치지 않고 쉴새없이 행사에 반영해온 결과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관련 업계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곳으로 향한다.올해 행사는 14일부터 닷새 간 이어졌다. 첫 사흘은 사업자, 남은 이틀은 일반 관람객을 위한 시간이다. 4200여개의 행사와 강연, 대담 같은 이벤트들이 28만명에 달하는 방문객을 맞았다. 작년보다 2.3%가 늘었다. 취재진도 600명 증가한 9900명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국내 콘텐츠 퍼블리싱 스타트업인 퍼블리(publy.co)가 현장 참관기를 보내왔다. 북페어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다섯 가지 테마로 소개한다. 퍼블리(박소령, 정보라)는 북페어 전반에 걸친 취재 프로젝트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 중이다. [편집자 주]① 영국 잡지 모노클 “종이 출판도 하기 나름"올해 행사의 모토는 ‘Global City of Ideas’. 행사장은 출판과 영화, 게임 등 콘텐츠 관련 비즈니스 관계자는 물론 IT/테크, 스타트업, 투자자, 미디어 관계자들로 붐볐다. 행사장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끓는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였다.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판의 영역이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각각의 부스와 발표자들의 발언 내용은 출판이 이미 오랜 경계를 한참 벗어나 있음을 보여줬다. 저마다 전통적인 구획을 넘어 콘텐츠/미디어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초반에 ‘소비자’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면 후반에는 ‘팬’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그것도 ‘골수(hardcore) 팬’ 에 기반한 콘텐츠 비즈니스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라고들 했다.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영국의 모노클이었다.모노클은 영국에서 인쇄돼 세계 여러 나라로 배송되는 종이 잡지를 내는 회사다. 하지만 잡지가 다가 아니다. 지금은 라디오, 서적 출판, 카페, 샵, 오프라인 컨퍼런스 사업까지 진출해 있는 종합 미디어 회사로 커졌다.얼마 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를 인수한 일본 닛케이 신문사도 작년 9월 30억원(지분 3%)을 투자한 ‘유망주’로 꼽힌다. A (Affairs), B (Business), C (Culture), D (Design), E (Edits) 다섯 가지를 앞세워 ‘인터넷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 콘텐츠들을 한 권의 종이 잡지에 담는다고 자랑한다.모노클은 타겟이 분명하다. 국적과 인종,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영어로 교육받고 영어로 사업하는 글로벌 고객이 대상이다. 콘텐츠를 외국어로 번역할 계획도 없다. 오로지 영어에만 기반한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철학이 뚜렷하다.모노클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부스를 차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냥 부스가 아니라 모노클 카페와 모노클 샵, 모노클 라디오까지 와있었다.모노클은 이곳에 와서도 돈을 벌었다. 다른 출판사들은 고객을 끌기 위해 커피, 와인, 샴페인, 맥주 같은 음식을 무료 서비스하는 데 반해 모노클은 다 유료였다. 심지어 좀 비싸기까지 했다. ‘모노클’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스몰 사이즈 커피가 약 4000원이었다. 그런데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모노클’이라는 브랜드를 소비한다는 느낌 때문 아닌가 싶었다.모노클의 편집장 타일러 브륄레(Tyler Brûlé)와 에디터 앤드류 턱(Andrew Tuck)은 비즈니스 클럽 대담장에서도 자사 상품을 적절히 홍보하는 ‘감각’을 과시했다. 한 손에는 모노클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모노클의 책을 들고 와서는 테이블에 보란 듯이 놓은 후에 말문을 열었다.모노클의 창간은 2007년. 시기는 불운했다. 바로 다음 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종이 잡지를 창간하겠다는 말에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확신했다고 한다. “언론사들이 헐값에 콘텐츠를 팔아 넘기고, 그래서 비용을 더 줄이고, 다시 콘텐츠의 품질이 급전직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한 번 읽고 던져버리는 잡지가 아니라 다 읽는 데 2주 넘게 걸리고, 언제든지 돌아가서 읽고 또 읽고 싶은, 보관 가치가 있는 잡지를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고객들이 우리 잡지를 읽고 ‘생각’을 했으면 했다.” 두 사람은 모노클을 ‘슬로우 미디어(slow media)’라고 불렀다.목표 고객도 거기에 맞췄다. 300자 내외 글은 모바일로 보지만, 그 이상의 글은 종이로 제대로 읽고 싶어 하는 층을 겨냥했다. 가령,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해놓고 20분 정도 천천히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모노클의 독자군이란 얘기다.브륄레 편집장은 “5년 전만 해도 언론사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다들 아이패드용 앱과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오히려 라디오가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를 통한 독서보다 훨씬 더 친밀감을 주는 매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모노클은 출판의 미래를 10가지로 요약했다. 그 중 하나가 “당신이 읽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read)”였다. 스마트폰으로 읽을 때는 기기 제조사의 브랜드만 보이지만, 종이로 읽을 때는 노출되는 브랜드가 읽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물 역할을 한다는 것. 이런 트렌드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모노클이 브랜드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잡지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종이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잡지를 창간할 때도 첫 호를 내기에 앞서 글자 없이 빈 종이로만 0호를 만들어 촉감과 향을 시험해본 후 인쇄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담이 끝난 후 별도로 인터뷰했다. 모노클의 브랜드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며 고객과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시켜 가는지 물었다. 앤드류는 이렇게 답했다.“나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싱가폴에 간다. 이어 홍콩, 도쿄로 이어지는 출장 일정이다. 오가는 동안에도 내내 독자들이 뭘 원하는지 묻고, 만나고, 관찰하고, 말을 듣고 피드백을 받는다. 전세계적으로 오프라인 행사를 1년에 70회 넘게 한다.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이 가장 핵심이다.전세계에 모노클 샵이 6 곳, 모노클 카페가 2곳 있다. 얼마 전에는 런던에서 ‘모노클 키오스크’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커피와 함께 모노클이 큐레이션한 잡지를 파는 곳이다. 이 모두가 오프라인에서 고객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날 모노클 부스를 들렀다. 매장 직원과 대화를 하던 중 어느새 나는 1년 정기구독 가입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모노클의 ‘마법’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② 유튜브 벤치마킹한 맥밀란 북튜브비즈니스 클럽 행사로 ‘이방인과의 포옹(Hug the Alien)’이라는 세션이 있었다. 기존 출판업계의 틀을 뛰어넘는 참신한 실험을 하는 인물과의 대담 시간이었다. 그 두 번째 순서가 ‘골수 팬’에 기반한 출판 사업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영국 팬 맥밀란(Pan Macmillan) 출판사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매니저(Digital Communications Manager)인 나오미 베이컨(Naomi Bacon)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슈퍼모델 느낌이 나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그는 디지털 PR 회사에 다니다 2013년 맥밀란에 스카웃됐다. 그는 영국의 젊은 독서층과 활발히 교류하기 위한 채널로 유튜브를 선택했다고 했다. 유튜브를 통해 젊은 독자들과 콘텐츠 창작자 사이의 소통을 넓혀감으로써 탄탄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유튜브를 통한 책 소통, 즉 ‘북튜브(BookTube)’다. 영국에는 이미 책과 관련한 자신만의 채널을 만들어 꾸준히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북튜브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마치 한국의 MCN 스타들이 게임, 뷰티, 먹는 방송을 내보내는 것처럼)맥밀란은 젊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를 담당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Creative Producer) 직책까지 새로 만들고, 지원서도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모했다. 그렇게 해서 선발된 리나(Leena)라는 20대 여성도 이날 함께 자리했다.리나는 전형적인 영국의 20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였다. 그의 동영상(맨부커 수상 시즌에 맞춰 만든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에너지가 넘치고 친구에게 대화하듯 편하고 유쾌하게 수다를 떤다. 화면도 역동적이고 편집은 감각적이며 음악도 수준급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든다고 했다. 대담 후 별도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알아서 대본도 짜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음악 넣고 내가 다 하는거야, 그게 재밌고 좋아!”라고 했다. 동영상 한 편 제작에 이틀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날도 평소 사용한다는 캐논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취재 영상도 올릴 거라고 했다.동영상에 소개되는 책들도 나오미와 자신이 상의해 결정한다고 했다. 가령, 맨부커 수상작 발표 기간에는 그에 맞는 특집을 하고, 어떤 주는 과학서 특집을 하는 등, 시의성에 맞춰 테마에 맞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도서 선정의 진실성(Authenticity)을 기하기 위해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책을 고른다고 했다. 그는 발표 중에도 ‘진실성’라는 단어를 수십 번 반복했는데,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충성도 높은 팬들을 만들기 위한 핵심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철저히 연구하고, 유튜브 동영상 제작 과정도 공개해 피드백을 받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잘,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표 자료에는 “새 인재를 뽑아라(Hire New Skillsets)”라는 문장이 선명했다.발표 후 나오미와 따로 만나 추가로 질문했다. “타겟 독자층이 너무 젊은 층에 국한된 것 같다. 다른 연령대는 어떻게 접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준비 중”이라면서 “35-45세 여성을 위한 북튜브 채널을 곧 시작할 예정이고, 모든 연령대를 분할 접근해 각각에 맞는 채널을 만들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 맥밀란 방송국을 만드려는 거네”라고 하자, “맞아!” 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이번 대담에 동참한 영국의 디지털 퍼블리싱 회사 카넬로(Canelo)의 공동창업자 마이클 바스카(Michael Bhaskar)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했다. 그는 디지털 출판에서는 팬덤 형성의 여부가 성공에 절대적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는 출판뿐만 아니라 업종을 가리지 않고 팬에 기반한(fan-driven) 비즈니스라야 성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③ 중국 최대 자가출판플랫폼 도우반 - 영어책도 그냥 낸다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연사들의 입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내 귀에는 아마존, 구글, 중국이 그랬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중국 참가자들 중에서도 내 눈에 띈 회사는 자가출판(self publishing) 플랫폼을 운영하는 도우반이었다. 이 회사는 작가들을 향해 “중국에서 책을 내시라”라며 홍보 활동을 폈다.도우반은 2005년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다. 네이버 영화의 별점 평가처럼 사람들이 영화와 음악, 책에 대한 후기를 남기도록 한 서비스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서 부문에 관한 한 중국 최대 서비스라고 자신했다.서비스의 특징과 위상을 보면 중국의 ‘굿리즈(Good Reads, 아마존이 인수한 책 커뮤니티)’라 할 만했다. 2012년 전자책 판매 기능까지 추가하면서, 콘텐츠 추천·발견 서비스에서 소셜 상거래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서비스로 발전했다. 지금은 영화 예매 기능까지 갖췄다.도우반 역시 목표 고객이 아주 뚜렷했다. 주 사용자는 18-35세에,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 직업군은 화이트컬러이면서 학습욕이 높은 사람으로 설정했다. 서비스를 시작할 때 조준했던 타겟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고객 취향에 맞춰 자가출판 서비스 도서도 논픽션을 핵심 카테고리로 내세웠다. 판매 비중은 소설과 비소설이 반반이라고 한다. 현재 도우반의 자가출판 플랫폼에 등록한 작가는 약 1만 명, 등재된 책은 9000종쯤 된다.권당 분량은 3000~5000단어 수준. 연재보다 낱권 판매가 핵심이다. 한국에서는 낱권보다 연재 방식이 인기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가격은 권당 4위안(약 700원)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수익은 도우반과 작가가 3대 7로 나눠 갖는다.도우반은 여느 전자책 판매나 자가출판 플랫폼에서는 드문 ‘칼럼’이라는 카테고리와, 이미지와 음악 등으로 구성된 ‘앨범’이라는 상품도 서비스한다.도우반의 전략 중에는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해외 저자들을 향해 “영어 저작도 받을 테니 그대로 보내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영어로 쓰인 책도 충분히 팔린다고 자신했다. 이미 중국 쇼핑몰들이 영어 책을 팔기 시작했고, 아마존 킨들이 중국에서 수백만대 팔린 것도 영어 책을 쉽게 사 보려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중국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해마다 2000만명씩 늘고 있고, 영어 책 독자 수도 급증하고 있다는 게 도우반측의 말이었다. 중국 내 영어 도서 시장의 크기가 그 정도라니, 어쨌든 나라는 크고 볼 일이다 싶었다.이런 시장을 겨냥해 번역 과정 없이 해외 작품을 중국 독자에게 그대로 소개하는 서비스는 도우반 말고도 더 있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자가출판 플랫폼 ‘파이버리드’, 중국에 서비스 파트너를 둔 ‘잉그램 스파크’, ‘아마존’ 등이 책 시장의 국경을 없애고 있다.도우반의 전체 가입자는 2015년 1월 현재 1억명. 도서 부문의 월 이용자는 300만명이다. 이 중 60만명이 모바일 앱으로 접속한다. 중국의 18세 이상 성인의 독서율은 58% 수준이다. 반면 17세 이하 독서율은 77%. 경제 수준과 함께 교육 수준이 올라가면서 독서층은 물론 영어책 수요층도 늘거란 게 도우반의 예상이다.중국 출판 시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갈래도 다양해지고 있다. 시장이 도서 부문별로 아무리 잘개 쪼개진다고 한들 한국 전체 시장보다 크지 않을까. 부러울 따름이다.④ 미국 최대 번역출판사는 아마존의 크로싱비즈니스 클럽에서는 ‘이방인과의 포옹’ 세션이 이어졌다. 첫날 주인공이 ‘아마존 크로싱’의 사라 제인 군터(Sarah Jane Gunter) 발행인이었다. 아마존 크로싱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존이 만든 문학 번역전문 출판사로 영미권에서는 유명하다.2010년 11월에 창업해 지금까지 15개 언어로 된 18개국 문학 작품 650권 이상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 출판했다. 2014년 매출 기준으로 미국내 최대 번역 문학 출판사가 됐다.전세계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문학 작품들이 언어 경계를 넘어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출판된 한국 작가로는 배수아가 있다. 중국만 해도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세계 시장에 소개되는 문학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사라는 2003년 아마존에 입사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 룩셈부르그의 유통판매 업무를 거쳐, 2013년 아마존 크로싱의 발행인을 맡았다. 그는 아마존 크로싱이 다른 전통적인 번역 출판사들과 다른 점은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저자 중심 (author-centric) 출판이라는 점, 둘째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동시 출간 속도, 셋째로 책 매출과 연동한 저자 인세 계약이다.저자 중심 출판이란 저자에게 최고의 출판 경험을 제공하는 데 주력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저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피드백 조사를 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인세 지급 주기를 월 단위로 단축하기도 했다.그는 2016년에는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약 70종의 번역서가 출간될 예정이라면서, 앞으로 5년간 100억원을 번역에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묘한 뉘앙스를 정밀한 언어로 옮길 수 있는 번역가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최고 자산이라면서 이를 위해 각 언어권의 최고급 번역가 네트워크도 열심히 구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는 번역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우리는 해당 외국어-영어 번역의 최고 전문가를 붙인다”면서 “번역이 다 된 작품도 2, 3차에 걸친 패널 회의의 리뷰를 통과한 작품만 출판한다”고 했다.아마존 크로싱 웹사이트에는 번역 출간을 희망하는 작가들이 직접 제안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있고, 아마존 크로싱과 함께 일하고 싶은 번역가들도 자기소개서를 올릴 수 있게 돼있다. 세계 시장 진출을 생각하는 국내 작가나 번역가들도 참고할 만하다.⑤ 하퍼 콜린스 “비영어권 콘텐츠 시장도 진출할 것”프랑크푸르트 북페어 개막 전날 비즈니스 클럽 회원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퍼블리싱 서밋(The Market - Global Publishing Summit)’이 열렸다. 부제가 ‘국제 비즈니스의 7대 시장(The 7 Markets for Your International Business)’이었다.7대 시장으로는 미국, 중국, 독일, 터키, 인도네시아, 멕시코, 한국이 포함됐다. 아침 9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7개국의 최신 정보들이 숨가쁘게 발표되는 가운데,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하퍼 콜린스의 최고디지털책임자(Chief Digital Officer)가 강연했다.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자회사인 하퍼 콜린스는 세계 18위의 출판사다. 2014년 매출이 약 1조5000억원. 2012년 하퍼 콜린스의 CDO로 발탁된 챈탈 레스티보-알레시(Chantal Restivo-Alessi)의 이날 발표는 단연 돋보였다.출판사에 디지털 부문을 총괄하는 CDO가 따로 있다는 것부터가 인상적이다. 2015년 10월 17일자 위클리비즈에 실린 맥킨지 도미니크 바턴 회장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그는 “큰 회사일수록 디지털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 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모든 회사들이 CDO를 영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붉은 드레스 차림의 챈탈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컬럼비아대 MBA를 졸업한 후 컨설팅 회사와 광고 및 음반 산업에서 일하다가 하퍼 콜린스에 영입됐다. 지금은 하퍼 콜린스의 글로벌 디지털 전략을 총괄한다. 얼마 전부터는 해외시장 진출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음반 산업의 주력이 레코드·CD 에서 디지털 파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을 출판사의 CDO로 스카웃한 하퍼 콜린스의 선택은 의미심장하다.마침 프랑크푸르트 북페어가 열리기 전 전자책 매출이 감소하고 종이책이 되살아날 조짐이 있다는 내용의 뉴욕타임즈 보도가 있던 터여서, 그의 발표는 더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뉴욕타임스의 분석과는 좀 달랐다.“전자책은 일시적 유행이었다거나 종이책이 결국 부활할 거라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지난 1년이 전환의 해(the year of transition)였다는 것” 이라고 했다.따라서 하퍼 콜린스 같은 출판사들은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디지털 실험을 통해 소비자에 대해 더 정교하게, 더 많이 배워나갈 것이라고 했다. 내년에 다시 이 자리에 올 수 있다면, 그때까지 배운 것을 알려주겠다고도 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챈탈 CDO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구분해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다. 전자책 독자, 종이책 독자로 쪼개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장르에 따라, 가격에 따라 소비자들은 어떤 때는 전자책을, 어떤 때는 종이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둘 다 읽는다. 그때그때 다르다. 즉 소비자가 자신에게 맞게 최적화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상품을 제공하는 게 출판사의 핵심이다. 상품을 기준으로 소비자를 쪼개서는 안된다.”그는 출판 분야의 디지털화가 다른 콘텐츠 시장과는 다르다는 점은 시인했다. 디지털화 초기만 해도 출판 시장은 음반 시장보다 더 급격하게 진행될 거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그는 “현재로서는 전체 책시장에서 전자책의 점유율은 25-30%에 수렴할 것으로 본다”면서 “이제 우리는 독자들이 종이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심지어 밀레니엄 세대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도 종이책으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출판이 다른 종류의 콘텐츠 비즈니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은 사람들이 손에 잡히는 물성 자체를 사랑한다는 점이며 그 때문에 소비자들은 돈을 낸다”고 했다.하퍼 콜린스의 콘텐츠 유통 전략에 대해서도 소개가 됐다. 챈탈 CDO는 “학교, 도서관, 하퍼 콜린스 웹사이트를 통한 직판 등 유통 경로를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다”면서 “그 중에서도 구독(subscription) 모델과 오디오북 시장의 급성장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그는 “이제는 소셜커머스의 시대”라면서 “소비자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만큼, 소셜미디어 채널에서 매출을 일으키는 방법도 집중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영어권 출판사의 강점을 살려 글로벌 시장에서 더 성장할 기회를 주시하고 있으며, 영어 콘텐츠뿐만 아니라 인수합병이나 직접 진출을 통해 비영어권 콘텐츠도 생산하는 진정한 글로벌 회사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퍼블리(박소령, 정보라)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30/2015103004299.html?query=%EB%AF%B8%EB%8B%88%EB%B6%81&x=0&y=0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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