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03-23
    북스조선 유영훈 기자['지금은 중국을…' 펴낸 '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 교사 모임']"중국의 진짜 모습과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중국이 앞으로 세계 중심에 우뚝 설 것이라고. 그런데 실상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 세계인이 경계하는 중국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시하는 건 아닌지, 중국의 발전이 못마땅해서이든 두려워서이든 그들의 발전을 일부러 외면하는 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 교사 모임(이하 중국어 교사 모임)'을 이끄는 심형철(54) 오금고 교사는 작년 2월 전국의 동료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했다. 새 학기 중국어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중국에 대해 무엇이 알고 싶은지 쓰게 한 후 그 내용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질문을 바탕으로 중국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그는 전국의 학생들에게서 온 질문지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쳤다. 그러나 질문의 내용은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현직 중국어 교사들로 구성된 '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 교사 모임'"중국인들은 왜 인육을 먹나요?", "중국인들은 장기매매를 한다는데 진짜인가요?", "중국 음식은 쓰레기라는데 사실인가요?", "중국 물건은 왜 질이 안 좋아요?", "중국인들은 더럽다는데 진짜인가요?"중국에 대한 학생들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책을 만들겠다는 꿈은 '빛 좋은 개살구'였을까. 그야말로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질문이었다. 이에 뜻이 맞는 선생님들이 모여 중국어를 잘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했다. '깊지는 않지만 넓게, 무겁지는 않지만 가볍지도 않게, 학생과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라는 3가지 원칙을 세운 후 1년여간 자료를 수집하고,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나온 책이 '지금은 중국을 읽을 시간'(세그루)이다.'지금은 중국을 읽을 시간'  심형철 교사는 "'중국어 교사 모임'은 그동안 여러 차례 중국을 취재하고 여행하면서 중국과 중국문화의 저력을 발견하고 중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웃이 먼 나라가 되지 않게 하도록, 동반성장의 좋은 모델을 연구하고 청소년들에게 중국을 바로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중국이 뜨니 중국어 교사도 덩달아 떴다"라고 말한다. 30여 년 전 중국어 교사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학교에서 중국어도 가르쳐요?"라며 신기해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해 "선견지명이 있었네요"라며 부러워한다고 한다. 이어 그는 현직 중국어 선생님들께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중국의 발전된 모습과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들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21/2016032102583.html​
  • 2016-01-09
    ​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 유라시아를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들▲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사행 경로 /이하 김장구 연구원 제공쿠빌라이 칸의 통치시기에 몽골을 왕래하고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노 드 카르피니(Giovanni Plano de Carpini)와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을 아는 이는 극히 적을 것이다. 이들은 마르코 폴로보다 20~30년 앞서, 각각 구육과 뭉케 카안의 통치시기에 대몽골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로, ‘몽골의 역사(Ystoriae Mongalorum)’와 ‘몽골기행(Itinerarium)’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후대에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의 여행기 ‘몽골제국 기행’을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세계 제국 ‘대몽골국’의 탄생우선, 카르피니가 몽골로 사행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몽골고원은 9세기 초반에 위구르제국이 멸망한 후 분열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어서 거란(遼)을 멸망시킨 여진 왕조(金)는 초원 유목민의 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타타르(Tatar) 부’를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훗날 칭기스 칸이 되는 테무진(Temüjin)의 아버지 예수게이(Yesügei) 바아투르(ba’atur·용사)가 타타르부에 의해 독살당하게 된다. 이런 혼란한 상황을 ‘몽골비사’에는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수장을 잃은 몽골부의 구성원들은 열 살 전후의 어린 테무진을 버리고 떠나가 버렸다. 테무진은 기나긴 고통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을 견디고, 1206년 모든 유목민들에 의해 ‘칭기스 칸(Činggis qan)’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γol ulus· 대몽골국)'라고 정했다.▲ 칭기스 칸의 초상화1227년, 일생을 정복전쟁으로 보낸 칭기스 칸이 탕구트(西夏) 원정 도중에 사망하자, 쿠릴타이를 거쳐 1229년에 셋째 아들 우구데이(Ögödei)가 대칸(qa'an)으로 선출되었다. 우구데이는 금(金)과 고려(高麗)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카라코룸(Qara qorum)에 성과 궁전을 짓는 한편 제국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역참(驛站·ĵam)을 재정비하여 세계 각지에서 몽골제국의 수도로 올 수 있게 만들었다. 카르피니, 루브룩, 마르코 폴로 등 중세 유럽인은 바로 이 역참망에 의해 대몽골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안내되었던 것이다.▲ 우구데이 카안의 초상화우구데이 카안은 1234년에 바투(Batu)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2차 서방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241년 말 우구데이는 사망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바투의 서방원정군은 일단 진격을 멈추게 되었다.◆ 몽골과 유럽이 무렵 이슬람과 싸우고 있던 유럽에는 이슬람 너머 먼 동쪽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국가가 있으며 그 나라를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에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이 찾아왔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을 타르타르(Tartar)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동방으로부터의 공포는 희망적인 ‘프레스터 존 전설’과 절망적인 ‘타르타르’라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유럽인들에게 다가왔다.▲ 타르타르(몽골)의 이미지서유럽은 ‘지옥(Tartarus)에서 보낸 타르타르[몽골]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1245년 6월 리옹(Lyons) 공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동유럽과 러시아 방면의 동방전도를 맡고 있던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초창기부터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카르피니는 이미 리옹 공회의 개최 2개월 전에 몽골을 향해 출발한 상태였고, 교황은 회의에서 이에 대한 추인을 요구한 것이었다.◆ 칭기스 칸 이야기카르피니는 칭기스 칸 휘하의 몽골 군대가 흉노(匈奴) 이래 유목국가의 전통인 십진법에 기초한 ‘천호(千戶)’로 조직되었으며, 각각의 장(長)들은 칸이 지정해 준 장소를 벗어날 수 없고, 칸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일언반구도 없이 복종하고, 특히 전쟁에서 도망친 군사들과 포로로 잡힌 동료를 구출하지 않은 나머지 부대원 등은 모두 죽음을 당한다고 하여, 칭기스 칸의 위엄과 몽골 군대의 규율이 엄격함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런 강력한 몽골군이 그때까지 정복한 나라와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일일이 열거하였다.“그들이 정복한 나라와 민족은 다음과 같다. 키타이(Kytai), 나이만(Naimani), 솔랑기(Solangi), 카라키타이(Karakytai) 즉 검은 거란(nigri Kytai), 코마니아(Canana?), 쿠마에(Tumat?) … 바그다드(Baldac), 그리고 사르티(Sarti) 등이다. … 지금부터 말하려는 나라들은 용감하게 타르타르에 저항했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복속하지 않았다. 대 인디아(India Magna), 망기아[Mangia], 알란(Alanorum)의 일부, 키타이(Kytaorum)의 일부와 사히(Saxi) 등이다.”이들 나라와 지역 이름만 보아도 대몽골국의 정복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몽골문자카르피니는 몽골 문자에 대해서 “몽골은 이전에는 공식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의 문자를 차용했는데, 지금 그들은 그것을 몽골 알파벳(litteram Mongalorum)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몽골이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것은 맞지만, 위구르인들에게서가 아니라 나이만 부족을 정복한 후 포로로 사로잡은 타타통가(Tatatongγa·塔塔統阿)를 통해서였다. ▲ 위구르식 몽골 문자아울러 카르피니가 몽골 알파벳, 즉 ‘몽골 문자’라고 기록한 것은 ‘몽골 비칙(Mongγol bičig)’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정확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몽골인들이 이미 ‘위구르 문자’가 아니라 ‘몽골 문자’라고 불렀다는 중요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카르피니보다 몇 년 늦게 몽골을 방문한 루브룩도 ‘그들은 꼭대기에서 쓰기 시작하여 선을 아래쪽으로 내려 적고 같은 방식으로 읽는데, 그 다음 행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각각 이어진다.’고 쓰는 방식에 대해서까지 정확한 묘사를 하였다.◆ 구육 카안을 알현하다▲ 구육 카얀의 궁정. /러시아 번역본 삽화카르피니 일행이 도착하자 구육은 그들의 관습대로 막사와 양식을 제공해주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더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구육은 카르피니 일행을 자신의 어머니 투레게네(Töregene)에게 보냈다. 그 곳에는 2000명도 더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몽골 궁정에 도착한 사절은 우선 궁정 밖 수백 미터 전에 말에서 내린 다음, 수석서기가 호명하면 궁정 앞으로 간다. 카르피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는 칭카이(Čingqai)가 수석 서기였고, 루브룩이 방문했을 때는 불가이(Bulγai)가 최고의 대신이었다. 그런 다음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등 금기 사항을 듣고 칼이나 무기를 숨기지 않았는지 철저한 몸수색을 받고 동쪽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칸을 선출하는 장소에 대해 카르피니는 ‘시라 오르두(Šira ordu·황금색 궁정)’라고 정확하게 적었으며, 그 곳에서 벌어진 대칸의 즉위 광경에 대해 “첫째 날 그들은 하얀 벨벳 옷을 입었고, 구육이 오는 날인 둘째 날에는 모두 빨간색 옷을 입었다. 셋째 날에는 파란 벨벳으로 된 옷을, 넷째 날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라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 교황의 서신그런 다음 카르피니는 다시 한 번 호출되었는데, 이번에는 교황의 서신에 대한 대칸의 답신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구육 카안의 답신을 번역하고 적는 과정에 대해 카르피니는 마치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처럼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 때 몽골어 원본과 함께 한 통의 페르시아 번역본이 만들어졌고, 게다가 카르피니는 다시 라틴어로 적었다. 이전에는 라틴어 본만 알려졌었는데, 1920년 바티칸 공문서보관소에서 페르시아어본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페르시아어 판본에도 구육 카안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몽골어본과 함께 페르시아어본도 ‘구육 카안의 국서’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카르피니는 구육 칸을 직접 만나본 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술했다.“지금 황제는 마흔에서 마흔 다섯 쯤 또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매우 지적이고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태도는 심각하고 진지하다. 그는 가벼운 이유로도 웃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고, 어떤 경박함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런 말을 그와 같이 지내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들었다. 그의 집안에 있는 기독교도들은 그(구육)가 기독교도가 되려고 했던 것에 대해 확고하게 믿으며 또한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기독교의 물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항상 텐트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이 서술은 마치 구육이 기독교도인 것으로 적고 있다. 물론 구육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 비해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등거리 종교정책이었던 바, 각자 자신이 속한 종교가 마치 특혜를 받고 있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나타낸 것이다.◆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과 이방인들카르피니는 대몽골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대해서도 “이 땅은 백분의 일도 비옥하지 않고, 흐르는 물로 관개를 하지 않는다면 과일이 열리지도 않으며, 실개천은 몇 개 있지만 강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그 곳에는 카라 카롬(Cara-carom)이라고 불리는 꽤 큰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마을이나 도시가 없다. 우리는 그 도시를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황제의 가장 큰 숙영지인 시라 오르다(Syra-Orda)에 있을 때 그 곳은 반나절 정도면 여행할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웠다”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몽골-독일 공동 카라코룸(하르 호린) 발굴 사진‘카라 카롬(Cara-carom)’은 카라코룸(Qara-qorum)을 말하며, 중국 측 한문 기록에는 코룸(qorum)의 음에 따라 화림(和林)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시라 오르다(Syra-Orda)’는 시라 오르두(Sira ordu)로 구육 카안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다.루브룩은 카라코룸 도시 전체 규모에 대해서 얕보는 투로 생-드니(Saint Denis)보다 못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도시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시장이 있는 사라센 상인들의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키타이(중국) 장인들을 위한 구역이며, 궁전이 있는 구역은 따로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카라코룸에 거주하는 키타이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 온 장인들이며, 사라센인들은 대부분 상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네 개의 문이 나있다고 한다. 그 네 개의 문밖에는 각각, 동쪽 문에서는 수수와 여러 다른 종류의 곡식을 팔고 서쪽 문에서는 양과 염소가, 남쪽 문에서는 소와 마차가 그리고 북쪽 문에서는 말을 파는 장이 선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카라코룸의 종교시설에 대해서는 “열두 개의 다른 사람들이 속해있는 우상숭배 사찰이 있고, 마호메트의 종교를 선언하는 두 개의 모스크들이 있으며 마을의 끝에 하나의 크리스트교 교회가 있다.”고 서술하였다.▲ 은제 나무 /러시아어 번역본 삽화루브룩은 뭉케 카안을 위해 아이락(airaγ, 마유주), 포도주, 검은 쿠미스(정제된 마유주), 보알(蜂蜜酒), 테라키나(쌀술) 등 다섯 가지 음료가 나오는 ‘은제(銀製) 나무(mönggün mod)’를 제작한 파리 출신의 장인 기욤 부시에(Guillaume Buchier)를 만났으며, 그의 양아들 바실이 몽골어를 아는 훌륭한 통역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바실은 뭉케 카안이 궁정에서 각 종교의 우위 논쟁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도록 했을 때 루브룩의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다.◆ 카르피니와 루브룩, ‘솔랑기(高麗)인’을 묘사하다.칭기스 칸은 1206년 몽골초원을 통일한 다음, 이어서 주위의 세력을 정복하기 위한 대외원정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과 집단이 차례대로 대몽골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주로 위구르 등 투르크 계통과 거란 출신의 인재들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점차 무슬림과 탕구트, 여진인과 북부 중국의 한인들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칭기스 칸이 몽골초원을 통일한 직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몽골비사’에는 “그 뒤에 아홉 가지 언어의 사람들(yesün keleten irgen)이 텝 텡게리에게로 모여”라고 적고 있다.여기서 ‘아홉 가지(yesün)’이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9’라는 숫자를 적은 것이 아니라 몽골어에서 헤아릴 수 없이 아주 많은 수나 종류를 말할 때 쓰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 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몽골초원에 존재했다는 의미이다.그 중에서 카르피니의 관심을 끈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솔랑기(Solangi)’, 즉 고려(高麗)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카르피니는 여섯 차례, “그들이 정복한 나라와 민족은 키타이, 나이만, 솔랑기, 카라키타이…” “우리는 칸의 궁정에서 …솔랑기의 수장을 보았는데…” “이 나라의 동쪽에는 키타이 사람들의 나라와 또한 솔랑기라는 나라가 있고…” “나중에 … 몇 명의 키타이와 솔랑기의 수장들이…” “서기인 친카이는 …솔랑기와 다른 나라의 수장들의 이름을 적고나서…” “오히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솔랑기의 지배자의 경우처럼 그들이 직접 나서서 완전하게 통치권을 장악했다” 등이다.그리고 루브룩도 고려에 대해 각각 솔랑가(Solanga)와 카울레(Caule)로 두 번 언급했다. 특히 루브룩은 고려 사절에 대해서 “그들(Solanga)은 작았고, 스페인 사람들처럼 피부가 거무스름했으며, 기독교 부제들이 입는 겉옷처럼 생겼으나 조금 좁은 소매가 있는 튜닉을 입었다. …그리고 매우 장식적인 머리 모양이 만들어진다”고 했고, 이어서 “카타이아(Cataia) 너머에 한 나라가 있는데(Caule·고려), 몇 살이든 간에 그 나라에 들어가면 그 때의 나이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장인 윌리엄은 그가 어떻게 섬에 살고 있는 카울레(Caule)와 만세(Manse)로 알려진 사람들의 사절단을 보았는지 나에게 설명했다”고 아주 정확하고 자세한 묘사를 했다. 17세기 이후의 ‘몽골문 연대기’에도, 그리고 오늘날 몽골인들도 한반도의 사람과 국가를 지속적으로 ‘솔롱고스(Solonγos)’라고 부른다.◆ 카르피니는 교황이 보낸 간첩?카르피니가 판단하기에 자신이 보고들은 몽골은, 비록 새로운 대칸이 된 구육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이기는 하였지만, 결코 쉽게 기독교로 개종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특히 교황의 편지에 대한 구육 카안의 답장을 받아든 카르피니는 많이 당황하였을 것이다. 교황은 몽골을 대등한 관계로 생각하고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인데, 몽골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서신에 대한 구육의 답신 사진“위대한 칸 구육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영원한 하늘의 힘에 의해, 모든 백성의 바다와 같은 칸의 명령이다. …신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에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그 땅을 장악하였다. …만약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당신에게 알린다. 만약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우리가 어찌할 것인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몽골의 ‘세계정복 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문서를 전하게 된 카르피니와 읽게 된 교황은, 분명히 몽골이 다시 유럽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카르피니는 ‘타르타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의 전쟁 방식과 군율, 무기 상황을 자세히 관찰하고 정보를 입수하였다. 아울러 방비책에 대해 자세한 서술했다.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사전정보조차 불충분한 상황에서 몽골에 다녀온 카르피니의 여행기록은, 비록 4개월 정도의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카르피니의 몽골어와 몽골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보이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구육 카안이 교황에게 사신을 파견하려고 하자 카르피니는 이에 대해 냉철하게 대응하였다. 결국 몽골 사신과 함께 교황에게 되돌아가지는 않게 되었다.그리고 카르피니는 여러 차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그 이유는 ‘타르타르(몽골)’가 기괴한 존재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들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결국 타르타르는 ‘인간’이 아닌 ‘지옥(tartarus)에서 보낸 악마’와 같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1253~1255년에 몽골을 방문한 루브룩이 보다 객관적인 여행기록인 ‘몽골기행(Itinerarium)’을 남겼지만, 유럽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은 베스트셀러는 카르피니가 쓴 ‘몽골인의 역사(Ystoriae Mongalorum)’다. 이후 유럽은 지속적으로 아시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카안이 대몽골국의 중심을 대도(大都)로 옮기자 몽골고원으로 향하던 발길도 끊어지고, 몽골고원에 존재했던 이방인과 이문화의 흔적과 기억도 급속하게 희미해져버렸다. 그들은 이제 대몽골국의 새로운 중심 칸 발릭(Qanbaliγ·大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김장구(金壯救)동국대학교 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중앙아시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몽골국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몽골사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문명교류사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는 몽골문 사료, 불교경전 역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주 몽골 황금사’ ‘중국 역사가들의 몽골사 인식(공저)’ 등을 썼고, ‘몽골 세계제국’ ‘몽골의 역사’ 등을 번역했다.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05/2016010502121.html​ 
  • 2015-12-29
    ​▲ 한옥을 리모델링하거나 한옥 양식을 현대건축에 접목한 작업 덕에 ‘한옥 건축가’라는 별명이 붙은 황두진. 서울 효자동에 본인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운영한다. /박상훈 기자​​​서울대 건축과, 예일대 건축과 석사,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상, 서울시 건축상 2회 수상. 2004~2008년 북촌 한옥 리모델링 작업으로 ‘한옥 건축가’란 별명과 인지도를 얻음. 이력서 위의 건축가 황두진은 엘리트의 전형이다. 날카롭고 예민한 외모를 가진, 문장마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서울 통의동 황두진건축사사무소에서 만난 그는 기자의 예상을 단박에 깼다. 전위적인 예술가들마냥 민머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소를 띤 얼굴과 차근차근 답하는 말투, 역사책과 소설책, 건물 모형 따위가 가지런히 배치된 응접실 분위기가 편안했다.  도시 건축의 미래와 한국적인 건축에 대해 고민해온 그는 몇 년동안 고민한 결과물을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도심공동화, 긴 통근시간과 교통 체증, 몰개성한 재개발 건축 등 한국 대도시의 문제들이 ‘낮은 밀도’와 ‘용도의 단일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뭘까? 밀도가 높고 복합적인 건물인 ‘무지개떡 건축’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황두진은 생각한다. 스스로를 ‘동네 건축가’라고 부르는 그를 만나, 도시 건축의 대안에 대해 물었다. ◆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한국 도시엔 안 어울린다”―한국 건축만의 새로운 특징이 있습니까?“한국 건축의 특징을 굳이 말하자면, 다른 나라의 건축에 비해서 대체적으로 조형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조형이 강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외국 건축물과 비교해보면 건물의 성격이 강하지 않아요. 건물이 만들어지는 상황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럽의 도시 정책은 오래된 건물을 유지하기 위한 보존 중심입니다. 도시도 생명이 있는 유기체니까 수시로 변화해야 하는데, 유럽 도시들은 규제가 많기 때문에 그런 활력을 잘 받아들여줄 상황이 아닌 거예요. 그러다 보니 도시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한 처방으로 굉장히 강렬한 형태와 색깔, 조형 언어를 가진 랜드마크 같은 건물을 여기저기 심습니다. 유럽 도시의 매력은 이런 강렬한 건물들이 잘 보존된 역사적인 환경과 만들어내는 ‘극적인 대비’에서 비롯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입니다. ‘빌바오 효과(쇠락해가던 스페인의 지방 공업도시 빌바오는 랜드마크가 된 미술관 건물 덕에 관광업 전성기를 맞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건물의 강렬한 조형만이 아닙니다. 빌바오 구겐하임의 배경이 되는, 잘 보존된 역사도시인 빌바오도 중요해요.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우리나라 도시, 서울 같은 곳에 지어 놓으면 그런 강렬한 대비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건축가들은 강렬한 조형을 특징으로 한 건축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너무 혼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보니, 오히려 정숙하고 정제된 건물이 도시 전체와의 균형 면에서 더 잘 맞다고들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도시에는 절제하되 깊이가 있는 걸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그렇다면 한국의 건축은 도시와의 균형을 중시하는 현대 건축의 흐름과는 맞는 거군요. “우리나라는 ‘잘 보존된 도시’라는 맥락이 깔려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아직까진 (건축물들이) 들쭉날쭉 마음대로예요. 굳이 여기에 혼란을 더하지는 말자, 라는 (건축가들의) 공감대랄까요? 아우성을 치는데 혼자 조용히 있으면 그 사람의 존재가 부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건축사무소와 황두진 대표의 자택은 ‘목련원’이란 건물에 있다. 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에 3층짜리 새 건물을 연접해 증축했다. 그가 생각하는 ‘무지개떡 건축’을 실현한 건축물이다. /박영채 촬영,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제공◆ “낮고 단순한 건물이 도시 문제를 낳는다” 황두진은 건물 하나 잘 짓는 걸 목표로 두지 않는다. 현대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도시 생활이라면, 도시의 모습을 더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주거기능만 몰아넣은 폐쇄적인 아파트 단지, 밤이 되면 텅 비는 상업시설과 사무공간을 ‘시루떡 건축’이라고 부른다. 이런 단일 용도 건축물이 도심공동화, 출퇴근 문제 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대안으로 제시한 ‘무지개떡 건축’이란 어떤 건축물을 말합니까?“평균적으로 5층 정도 건물이면 도시적 보편성에 맞는 밀도를 달성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 다음엔 ‘이 건축이 충분히 복합적인가’가 문제죠. 일하는 건물에선 일만, 잠자는 건물에서는 잠만 자는가? 다시 말해 상주인구와 유동인구를 동시에 수용하는 건축인가, 어느 한 쪽만 수용하는 건축인가. 도시에서는 둘을 동시에 수용하는 건축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무지개떡 건축입니다.”―구체적인 구조와 형태를 예를 든다면요.“저층부는 카페나 꽃집 같은 상업시설, 중층부에는 사무실, 상층부는 주거시설이 들어가고, 꼭대기 층에는 옥상마당을 둔 형태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고층건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극단적인 얘기가 아니라, 무지개떡 건축물이 우리 도시의 평균적인 건물이면 여러가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1층짜리 주택과 상가가 죽 늘어선 동네가 있다면, 용무가 있을 때 먼 거리를 다녀야 합니다. 하지만 중층 복합 건물이 보급되면 여러 가지 기능을 가까운 공간에 모아둘 수 있겠죠.” ▲ 건축가 황두진이 고안한 ‘무지개떡 건축’인 중층 고밀도 복합건물의 개념도. /메디치미디어 제공―한옥 작업도 많이 하고 ‘한옥이 돌아왔다’는 건축 책도 쓰셨는데, ‘한옥의 특성을 살린 건축물’에는 어떤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보시나요?“제가 강조하는 밀도와 복합이라는 면에서, 한옥은 불리합니다. 하지만 한옥의 특성, 가치를 반영한 건축은 가능하죠. 예를 들어 한옥의 다공성, 공간이 열려 있다는 점은 좋습니다. 한국의 기후에도 잘 맞고요. 옥상마당이라든지 건물의 일정 부분을 통로로 확보하는 게 한옥의 영향인 거죠.” ―마당이 있는 집은 많은 한국인의 로망인데요.“100년 전만 해도 조상들은 100% 단층집에 살았어요. 토지밀착형 삶인데, 그래서인지 현대인에게도 마당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하지만 서울 인구만 해도 1000만명, 수도권까지 넓히면 2500만명이 모두 마당이 있는 단층집에서 산다면, 집으로 국토 전체를 뒤덮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건물이든지 옥상은 있으니까, 계획 단계부터 옥상을 잘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실내공간과 야외공간이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해요. 그냥 옥상에 문 열고 나가면 바로 정원이 있게끔. 통계를 찾아봤더니 서울 전체의 옥상 면적을 서울시 가구 수로 나누면, 47㎡(약 14평) 정도 되거든요. 절대 양으로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옥상이 서울시에 있다는 겁니다. 그게 전원생활과 교외에 대한 대안이다, 무지개떡 건축이 늘어나면 옥상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다, 이런 얘깁니다.” ―서촌을 지나다 보면 기와나 창호문 장식 같은 한옥 양식을 가미한 건물들이 제법 보입니다. ‘한옥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해진 기준이 있나요? “한옥을 현대 건축에 활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와 같은 직접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건 하나의 방법인 거죠. 또 다른 방법으로는 한옥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보면 ‘이건 한옥적인 상황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높은 다공성(통기성) 같은 한옥의 건축적인 특징을 활용한 거죠. 전통 건축을 현대 건축에 수용하는 방법이 다양해질수록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두진 건축가는 서촌 애지헌(愛知軒)을 ‘전통 건축의 형태’에 ‘첨단 기술이라는 기능’을 접목하는 형태로 설계했다. /박영채 촬영, 메디치미디어 제공◆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1순위 과제는 아니다”황두진은 서울, 그 중에서도 구(舊)도심에서 하는 작업들 좋아한다. 법적인 제약이 많아 타협하고 조율할 점이 많지만, 작업할 장소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일하는 게 재밌다고 설명했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서 일하는 건축가들만이 누릴 수 있는, 독특한 특권 같은 거죠.” ―요즘 서울에서 주목 받는 건축사업은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같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고가도로 공원은 있으면 좋은데, 그 사업이 우선순위가 그렇게 높을까, 라는 의문이 들어요. 공원이 만들어지면 왜 나쁘겠어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많은 자원과 관심이 투입되는 사업인데, 서울이라는 도시의 수많은 과제들 중에서 우선순위가 제일 높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얘깁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는 여전히 구도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종로구나 중구에 상주인구가 돌아오게 할 것인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미래를 생각할 때는 이런 문제들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뉴욕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시드니는 오페라하우스처럼 세계 유수 도시들을 보면 랜드마크라고 할 만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서울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어떤 게 있을까요?“남산타워(N서울타워)가 제일 지배적인 이미지인 것 같고, 그 다음이 세종로에서 바라본 경복궁. 이 두 건축물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자연과 인공적인 구조물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라는 겁니다. 남산타워는 말 그대로 남산 위에 있는 타워고, 경복궁을 랜드마크라고 할 때는 경복궁 뒤로 보이는 산까지 포함하는 거죠. 서울이 세계적인 대도시와 다른 점은 여전히 ‘자연이 굉장히 지배적인 도시’라는 거에요. 어딜 가나 산이나 강을 느낄 수 있죠. 인간이 아무리 크고 높은 구조물을 세워봐도, 규모나 시각적인 면에서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에서 랜드마크를 만들 때는 하나의 건물이 그 배경이 되는 산과 어떻게 연관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외국에도 자연과 인공물이 잘 어우러진 도시가 없지는 않을텐데요. “뉴욕은 자연의 존재가 잘 안 느껴지죠. 도쿄는 지대가 평평하고. 누가 저한테 서울이 어떤 도시인지 왜 특별한지 물으면 저는 이종격투기 선수에 비교할 겁니다. 서울은 단일 종목에서는 챔피언이 아닙니다.세 가지 기준이 있는데, ‘세계적인 대도시인가’ ‘자연이 아름다운가’ ‘역사가 오래됐는가’입니다. 대도시로서의 위상은 뉴욕, 도쿄, 어쩌면 상하이에도 밀릴지도 모르겠어요. 서울이 사실 행정구역이 넓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울산입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도시도 많아요. 스위스의 도시들이 그렇죠. 서울보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는 아테네,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있죠.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일단 체감하는 서울의 역사는 600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 세 가지 요소를 더해보세요. 다 갖춘 도시가 얼마나 있는지. 단일종목으로 겨루면 서울보다 나은 도시가 있겠지만, 이종격투기로 가면 서울이 승자라는 얘깁니다. 마이크 타이슨(권투 챔피언)은 아닌데 미르코 크로캅(정상급 이종격투기 선수) 정도는 되는 거예요(웃음).” 올해로 만 52세. 건축가로서 갈 길이 한창인 나이다. 일흔 즈음엔 자신의 작업을 총망라해 ‘한옥적 가치를 담은 건축 책’을 새롭게 출간하고 싶다는 ‘동네 건축가’의 행보를, 기대를 갖고 지켜보게 된다.   유한빛 기자 hanvit@chosunbiz.com조선비즈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24/2015122402899.html​​ 
  • 2015-12-28
    ​성격에서 나오는무의식적 힘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삶이 큰 목표, 포부, 개인적 과제처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스로 정한 모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힘에 농락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격을 바라본다면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기 한결 쉬워진다. /브라이언 리틀, ‘성격이란 무엇인가’ 중에서인간 성격에 대한 탐구는 4 세기 그리스의 철학과 화학 이론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리학의 한 학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부터다. 오늘날 심리학은 인간의 성격이 그 사람의 성공과 행복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조언한다. 이 방면의 대가인 브라이언 리틀 케임브리지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방한했다. 국내에도 번역된 ‘성격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이기도 한 그를 만나 성격과 삶의 관계에 대해 물어봤다.-요즘 심리학 서적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성격심리학이라는 것은 뭐지요?심리학의 하위 분야인데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서로 다르고 구별되는지를 주로 연구합니다. 유전학부터 사회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성격은 타고난다고도 하고, 자라면서 형성되거나 바뀔 수 있다고도 합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둘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 정도는 타고나는 유전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사회화나 역할 학습, 문화 규범과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을 5대 특성으로 나눠 설명하셨는데요.성격의 특성은 ‘경험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 ‘성실성(Consientiousness)’ ‘외향성(Extraversion)’ ‘친화성(Agreeableness)’ ‘정서적 안정성(neuroticism)’ 이렇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0가지 항목에 걸친 성격 검사(TIPI)를 통해 점수를 산출해 다섯 가지 성격 특성 중에서 개인의 해당 정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경험 개방성은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상호작용, 새로운 환경을 수용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반대로 개방성이 낮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거부감을 보이고 늘 하던 대로 하는 것을 편해 합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일부러 자극적인 상황을 찾는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그런 상황을 피합니다. 또 외향적인 사람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건드리거나 끌어안기까지 합니다. 내향적인 사람은 말도 다소 모호하고 복잡하게 표현합니다. 자극적인 행동도 적고 대체로 차분합니다. 성실성은 평소에 체계적이고 신중하며 조심성 있고 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 항목에서 점수가 낮은 사람은 즉흥적이고 부주의하며 경솔합니다. 친화성은 자기나 남이 보기에 즐겁고 협조적이고 친밀하고 남을 응원하고 공감을 잘합니다. 반면, 반친화적인 사람은 냉소적이고 남과 잘 부딪치고 불친절하고 인색해 보입니다. 정서적 안정성이란 신경질적인 성향과 반대의 경우입니다. 신경질적인 사람은 주체적으로 잘 살기 어렵고, 감정이 부정적이고 업무 만족도가 낮고, 신체 면역성도 떨어집니다.-성격이 건강과도 관계가 있나요? 예를 들어 친화성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특별히 심혈관질의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습니다. 친화적이지 않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늘어가는 피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쌓이고, 그렇게 쌓인 화는 심혈관질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은 믿을 만하고 주의가 깊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실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학교나 사회 생활을 더 잘하는 것도 있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잘 돌보기 때문입니다. 체중 조절을 잘 하거나 의사의 진단을 믿고 잘 따릅니다. 이처럼 성격의 특성은 우리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성격에도 좋은 성격과 나쁜 성격이 있나요? 성격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이유는 개인의 처해진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성격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좋은 성격을 말할 때 전형적으로 ‘개방적이고, 성실하고, 외향적이며 친화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부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외향적인 성격보다 내향적인 성격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좋은 성격이라는 것은 이처럼 문화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또한 억압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친화적인 사람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가 억압에 맞설 수 있을까요? 분명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 반(反)친화적인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정된 나쁜 성격이 있다고 하기보다는 개인과 행동이 상황에 어긋나거나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변할 수도 있나요?10년 전까지만 해도 타고난 유전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변화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전의 신경생리학에서는 성격은 전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신경가소성 때문에 어느 정도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닌 약간의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자유 특성’을 통한 변화입니다. 비록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이나 요구되어지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향적인 성격의 엄마가 딸 생일 파티를 열 때 딸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생일 파티를 하는 동안 활발하고 적극적인 엄마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장기간 바꾸는 것이 아닌 잠시 동안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다중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본연적인 성격의 특성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 극도로 피로해지는데 이는 자율신경계의 활동을 극대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심장 박동수는 빨라지고, 땀을 흘리며, 뇌가 비동기화되는 등 이러한 것들이 반복될 때 극도로 피곤해질 수 있고 육체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때 유익한 점은 개인 목표의 성공 가능성를 높혀줍니다. 개인 핵심 목표는 우리의 삶에서 중하기 때문에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때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관점은 자신을 바라보는 범위를 넓혀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본연적으로 친화적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 친화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개인 핵심 목표를 달성을 위해 친화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 ‘내가 친화적인 사람이구나’ 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성격은 상담이나 임상적 치료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또한 그것보다 쉬운 방법으로, ‘개인 핵심 목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가능합니다. 계속적으로 변화하려고 내적인 노력을 말합니다.예를 들어 ‘사교적으로 변하기’와 같은 개인 목표는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에서 좋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당신은 조금 더 사교적으로 변해야 해”라고 해서 외부에 의해 시작된다면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자기 스스로 결심에 의한 도전이나 자아 발견을 통해 “나는 조금 더 사교적으로 변해야겠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야겠어” “조금 더 성실해 져야겠어”와 같이 개인 핵심 목표를 세우면 달성하기 더 쉬워질 것입니다. 이 부분이 성격을 바꾸기 어려운 것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단계적으로 시작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교적으로 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적은 사람들이 모인 그룹에서 어울리기 시작해 그 후 조금 편안해 지면 다음에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룹에서 어울립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게 됍니다. 점차적으로 작은 단계의 개인 목표부터 시작해서 성격을 바꿔가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창의적인 지도자 중에 독불장군이 많은데 그럴 수밖에 없나요?매우 창의적인 사람은 경험을 즐기기도 하지만 내향적이기도 하고 남들과 친화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인 또는 타인의 개입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때문에 자기만의 독립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만의 창의적인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면 성실하고 상냥한 사람들과도 협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립적이거나 독불장군 같은 사람도 성실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잘 해낸다면 괜찮습니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회복 틈새’를 만들라고 하셨는데요 무슨 뜻이죠?만약에 외향적인 사람이긴 긴 시간 동안 압박되는 분위기의 회의에서 내향적으로 행동했다면 분명히 지치고 피곤할 것입니다. 회복 틈새는 피곤하고 지친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자신만의 공간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남자 화장실이었는데 각각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회복 틈새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회복 틈새를 확보하는 것이 왜 중요하지요? 회복 틈새를 갖지 않으면 금방 극도로 피로해질 수 있습니다. 계속 자신의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이는 자율신경계를 자극해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회복 틈새를 가지며 쉬고 흥분을 가라 앉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에서 ‘개인 핵심 목표’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지요?우리는 다양한 목표를 세우고 동시에 진행합니다. 사람들에게 목표를 설정하라고 하면, 화요일의 소일거리부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까지 다양하게 세웁니다.만약 당신이 작은 목표만 갖고 있다면, 모든 게 잘 정리돼 있고 관리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의미 있는 목표가 많이 있을 경우에는 아마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계획적인 삶을 살기 위해 목표와 의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 핵심 목표는 나머지 개인 목표를 붙잡는 역할을 합니다. 작은 목표들은 핵심 목표와 관계돼 있는데, 만약 핵심 목표를 바뀌도록 강요당하거나 실패할 경우에는 나머지 목표들도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핵심 목표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브라이언 리틀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심리학과 교수. 전문 분야는 성격학과 동기심리학이다. 맥길, 옥스퍼드,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했다. 하버드에서 3년 연속 학생들이 직접 뽑은 인기 교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개인 목표와 성격의 자유 특성이 삶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성격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한다. 현재 케임브리지대학 소속 웰빙연구소, 저지경영대학원, 계량심리학센터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또 여러 기업과 단체에서 ‘사람마다 다른 성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와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유하윤 인턴기자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11/2015121102948.html​  
  • 2015-12-12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일제 강점이 남긴 트라우마는 이런 탄식 같은 물음을 내내 남긴다. 18세기를 전후해 온 세상이 급변하던 시대, 한반도 안의 지도층은 과연 밖의 지식과는 단절된 채 성리학의 관념에 빠졌거나,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던가.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열고 있는 특별전시회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는 그런 완고한 선입견에 의미있는 균열을 내려는 시도다.기획자들의 말에 따르면, 규장각만 해도 그저 조선 왕실의 도서관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당대 세계의 지식을 집성하는 지식 공간이자 조선과 세계의 소통을 이끄는 기구였다. 18세기 후반,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상호 교류도 활발했다. 정조와 조선 정부는 이런 국제 정세를 적극 활용해 지식 세계를 확장하고 문화적 성장을 꾀했다.조선은 그 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서적을 사들이고 새로운 정보를 수집했다. 이 작업은 정조 대에 와서 규장각을 통해 더 짜임새 있게 추진됐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전례 없던 문화 성장이 일어나고 있었다.특히 청나라의 변화는 괄목상대했다. 이 제국은 만주족의 문화와 중국의 전통 문화를 결합하고, 자신의 지식 체계에 서구의 근대적 학습과 문물을 용해하면서 중국 지배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정조는 앞선 대륙의 제국으로부터 지식을 수혈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구입해야 할 서적의 목록을 미리 준비하고 최대한 들여오려 했다. 수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자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 했다.가령, 왕의 특명으로 청대 최고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하기 위해 분주했던 연행 사절의 모습,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 외국어 교재를 공부한 역관들, 격동하는 국제정세를 담은 ‘만국공보’의 수입 등은 조선이 나름대로 해외로부터 당대 최신 지식을 수입하기 위해 노력했던 증거들이다.그런데도 왜 결과는 개혁 개방의 지연과 식민지화로 이어졌던가.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정호훈, 노관범, 김시덕 교수와 만나 이번 전시회의 의미와 의의, 남는 물음들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봤다.-먼저 어떤 전시회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정호훈(이하 정): 이번 주제가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입니다. 규장각이 소장한 도서 중에는 조선에서 간행한 책 외에 중국이나 일본, 외국에서 사들인 책들이 있습니다. 이번엔 이 책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당대 지배층이 세계의 지식을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했는지 보여줍니다.가령, 정조 시대 규장각 도서 목록인 ‘규장총목’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노력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정조는 청이 만든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거금을 주고 수입했습니다.고종이 수집한 집옥재(集玉齊) 도서도 서구 문명에 관한 당대 최신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최신 과학과 근대 문물, 격동기의 국제 정세까지 파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 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이 나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노관범(이하 노): 그 전까지는 조선에서 간행된 실록, 의궤, 지도를 중심으로 전시를 해왔습니다. 규장각이 외부에서 들려온 도서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규장각이 수집, 정리, 관리했던 도서들을 중심적으로 살피고, 나아가 19세기 후반 고종대에 집옥재에 수집된 책들까지 포괄했습니다.김시덕(이하 김): 이번에 특히 중국 책을 많이 소개하했습니다. 이 중에는 현재 중국에도 없는 책들도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규장각이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와 같이 동아시아학 연구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에 실린 대서양국흑귀노부(大西洋黑鬼奴婦) 청나라 때 국내 각지 및 외국 에 대한 지리 정보를 담은 문헌. 1751~1757년 사이에 원형이 완성됐고 1763년에 증보 간행됐다. ‘직공도’란 중국 역대 왕조의 궁정에 조공하는 외국 사절들과 그들이 가져온 기이한 이국 물산을 그린 것으로, 6세기 전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조선, 오키나와, 베트남, 타이, 미얀마 등과 같이 중국 역대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어온 국가들뿐 아니라, 명나라 영락제 때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항해해 알게 된 여러 지역,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과 같이 청대에 들어 새로이 중국인의 지리 지식에 포함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규장각이 서울대에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요?노: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설립한 학술 기관입니다. 처음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는데 고종 대에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고종이 별도로 집옥재라는 도서관을 두면서 규장각 도서들이 그리로 갔습니다. 대한제국이 종말을 고하면서 규장각을 포함해 정부 부서별로 관리하던 고서들을 일괄 정리해 조선총독부에서 관리를 하다가 경성제대가 설립되면서 맡게 됐습니다.해방 후 경성제대가 국립 서울대로 바뀌면서 규장각 도서도 승계됐습니다. 서울대 문리대를 거쳐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중앙도서관으로 모이게 됐고,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는 별도의 실을 설치했습니다.그 후 새로 규장각 건물을 짓고 규장각 관장과 전임 학예직을 두었습니다. 규장각이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한 후 규장각 도서의 해제사업과 자료연구사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현재 규장각에는 어떤 자료들이 있나요?정: 정조 시대 규장각이 만들어질 때 소장하고 있던 책, 항말의 집옥재 도서, 조선이 망하면서 규장각으로 모인 사고(史庫) 소장 도서, 조선의 여러 관청에서 소장하던 책과 자료, 경성제국대학 시절 구입한 책, 일반 고문서 등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책과 자료들이 모여 있습니다.-이번 전시회 제목을 ‘규장각 세계 지식을 품다’ 로 내걸었는데요?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들어와 있던 세계의 지식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흔히 바깥 세계에 대한 지식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을 통해 개화파에 의해 유입됐다고 알고 있을 뿐, 사실상 같은 시기 중국에서 들어온 지식들은 거의 잊힌 상태였지요.그 동안 우리가 한국 근대사를 지나치게 조선이라는 국가 단위로만 생각한 나머지, 실제로 조선도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중국이라든가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과 함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을 잘 인식하지 못했거나 성찰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가령, 고종의 집옥재에 다양한 과학 서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 중국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가 전해준 서학 지식이 양무 운동과 연결돼 중국에 활성화돼 있었고, 그 주변국인 조선에도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겁니다.앞으로 가능하다면 동아시아의 지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관점에서 관련 자료들을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정: 제가 이번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을 네이버에 올렸더니 이런 댓글이 붙었어요. “정조가 외국 책을 들여오기 위해 저렇게 많은 노력을 했구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라고요. 저는 우리 역사를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살펴보면, 결국 혼자만 잘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바깥에 의해 압도된 것도 아니고 외부로부터 새로운 지식과 정보, 문물을 필요하면 받아들여 자기화하면서 성장해온 과정이었다고 봅니다.규장각이 만들어진 18세기말만 해도, 정조가 외부를 보면서 지식과 정보를 담은 자료들을 끌어와 성장과 변화를 이루려 했습니다. 세종대도 그랬고 여러 시기에 걸쳐 그런 시도를 확인 할 수 있는데, 18세기 말이 두드러졌지요. 19세기말 고종 때에 와서도 또 한 차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이처럼 우리가 자기 테두리에만 갇혀 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외부와 소통하고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키워나가고 확장하고 변화하려고 했던 역사의 모습들을 이번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천전도(渾天全圖) 서양 천문학의 핵심 내용을 담은 천문도. 지리학자 김정호가 19세기 중엽 ‘여지전도’와 함게 한 쌍으로 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필사본과 목판으로 모두 전해질 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됐다. 이 천문도는 전통과 서구 지식의 융합, 혼종을 의미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별자리 가장자리에는 12궁, 12차, 24절기가 적혀있다. 그림 안에는 적도와 황도, 은하수, 전통 별자리들을 표현했다. 바깥에는 서양천문학 서적에서 두루 인용한 해와 달과 오행성의 형상과 크기, 거리, 공전주기, 일월식의 원리,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모델, 달의 위상변화의 원리 등을 담았다.-이번 전시회는 이미 조선도 당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규장각 장서 중에 그런 수입서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런 지식이 사회에 얼마나 유통됐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 같은데요.정: 네,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일단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 우리가 편입돼 있었으니까 독자적인 행보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 한계 안에서도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많은 지식을 받아들였으면서 왜 변하지 못했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지요. 조선으로 들어온 지식 중에는 내부에서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는 요소도 있었을 테고, 또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것도 있었겠지요. 그 과정에서 변화의 의지와 노력과 그걸 가로막고 제한하는 요소들이 다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봅니다.노: 정조대와 고종대를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령, 건륭제 치하의 중국을 두고 영조 대와는 달리 정조대는 굉장히 밀월 관계였습니다. 그 때 청으로부터 지식, 문헌들이 대거 수용됐습니다. 정조는 그런 것을 활용해 절정기 청의 문화를 보여주면서 “조선이 고루하다, 향상돼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고 사업도 시도했던 거죠.반면, 고종대에는 대외적으로 중국에 밀착하기보다 오히려 벗어나 세계 만국과 보편적인 외교 관계를 누리는 근대 체제로 편입돼야 하는 시점이었습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국내 질서가 와해될 상황이다 보니 조선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유교 질서를 회복하고 중국 체제에 기대야 했습니다.그러다 보니 서책이 들어와도 전면적으로 국가 정책에 활용하기보다는 사회적인 동요와 불안을 더 우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1905년 전까지 조선은 국가 주도적인 시스템이었고 민간에서 자율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밖에서 들여온 여러 책들을 개별적으로 읽고 보기는 했지만 전면적인 정책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던 거죠.김: 조선의 사대부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격취휘편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서양 사정을 소개했어요. 여기에 존 프라이어라는 사람이 영국에 가서 한 달 동안 런던 근처 공장을 취재해서 리포트를 실었는데, 한성순보가 이 내용을 받아 실었어요. 당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출간됐고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왔던 거죠. 이걸 얼마나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더 따져봐야 하지만, 최소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정: 18세기 말에 나온 전하도지도 같은 경우는 정보와 지식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지도를 조선에서도 재현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조선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사회를 바꾸는 상황까지 가려면 시간이 필요했겠지요.김: 당대 여러 나라의 해외 정보 유입 수준은 비슷한데, 차이를 낳은 것은 결정적 촉매제인 위기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초에 러시아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걸 느낀 상태였는데, 중국이나 조선은 이 부분이 결여돼 있었다고 봅니다.정: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이 평화 상태라는 점이 강조됩니다.노: 중요한 점인데, 가정이지만 건륭제 이후에 조청 관계가 파탄이 나서 조선 혼자밖에 없다고 했다면 뭔가 자구책을 열심히 도모했을지도 몰라요. 거대한 중국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너무나 오랫동안 갖고 있어서 중국에 들어오는 서양 지식도 쓸모는 있지만 보조적인 정도로 생각했지, 아주 절박한 지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전시작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정: 이게 규장총목인데요. 세 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목록에 적힌 책이 700여 종인데 규장각이 만들어지면서 소장하고 있던 외국본, 특히 중국 도서의 목록 겸 해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별로 제목을 제시하고 핵심 내용을 추려서 정리했습니다. 초기 규장각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 중 하나입니다.규장총목은 정조 5년에 처음 만들고 순조 5년에 증보를 했는데, 600여 종에서 700여 종으로 늘었습니다. 100여 종 늘어난 걸 보면 그렇게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 종의 권 수가 여러 권이 되니까 전체 분량은 상당히 큽니다.숙종, 영조대에도 중국에서 책을 많이 들여왔는데, 정조대에 오면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규모 있게 목록을 만들어 구입해서 특별한 장소에 보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에 찍힌 도장을 장서인이라고 하는데, 정조는 자신이 귀하게 여긴 책은 도장을 찍어서 특별히 분류해 보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정조의 학구열이 대단했군요.대단했죠. 이건 고금도서집성인데요. 규장각에서 보관하는 책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책이랄까요, 높이 평가하는 책입니다. 중국 옹정제 때 만들어졌는데, 당시 18세기 전반 중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중요한 서적을 집성해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을 시작해 옹정제에 완성된 거질의 유서(類書)다. 중국 역대 서적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들을 총 6부로 분류 정리했다. 총 1만권, 5022책에 목록만 40권에 이른다. 이 책은 정조 1년인 1777년 북경에 사절로 파견된 서호수가 구입해 온 것으로, 은자(銀子) 2150냥을 지불했다. 규장각은 이 책의 표지 장정을 다시 하고, 별도로 ‘고금도서집성’의 편차를 정리한 책(일종의 색인집)을 만들어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게 했다.모두 만 권인데요. 두 권을 한 책으로 묶어서 오천 책이 됩니다. 여기에 조선국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도장을 찍은 게 많지 않은데 그만큼 가치 있게 봤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들은 중국에서 가져와서 조선식으로 개장하면서 표지를 바꿨습니다. 중국은 책머리를 네 번 꿰매는데, 조선식으로 다섯 번을 꿰맸습니다.고금도서집성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 지식을 담은 책도 있었습니다. 기기도설이 대표적인데, 표지 제목을 기기도설이라고 적어두고, 고금도서집성의 마지막 부분에 실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기계의 작동 원리를 담은 책입니다. 이걸 중국 사람들은 중국 식으로 바꿨습니다. 등장 인물도 중국인으로 바꾸고.정조가 이걸 보고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 수원화성을 만들 때 정양용에게 이 책을 주지요. 이걸 보고 기중기를 만들어 봐라 했는데 정약용이 이걸 바탕으로 해서 거중기라는 이름의 새 기계를 만들어 화성 축성 때 사용합니다. 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와서 실제로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지요.▲ 기기도설(奇器圖說) 16세기 유럽에서 고안된 ‘기묘한 기계’들의 제작법 및 작동 원리를 다룬 책. 조선에는 1777년경에 수입되어, 정조 때 수원 화성의 설계 및 건축에 활용됐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수원 화성의 세부 설계 및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여러 이론을 강구할 것을 명하면서 직접 ‘기기도설’을 내려주었다. 정약용은 이를 참고, 응용해, 네 개의 움직도르래와 네 개의 고정도르래가 결합된 복합도르래 양측에 한 쌍의 축바퀴(녹로)가 덧붙여진 형태로 거중기를 설계했다.-왕실에 들어온 책을 사회적으로 유통시키기 위한 움직임이나 노력은 없었나요?정: 필사 문화가 발달했으니까, 빌려서 필사를 해서 봤을 것 같긴 한데, 활자나 목판으로 찍어서 배포한 노력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이덕무가 ‘사소절’이라는 책을 만드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현대 지식이에요. 이런 지식을 어디에서 구했는가 하면 규장각에서 근무하면서 필요한 내용을 뽑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김: 고금도서집성의 경우 일본에도 세 부가 들어갔는데 열심히 본 것 같지는 않고, 쇼군이나 왕실이 그런 책을 갖고 있으면 권위가 서니까 보유한 측면도 있습니다.김: 사실 이 책은 중국에서도 편리한 책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었지요.▲ 소학언해(小學諺解) 한국, 일본, 중국의 소학언해. 조선 책은 크기가 크며, 무겁고 질긴 종이를 이용해 견고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책은 조선 책에 비해 크기가 작고 가볍게 제작돼 대량 판매됐다. 조선 책이 주로 다섯 번 꿰매는 오침안(五針眼)인데 비해, 중국책과 일본책은 사침안(四針眼)인 경우가 많다. 똑같은 사침안이라도 일본은 4개의 구멍이 같은 간격으로 배치된 반면, 중국책은 가운데 두 구멍이 좁게 몰리는 특징이 있으며, 때로 첫 번째와 네 번째 구멍의 위와 아래를 다시 꿰매 육침안(六針眼)이 되기도 한다.-중국에서도 대중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나요?정: 왜냐하면 66부밖에 안 찍었으니까요.정: 이 지도는 북경전도인데 남쪽에 ‘유리창’(유리제품 만드는 공장)이라고 해서, 서점이나 문방사우를 구할 수 있는 상점, 골동품을 구할 수 있는 가게도 많았습니다. 여기서 파는 책들은 양쯔강 이남에서 제작돼 정기적으로 배에 실려 이곳에 집결됐다고 해요. 책이 모이니까 중국 문인 학자들도 모여들고 기숙해서 살고, 조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중국 학자들을 만나거나 책을 구하러 간 거죠.김: 그나마 청나라 때에는 출입을 허용해 줬지만, 그 전에는 조선에 대한 경계가 강해서 사신들이 집 밖에도 잘 못 나갔다고 해요.▲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 조선 후기에 그려진 서구식 세계 지도. 3책으로 구성된 보물 제 1592호인 ‘여지도’의 첫 번째 책에 들어 있다. 천하도지도는 근대적 측량에 의한 서양식 세계 지도로, 중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 알레니의 ‘직방외기’에 그려져 있는 ‘만국전도’와 형태가 비슷하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비슷하게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에 배치했다. 동해 해역을 마테오 리치는 일본해라고 적었지만 여기서는 소동해(小東海)로 표기했다. 북극은 푸르게, 남극은 붉게 칠한 것이 이채롭다.김: 이건 유럽에서 들어온 정보를 가지고 만든 중국 책을 조선에 들여와서 다시 개량한 지도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북반구는 추우니까 파란 색, 남반구는 다 붉은 색으로 칠했습니다. 적도 이남으로 내려가면 다시 추워진다는 생각을 못했던 거지요.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의 증언에 따르면, 스승이 돌아간 후에도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보고 있었다고 나오는데, 아마 이런 지도가 당시에 유포되지 않았을까 싶어요.정: 외국에 대한 조선의 지리적 지식도 저런 책들을 통해 나름대로 확보가 된 거죠.▲ 경도신각외국토산인민이수칠십이도전도(京都新刻外國土産人民異獸七十二度全圖) 명나라 때 중국 주변 여러 지역의 주민과 변방에 산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이수(異獸) 등을 나타낸 그림.-이 특이한 그림은 뭐죠?김: 청나라 때 출판된 세계인물도 같은 겁니다. 중국 밖의 세상 사람들을 보여주는 거죠. 기본적으로 다 야만스럽게 그렸는데, 그래도 인간에 가까운 윗쪽이 일본과 여진이고 아래로 갈수록 심각한 야만으로 그렸습니다. 기본적으로 ‘산해경서’에 나오는 이미지들이에요.-삼재도회(三才圖會)도 대단한 책이라면서요?대단한 책이죠. 처음으로 대량으로 그림을 수록한 책입니다. 널리 읽히고 영향을 줬습니다. 이게 일본으로 가서 화한삼재도회가 나오는데, 그림이 훨씬 섬세해집니다.김: ‘화한’이라는 것이 일본의 이념인데, 중국의 한과 일본의 화라는 것이 동격이라고 본 거죠. 중국과 일본을 일대일로 붙인 거죠. 제가 다 찾아봤는데 중국 삼재도회에는 나비가 한 점이 있다면 일본에는 네 점, 다섯 점이 있어요. 같은 책을 두고도 아시아 3국의 문화적 차이가 반영되는 거지요.▲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일본 오사카의 의사였던 데라시마 료안이 1712년에 서문을 집필한 뒤 30여 년에 걸쳐 저술한 백과사전. 명나라의 ‘삼재도회’를 기본으로 했지만 일본의 지식과 수많은 삽화를 추가했다. 18세기 중엽에 조선에 수입되어 실학자들의 저작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조선은 왜 그림을 꺼렸을까요?김: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애들 책에 그림이 많고, 성인이 보는 책에는 그림이 별로 없잖아요. 그림이 들어간 것은 병법서나 의학서, 불경 정도이고, 나머지 책들은 그림을 빼는 형태로 갑니다. 그림은 인민들 교화할 때만 쓰는 정도로 본 거지요. 일본도 중국 사대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집들은 책에서 그림을 빼는 경향이 있었어요. 중국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상업출판의 경우에는 그림이 들어가는 책이 많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이건 명나라 단편소설집인 형세언인데 세계 유일본입니다. 책에다 이렇게 낙서를 열심히 한 사람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추정됩니다. 사도세자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그림으로 그려서 보게 한 것 같은데 왕실에서는 널리 읽혔다고 해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육조에서 명나라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화론을 가려 뽑고, 유명한 그림들을 목판으로 새겨 화가들에게 본이 되도록 편찬한 책. 1집은 산수, 2집은 매란국죽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회화 이론편과 도해된 작화법 및 옛사람들의 그림을 간략화한 전도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문인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로 여겨져 중국의 회화론 및 회화 양식을 익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김: 사람들이 제일 충격을 받는 게 이 그림입니다. ‘개자원화전’이라는 중국 책인데, 다색 인쇄가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책이예요. 일본에서 우키오케가 생겨나고 조선에서도 김홍도나 화가들이 보고 배운 책이지요.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고유의 것이라고 배웠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줄 만하죠.▲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 19세기 상해 풍경을 그림과 시로 엮은 책. ‘신강’은 상해 황푸강(黃浦江)의 별칭이자 상해를 일컫는 말이다. 서구식 소화기로 불을 끄는 모습을 그린 근대적 문물 풍경을 담은 것도 있다.(윗 그림) 아래는 인쇄소 풍경.노: 점석재는 중국 상해에 있었던 인쇄소인데요, 19세기 후반 중국 출판의 메카 같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신보’라는 신문도 찍고, 상해 풍경 화보도 찍고, ‘고금도서집성’ 대중판도 찍어 냈지요. 이곳에서 서양 풍물을 소개하는 책을 찍어냈으니까 당시에 지적으로 굉장한 영향을 미쳤겠죠.-이건 집옥재 서적목록이군요.정: 1908년 정도에 도서를 정리하면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집옥재는 함녕전 별당으로 시작했는데 1891년 고종의 거쳐였던 건천궁 옆으로 옮겨왔다고 해요. 1887년 경복궁에 에디슨 회사하고 계약을 맺어서 처음 전깃불이 가설됐으니까, 집옥재가 왔을 때는 고종이 환한 불빛을 받으면서 책을 읽었을 거라고 짐작이 됩니다.여기 ‘화학감원’이라는 책이 중요한 게, 화학에 대한 서양 문헌을 번역한 책인데 화학 용어를 결정지은 게 이 책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학도설’이라는 책은 전기학에 대한 책으로 1887년에 출간됐습니다. 그때 경복궁에 전깃불이 켜진 해이고 해서 조선에서 전기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됐을 때였어요.1887년 조선에서 전선을 가설을 하는데 처음엔 청나라 기술에 의존했다가 한양-부산 구간 전선만큼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가설합니다. 그래서 추측하기로는 당시에 들어온 전기 관련 책자들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서의약론(西醫略論) 병리학을 다룬 한역(漢譯) 서양의학서. 내과보다 외과 질환의 치료와 증상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질병 치료와 관련한 서양 의료 기기, 골절을 포함한 외상의 응급처치 방법 등을 삽화로 수록해 이해하기 쉽게 했다. 이 책은 고종의 내하서목(內下書目)에 포함돼 있다. 조선 정부가 서양 의학서를 수집한 것은 전투에 의한 외상 치료에 서양의학이 탁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서양의학을 기반으로 한 군진 의료를 갖춘 서양의 근대식 병력을 확보하려는 고종의 무비자강책의 하나였다.이건 ‘서의약론’이라는 책인데요. 외과 수술과 관련해 조선에 재중원이 만들어진 게 1880년대 중반인데,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잘 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저 책이 들어와 있었다는 거랑 시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별개지요?정: 세브란스에서 의사를 길러낸 게 1890년대부터니까 시기적으로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부국책(富國策) 영국인 포셋이 지은 경제학 교재 ‘Manual of Political Economy’를 중국인 왕봉조가 한문으로 번역한 책. 1882년 상해의 미화서관에서 출판됐다. 저자는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고,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litical Economy)의 체제를 따라 지었다. 이 책은 서양 근대 경제학을 중국에 도입해, 중국에서 널리 재원을 개발하는 것을 논했다. 이 책를 통해 서양 근대 경제학 지식이 조선에 들어왔다.노: 여기 ‘부국론’이라는 책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포셋이라는 경제학자가 쓴 ‘Manual of Political Economy’를 번역한 겁니다. 포셋이 존 스튜어트 밀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쓴 책인데, 1860년에 북경이 영불연합군에 함락된 후 중국 정부에서 세운 동문관이라는 외국어학교에서 학생들 교재로 번역한 거라고 해요. 영어 교재 겸 경제학을 공부하는 책이 된 거죠.이건 ‘태서신사남요’라는 책인데요, 티모시 리처드라는 서양 선교사가 썼습니다. 그가 선교 활동을 하다가 텐진에서 언론 매체의 주필이 됩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서양을 몰라서 발전이 더딘 거라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갖고 중국에다 서양 지식을 전하기 위해 글을 써요. 나중에 ‘시사신론’으로 출간합니다. 그걸로 부족했던지 맥켄지가 지은 ‘The Nineteenth Century’라는 책까지 ‘태사신사남요’로 번역했어요. ▲ 격치휘편(格致彙編)노: 1896년 조선에서는 독립협회가 매달 두 번 잡지를 만들었어요. 거기에 보면 ‘격취휘편’ ‘시사신론’ ‘태서신사남요’를 조선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이야기해요. (격치휘편은 서양 근대 과학기술을 포함한 서양의 사정을 기사로 다룬 잡지였다. 영문 서명은 ‘Chinese Scientific Magazine’. 존 프라이어가 편집 실무를 맡기 시작한 1876년부터 상해 강남제조국에서 발간했다. 기사들 대부분은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했다. 이 중 단행본으로 출판된 기사도 적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이 잡지를 꾸준히 수집했으며, 이를 통해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고, 정부 정책 개혁에 도움이 될 만한 이기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실린 기사들은 상당수 ‘한성순보’ 등에 전재되어 조선에 널리 알려졌다.)노: 대한제국 초기 학부(지금 교육부) 대신 중에는 진보적인 사람이 많았어요. 1898년 학부에서 전국 소학교에다 문제를 출제했는데, ‘영국은 어떻게 세계 1등국이 되었으며, 한국은 세계에서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였어요. ‘한국과 영국의 정치를 비교하라’는 문제도 나오고. 이런 지식이 대한제국 초기에 어떤 계몽 차원이랄까, 요긴하게 쓰였던 것을 볼 수 있어요.▲ 만국공보(萬國公報) 상해에 설립된 서학 지식 보급 단체인 광학회에서1889년부터 1907년까지 발행한 월간지이것은 ‘만국공보’라고 해서,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가졌다고 하기보다는 민간에서 많이 봤던 잡지입니다. 규장각에 소장된 것은 월간지예요. 그보다 앞서 주간지도 있었어요. (만국공보는 주필 알렌을 위시해 중국에서 활약하단 유명한 서양 선교사들이 다수 필진으로 참여했다. 기독교 지식에 한정되지 않고, 서양 근대 지식 일반과 세계 각국의 시사를 소개한 종합 잡지였다. 이 잡지는 세계 각지 화교 사회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널리 퍼졌다. 조선에도 일찍이 역관 김경수가 주간 ‘만국공보’를 간추려 ‘공보초략’을 편찬한 바 있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월간 ‘만국공보’가 그대로 유입됐다. 신문과 학회지에도 곧잘 전재되어 사회적으로 널리 읽혔다.)월간지 내용을 보면 근대 매체다 보니까 상업 광고도 많이 있어요. 모유를 먹은 아이와 연유를 먹은 아이의 발육 상태가 다르다는 그림을 넣은 광고도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과 축음기, 우유 광고 만국공보 1903년 12월호에 실린 자유의 여신상 삽화. 자유의 개념을 설명하고 자유의식을 고취한 기사에 같이 실렸다. 하단에 ‘Liberty Enlightening the Wrold’라고 적혀있다. 만국공보는 종합잡지였다. 말미에 광고면이 있었다. 근대 생활문화를 증언한다. 가운데는 만국공보 1898년 11월호의 유성기 광고, 맨 오른쪽은 만국공보 1899년 12월호에 실린 연유 광고.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오른쪽)보다 우유를 먹고 자란 아이가 더 튼튼하게 자란다는 삽화를 실었다.이 ‘섬라중흥기’는 섬라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한제국 초기에 제일 관심 있었던 나라가 섬라, 곧 타이었어요. 당시 서양에서 타임지에 아시아 국가의 근대화를 비교하면서 일본, 타이, 이집트, 한국을 비교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게 ‘섬라중흥기’예요.이걸 만국공보에도 실었는데, 독립신문 편집자도 이걸 그대로 옮겨온 거에요. 대한제국 초기의 국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만국공보나 독립신문에 이런 글이 있으니까 가늠할 수 있게 된 거에요.이 글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에서 근대화가 잘 되는 나라라고 돼있고, 이집트와 타이는 요즘 열심히 하고 있는데, 특히 타이가 국왕 주도 아래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나와요. 그런데 한국은 겉으로 제도는 갖췄지만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 조선시대 그대로라고 나와요. 그래서 사사건건 구습에 빠져있다고 말하거든요.이 글이 당시 한국 사회에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어요.-만국공보가 조선에서는 얼마나 읽혔나요?노: ‘독립신문’이나 ‘한성신문’ 같은 신문에서 그걸 곧잘 가져와 실어요. 그 당시 청년 유학자들이 그걸 읽고 독후감도 쓴 게 있고, 이게 러일전쟁 이후 1907년까지 가는데 그때까지는 한국의 웬만한 지식인들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얻었던 원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요.-그런 기사와 관련해서 쓴 글들은 없나요?노: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평서인 ‘고대희랍철학고변’을 남긴 유명한 사람으로 경상도에 이인재가 있었는데, 그 책에 앞서 ‘만국공보’ 기사를 보고 대한제국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혁 방향에 대해서 논한 ‘구경연의’라는 글이 있어요.▲ 칠교도(七巧圖) 중국에서 고안된 놀이. 정사각형을 7개의 삼각형과 사각형, 마름모꼴로 잘라 각종 모양을 맞추는 칠교 놀이, 일명 탱그램(tangram)으로 불린다. 한중일 삼국에 전파됐을 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에도 전해졌다. 1814년 엘바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도 탱그램으로 무료함을 달랬다는 일화가 있다. ‘칠교도’는 칠교로 만든 낙타, 산, 나무 등 자연과 동식물의 형태를 다양한 색으로 예시했다.-화한삼재도서가 조선에 다시 유입이 됐다고 하는데, 그 무렵부터 일본이 앞서기 시작했거나 독자적인 걸음을 시작했다는 건가요?박: 조선이 일본에 영향을 준 부분은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게 불가피하게 영향을 준 것이고, 그 후에 조선의 책이 대량으로 수출되지는 않죠. 1650년대 정도가 되면 일본이 나카사키를 통해서 청나라 상인들과 정식으로 거래를 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지요.-마지막으로 결론 삼아 한 말씀씩 해주신다면요?정: 조선이나 조선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경직된 인식이 조금은 유연해졌으면 합니다. 조선 초기나 중기, 18, 19세기도 각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 정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물론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자율적인 근대화는 실패했지만 그 시간 역시 우리의 긴 역사에서 보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전체 역사의 움직임 속에서 본다면 그동안 축적된 힘들이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고도의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큰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걸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특별전 한 번 가지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쌓은 힘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계속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1766년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간행한 통역관들의 몽골어 학습 교재. 각 면 왼편에는 위구르 문자로 표기된 몽골어가, 오른편에는 한글 발음이 적혀 있다. 내용은 어느 상인이 여행하고 장사하는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다. 노걸대라는 이름은 ‘중국 사정에 훤한 중국통’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중국 명대에도 몽골인들은 스텝 지역에서 강력한 독립 국가를 유지했고, 청대에는 만주족과 함께 국가의 중추를 차지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몽골어를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 만주어 학습서 ‘청어노걸대’, 일본어 학습서 ‘왜어노걸대’ 등도 제작됐다.노: 예전에 15년 전쯤 박사과정 때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과 스페인 그라나다에도 갔는데, 그 때가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를 기념하는 해였던 것 같아요. 빈에서도 카를 5세의 화려한 제국을 전시하고 있었고, 스페인 남부 마지막 이슬람 왕조가 있었던 그라나다에서도 똑같이 카를 5세를 기념하는 전시를 하고 있었던 거죠.그때 지리적으로 떨어진 두 곳에서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우리가 규장각이 소장한 중국본 자료를 가지고 전시를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몇 년 전 양무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하이의 도서관에서도 근대 서학 도서를 집중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한, 중, 일 각국에서 비슷한 컨셉으로 동아시아 근대의 동시성을 동시에 전시회로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요. 일국 체제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통해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었는지를 본다면, 선진과 후진의 격차보다 역사의 동시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 중, 일을 지식의 공통된 장의 단위로 보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동시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역사 분쟁에서 늘 근원적인 철학적 빈곤이 뭐냐면 누가 앞섰다 누가 뒤섰다, 누가 고차원이다 저차원이다는 식의 비교만 하기 쉬운데, 각자 자기가 위치한 곳에서 동시적으로 발현된 양상들을 거시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거지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규장각도 중국, 대만, 일본 이런 곳의 기관들과 같이 기획을 하면 좋겠습니다.▲ 첩해신어 임진왜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체류한 적이 있는 강우성이 1676년에 편찬한 일본어 회화집. 강우성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사역원 역관으로 있으면서 세 차례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첩해신어’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문헌이다.김: 이번 전시를 통해 깬 게 뭐가 있을까? 저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여기가 한국학 도서관이지만 동아시아 전체를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규장각을 그저 정조의 왕실 도서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의 10%도 설명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최소한 고종 때 집옥재라든가, 중국 근대 지식의 수입을 빼놓고는 이 기관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그리고 20세기 시기 문제도 있습니다. 즉 경성제국 대학 시절의 것들은 못 다뤘어요. 대한제국이 망하고 총독부가 규장각을 장악했을 때 각 기관의 책과 자료를 모아 만든 것 부분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도 미완의 과제입니다.정: 그 시기에 대한 조명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어떤 금기 때문이어서라기보다 아직 여력이 미치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 전체를 정리하고 그에 맞춰 책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복잡하죠. 보통 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그렇고.식민지를 거치고, 분단이 되고, 전쟁도 나고 하면서 국가의 주요 기관에서 관리하던 오랜 책과 자료, 고문서들이 엉망진창으로 흩어지고 사라지고 뒤섞여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규장각에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규장각에서는 예전에 해왔던 대로 긴 시간 계획 속에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 자료를 정리하고 또 그 자료를 활용한 한국학 연구를 진행해 나갈 겁니다.‘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 특별전은 2016년 1월 16일까지 계속된다.​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유하윤 인턴기자 조선비즈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11/2015121102481.html​   
  • "대구는 최고의 청년도시죠."
    "강릉은 커피산업의 메카고요.
    "대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진단이 나온다. 환자 얼굴만 봐도 병을 알아보는 명의처럼,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 주요 도시들의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내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 그는 학계를 대표하는 국제문제 전문가지만,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정도로 지
    more >