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12-12
    1908년 3월, 중국의 서쪽 끝 돈황 막고굴에서 서류뭉치가 발견되었다. 막고굴의 장경동(藏經洞)에서 였다. 장경동은 지금의 제17굴에 해당하는데, 말 그대로 ‘경전이 보관되어있던 굴’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안에는 수 만 본의 문서와 그림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 서류뭉치 속에 뒤섞여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바로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였다. ▲ 사르나트 성지, 중앙의 철책 안에 아쇼카석주의 부러진 기둥이 보관되어 있다.물론 그가 처음부터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두루마리 형식인 왕오천축국전의 앞부분 3분의 1이 손상돼 책 제목도 지은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두루마리의 내용을 살펴보던 펠리오는 얼마 전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바로 혜림(慧琳 737~820)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이다.이 책은 경전의 용어를 해설해 놓은 일종의 불교용어사전이다. 이 책에 인용된 왕오천축국전의 단어들이 두루마리 뭉치에 언급된 단어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펠리오가 알아차린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만약 천재 동양학자 펠리오의 놀라운 기억력이 없었다면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두루마리는 혜초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혜초의 글을 보고 필사한 것이지만 말이다.▲ 사르나트 아쇼카석주의 기둥머리돈황에서 그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지만, 책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6000여자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이다. 이 문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왕오천축국전의 초고로 보는 의견, 둘째는 왕오천축국전을 줄인 축약본이라는 의견, 마지막은 왕오천축국전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혜초(慧超, 700?~780)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고 있는 문헌은 사실 없다. 다만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오행시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암시한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남방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계림’은 ‘신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의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 바로 이 부분, 즉 그의 고향 계림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그리움을 담은 구절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다만 원문에는 ‘誰爲向林飛’이라고 적혀 있어, 이 때 ‘림’이 꼭 계림을 지칭하는 것이냐는 반론도 있지만, ‘(고향)계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고, 언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중국에서 인도로 출발할 때가 723년, 귀국한 때가 727년이니 햇수로 5년 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했음은 분명하다. 이후의 그의 생애는 기록을 통해 간간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인도 여행 후 733년부터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671~741)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740년 금강지가 입적한 후에는 불공(不空, 705~774)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6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780년 무렵 오대산으로 들어가 입적했다. 혜초는 당시 밀교의 대가였던 금강지와 불공에게 밀교를 배우고, 당시의 밀교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밀교 승려였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왕오천축국전은 말 그대로 인도의 5개 나라를 다녀와 쓴 글이다. 물론 인도만 둘러 본 것은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도 다녔다. 모두 44개 지역이다. 대부분 혜초가 직접 가보고 적은 글이지만, 일부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있다. 특히 지금의 페르시아, 아랍, 동로마까지 다녀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햇수로 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모두 섭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가 밟았던 노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책은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인도의 바이샬리에 해당한다. 책의 끝에 등장하는 지역은 중앙아시아 서역북도에 위치한 언기국(焉耆國), 즉 카라샤르이다. 시작이 인도인 것을 보면 출발할 때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7~8세기 인도로 향한 구법승은 해로를 많이 이용했다. 그는 10대 후반 약관의 나이에 광둥항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를 경유하여 수마트라섬(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수마트라섬에는 슈리비자야 왕국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개월 혹은 1~2년 정도를 머물고 인도의 벵갈만을 지나 천축국에 도착했다. 그는 슈리비자야 왕국에서 상당기간 머문 뒤 인도(천축)에 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천축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44개 지역을 답사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혜초는 각 지역에 이를 때 마다 풍속, 언어, 종교, 산물과 그 나라의 정세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8세기 전반 혜초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불교는 침체하여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고,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되어 유지하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감옥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등 색다른 여러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그는 왜 인도로 갔는가? 물론 승려인 혜초가 ‘불법 구하기’가 목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목적은 여덟 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오언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급기야 마하보리사(大覺寺)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너무나도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노래한다. …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거지반 타버렸으니, 어찌 보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오늘 아침 바로 내 눈앞에 있구나.’ 그가 말하는 여덟 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 사리를 팔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세웠다는 근본팔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8대 성지를 일컫는 것이다. 석가모니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8곳의 성지를 그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그를 머나먼 인도로 이끈 것이다.▲ 인도 화폐 루피 /블룸버그 제공8대 성지는 석가모니가 나고 자란 카필라바스투,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첫 설법한 사르나트(녹야원·鹿野苑), 기적을 보인 쉬라바스티(사위성·舍衛城), 도리천에서 내려온 장소인 상카시아,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르(왕사성·王舍城), 원숭이가 꿀을 바친 바이샬리(사진 3),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이다. 이 가운데 사르나트에 도착한 혜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에는 사자가 있는데, 그 기둥은 아주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며, 결이 섬세하다. …탑을 만들 때 이 기둥도 같이 만들었으며…’. 혜초가 본 네 마리 사자가 장식된 아쇼카 석주는 인도의 화폐인 루피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조각이다. 이 석주는 마우리아왕조(기원전 321~185)의 제3대 왕 아쇼카(기원전 272~232)가 석가모니의 첫 설법 성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잘 다듬어진 높이 12.8m의 돌기둥인데, 기둥 몸통은 부러져 현장에 있고, 위에 올려졌던 기둥머리 장식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혜초의 여행기간은 햇수로 5년이다. 중국 승려 법현이 12년(399~410), 현장이 17년(627~643), 의정은 18년(671~689) 점을 상기하면 긴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는 법현의 ‘법현전’,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3대 여행기로 꼽힐 만큼 중요하다. 8세기 전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직접 다녀왔던 신라승 혜초가 그의 고향인 신라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땅에 없지만, 신라승 혜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 임영애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 경주대 실크로드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사찰운영위원회와 경상북도, 강원도 등의 문화재 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불교 조각사를 주로 연구한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 본 한국불교조각’ 등이 있다.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25/2015122502177.html​
  • 2015-12-07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푸른 투르크’ 돌궐유라시아 대륙은 6세기 전반 또 한번 주도 세력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운 세력의 중심에는 아사나(阿史那)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중가리아(Jungaria) 남부 초원과 알타이 산지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들은 552년, 그때까지 몽골 초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 유연(柔然)을 무너뜨리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돌궐(突厥)이 이들이다. 중국식 해석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의 모습이 투구와 비슷했는데, 이들이 투구를 ‘돌궐’이라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로 인해 이름을 (돌궐로) 했다”고 나온다. 고대 투르크어로는 ‘쾩 투르크’라고 했다. ‘푸른 투르크’ 혹은 ‘성스러운 투르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돌궐 제국의 발전을 기록한 고대 투르크 문자로 된 빌게 카간 비석(왼쪽)과 퀼 테긴 비석 /정재훈 교수 제공초원의 패자가 된 돌궐은 세력을 더 크게 확대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런 야심을 품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북중국의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돌궐에 대해 견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됐다.더욱이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북중국의 정권들은 각기 세력을 확대하고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신흥 세력인 돌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덕분에 돌궐은 북중국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물적 지원까지 받으며 서방으로의 진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돌궐의 서방 진출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먼저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과 북인도 등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에프탈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이것은 마치 13세기 몽골 제국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호레즘 제국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발전시킬 때와 같은 양상을 띠었다. 돌궐 역시 유목 제국으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진출해 이 지역을 세력권에 두는 것이 중요했다.이를 위해 돌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페르시아와 양동 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에프탈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패한 에프탈의 잔여 세력들은 서방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아바르(Avar)라고 불렸다. 아바르는 그 뒤로 비잔티움(동로마)은 물론 동유럽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집단과도 연결이 된다고 추정된다.에프탈을 무너뜨린 돌궐은 이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 유목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하나로 통합된 중앙아시아는 과거와 달리 분절되지 않고 모두 연결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무대로 부상할 수 있었다.돌궐은 이를 매개로 주변의 거대한 정주 문명 세계까지 연결시킴으로써 미증유의 활발한 교류를 주도하게 되었다. 돌궐은 그 후에도 교역 체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원래 초원을 기초로 한 유목민 집단은 내부의 생산력이 자급자족을 하거나 외부에 물자를 공급할 수준은 못 된다. 하지만 국가를 건설하면 많은 잉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고도화하면 할수록 교역에 집중하게 된다.◆오아시스의 상인들 소그디아나돌궐은 중국이라는 안정적인 공급지에서 확보한 물자를 가지고 대륙에서 자신들이 확보한 교통로를 통해 새로운 시장으로 이동시켜 판매하는 방식으로 부를 꾀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부족한 경영 능력을 보완해줄 수 있는 오아시스 상인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소그디아나 출신의 상인들이 적임자였다. ▲ 삼채에 남아 있는 소그드인의 다양한 얼굴 모습돌궐에 새로 편입된 소그디아나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지역이었다. 파미르 고원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아랄 해로 들어가는 강인 아무 다리야와 시르 다리야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파미르에서 발원해 사막으로 흘러들어가는 자라프샨(Zeravshan) 강과 카슈카(Khashuka) 강을 끼고 발달했다. 지금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고, 동쪽 끝 일부만 타지키스탄 국경 안에 있다.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동부 이란계 방언을 사용하는 인도유럽계통인이었다. 이들은 특히, 자급에 필요한 농경과 함께 주변 지역을 오가는 원격지 상업에 종사하는 대상(隊商)으로 유명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이 명칭은 소그디아나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 수십 곳을 개별 도시명에 따라 각기 하나의 성을 붙여 구분한 데에서 나왔다. 이곳 상인들은 돌궐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 일대에 많은 식민 취락을 구축한 상태였다. 이미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돌궐이 새로운 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들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외부의 위협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교역 이익을 확대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돌궐의 권력층과 결탁해 행정, 외교 등 다양한 분야의 관료로 활동하면서 유목 제국의 발전을 도왔다. 그전까지 유목 세력이었던 돌궐은 이러한 소그드 상인들과의 정경유착(政經癒着)을 통해 새로운 교역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페르시아와의 ‘세계대전’하지만 에프탈이 무너진 이후 주인을 잃은 영토 할양을 두고 돌궐과 페르시아의 대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방의 비단 무역을 장악했던 페르시아 상인들과 돌궐의 지원을 받는 소그드 상인들의 충돌로 불거졌다. 당시 동서 교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비단 유통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양자 간에 심각한 분쟁이 잇따랐다.▲ 당대 소그드 상인 담삼채용급기야 돌궐은 페르시아와 교섭을 벌이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돌궐을 대표한 소그드 상인이 바로 마니악(Maniak)이었다. 페르시아와의 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그는 먼저, 페르시아측에 비단 금수(禁輸)의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일축했다. 페르시아는 영토 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했다고 판단했다.돌궐은 567년에 다시 다른 사신을 페르시아에 파견해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 중 일행이 오히려 독살당하고 일부만 귀환하는 등 사태는 더 나빠졌다. 당시 페르시아는 돌궐의 사절이 현지에 도착한 후 풍토병으로 죽었다고 변명했지만, 돌궐과의 교섭을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이 역시 몽골이 겪은 일을 연상시킨다. 1218년 호레즘으로 파견된 몽골의 사신들이 국경 도시 오트라르(Otrar)에서 살해되면서 양국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돌궐과 페르시아 역시 당시로서는 막대한 경제 이익이 걸린 비단 교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중앙아시아에서 비잔티움으로 연결되는 교역권의 확보는 중차대한 문제였다.결국 양국 간 교섭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전면전으로 치닫고 말았다. 원군이 필요했던 돌궐은 567년 마니악을 비잔티움으로 파견했다. 바로 예전에 아바르 문제로 교섭을 했던 곳이었다. 마니악은 페르시아 협공과 함께 비단 교역을 의제로 비잔티움 황제를 적극 설득했다.◆비잔티움과의 협상 타결과 뒤이은 파국이 무렵 비잔티움 역시 사산조 페르시아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돌궐 상인들이 페르시아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비잔티움으로 물자를 반입하는 것을 허락하게 됐다.양국 간 교섭이 타결된 후 마니악이 돌궐로 귀국하는 길에 비잔티움의 자마르쿠스(Zamarcus)가 동행했다. 이것은 세계사적 상황의 연출이라고 할 만했다. 마침내 동방의 유목 국가인 돌궐과 서방의 비잔티움이 새로 연결된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만날 수 있게 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멀리 중국에서 비잔티움까지 돌궐을 매개로 하나의 거대한 교역망이 구축될 수 있었다.양국의 사신 일행은 귀환 도중에 당시 돌궐이 벌이고 있던 페르시아 공격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궐의 페르시아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들은 비잔티움에서 파견된 군대의 호송을 받아 돌궐로 돌아갈 수 있었다.▲ 6세기 후반 북주를 대표해 돌궐을 방문한 부하라 출신 상인 안가(安伽)의 모습을 새긴 묘곽 부그 후 571년에는 돌궐이 다시 사신을 비잔티움으로 보내 이전에 페르시아와 맺었던 화의의 파기를 요구했다. 비잔티움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였는데 20여년(571~590) 동안 지속됐다.하지만 돌궐과 비잔티움의 긴밀한 협조 관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돌궐에서 이탈한 부락을 비잔티움에서 받아들임에 따라 576년 양측은 파경을 맞았다. 여기에는 이미 비단을 생산하고 있던 비잔티움에서 자국산 보호를 위해 돌궐과의 교역에 미온적이었던 점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잔티움으로서는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돌궐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돌궐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당시 돌궐이 적극적으로 비잔티움과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은 페르시아를 견제함으로써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동서 교역을 독점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은 돌궐이 앞서 북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이뤄 확보한 비단을 기반으로 거대한 유목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돌궐이 경제 이익을 극대화하는 중상주의적 교역 국가 체제를 지향했음을 잘 말해준다.이러한 구상은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과 오아시스에 걸쳐 자유로운 왕래와 안전한 교역이 가능한 새로운 통합 체제가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거대 통상권은 오늘날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에 비견할 만했다.이를 통해 과거에는 인위적 장벽에 막혀 활성화되지 못했던 ‘초원길’이 중국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이 오가는 이른바 ‘비단길’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 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동서 교류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초원의 안정이었던 것이다.◆몽골제국의 모범이 되다돌궐은 거대한 중앙아시아 초원을 통해 중국에서부터 서쪽 시장인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독점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소그드 상인들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질서의 구축에 필요한 이들의 외교적 협상력과 그 과정에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통망의 운용 경험, 그리고 이것을 관장할 수 있는 행정 능력 등을 담보하는 소프트웨어까지 갖출 수 있었다. 돌궐의 이러한 교역 체제 지향은 그 후에도 하나의 모범이 되어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유목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훗날 몽골도 바로 이 돌궐의 전례를 본받아 거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국제 교역을 주도했던 소그드 상인 마니악과 같이 유목 권력과 결탁한 정상(政商)에 대해서는 단편적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무렵 이들의 활동 기록을 통해 6세기 후반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던 돌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돌궐은 에프탈, 페르시아, 그리고 비잔티움 등을 상대로 세계대전이라 부를 만한 스케일의 격전을 치렀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경제 전쟁’을 벌이며 성장 혹은 몰락하는 기업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거에도 자유무역체제 구축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상인들의 처절한 노력이 제국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소그드 상인 마니악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재훈 (丁載勳)현재 경상대 사학과 교수이면서 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 및 중앙아시아사(고대 투르크 유목민족사)가 전공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연구소 방문학자를 지냈다.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있다. 공저로 ‘몽골의 역사와 문화’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과 꿈’ 등이 있다.<이전 기사>[新 실크로드 열전] 기획을 시작하며: 유라시아로 시간 여행[新 실크로드 열전] ① 5천년 전 실크로드의 주인공[新 실크로드 열전] ② 한나라 장건 서쪽 길을 뚫다[新 실크로드 열전] ③ 현장의 서역기행...걸어서 110개국​ 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04/2015120402139.html​
  • 2015-11-28
    ​​오롯이 사적인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온전한 내 생각도 다른 사람과 사회,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성된 ‘공유된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기록물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하는 까닭은 기록이야말로 우리의 ‘공유 기억’을 만드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유의 틀을 만들어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와 인류의 삶을 꿈꾸도록 돕는다...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돌아보기, 보통 사람들의 느린 아카이브를 제안한다… 아카이브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경쟁을 멈추고 함께 돌아보게 한다… 부분적인 쓰기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물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진다.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 /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중에서아키비스트(archivist). 우리말로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다. 아직은 낯설다. 도서관의 사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에 견주면 이해가 쉬울까. 적어도 그 비슷한 전문직에 속한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이 생기면서다. 그 후 700여개 공공기관에서 저마다 아키비스트를 두기 시작했다. 거기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길러내기 위해 국내 대학원에도 기록학 전공 과정이 생겼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런 과정이 전국에 걸쳐 약 16곳에 이른다.기록이라고 하면 우리 문화에도 장구한 내력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둘만 해도 세상에 유례를 찾기 힘든 거질 아닌가. 크고 작은 개인 문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기록의 현대적 의미를 새삼스럽게 조명한 책이 나왔다.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제목은 다소 감상적이다. 하지만 담긴 내용은 알차다.너, 나, 우리의 사소한 일상의 기록들이 모여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지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저자에 따르면, 기록을 남기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야말로 자신을 만들고 가꾸는 과정이다. 나아가 그것이 종국에는 공동의 문화가 되고 집단의 역사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저자와 만나, 디지털 시대의 기록하는 인간, ‘호모 아키비스트’란 무엇인지 생각을 더 들어봤다.-‘호모 아키비스트’라고 부제에 썼더군요. 아카이브나 아키비스트라면 아직도 생소하게 들리는데요?어떤 일을 하면 문서를 작성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생산되는 공공기록물을 아카이브라고 해요. 그런 공적인 기록물은 언제까지 반드시 보관해야 한다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1999년에 생긴 공공기록물관리법 말입니다.그 법이 생긴 뒤로 공공기관에서는 어디나 아키비스트를 두도록 돼 있어요. 국내 대학원에도 그런 과정들이 생겼고요. 이 책에서는 사적인 일상의 기록이 갖는 공공의 가치를 이야기해봤어요.-그쪽 공부를 하셨나요?저는 그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어요. 대학 때 전공은 법학이었어요.-어떻게 이런 쪽 일을 하게 되셨지요?원래 책을 많이 좋아했고 읽기도 해서 잡스럽게 여러 분야 책을 알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대학 졸업 후에는 일반 회사에 들어갔어요. 해외 영업 일을 오래 했어요. 10년 정도 일하다가 무역회사를 창업해서 꾸려 가던 중에 다리를 다쳐 큰 수술을 받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사업을 접게 되자, 출판사를 하시는 아는 분이 번역 일을 제의해 오셨어요. 원래 책을 좋아하는 데다, 제가 그 동안 해외 영업을 하면서 영어를 많이 썼거든요.‘에이프릴 풀스 데이’ 같은 외서를 번역하다가 소개를 받아 도서관 일도 하게 됐어요. 경기도 용인의 느티나무도서관에서 기획상임이사를 맡아서 작년 7월까지 근무했어요. 지금은 도서문화재단 씨앗이라는 곳에서 에코라이브러리 설립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이번 책은 어떻게 내시게 됐지요?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자료를 아카이브하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어요. 기록학 전문가인 이영남 교수님을 알게 됐어요.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으로 일했고 참여정부 때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실에서 기록행정관을 지낸 분인데 지금은 한신대 한국사학과 초빙교수로 계세요.이 분이 ‘기록과 한국 현대사’ 과목을 가르치는데, 기록학 전공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와서 도서관 자료를 가지고 실습 수업을 할 때 저도 참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아카이브 기초 업무를 배웠어요.이 교수님이 민간 단체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본 용어와 방법으로 아카이브를 할 수 있게 알려주셨어요. 그분은 “기록물 속의 사람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기록물에서 사라진 삶을 찾기 시작했어요.그리고 공개 워크샵을 열었어요. 도서관의 자료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만의 기록이 아니라 공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지요. 그때 어떤 기록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고 폐기할지 같이 공부해보자고 홍보를 했더니 예상치 않게 여러 단체에서 참가 신청들을 해왔어요.-어떤 곳들이었나요?NGO(비정부기구)나 NPO(비영리조직), 대안학교 같은 곳들이 많았어요. 이런 곳이 대개 10년 정도 된 단체들이다 보니까 기록물이 꽤 쌓였을 때지요. 이걸 정리도 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할지 고민도 하고 있었던 거죠. 여러 곳에서 참가 신청을 해와서 2013년 말 석 달 반 10회에 걸쳐 워크샵을 했어요.워크숍을 할 때 사전 예비 강의를 했어요. 아키비스트나 아카이브라는 말을 어렵고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쉽게 설명했지요. 우리가 아는 주변의 문학들, 자서전 쓰시는 분들의 기록물들이 다 그런 이야기라는 것을 강의했어요. 그 내용을 ‘보통 사람들의 생활 아카이브’로 써보자는 제의가 있어서 글을 고쳐 써봤어요.-강의 내용을 책으로 내신 거군요.원래 원고는 도서관이나 단체에서 어떻게 자신의 기록물을 관리할 것이라는 방법론적인 것들이 많았는데, 책을 내면서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단체보다는 개인의 기록물이 가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췄어요. -국내 기록관은 어디에 얼마나 있나요?국가기록관의 경우엔 경기도 성남에 하나가 있고, 부산에도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두 군데 다 가보긴 했습니다.-잘 운영되고 있던가요?제가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어서 말씀드리긴 조심스럽습니다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가령 최민식(1928-2013) 사진작가 분이 돌아가시면서 2008년에 유작을 모두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셨잖아요. 그 자료가 어떻게 돼있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 보게 됐는데, 그게 아직 채 다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어요.저도 도서관에서 일을 해봐서 사정이 짐작이 되지만, 아마 인력 사정이 못 따라가거나 업무 편성이 잘 안 돼서 그런 것 같았어요. 자료가 수만 장이고, 필름 상태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한데, 분류 정리만 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자료를 국가기록관에 기증할 때는 국민들이 그걸 마음껏 찾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더군요.반면에 부산 기록관을 방문하는 길에, 인근의 최민식 갤러리(사립)를 들렀는데 거기에는 사진이 많지는 않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관람을 하고 있더군요. 국가기록관도 그런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좀 더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고 기록물들도 활용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요즘 기록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진 것 같은데요?1, 2년 사이에 관심이 어마어마하게 커졌어요.-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요? 어떻게 알 수 있죠?제가 전국 도서관을 다니면서 강연을 합니다. 월 10회 정도 다녀요. 지금까지 100곳은 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지역의 기록을 쓰시는 분들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도서관 주변 문화유적 같은 곳도 탐방해요. 그런 곳에서 의외로 자신의 삶이라든가 지역이라든가를 기록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어요.지방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하는데 참가자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처음엔 선뜻 하시겠다고 하다가도 막상 기록이 돼서 책으로 나오게 되면 자식들이 보면 체면 깎는 일이라며 거부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기록이 갖는 사회적인 의미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생겼구요. 어떤 분들은 어머니 환갑 선물로 자서전을 써드려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기록에 대한 관점, 태도들이 몇 년 사이에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명지대에서 ‘당신의 하루를 보관해 드립니다’ 같은 프로젝트만 봐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보내와요.안 씨의 책에는 국내외 고금의 흥미로운 아카이빙 사례들이 잘 나와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유희춘의 생활기록 ‘미암일기(眉巖日記)’유희춘은 1513년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나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의 일기가 ‘미암일기’다. 조선 시대 개인 일기 중에서 가장 방대하다. 여기에는 조선 중기 양반 아내의 실제 삶이 나온다. 유희춘은 결혼 후 처가에 살았는데 당시로선 특별할 게 없었다.아이들도 외가에서 자랐고 아내는 친정과 시대 제사를 번갈아 지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장기를 두고 시문을 지어 나누며 애정을 표현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 증식, 부부 갈등, 노후 생활 등을 세세하게 의논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 생활에 대해서도 자문했다.2014년 3월에 출간된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에서도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유교적인 전통’은 조선 시대 후기인 18, 19세기 이후의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으로 알고 있던 가부장적 가족, 유교적 틀에서 여성을 바라보던 역사는 생각보다 짧았다. 생활사 기록들을 펼쳐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민간인 오인문의 전쟁 기록 쇄미록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기록한 민간인도 있다. 한양사람 오인문이다. 그는 한양을 떠난 1591년 11월 27일부터 환도한 다음 날인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간 일기를 썼다. 그 책이 쇄미록(瑣尾錄)이다. ‘자질구래하고 하찮은 기록’이라는 뜻이다.유성룡과 이순신이 기록한 징비록과난중일기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전쟁 당시 민간인의 고초와 생활상이 꼼꼼히 기록되었다. 이 책을 통해 거창한 역사책에서 소외되었던 가족들과 헤어지고 군사징발과 군량 조달로 고난을 겪은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가 드러났다.◆미국 여성의 일상을 기록한 울리히의 ‘산파일기’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할로웰에 살았던 마서 밸러드는 산파였다.로렐 대처 울리히는 27년 동안 쓴 ‘산파일기’를 번역해 1991년 퓰리처상을 받은 데 이어 밸러드에 관한 연구로 하버드대 교수가 됐다.밸러드는 아이를 800여명 정도 받은 산파이자 마을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었다. 실생활에서도 남편과 집안일을 대등하게 책임지는 당당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 일기가 없었다면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일기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고손녀 메리 호버트였다. 1844년 의대생 시절 증조할머니로부터 책을 물려받은 그녀는 의학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 메인 주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일기를 두 번째 발견한 사람은 메인 도서관 사서 내시였다.내시는 낡아서 알아보기 힘든 일기를 멀리 보스턴까지 가서 손으로 일일이 베꼈다. 어떤 부분은 빠뜨리고 어떤 부분은 잘못 필사하기도 했다. 이런 밸러드의 일기를 세계 역사의 주요한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은 울리히였다.일기의 내용이 특별하거나 극적이지는 않다. 산파로서의 수입과 지출 등 경제적인 내용과 가족 행사, 날씨 변화, 원예, 이웃을 방문한 일 등 그야말로 지루하고 지속적인 일상을 기록했을 뿐이다.하지만 울리히는 지루한 일상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초기 미국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된 여성의 삶을 되살려냈다.◆위안부 사건의 우회적 기록, 이창래의 ‘척하는 삶’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가 위안부 사건을 접한 충격으로 쓴 ‘척하는 삶(A Gesture life)’은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힘입어 어떻게 우리에게 공명의 시간을 부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소설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더 잊을 수 없고 더 멀리 퍼지는 방법으로 사라져 가는 기억을 복원했다. 이 작품은 미국의 4개 주요 문학상을 받았다.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하던 닥터 하타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어떤 세상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한다. 입양한 딸 ‘서니’와도 부녀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노후에 찾아온 연인과도 속내를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으로 참전한 그는 위안부 ‘끝애’를 사랑하고 그녀를 차지했다. 그는 전쟁을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듯 ‘끝애’를 향한 감정은 다른 군인들처럼 단순히 성욕을 채우기 위한 폭력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격이 있는 사랑을 했노라며 어떤 세상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손해도 보지 않고 상처도 주고받지 않으며 고결함을유지하는 척한다.하지만 결국 그는 세상을 마주 보지 못한 비겁자였다. 작가는 직접 위안부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더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악이 눈앞에 있을 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악은 거듭 창출된다고. 소설은 그 어느 기록보다 더 깊고 날카롭게 ‘위안부의 상처’를 새겼다. 상처가 기록으로 나아가고 기록이 역사가 되며 역사가 다시 문화로 정착한 사례다.◆영국 서섹스대학의 일상 아카이브5월 12일이면 영국 서섹스대에는 수많은 일기가 도착한다. 대학은 2011년부터 매년 5월 12일 하루 동안의 일기를 영국 전역에서 받아 자체적으로 구축한 일상 아카이브에 보관한다. 1937년 인류학자 세 명이 관찰자, 자원봉사자, 작가 등으로 팀을 꾸려 1950년대까지 영국인의 일상을 기록화한 것을 보고 시작한 프로젝트다.◆명지대 디지털 아카이빙 연구소 ‘당신의 5월 12일을 보관해 드립니다’2013년 5월 12일 명지대 디지털 아카이빙연구소 역시 ‘당신의 5월 12일을 보관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로 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유치원생은 그림일기, 할아버지는 전화 녹음, 주부는 사진, 중고생은 낙서, 군인은 입소 때 엄마에게 보재는 소포에 함께 넣은 쪽지 등 수집을 광범위하게 하되 연령층과 대상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하루 동안 먹은 음식, 입은 옷, 만난 사람, 했던 생각을 저마다 다른 방식, 다른 내용으로 담을 수 있게 한 결과 불과 2주 만에 600여건이 모였다. 모인 내용은 방식만큼이나 다양했다. 이렇게 모인 자료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일상은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가공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드러났다.◆개화기 옛도시의 복원, 광주 1930광주비엔날레 시민참여프로그램 참여단체인 ‘광주 1930’은 시간을 거슬러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활동하던 시절의 동네 양림동을 기록한다. 버드나무가 숲을 이뤄 ‘양림동(楊林洞)이라 불리는 이 동네는 선교사 마을로도 불렸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공동묘지인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종교 박해가 심했던 시대에 묘지터는 유교로부터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토지 가격도 저렴한 적지였다. 덕분에 이 동네에는 광주 현존 최고의 서양식 건물 우월순 사택을 비롯해 110년이나 된 양림교회, 1911년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 수피아 여중고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나란히 세워졌다.이곳에는 이 외에도 최승효 가옥과 이장우 가옥 등 개화기 한옥의 모습 또한 잘 보존돼 있다. ‘광주 1930’은 최승효 가옥 바로 옆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소식지를 통해 양림동의 1930년대 역사와 현재 소식을 전한다. 동네 지도를 만들고 양림동 4.7km를 걷는 ‘청춘달빛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댓글도 책이 된다: 공동 기록 활용한 출판2013년 여름 출판사 열린책들 공식 페이스북에 ‘전국의 책벌레 여러분, 심장이 쫄깃해져서 밑줄 좌악 그은 문장을 댓글로 적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9일 만에 모두 706개가 달렸다. 출판사는 이를 모아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고전 명작 속 한 문장’으로 책을 출간했다.모인 댓글 문장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책을 보는지 책 속에 어떤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기록물이 탄생했다. 사회학자라면 이 기록을 통해 2013년도 풍속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고, 작가들은 이렇게 골라진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문장에 마음을 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의 현재 마음을 읽을 수 있다.◆서태지 아카이브서태지 팬들은 20년 동안 서태지 활동 자료를 모아 디지털 기록보관소인 온라인 박물관에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히스토리, 음반, 발매 영상, 공연, 프로모션, 광고, 각종 언론에서 서태지에 대해 언급된 자료(TV, 라디오, 신문, 댓글까지), 팬아트, 팬사인회, 팬클럽 활동, 용어집까지 갖췄다. 놀라온 사실은 이 자료들의 출처가 세계 곳곳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 서태지의 팬들이 온라인상에 자료를 모으고 있다. 지금도 자료가 업데이트된다.◆다음세대재단의 ‘소리 아카이브’다음세대재단은 정기 강좌, 강연 등 오디오 콘텐츠와 기획 대담, 인터뷰 시리즈, 가치 있는 소리의 수집과 기록 보존 활동을 하는 ‘소리 아카이브’를 운영한다. 이 모든 것이 디지털 기기가 발달해 대용량 저장이 가능해진 덕분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최소화한 덕분에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저장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게 됐다.-이번 책에서 주로 평범한 개인들이 남기는 일상적인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요. 왜 중요한가요?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목소리니까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글을 쓰잖아요.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저도 그렇게 하는데. 이런 것들이 그냥 자기 생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함께 공유되는 생각들이 다 들어 있다고 봐요.단순히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도 기록을 하게 되면 객관적인 거리감 같은 게 확보가 되거든요. 그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의 생각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지요. 자기가 쓴 것도 다시 보고, 어떤 기록이 남아야 하는지, 왜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나 행동 속의 이기적인 욕망들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것은 기록할 때보다, 그 중에서 뭔가를 삭제하거나 폐기하려고 할 때 더 하게 되지요.-안 선생님 자신은 기록을 잘 해오신 편인가요?중, 고등학교 때는 대부분의 여학생처럼 일기를 썼고, 나중에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인터넷 블로그를 만들어서 글을 계속 써왔어요. 하루에 한 편 정도는 쓰는 편이예요.-주로 어떤 내용인지 물어봐도 될까요?사사로운 여러 가지 일들이예요. 그때그때 지향하는 삶에 따라 바뀌는 것 같아요.-기록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은가요?가령 아이 얼굴을 꾸준히 찍어서 아카이빙을 해보세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때 표정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실제로 주변에서 그렇게 해본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어두워진다고들 해요. 왜 그럴까, 자문하고 해법을 찾아볼 수도 있죠.내가 어떻게 키웠고 어떤 교육을 하고 있길래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가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 식으로 기록을 하면 대상화가 가능해지고 시간에 따른 미세한 변화를 읽어낼 수 있어요. 자신을 객체화해서 거리감을 두고 보면 변화를 읽고 개선을 생각해낼 수 있어요.저는 식구들 이야기를 블로그에 꾸준히 기록해 왔어요. 자연관찰 일기 같은 것도 있어요. 아이들하고 같이 발견한 사마귀에 대해, 어디서 어떻게 발견했고, 그때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런 걸 적어두는 거죠. 그때그때 아이들 관심사도 알 수 있구요.-사적인 내용도 블로그에 공개합니까?어느 정도는요.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블로그 타이틀을 바꾸곤 해요. 제 블로그는 그 정도로 유명 블로그는 아니지만. 알려졌다 싶으면 블로그 이름을 바꿔요.-그러면 굳이 왜 남들이 볼 수 있는 블로그에 올리지요?개인적인 글을 쓸 때에도 자신을 견인할 만큼의 제 3의 공적인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순전히 나 혼자서만 쓰고 보는 일기장에 글을 쓰면 지속적으로 쓰기가 어렵거든요. 완전 독백도 아니고 완전 공개도 아닌, 중간쯤에 있는 곳에 나를 두는 게 적절한 긴장도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자신과 적당한 거리를 두되 완전히 나를 내어 놓는 방식은 아닌, 그런 공간을 확보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흥미로운 말씀이군요. 소셜미디어를 보면 익명성 뒤에 숨어서 온갖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과시나 자아도취의 공간이 됐다는 말도 합니다.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강의해보면 그런 질문이 많아요. 왜 사생활을 그렇게 드러내려고 할까 하구요. 단순히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글쓰기가 자신을 견인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새로 발견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의외로 커요.그래서 온라인 공간에서도 적절한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글이든지 곧바로 ‘좋아요’를 누르거나 반박성 댓글을 다는 식의 즉자적 반응은 좋은 사용법이 못 된다고 생각해요.-기록 과잉의 시대라고도 하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요.사실 이것저것을 다 기록하는 것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것과도 같아요. 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기록은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그 중에는 과거의 시간에 묻어야 할 기억과 경험도 있습니다.그러면, 어떤 걸 폐기해야 할까? 혼자 생각해보게 되지요. 기록을 해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살펴봤을 때는 지워도 될 것들이 보입니다. 기록의 분류와 폐기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되묻게 되지요. 그래서 사실 기록보다 더 어려운 게 삭제와 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우기가 어려우면 분류부터 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도 되지요. 수많은 기록 중에서 결국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때 자기 삶의 가치를 말해 줍니다. 어떤 기록을 채택하는가가 지금 그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주지요.-기록의 구체적인 노하우 같은 것도 강의를 하세요?작은 도서관 같은 데 가면 그런 것들을 많이 해요. 부산 맨발동무도서관도 제가 했던 아카이브 워크숍에 참가했는데, 사진 아카이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 오셨어요. 대천마을 안에 있는 도서관에요.대천마을이라는 곳이 신시가지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입주자들과 옛날 골목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있잖아요. 맨발동무도서관에서 제안을 했어요. 동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도서관에 초청해서 자신들 옛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 거죠.이야기를 하는 중에 개인 사진을 꺼내 보여주는데 대천마을의 강이 보인다던가 하는 식이예요. 그 이야기를 아파트의 아이들이 듣는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통의 장이 마련되고, 어르신들도 도서관에서 하실 일들이 생겼고,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도 이어지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개인 차원에서도 그런 일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이제라도 아카이빙에 관심이 생긴 분께 요령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면?나이가 있는 분의 경우에는 일일이 쓰기보다 녹취를 하는 방법도 있어요. 제일 편리한 것은 사진인 것 같아요. 요즘 스마트폰이 다들 있고 찍기도 쉽고 해서 기록을 체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어요. 대부분은 사진들을 찍은 후에 분류를 안 해놓는데, 일정 주기를 두고 1년이나 석 달씩 주제별로 분류를 해 두면 좋아요.요즘은 컴퓨터에 저절로 연도순으로 저장되는데 이걸 주제로 하는 거죠. 분류를 하면서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을 하면서 기록물도 다시 보게 되지요. 비슷한 것은 삭제도 하고, 삭제를 할 때는 어떤 걸 남겨야 할지도 생각하게 되고.그런 식으로 아카이빙이 돼 있으면 나중에 따로 뽑아서 누구 생일이나 특별한 때에 선물로 줄 수도 있고, 거실에 전자액자 같은 것으로 활용해서 볼 수도 있고요.-책 제목을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로 붙였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개인의 상처도 밖으로 드러내야 치유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만 해도 그래요. 고향이 포항인데, 남녀차별이 심한 집에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께서 저한테는 고등학교도 상고를 가라고 했고, 대학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결국 고3 때 집을 나와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 정도였나요?오빠가 먼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오빠가 안내를 해줘서 간신히 서울에서 지원한 대학에 가서 시험도 보고 했어요. 오빠로서는 미안했던 거죠. 아버지는 평소에 가장 똘똘한 아이를 대학에 보낸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제가 똘똘한 편이었거든요.(웃음) 하지만 오빠가 대학을 먼저 가게 되면서, 저는 속으로 ‘아, 이제 나는 대학에 못 가겠구나’ 하면서 고1, 고2 때 방황을 심하게 했어요. 아마 그래서 오빠가 저한테 잘 해줬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입장이 다 이해가 가요. 늦게 결혼하셔서 저를 낳으셨고, 항만 노동자로 일하셨는데 자식들 학비가 들어갈 때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죠. 경상도에서 아들 교육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그 과정에서 제가 받은 상처를 나중에라도 드러내지 않았으면 원망으로만 남았을 텐데 기록을 했어요.-어떻게요?대학에 들어가서 2학년 올라갈 무렵이었는데, 혼자 아버지 삶을 기록으로 정리해봤어요.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전쟁을 겪고 평생 노동자로 일하신 분이었어요. 옛날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그런 일생을 써내려 갔어요. 그렇게 기록을 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했고 그렇게 해서 저도 치유가 된 것 같아요.안 씨의 책 말미에는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실려있다. 포항시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라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뒤에 자신의 소회를 적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어떻게 기록에 대한 생각으로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아버지와 형을 일찍 잃었다.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농지도 잃었다. 십대에는 한국전쟁을 치렀고 결혼과 동시에 도시에 나와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1968년 2월 1일 착공)과 각종 지방 국도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나갔다.1968년 포스코(당시 포항종합제철)가 포항에 세워지던 해 첫 아이를 낳고 철강도시 포항의 항만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를 낳던 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고, 일용노동자였다가 항만노동자로 다시 철강노동자로 숨 가쁘게 사시다가 제7차 국가경제발전계획이 끝나던 해에 생을 마감했다.도로를 건설하고 부두에서 철강을 나르며 국가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느라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은 사라졌으나 포항은 여전히 개발 중이며 새마을운동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나라로 수출되고 철강기업 포스코는 여전하다.(하지만) 저 사진 속에는 개발과 발전과 속도가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아카이브를 공부하고 난 후에 저 사진을 다시 봤다. 어린 자식에게 화석과 별을 보여주며 너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항운노동조합원으로 포스코에서 삼 교대로 근무하면서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시간을 잃었다.자전거가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변했고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경쟁시켰다. 모든 말과 행동이 돈을 향했다.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왜 변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절을 잊고 출세와 투자와 성공을 주문했다. 그의 영혼의 속도는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기록하지 않으면 삶은 다시 전복될 것이다.-명함에 북큐레이터라고 쓰셨더군요. 어떤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세요?그렇지 않아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북큐레이션에 관한 책을 내려고 쓰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 좋은 책이죠. 대개는 남이 좋다고 하는 책들을 보잖아요. 자기 인생에 필요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많이 노출된 책, 읽기 편한 책, 읽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은 책을 주로 찾는 것 같아요. 읽는 방식도 자기 방식으로 읽지 않고 서평 중심으로 읽는다든지 하는 것 같아요-얼마나 읽으시지요?하루에 한 권 정도는 읽는 것 같아요. 잡다하게 읽어요. 추리소설을 제일 좋아하고 생태에 관한 것을 좋아해요.-직업상 봐야 할 책이 많을 것 같군요.매일 아침 3개 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스크랩을 해요.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에 가서 잡지책도 다 보구요. 매일 밤 목록을 업데이트하는 식으로 주제별로 스크랩을 해요. 지금까지 스크랩북이 18권쯤 돼요. 제 나름대로는 ‘책 나무’라고 해서 책의 계보를 엑셀에다 기록하는 게 있어요.‘정원’ 하면 정원에 관한 책들이 도서명, 저자명 쭉 나오는 식이죠. 사람들에게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책을 알려줄 수 있을 만큼 목록들을 만들죠.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 책은 잘 안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해요.-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어떤 게 있습니까?일본 작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를 꼽고 싶습니다.-학부모들은 자녀 독서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언하신다면?아이들에게 뭘 읽으라고 하기보다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정말 즐겁게 읽으면 아이들도 따라 찾아 읽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은 강요되는 게 많은데 책까지 강요하면 곤란해요.우리나라 교육 과정이 여러 종류의 책들을 보면서 과제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과서만 집중하도록 돼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여러 책을 읽고 참조하는 방식으로 독서 습관이 발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그런 상황에서 집에 와서 엄마가 무슨 책을 읽으라고 하면 정말 화가 난대요. 머리도 쉬어야 하는데. 뭐든 즐겁게 체험한 경험이어야 나중에도 오래가고 지속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잘 먹던 당근도 영양가 많으니까 꼭 먹으라고 하면 잘 안 넘어간다잖아요.제가 이런 답을 해드리면 질문하신 부모님의 표정이 냉랭해지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요즘 북큐레이터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올해 5월부터 20회차로 북큐레이터 양성 과정을 진행했는데 다 찼어요. 2시간짜리 20회로 총 7개월짜리인데 수강생이 20명으로 제한돼 있었어요.오늘 저녁에도 마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하는 과정 강의를 가야 해요. 총 7회차 중에서도 오늘이 3회째예요. 은평구 프로그램 경우에는 무료지만 구민이어야 하고, 오늘 것은 유료인데 아무나 신청할 수 있어요.-어떤 분들이 참가하나요?도서관에서 일하는 분들, 서점에서 일하는 분들도 계시고, 독서 동아리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현역이신 입장에서 직업으로서는 어떤가요?수입이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면서 제가 좋아하는 책에 관한 일을 하는 거니까 좋은 거죠.(웃음)“글을 고쳐 쓰는 동안 포항에는 달팽이라는 이름의 작은 서점이 생겼다. 독립출판물과 인문학책을 판매하는 동네 책방인데 ‘달팽이 트리뷴’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한다. 지역 사람들과 역사를 공부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했다. 속도를 늦춰야 사람이 보인다. 기록은 삶을 느리게 하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들여다보게 한다. 삶의 속도가 영혼의 속도에 맞출 시간을 선물한다…다른 이들도 이 글을 읽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시작하면 좋겠다. 에필로그에 실린 내 아버지의 사진이되 나의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듯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기록물 안에서 사회 공공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고르거나 가치를 부여하거나 재해석해서 광장으로 가져나와 이야기를 들려주길 희망한다.상처를 드러낼 때 반드시 그 손을 잡는 이가 있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영화로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거나 디지털 기기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가 출현한다. 상처가 기록이 되고 기록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도록 이제, 아카이브를 시작할 시간이다.”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마지막 단락 중에서◆안정희북큐레이터.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와 경기도서관총서 공모당선작 ‘책 읽고 싶어지는 도서관 디스플레이’를 썼고 ‘가이와 언덕지기 라이’를 번역했다. 서울도서관 등 100여 개 도서관에서 책과 책 읽기에 대해 강의한다. 은평구립도서관, 인천계양도서관 등에서 북큐레이터 양성과정 프로그램을 기획,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국경을 넘어서는 역사대상 어린이청소년역사책’ 심사위원, 도서문화재단씨앗의 에코라이브러리 장서개발 및 주제도서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인천광역시도서관발전진흥원의 계간지 ‘도서관, 말을 걸다’에 ‘미술관 옆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 중이다.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유하윤 인턴기자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7/2015112703400.html   
  • 2015-11-28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실크로드를 이야기하자면 당나라 시절의 서역기행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주역이 현장(玄奘, 602~664)이다. 그는 당나라 초기 뛰어난 고승이자 불교 경전 번역가였다. 우리에게는 삼장(三藏)법사로도 유명하다.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두루 통달해서 얻은 별칭이다.◆삼장법사 여행길에 손오공은 없었다삼장법사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근한 것은 ‘서유기(西遊記)’ 덕분이다. 명나라 시대의 소설 작품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기행의 주역이 삼장법사다. 그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도중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를 차례로 만나 일행이 되어 겪게 되는 무용담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국내에도 소개됐다.하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현장이 불경을 구하러 서역기행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무런 일행도 없이 홀로 모험의 길을 나섰다.그가 인도로 가기 위해 중국 국경을 넘은 때는 629년(唐太宗 貞觀3年) 8월,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당시 즉위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당 태종(599~649, 재위 626~649)은 백성의 어느 누구도 중국 땅을 벗어나 실크로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하지만 현장은 혼자서 월경을 감행했다. 불법(不法)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 현장 모습 추정 복원도◆17년간 2000km 기행...130개국 견문그렇게 시작된 현장의 여행은 햇수로 무려 17년이 걸렸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직접 걸어서 다닌 나라만 해도 110개국이었다. 귀로 전해들은 20여개국까지 포함하면 그가 직간접으로 접한 나라는 130개국이 훌쩍 넘는다.그가 다닌 길을 거리로 계산해도 총 5만여리, 지금의 단위로는 2000km에 달한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불교 유적지 가운데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현장은 그 긴 시간 각지의 대덕(大德, 고승)들을 찾아 다니며 스스로 불교의 깊은 뜻을 터득했다. 드디어 645년 1월 무사 귀환했다.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경전 657부와 부처의 육사리(肉舍利) 150과, 석가상 7구를 갖고 왔다. 떠날 때 국법을 위반했던 터여서 귀국 후 죽음을 각오했지만, 뜻밖에도 당 태종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당 태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 현장이 17년간 보고 들은 중국 서쪽 나라들의 정보는 더할 수 없이 요긴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그가 가져 온 경전을 전시 보관하기 위해 652년 장안에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지었다. 그 안에는 대안탑(大雁塔)을 세웠다. 대안탑은 원래 50여미터 높이의 오층탑이었으다. 하지만 화재 등으로 인해 세 차례 중수를 거쳐야 했다. 현재 7층(64m)인 모습은 17세기에 중수한 것이다. 탑의 1층 출입구 좌우 벽에는 652년 태종이 현장에게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고종의 ‘술삼장성기(述三藏聖記)’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두 비석에도 현장은 ‘삼장’으로 언급되고 있다.◆12권에 7세기 중앙亞-인도의 모든 것 담아현장의 ‘대당서역기’는 646년 7월에 완성됐다. 모두 12권으로 편성된 ‘대당서역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여행기라기보다는 지리서에 가깝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7세기 전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당시 그 지역의 기후, 풍토, 민족, 습관, 언어, 물산, 종교, 미술, 전설 등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그런 ‘대당서역기’는 당 태종에게도 아주 중요했지만, ‘지금 이곳’ 실크로드를 연구하는 학자들로서도 필독서라 할 만하다.사실 이 책은 현장이 직접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체험하고 견문한 내용을 다른 승려인 변기(辯機)에게 구술해 집필하도록 한 것이다. 변기는 왕의 칙령으로 645년부터 현장의 경전 번역을 돕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에 무려 4부의 경전 번역을 마쳤다. 그만큼 총명했다. 하지만 변기는 자신의 기량을 다 펼치기도 전에 극형에 처해졌다. 황제의 딸, 그것도 기혼의 여인을 사랑한 죄값이었다.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법현의 ‘법현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3대 여행기로 손꼽힌다. 이들 세 구법승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 여행하고,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했던 인물이 바로 현장법사이다.▲ 2001년 탈레반의 포격으로 폭파된 바미얀 서대불(왼쪽)과 동대불. 각각 38미터과 55미터다. /사계절 제공그는 자신이 돌아본 7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대불에 관한 기록이다. 이 석불은 불행히도 2011년 탈레반의 폭파 만행으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탈레반에 폭파된 바미얀 대불의 최초 문헌대당서역기는 그 바미얀 대불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이기도 하다. 중국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현장은 바미얀 국왕의 왕궁에서 공양을 받으며, 바미얀의 불교사원지 이곳저곳을 방문했다.15일 동안 머물면서 그는 자신이 본 금빛 반짝이는 높이 38미터와 55미터의 대불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55미터 높이라면 지금으로 치면 20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돼주었을 거대한 금빛 불상은 현장에게 꽤 큰 충격이던 모양이다.그는 귀국길에 들른 중앙아시아의 호탄에 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그대로 입증해 준다. 특히 호탄의 한 사원지 벽면에 그려진 용녀전설도(龍女傳說圖)는 ‘대당서역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 단단 월릭 용녀전설도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성의 동남쪽에 큰 강의 강물이 갑자기 끊겼는데, 왕이 알아보니 물속에 사는 용녀의 소행이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된 용녀가 새로이 지아비를 얻고 싶어 심통을 부린 것이었다. 이 때 나라의 한 대신이 자청하여 말을 타고 강물로 들어가 용녀의 남편이 되어 물길을 되살렸다.”지금은 희미해져버린 벽화의 옛 사진에는 아름다운 용녀와 강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 대신이 그려져 있다. 대신이 타고 있는 점박말은 호탄 지역의 특산말이다.◆고대 비단 전설에 관한 기록도고대 비단 전설에 관한 그림인 잠종전설도(蠶種傳說圖)에 관련된 기록도 있다. “호탄 사람들은 뽕과 누에를 원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호탄왕은 중국에 혼인을 청했고 신부에게 뽕과 누에를 가져와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신부는 남몰래 뽕과 누에 종자를 구하여 자신의 왕관에 숨겨 호탄에 가져왔다.”나무 위에 그린 이 그림은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 오럴 스타인이 호탄에서 북동쪽 100킬로미터 떨어진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단단 윌릭에서 발견했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호탄 사람이 뽕과 누에 종자가 숨겨져 있는 신부의 왕관을 가리키는 장면이 나온다.▲ 잠종전설도현장이 귀국 당시 가지고 온 7구의 불상은 당시 인도의 각 지역에 봉안돼 있던 그림과 조각을 본으로 해서 만든 모각상(模刻像)들이다. 현장이 가져온 각종 경전과 불상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주작문 남쪽에 진열됐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봤다. 그 다음 날에는 스무 마리의 말에 실려 떠들썩한 행렬과 함께 홍복사(興福寺)로 옮겨졌다고 한다.그 후 이 유물들은 648년 12월 장안의 대자은사로 이송됐다. 당시 온 도시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경전과 불상을 갖가지 종류의 수레 위에 안치하고, 불상 앞 양쪽에는 각각 큰 수레를 배치했다. 수레 위에는 깃발을 단 긴 장대를 두었고, 그 뒤에는 사자(獅子)가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당 태종과 황태자는 안복문(安福門) 누각 위에서 손에 향로를 들고 이를 보냈다”고 돼 있다.현장이 가지고 온 7구의 불상에 대한 그 후의 내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적어도 당대의 불상 양식을 크게 변화시켰을 것은 틀림없다.현장법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 내용은 각색되어 희곡으로도 공연되었고, 원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책으로도 출판됐다. 그것이 바로 ‘서유기’이다. 애석하게도 원대 ‘서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읽는 ‘서유기’는 명나라 말인 1570년경 오승은(吳承恩)이 ‘대당서역기’를 기초로 찬(讚)한 구어체 장편소설이다.◆경천사와 원각사 석탑의 원대 서유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경천사지 십층석탑(왼쪽)과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 십층석탑지금은 사라진 원대 ‘서유기’에 담긴 이야기의 장면이 흥미롭게도 한국의 경천사 십층석탑(1348년 국보 제86호)과 원각사 십층석탑(1467년 국보2호)에 새겨져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인데, 잘 알려진 대로 친원 세력이 발원했고, 제작은 원나라 장인이 한 것이다.경천사 십층석탑이 만들어지고 120여년 후인 1467년 지금의 탑골공원에 역시 대리석으로 원각사 십층석탑이 건립됐다. 두 기의 탑에는 각종 조각이 있는데, 바로 기단부에 ‘서유기’가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석탑을 도는 참배자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이다. 이곳에 조각된 ‘서유기’는 명대 ‘서유기’가 간행되기 이전, 원의 ‘서유기’의 장면을 새긴 것이다. 현재 원대 ‘서유기’의 원본은 없이 단편적인 자료로만 확인되는 상황에서 이 두 탑에 새겨진 ‘서유기’의 장면은 더 없이 소중하다. 안타깝게도 두 탑의 ‘서유기’ 조각 부위는 손상이 심해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우리 탑에 ‘서유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현장과 우리의 인연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경천사지 십층석탑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 등장인물들◆ 임영애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 경주대 실크로드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사찰운영위원회와 경상북도, 강원도 등의 문화재 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불교 조각사를 주로 연구한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 본 한국불교조각’ 등이 있다. 임영애 경주대 교수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0/2015112002661.html​ 
  • 2015-11-28
    ​▲ ‘콘텐츠의 미래’ 저자 프랭크 로즈 /프랭크 로즈 제공“미디어 경계는 사라졌다. 모든 미디어는 하나로 이어진다.”“생산과 소비의 경계도 흐려졌다.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다.”“상대를 몰입하게 하는 콘텐츠가 성공한다. 웃고 울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콘텐츠다.”“수준이 높은 콘텐츠에는 값을 지불한다. 하지만 유료화 전략은 유연하게 가야 한다.”“창의적인 일에는 엄격하고 경직된 체제를 피해라. 너무 서두르지 마라.”매일매일 새로운 뉴스와 책, 쇼, 게임, 영화, 광고가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의 시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디어·콘텐츠산업 전문 저널리스트인 프랭크 로즈(Frank Rose)는 “몰입하게 만드는 콘텐츠가 성공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한다.몰입을 맛본 소비자(관객, 독자, 청자)는 비단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자발적으로 모여 그 콘텐츠를 분석하고 관련 제품에도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그런 팬층이 단단한 콘텐츠일수록 수명도 길고, 다른 장르로 변주될 가능성도 크다. 판타지소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드라마 ‘로스트’나 ‘오피스’의 성공과 인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그처럼 몰입을 끌어내는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즈는 자신의 책 ‘콘텐츠의 미래’에서 그 비결을 10가지로 제시했다.①대중이 원하는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②2차 창작물로도 발전시킬 수 있는 깊이 있는 세계관을 담아야 한다.③현실과 혼동할 만큼 정교한 허구여야 한다.④이야기가 완전히 종결되기보다 모호함을 남기는 것이 좋다.⑤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부과하는 열린 세상을 제시해야 한다.⑥팬들의 견해와 감상이 반영되는 쌍방향성을 갖춰야 한다.⑦콘텐츠 소비자도 콘텐츠의 일부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⑧소비자의 반응을 치밀하게 예상하고 파악해야 한다.⑨다양한 플랫폼을 다 활용해야 한다.⑩무엇보다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추가로 그에게 이메일로 보충 질문을 해서 답을 받았다.-당신이 말하는 ‘콘텐츠’는 어디까지 포괄하는 것인가? 이전까지만 해도 미디어가 (문화생활의)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방송은 텔레비전, 영화는 영화관, 잡지 기사는 잡지 같은 식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에 종속됐다. 하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미디어가 하나로 이어진다. 미디어간 경계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콘텐츠’라는 단어는 미디어가 더이상 특정한 개별적인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시대에, 미디어가 전달하는 모든 내용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좋은 콘텐츠란 어떤 것인가?독자나 시청자에게 ‘감성적인 영향’을 주는 게 좋은 콘텐츠다. 해당 콘텐츠를 봄으로써 독자들이 웃거나 울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에 대해 곰곰히 숙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물’로 한정되지 않는다.특정한 규칙이나 목표가 있는 게임 같은 창작물도 콘텐츠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콘텐츠가 되기 위해선 게임도 그 속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담아야 한다. -당신은 ‘콘텐츠의 미래’에서 독자들이 콘텐츠에 단순히 참여(engagement)하는 것보다 몰입(immersion)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떻게 다른가? 몰입은 자신도 모르게, 의도치 않게 일어난다. 참여보다 덜 자발적(involuntary)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마디로 독자나 청자가 어떤 이야기에 푹 빠지는 일이다. 반면, 참여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게임을 하거나 지금 시청 중인 텔레비전 쇼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글을 남기는 등의 활동이 참여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어 하고, 이야기 속 인물들에 자신을 투영하고 싶어한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수동적이고 대개 상상 속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욕구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어떤 행동으로 일어날 때, 몰입과 참여가 동시에 이뤄진다. -디지털 시대의 프로슈머(prosumer)를 강조했다. 어떤 사람인가?산업화 시대에는 분야별 경계가 확실했다. 생산자는 생산자, 소비자는 소비자였다. 하지만 디지털화는 이런 경계를 무너뜨린다. 개개인이 특정한 역할만 맡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얘기다. ▲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2009)’의 팬들이 만든 백과사전 웹사이트 ‘아바타 위키’의 첫 화면-현재 콘텐츠 산업이 직면한 환경을 어떻게 보나?기술과 사회, 산업간 관계를 설명하는 열쇳말은 ‘경계(boundary)’와 ‘모호함(blur)’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엔 작가(콘텐츠 생산자)과 독자(콘텐츠 소비자)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게임, 소설, 오락, 광고 등 콘텐츠 형태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현실과 허구간 경계도 희미해진다. 디지털 시대는 독자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와 본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도록 촉진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다. 그동안 영화관의 ‘화면(screen)’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캐머런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영화감독들은 이제 화면을 장애물로 취급한다. 화면이 관객과 관객이 소비하려는 콘텐츠를 분리하는 장벽이라고 생각한다. 2년 전 미 서던캘리포니아대 강연에서 조지 루카스 감독과 스필버그 감독은 지금 같은 형태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몰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카스 감독은 대형 자본을 들인 영화는 브로드웨이 공연이나 대형 스포츠 경기처럼 비싼 값에 표를 판매하고, 나머지 영화들은 온라인서비스로 이동할 것이라고 봤다. 스필버그 감독은 한발 더 나가 동영상과 영화, 컴퓨터가 하나로 연결된 유비쿼터스 화면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처럼 한 쪽에 걸린 화면 하나로 영화를 감상하기보다, 3D 형태로 내용을 ‘체험’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기술의 발달로 이런 형태의 영화 감상이 가능해진다면, 관객은 지금보다 더 콘텐츠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최근 콘텐츠 산업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혁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최근 수십년 동안 가장 인상적인 혁신은 단언컨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디지털로 만든 가상의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를 지운 기술이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가상현실은 단순한 눈속임 기술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가상현실 기술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본다. -빅데이터(big data)나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이 콘텐츠 산업에 미칠 영향은?데이터는 점점 더 많아지고, 더 구체적이게 됐다. 언론이 특히 수많은 데이터(자료)에 의존한다. 하지만 데이터에만 의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인간은 본래 다양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데이터만 활용해서는 내용이 단조롭거나 비슷비슷해지기 쉽다. -로봇이 사용 범위를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콘텐츠 영역에서는 어떤 역할은 어떨까?로봇과 인공지능은 몇 가지 형태로 콘텐츠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로봇이나 인공지능의 역할은 대부분 통계적인 업무로 한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나 기업 활동 분석 같은 것을 말한다. 관객이나 독자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감성적인 콘텐츠를 만들려면 아직 멀었다고 본다. -콘텐츠 산업 중에서도 앞으로 유망한 분야와 취약한 분야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나?아직까지 독자들은 수준 높은 콘텐츠라면 온라인상에서도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형태의 뉴스 제공업체, 즉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신문, 잡지, 방송사 등은 (디지털화에) 취약하다. 뉴욕타임스(NYT) 같은 몇몇 언론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출판업체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 어려워 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뉴스 제공업체로 떠오르는 중이다.-앞으로 점점 더 많은 개인이 콘텐츠 생산자로 등장하는 1인 출판 시대가 될 거라고들 한다. 어떻게 보나?이전에는 개인이 콘텐츠 창작자로 활동할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창작자다. 문제는 충분한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가, 콘텐츠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두 가지다. 모든 창작자들이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콘텐츠 산업에서 최근 주목하는 스타트업으로는?개인적으로 비디오게임에 대한 글과 창작물을 취급하는 ‘킬 스크린(Kill Screen)’의 팬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로 일한 제이민 워런이 설립한 업체다.-미디어들도 다들 유료화 모델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조언한다면?독특하고 아주 흥미로운 콘텐츠를 생산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엄격한 유료화 시스템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한 사례로 꼽은 NYT의 경우, 구글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깊이 있는 기사를 읽거나 추가로 기사를 찾아보기 위해선 돈을 내야 한다. -콘텐츠 생산 기업이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기업 운영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관리하는 일은 더 어렵다. 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고 경직된 체제를 피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언제 이야기가 완성될지, 언제 제작을 시작할지 같은 일정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픽사와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수장인 에드윈 캣멀 회장이 쓴 책 ‘창의성 주식회사(Creativity Inc.)’를 추천한다. 캣멀 회장 스스로가 콘텐츠 기업을 이끌면서 훌륭한 성과를 냈고, 저서에도 그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프랭크 로즈IT 전문매체 와이어드의 객원편집자., 뉴욕타임스(NYT)와 LA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영화·광고·IT 분야와 미디어·콘텐츠산업에 대한 글을 기고한다. 스탠퍼드대, 뉴욕대, 콜롬비아대 등에서 콘텐츠 산업과 언론에 대해 강의한다. 애플을 창업한 고(故) 스티브 잡스가 회사에서 쫓겨난 배경을 다룬 책 ‘에덴의 서쪽(West of Eden)’과 헐리우드에서 일하는 영화인들의 관계사를 담은 ‘에이전시(The agency)’ 등을 출간했다.유한빛 기자 hanvit@chosunbiz.com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5/2015112500964.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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